< 104화<흑사화 유연희> >
흑사련주 유길준一 수백 년간 명맥을 이어오며 강성함을 더해온 아홉 개 산속 정도 대방파 중 무려 셋을 무너뜨리고 육파로 불리게 만든 사천의 절대자.
그에게는 수양딸이 하나 있었다.
흑사화 유연희.
흑사련주 유길준이 소박한 인물이라는 것은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성(城)의 패자로서, 웬만한 소국의 왕과 비견될 만큼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고.
산해진미를 즐기기보다는 허름한 객점에서 소면과 교자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좋아했고, 흑사파 시절부터 함께해 온 의형제이자 전우들인 사도육존(邪道大尊)과 싸구려 화주를 기울이며 뒷골목을 전전하던 때의 추억을 곱씹는 것을 사랑했다.
여색을 밝히지도 않았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다.
사도 무학의 대종사답게 새로운 무학을 궁구하거나, 정도 상승 무학을 사도의 그것으로 개변하는 것 따위가 유일하다시피한 취미였다. 청성과 아미, 점창과의 악연으로 사도를 걷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한이 없는 다른 정도 세력까지 멸절시킨다던가 할 요량은 아니었다.
휘하 방파들이 영역을 다스리거나 서로 아응다응하는 것에도 크게 간여하지 않았다. 각자의 자율에 맡긴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천지회가 이권을 놓고 다투는 장이 되었지만.
아무튼 이렇듯 소박한 절대자가 극히 드물게 신경 쓰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수양딸인 흑사화 유연희의 행복과 안위였다.
흑사련주 유길준은 유연희가 가지고싶다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주었고, 또 그녀가 흑사련 밖으로 외출할 때는 반드시 사도육존 중 적어도 한둘이 동행하도록 했다.
한편
유연희가 어떻게 유길준의 양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흑사련 수뇌부 중에서도 의사결정의 중추를 맡고 있는 사도육존 역시 유연희를 어여삐 여긴다는 것에서 흑사파 시절 인연이 닿았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은밀하게 나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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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네요."
약관을 좀 넘은 듯한 여인이 기꺼운 표정으로 말한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깜찍한 인상과 말괄량이 같은 기질이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쪽빛 주단으로 만들어진 궁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보통 귀한 신분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 방주 말이냐?"
유연희의 말에 중년인이 되물었다. 그는 얼굴 전체를 길게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를 가지고 있었는데, 척 봐도 온갖 역경을 헤쳐나온 검객의 모습이었다. 아니, 겉보기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년인은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긴, 실력 있는 무인이었다.
구환교검(究換授劍) 상명일一 흑사파 시절부터 유길준과 동고동락했던 인물로, 청성파 멸문 당시 홀로 청성파 장로 둘을 격살했을 정도의 검도 고수다.
이제는 구환교검이라는 별호보다는 사도육존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초창기 본련에 투신한 이들이 각자 사연이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다는구나. 여인의 몸으로 상승의 양강 무학을 익힌 탓에 요절할 운명이었는데, 천운으로 련주를 만난 게지. 그녀가 익힌 양강 무학一 적련연화술은 련주에 의해 개변되어 이제는 여인도 익힐 수 있는 무공이 되었지. 여 방주가 련주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는 매년 보내오는 공물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단다."
그러니 네 요청은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一 상명일은 그렇게 덧붙였다. 유연희가 심화방주 여설련에게 요청한 것은 바로 당가 소가주 당연명이 묵는 곳과 인접한 곳에 방을 배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여설련은 크게 망설이지도 않고 승낙했다. 그냥 분부를 내리시면 된다고 하면서.
유연희는 무림 정세에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당가가 사천에서 하나 남은 정도 무가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분명 이번 사천지회는 당가 소가주 당연명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겠지.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지, 근거리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법했다.
물론 요청의 가장 큰 이유는, 당연명의 미모가 장난이 아니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자를 잠깐이라도 눈에 담은 성도 여염집 여식들이 일제히 상사병에 시달린다는 것일까.
"제가 적련연화술을 알려달라고 해도 될까요? 듣자하니 심화방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들을 눈짓만으로 태워버릴 수 있다고 하던데. 아,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맘에도 없는 소릴 하는구나. 무공을 제대로 배울 생각도 없는 녀석이."
상명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도 무학의 대종사를 아비로 두었으면서, 유연희는 어떤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 정확히는, 특이한 체질을 타고나 내가기공을 수련할 수 없었다. 전신 경맥으로 진기가 통할 때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까닭이다.
이건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나 무학의 이치에 두루 통달한 유길준도 어찌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병 같은 것이 아니기에 의술에 기댈 것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유연희는 상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으로 살아오던 그녀였기에,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지 굳이 무공을 익힐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절실했다면 운기의 통증을 참고서라도 수련을 했겠지.
결국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은 유연희 본인의 의지였기에, 상명일도 이러한 주제를 가볍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었다.
"헤. 아무튼 심심하면 사람을 태워 죽이는 기행을 일삼는다기에, 성정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랐지 뭐예요."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것은 아닐 게다."
"이곳 전각들이 기루를 연상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글쎄. 그것까지는 이 백부도 모르겠구나."
"아무튼 기대되네요. 당연명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잘생겼을지...."
유연희는 두 손을 모으고 몽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는 듯하다.
그런 유연희를 보면서, 상명일은 문득 감회가 새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숙녀가 다 되었을까.
'아니, 사실 변한 걸로 치면 내 쪽이 더하지. 뒷골목을 전전하던 파락호가 사도육존이 라니....'
상명일은 실소했다.
흑사련이 아직 흑사파이던 시절, 두목이 어디선가 주워온 꾀죄죄한 소년이 바로 유길준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유길준이 지닌 빛나는 자질을.
그저 무공에 재능이 좀 있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러다 청성파 도사에 의해 두목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길준은 그때를 계기로 무지막지한 무학들을 창안해댔다. 강해져야 한다면서, 흑사파 식구들도 익힐 수 있는 무학을 가르쳤다.
두목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는 청성과 아미, 점창을 모조리 멸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정말 미친놈인줄 알았다. 이란격석,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따로없었으니까. 그러나 유길준이 가르지는 무학을 익히고, 성취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흑사파 식구들은 다들 전율을 금치 못했다. 이거, 어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가능성을 보고 결의를 다진 흑사파 식구들은 의형제를 맺고, 유길준을 새로운 두목으로 추대했다. 나이로는 유길준이 가장 막내였지만, 서열로는 첫째가 된 것이다.
그 후 유길준은 유례없는 수준으로 강해지더니 금세 화경에 이르렀고, 상명일을 비롯한 훗날의 사도육존은 구파의 장로급 무위를 갖추게 됐다. 이 모든 게 불과 몇 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제대로 무공을 익힌 지 오 년도 되지 않아 화경에 이르다니.'
상명일은 당시를 회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는 사실 무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던지라, 어느 날 갑자기 유길준이 강기를 뽑아내도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어쨌건 유길준은 화경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언한 대로 청성과 아미, 점창을 멸문시켰다. 점창의 경우에는 아직 희미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도 하는데, 구파에서 제명될 정도이니 사실상 멸문이라 봐도 무방했다.
혹자는 말한다. 유길준이 왜 그렇게까지 분노했는지 모르겠다고. 몸 담았다고는 하나 흑사파는 결국 뒷골목 흑도 패거리에 불과하고, 그 두목과의 관계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일진대.
그러나 그건 모르는 자들의 말이었다.
상명일이 보기에, 유길준의 분노는 당연했다. 그에게는 흑사파 두목이 아비나 다름없었으니까. 두목은 하찮은 무공일지언정 성심을 다해 유길준에게 가르치고, 또 저질이라고는 하나 영약까지 구해다 먹였다.
유길준이라는 이름도 두목이 지은 것이었다. 성도 그의 것을 썼고.
이 정도면 피만 섞이지 않았지 가족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두목에게 하나뿐인 딸一 유연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길준이, 그녀를 수양딸로 들인 것은.
물론 유연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상명일을 포함한 사도육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명일은 얼마 전 또 하나의 벽을 넘고, 이제 화경에 이른 절세 고수였다. 유길준의 도음으로 타고난 자질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터무니 없는 무위를 일군 것이다.
그럼에도, 상명일은 유연희를 수행하며 사실상 보모 역할을 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만큼 유연희의 존재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이건 다른 사도육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연희를 흑사련에서 두 번째로 존귀한 존재라 규정지었다. 외출할 때마다 사도육존 중 한둘이 상시로 호위를 맡는다.
이번에는 상명일 혼자서 유연희를 수행하게 됐다.
사도육존 중에서도 상명일의 무위가 압도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천지회는 고작해야 후기지수들이 모이는 자리였으니까.
크게 경계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심화방주 여설련이 흑사련에 무척이나 충성스러운 인물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한데 왜일까.
'...별일은 없겠지.'
상명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요소가 없는데, 꺼림칙하게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있었다.
화경 정도의 고수가 되면, 직감이 거의 예지의 영역에 달는다고 한다. 빗나가는 일이 드물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연 화경 고수인 자신의 기감을 피해서, 유연희에게 해를 입히는 등의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一 상명일은 회의적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모략을 꾸미고 실행하는 자가 마찬가지로 화경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화경의 고수가 접근해온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그땐 모든 걸 팽개치고 유연희를 데리고 피신하면 된다.
상념이 여기까지 흐르자.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명일은 만에 하나 유연희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를 상정해 보았다.
'일단 조금이라도 관련된 이들은 모조리 련주의 손에 죽겠지. 아니, 아예 사천 전체가 완전히 갈아엎어질지도 모르겠군.'
사천지회 개회 이틀 전의 일이었다.
< 104화<흑사화 유연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