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섬> >
날이 밝았다.
"......"
당연명은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빠져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벌써 두 시진이 넘게 이러고 있었다.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고, 호흡 역시 들숨이 진행 중인지, 아니면 날숨을 뱉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느다랬다.
미동도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직접 보여주는 듯하다.
그야말로 정(停)의 극치.
[어이가 없군.]
식신 청각은 무아지경에 빠져든 당연명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매망량인 그는 인간의 수련법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 없었지만,
그래도 무영객과 함께한 세월 때문에 저절로 알게 된 부분들이 있었다.
인간은 대부분 동(動)一 움직이는 것으로 수련을 시작한다. 형(形)과 식(式)을 익히는 것이다. 범인들은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세월이 소요됐다. 인지하는 것고h, 구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까닭이다. 무학에 자질이 있다 함은,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단 인지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동적인 수련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근육을 발달시킨다던가 하는 행위는 도리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동작을 구현하는 것에 오차가 생기니까. 다시금 그 오차를 줄이는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적인 수련을 제대로 끝마친 이들은 자연스레 정적인 수련에 입문하게 된다. 심상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심상을 통한 수련에는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없었다. 무아(無我), 혹은 몰아(沒我)라 불리는 상태一 스스로를 잊고 심상 세계에 몰두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속도로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공간이야 앉거나 설 자리만 있으면 되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조금씩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하루아침에 경지를 뛰어넘는 경우가 많은 게 그래서다. 남들의 입장에서는 하룻밤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몰아의 시간이 지났다고 봐야 했다.
물론 심상 수련을 한다고 해서 이러한 몰아의 순간을 아무 때나 겪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극한으로 유지해서, 순간을 분절하여 인식하다시피 해야 한다. 대부분은 어떤 화두가 계기가 되어 깊이 사색하다 우연찮게 몰아에 빠져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불문 무학의 성지一 소림에서는 전대의 고승들조차 몰아의 순간을 위해 면벽수련에 임하곤 한다.
그런데 청각이 당연명의 수련을 며칠 지켜보고 있자니, 놀랍게도 원하기만 하면 몰아에 빠져들 수 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는 실낱같은 숨결에 의존해 몇 시진씩 명상하고 있지 않나. 순간을 분절해 몰아에 빠진 게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다.
[...실로 괴물 같은 집중력이구나.]
약관도 되지 않은 녀석이 어떻게 화경에 이르렀나 했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다른 시간축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언제든 몰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루를 한 달이나 일 년처럼 쓸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일백 년 면벽수련한 고승과 다를 바 없다. 납득 되지 않는 검술 실력 또한 그렇게 쌓아올린 게 아닐까.
한편.
당연명은 청각의 예상대로 몰아에 빠져 있었다. 심상 수련은 그에게 있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생, 그러니까 검신이었던 시절에는 오직 검술만을 염두에 두며 살았다. 마침내 스승이었던 검귀가 귀천하고 난 뒤에는, 인세와 그 어떤 인연의 고리도 없게 되었으니 잡념이나 번민 따위가 뇌리를 지배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一 검신의 집중력은 이미 인간의 그것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가문에 있을 때는 굳이 몰아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이미 검신의 영역에 다다랐던 깨달음이 건재했기에.
몰아에 빠지는 것은 심력을 적잖이 소모한다. 체감하는 세월만큼 정신력이 마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그리고 그 심력이야말로 의념(意念)을 실어 강기 따위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이었으니, 화경의 존재로서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분별하게 몰아에 빠져선 안 됐다.
그런데 적진이나 다름없는 이곳 심화방에서, 당연명이 몰아에 빠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될 것도 같은데.'
현양촌에서 당연명은 스승이었던 검귀의 무학을 꺼내들었다.
단일 검초一 섬(殘).
횡격 한 번에 칠십의 인원을 살상했지만, 사실 그것도 제대로 된 위력은 아니었다. 검귀의 무학은 용력지체를 바탕으로, 그의 독문심법인 패력심법을 통해 쌓은 패력진기로 펼쳐내야 한다. 전생에서 당연명이 섬(殘)을 펼쳤을 땐, 멀리서 거대한 산봉우리를 비스듬하게 잘라낼 수 있었다.
당연명은 검초 섬을 펼쳐내면서, 익숙함과 그리움을 느끼는 동시에 미진함과 아쉬움을 느꼈다. 무언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다고나 할까.
당연한 일이긴 했다. 독요청광심법은 애초에 검공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연명 또한 이번 생은 당가의 인물로서 살아가고자 했으니, 원래라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검귀의 무학을 버텨낼 수 있는 명검까지 얻고 보니, 독요청광기로 전생의 검공을 제대로 펼질 수 있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며질 동안 몰아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흑사련주라면, 독요청광심 법을 검공에 맞게 개변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은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 나서, 무학의 창안과 개변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지.
듣기만 해서는 쉬이 믿어지지 않는 자질이다. 오묘한 무학의 이치를 한눈에 꿰뚫어 본다는 것이, 정말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만한 강자를 수하로 둘 정도이 니, 분명 범상지 않은 인물이겠지.'
당연명은 며칠 전, 거처 인근에 새로이 자리 잡은 강대한 존재를 느꼈다. 어느 정도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분명 화경의 존재였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에게 물으니, 흑사련에서 나온 인물이라 했다. 사도육존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지니고 있는 자였는데, 상명일이라는 이름이었다. 사천 땅에서는 손꼽히는 검객이자, 흑사련주 유길준의 최측근이라고.
당연한 얘기였지만, 사천지회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라 했다. 참관인 신분이라던가. 사천지회가 열릴 때 간혹 흑사련에서 사람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굳이 당연명의 거처 주변에 묵는다는 것이 의문이었을 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화경의 인물이라 해도 당연명 자신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특히나 검을 쓴다면 더더욱.
'설마 애들 싸움에 나서지는 않겄I지. 흑사련주의 체면이 있는데.'
당연명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심상 수련 중에一 그것도 몰아에 들면 보통 무방비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선택적으로 몰아에 빠질 수 있는 당연명에게는 예외였다.
심상 수련에 들기 전 세워 둔 한 가닥 기감으로 주변을 경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대략적으로나마 시간의 흐름도 감지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당연명은 언제나 해가 떠오를 때 몰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괴물 같은 놈.]
"오늘인가."
식신 청각이 뭐라 하건, 당연명은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있어 청각은 마르지 않는 독샘이자 여차하면 내공을 보급할 수 있는 유용한 존재일 뿐, 일일이 대답을 해주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의 몸을 노렸던 전적이 있지 않나. 앞으로도 이 주종에 가까운 관계는 웬만해서는 변함이 없을 터였다.
심화방 측에서 전달받은 대로라면, 이제 몇 시진 뒤 공식적으로 사천지회가 시작된다. 개회식이 열리는 것이다.
며칠 동안 당연명 일행은 거처에서 머물며 조용히 지냈다. 심화방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방을 배정해준 덕분에,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릴 일이 없었다. 물론 난장을 피울 작정으로 사천지회에 참가한 당연명으로서는 약간 아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방해 없이 심상 수련에 임할 수 있었기에 나쁘지 않다 여겼다.
당가의 후계로서 참가한 당연명은 혼자서 널찍한 방을 쓰고, 호위인 당미려와 시종인 제갈영영은 인접한 곳에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며칠이 지났으니 조금 친해질 법도 한데, 어쩐지 당미려와 제갈영영의 사이는 갈수록 점점 더 냉랭해지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할 때는 셋이 모두 모였다. 당연명은 이곳이 적진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언제 수작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음식에 독을 탄다든가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었다.
설마하니 사천지회 같은 커다란 행사에서, 그것도 당가의 소가주를 상대로 독을 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까 싶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제갈영영은 몰라도 당미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미소를 볼 낯이 없어진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부족하다는 것이 당연명의 생각이었다.
대충 의복을 걸치자, 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명. 일어났어?"
당미려 였다.
그래一 라고 답하며 당연명이 문을 열고 나섰다. 호위답게 제대로 무복을 갖춰 입은 당미려 옆에는 제갈영영이 수수하지만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다 고개를 숙여보였다. 시종이라는 신분을 제대로 연기할 셈으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당 소저. 이제 곧 사천지회가 시작되는데, 언제까지 소가주를 친우 대하듯 하실 건가요?"
"웬 참견이니? 정작 연명이는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이번 행사에는 당가의 위신이 걸려 있어요. 아무리 어릴 적 친분이 있다고 해도, 한낱 호위무사가 가문의 작은 주인과 맞먹는 모습을 본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필시 집안의 법도가 바로서지 않았다고 여기겠죠."
"그러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냐구. 본가의 위신인데."
"여러 번 말씀드린 것으로 아는데요. 저희 제갈가는 당가에 복속되기로 결정했어요. 즉, 가신의 입장이나 다름없는데 상관이 없지는 않죠."
"그만."
당연명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벌써 며칠째 당미려와 제갈영영은 이런 식으로 언성을 높이곤 했다. 서로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영의 말이 틀리진 않아."
당연명의 말에 제갈영영의 얼굴에 금세 희색이 번졌다. 그동안 둘이 언쟁을 하면 대체로 당연명이 당미려의 편을 들어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갈영영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듯하니 기쁠 수밖에.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데, 당연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가 굳이 사파 놈들의 눈치를 볼 건 없지."
"역시, 그렇지?"
"그래. 하던 대로 해."
반색하는 당미려에게 당연명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제갈영영은 빠르게 시무룩해졌다.
두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당연명이 왜 사천지회에 참가한 것인지.
그래서 제갈영영이 가문의 위신 운운하면서 책잡히지 않으려 처신하는 거겠지.
완전히 헛다리짚는 격이었다.
당연명은 이제 두 사람에게도 행동지침에 대해 알려주어야겠다고 여겼다.
"이곳에서는 본가의 위신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
"왜…?"
당연명의 말에 당미려가 반문했다. 제갈영영 또한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당연명을 쳐다봤다. 사천지회는 각 방파가 온갖 이권을 두고 다투는 장이면서, 동시에 후계의 무위를 뽐낼 수 있는 자리다. 당연히 그 어떤 행사보다 방파나 가문의 위신이 크게 걸려 있다 봐야 하지 않나...?
두 사람의 의문을 지운 것은, 나직한 중얼거 림이었다.
"이번 사천지회에 참가하는 다른 방파의 후계들一 그놈들은 모두 죽을 테니까. 시체들 앞에서까지 위신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 105화<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