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개회> >
"...다들 알다시피."
요염하다一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성숙한 여인이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다리 부분이 살짝 갈라져 언뜻 살갗이 비치는 남색 의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불꽃 모양 무늬가 수놓아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본방이 이번 사천지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사천지회가 어떤 행사인지는 각자 소속 방파 및 가문에서 충분히 설명을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돌려 말할 것 없이,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이권들을 걸고 이곳에서 다투면 된다. 비무의 형식을 권장하지만, 관례상 생사결을 치러도 문제가 없다."
심화방주 여설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녀 앞에는 십대에서 이십대로 보이는 소년소녀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그들 모두가 사천에 적을 두고 있는 방파나 가문의 후계로서, 사천지회에 참가할 적령기의 인물들이었다.
호위나 시종이 아닌, 참가자 본인의 나이 제한은 이십오 세.
당연하게도 참가자들 대부분은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사천지회에 참가하면 어지간히 무위가 뛰어난 것이 아니고서는 득보다 실이 크기 마련이었다. 자짓 경쟁 구도에 있는 다른 방파의 후계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있었고.
한편.
심화방주 여설련은 평소답지 않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보다 어리다한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가 속한 방파나 가문의 후계 신분. 원래라면 반공대 정도는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사천지회의 주관자로서 얘기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을 통제 및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니 하대가 옳으리라.
여설련이 계속 말했다.
"비무의 경우에는 본방이 공증인이 된다. 각자 걸 이권을 문서로 작성하고, 수결을 찍어 제출한 뒤 비무의 승패를 가린다. 패자의 이권은 고스란히 승자의 방파나 가문으로 귀속되지. 이때 이권을 빼앗긴 측에서 앙심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향후 오 년간은 해당 사안으로 분쟁을 일으킬 수 없다. 만약 그랬다간, 행사를 주관한 본방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 간주一 응징토록 하겠다."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방파들은 흑사련 내에서도 제법 입지가 커다란 곳들이었다. 이렇듯 사천지회에서 벌어지는 이권 다툼의 결과를 중재하거나 공증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만한 무력이 필요한 것이다.
심화방은 드물게도 여인들이 주축이 되는 방파였다. 멸문한 아미가 비구니들로 이루어진 불문 방파였다면, 심화방도들은 대개 기루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심화방도 중에는 악기에 조예가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자연히 음공이 발전했다.
특히 심심척음공(深心刺音功)이라는 무학을 방도 대부분이 익히고 있었는데, 비파나 금(琴 ) 피리 따위의 다양한 악기로 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음공의 특징상 심심척음공은 내공보다는 연주 실력에 비례해서 위력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기루 출신 심화방도들은 수준급 연주 실력을 보유한 자가 많아 그들이 펼치는 심심척음공은 상당한 위력을 발한다고 했다.
심심척음공이 경지에 이르면 듣는 이의 심혼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게 된다. 무림인의 경우 내공 운용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주화입마를 유도할 수 있었고. 범인들은 아예 백치로까지 만들 수 있는 위력적인 무공이었다.
예전에는 당가 무학이 대량 살상에 특화되었다고 많이들 얘기했는데, 요즘 사천 무림에서는 대량 살상을 입에 담을 때 심화방의 심심적음공을 언급하는 편이었다. 사실 심심척음공은 살상보다는 적을 무력화하는 쪽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심화방주 여설련을 비롯한 정예들은 적 련연화술을 익히고 있었으니까.
흑사련주 유길준에 의해 개변된 덕분에, 적련연화술은 이제 남녀를 불문하고 익힐 수 있었다. 사내는 원형의 적련연화술을, 여인은 개변된 적련연화술을 배우면 된다. 심화방에 입문하는 사내들의 목적은 뻔했다. 어떻게든 여설련의 눈에 들어 적련연화술을 전수받고자 하는 것이다.
눈 한 번 잘못 굴렸다가 타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데도, 심화방에 입문하길 원하는 사내들은 많았다. 양강 무학인 적련연화술은 오성이나 노력보다는 타고난 체질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까닭이다. 무학에 그리 대단한 자질이 없으면서도, 무림의 고수로서 우뚝 서고 싶은 욕망을 끝내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아주 많다. 그런 이들에게 적련연화술은 고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같은 것이겠지.
어쨌거나.
심심척음공에 당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대를 적련연화술의 양강 진기로 태워버린다一 그게 심화방의 전투 방법이었고, 방파대전에서 특히나 위력적이었다.
그러한 심화방이 공증하는 비무의 결과를 뒤집어엎을 배짱을 지닌 방파는 사천에 거의 없을 터였다.
"또한 이번 사천지회에는 영광스럽게도 흑사련에서 귀하신 분들이 왕림하셨다."
잠시 말을 멈춘 여설련이 한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귀빈석이 있었는데, 일남일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얼굴에 길게 검상이 나 있는 중년 사내와, 면사를 드리우고 있는 궁장 차림의 여인.
심화방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사천지회 참가자들의 표정에 놀람이 어렸다. 그러고는 이제까지 조용히 여설련의 말을 경청하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구환교검 상 대협이시다..."
"뭣? 사도육존께서 친히 왕림하셨다고?"
"확실해. 이전에 본련에 갔을 때 스치듯 뵌 적이 있다. 저 검상을 봐. 청성파 장로 둘을 격살할 때 입었다는 상처가 분명해."
"검객으로서, 한 번이라도 존안을 뵙고자 했는데. 드디어 원을 이루는구나...!"
"사도육존 중에서 유일하게 아직 제자를 두지 않으셨다지? 이거 어찌면 커다란 기회가 될 지도....."
"왕림하신 목적이 제자를 찾기 위함이란 말인가?"
"꿈 깨. 멍청이들아. 옆에 계신 분이 보이지 않니? 흑사화 아가씨를 수행하고 계신 거겠지."
"흑사화? 그렇다면 저 여인이 흑사련주의 무남독녀라는 유연희...?"
"뭐? 유연희? 아가씨가 네 친구냐? 제대로 존칭을 붙여. 아직 본련 소속이 아니라고 해도 사천 땅을 살아가는 이상 최소한의 공경은 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네 아비의 성명이 실로 궁금하다."
"소문에, 구환교검께서 화경에 이르셨다는 얘기가 있던데. 련주께서 친히 축하의 말씀을 내리셨다고...."
아직 어린 후기지수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도육존이라 함은 천하 모든 사파 무인들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존재 여섯을 이르는 것이다. 물론 그들 위에 비교가 불가능한 사천의 지존一 흑사련주 유길준이 있었지만, 사파 무인들에게 있어 유길준은 거의 신선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인간의 범주에서 생각하자면 사도육존을 최강으로 꼽는다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러한 사파의 여섯 하늘一 그 중 하나를 마주했으니, 후기지수들이 심장이 고동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구환교검 상명일은 제자조차 두지 않고 수련에 힘써왔기에 사도육존 가운데서도 실력으로 수위를 차지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어쩌면 구환교검이 사천지회에 온 것이 제자를 구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一 누군가 뱉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추측이었지만 미약한 가능성만으로도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몇몇 이들은 포효하듯 크게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면사 여인一 흑사화 유연희가 입을 열었다.
"백부...? 생각보다 인기가 좋네요. 사람들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한데."
"허험. 저들에겐 이 백부가 우상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 하던 녀석들이 꽤 있을 게다. 넌 못 들었겠지만 조금 전에 구환교검의 존안을 뵙는 게 일생의 숙원이었다고까지 말하는 놈도 있었다."
"네? 거짓말一무슨 절세 미녀도 아니고, 백부는 안 그래도 험상궂은 인상에 살벌한 검상까지 좌악 나 있는데, 그런 얼굴을 보는 게 소원이라니."
유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물론 백부인 상명일의 말이 거짓이 아님은 함성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봐왔던 백부들이 사도육존이라는 거창한 별호로 불릴 때마다 어떤 괴리감을 느꼈다.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녀로서는 상명일이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 또한 양부인 흑사련주 유길준이 얼마나 고강한 무위를 지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렇듯 사천지회 같은 행사에 참석할 때나, 흑사련 밖으로 돌아다닐 때 가끔 실감을 할 뿐이었다.
소란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명일은 힐끗 여설련을 보았는데, 그녀는 전혀 나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열기가 과하군. 조용히 시켜야겠어."
"그런데 백부. 그자는 어디 있는 걸까요?"
"당연명이라는 놈 말이냐? 저기 있구나. 우측 가장자리 세 번째."
상명일은 당가 소가주 당연명의 거처 주변에 묵었기에 그의 존재감을 파악하고 있었다.
유연희가 면사를 살짝 걷고 미간을 모으더니 포기한 듯 말한다.
"...잘 안 보이는데."
"간단한 안법조차 익히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나저나 확실히 잘생기긴 했구나. 사람이 저리 생길 수도 있다니. 귀공자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태어나서 본 사내 중에 가장 잘 생겼다고 확언할 수 있겠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어야 하죠?"
"일단 이 개회식이 끝나야겠지."
기다려봐라一그렇게 말하며 상명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가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해방한다.
화아아악一
해일 같은 기세가 상명일의 전면으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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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천지회 참가자들은 높다란 파도가 덮쳐 오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대체 얼마나 심후한 공력을 지니고 있기에...!
"상명일이다. 이번 사천지회를 참관하러 왔다."
짧은 말을 마치고서, 상명일은 다시금 착석했다. 어느새 거대한 압박감을 선사하던 기세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만한 진기의 발출과 회수가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다는 얘기였다. 과연 사도육존이라는 감탄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작게 들려온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구환교검께서는 참관인 신분이시다."
심화방주 여설련이 곧장 입을 열어 참가자들의 시선을 다시 휘어잡았다.
"조금 전 비무에 대해서까지 얘기를 했었지. 말했듯 비무를 공증하는 것은 본방이다. 여기까지는 예년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이번 사천지회에 한해서, 특별히 참관인이신 구환교검께서 생사결을 관장하시기로 했다. 생사결을 원하는 자들은 구환교검 상대협께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얘기다."
상명일이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사결의 공증을 맡은 것은 여설련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연희가 참가자들 간의 제대로 된 결투를 보고 싶어 해서이기도 했다. 웬만큼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생사결을 신청하는 이들은 없겠지만, 젊은 혈기 때문일까一 사천지회에서는 종종 생사를 걸고 다투길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한 결투를 놓치지 않고 관전하려면, 역시 생사결의 공증을 맡는 것이 확실했다.
"생사결의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하겠다. 비무와는 달리,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허용되며 호위와 시종을 대동한 합공 역시 허용된다. 생사결의 상대로 지목된 자는 결투를 거부할 수 없으며, 결투가 끝난 뒤 일각(15분)의 휴식이 주어진다."
여설련은 담담히 생사결에 대해 설명했다.
생사결은 말 그대로 생사를 걸고 상대와 겨루는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게 당연했다. 독이나 암기 따위의 제한도 없고, 시종과 호위를 대동한 합격도 가능했다. 생사결 직후 주어지는 고작 일각의 휴식이 공정치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여러 번의 사천지회가 진행되면서 자리 잡은 규칙이었다.
아슬아슬한 실력 차로 상대를 죽일 경우, 온전치 않은 휴식을 취하고 다음 상대를 대비해야 했다. 연이은 생사결 도전을 받지 않으려면 최대한 전력을 보존한 채 상대를 죽여야 했다. 당연히 온갖 치졸한 수단이 동원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생사결을 치른 직후라고 해도 도전하는 쪽 역시 부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권을 넘겨주면 끝인 비무와는 다르게, 생사결은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하는 까닭이다. 지친 것 같다고 섣불리 생사결을 신청했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죽이더라도 상대 방파와 척을 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러니 어지간한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생사결을 신청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연달아 신청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 지금 이 순간을 기해 보름 동안의 사천지회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노니, 각자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라...!"
심화방주 여설련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드는 인물이 있었다.
"구환교검 상 대협께 청합니다. 부디 당가 소가주와의 생사결을 허락해주십시오."
< 106화<개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