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생사결(1)> >
손을 든 자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두 자루의 흑검을 등 뒤로 교차해서 매고 있었다. 행색의 특징이 확실하다.
드넓은 사천 무림에서도 이런 식의 차림을 하고 다니는 것은 태을묵검파의 사람뿐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흑검을 쓸 수 있는 것은 공동산 혈사 때 귀천한 장문인 막인후와 그 직계뿐이었다.
"태을묵검파의 후계인가."
구환교검 상명일 역시 한눈에 사내의 신분을 짐작했다. 흑사련 휘하 방파들 중에서도 태을묵검파 정도 되는 전력을 보유한 곳은 많지 않았다. 특히 상명일은 검객으로서 막인후의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기에 태을묵검파와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막인후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살기가 꽤 인상적이기도 했고.
'분명 련주가 하사한 것도 살기를 이용한 검공이었지, 아마.'
태을쌍검식一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살기를 극대화해 검기를 한층 더 강화하는 극쾌, 극강의 검공. 태을쌍검식을 통해 짙은 살의와 결합된 검기는 불길한 검은 빛을 띠게 된다.
이 묵검기는 보통의 검기보다 훨씬 강력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살의 또한 의념의 한 종류 아닌가. 어쨌거나 그러한 의념을 대충이나마 검기에 실었다는 얘기니까. 화경에 이른 무인들의 전유물인 '진짜 강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웬만한 강자를 상대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육존의 일좌이신 상 대협께서 본파를 알아봐주시니 영광입니다. 소생은 태을묵검파의 후계인 막천휘라고 합니다."
"그래. 막천휘. 당가 소가주와 생사결을 지르고 싶다고?"
"예. 그가 바로 제 부친을 해한 흉수입 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흉수의 신분을 알고도 원한을 갚지 않는다면 그만한 불효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마침 이번 사천지회에 놈이 참가했다 하니 생사결을 통해 부친의 원한을 갚고자 합니다."
막인후의 장자, 막천휘는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공동산 혈사一 사천 무림인들이 그렇게 명명한 사건으로 인해 태을묵검파의 전력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깎이고 말았다. 문파의 최고수였던 막인후는 물론이고, 그가 끌고 갔던 문파의 정예까지 모조리 죽어버린 것이다.
결국 막천휘가 이어받게 된 태을묵검파는 지금 빈껍데기나 다름없었다. 주변 방파들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간 태을묵검파가 다스려왔던 방대한 영역과, 또 그곳에 속한 이권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태을묵검파는 이전에 누리던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무력을 상실했다. 때마침 열린 사천지회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다른 방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터였다.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심화방에서 당분간 방파 간의 분쟁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덕분에 무사한 것도 있었다.
막천휘는 나름대로 최선의 판단을 했다. 우선, 부친인 막인후의 장례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이유로 들어 장문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후계의 신분에 머물렀다. 당연히 사천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금 사천지회에 참가하게 되면, 이권을 탐하는 다른 방파의 후계들로부터 숱한 도전을 받게 되겠지만, 어차피 지금 태을묵검파는 방파 대전을 치르거나 영역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차라리 사천지회에서 비무 등을 통해 이권을 지키는 것이 수월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막천휘는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태을쌍검식을 제법 깊게 익혀 스스로의 실력에 꽤 자신이 있었다. 묵검기까지 발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동년배 후기지수들한테는 밀리지 않으리라.
또한 사천지회에서 얻은 이권은 심화방에서 그 권리를 오 년간 보장해주기까지 한다. 오 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막천휘의 태을쌍검식이 완숙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고, 기울어버린 문파의 세를 어느 정도 되살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천지회의 참가를 결정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공동산 혈사의 흉수인 당가 소가주 당연명 역시 사천지회에 참가한다고.
막천휘는 기회로 여겼다. 공동산 혈사를 주도한 것이 당연명이라는 소문은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과장이 크게 섞였으리라 짐작했다. 아무리 당가의 무학이 대량 살상에 특화되어 있다고 하나 부친인 막인후가 동원한 인원이 삼백에 달했었다. 그만한 인원을 약관도 되지 않은 당연명이 홀로 몰살시켰다?
말이 안 됐다.
부친 막인후는 무당파에서 제대로 기초를 닦고, 흑사련주가 친히 내린 검공一 태을쌍검식을 대성했다. 상대를 완전히 분쇄해버리는 극쾌, 극강의 검식이다. 암기 무학 따위가 아무리 대단해도 부친의 옷깃조차 스지기 힘들 터인데. 게다가 데려간 다른 이들도 문파의 정예였다. 쉽게 당할 이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필시 당가의 다른 인물들이 도왔을 거다.'
그뿐 아니라 무언가 함정 같은 것을 이용했거나, 기상천외한 독 따위를 썼겠지. 막천휘는 당연명이 홀로 삼백의 인원을 살상했다는 소문이, 새롭게 소가주의 자리에 앉게 된 당연명의 무위를 부풀리기 위해 꾸며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와중에 신경 쓰이는 점이 있긴 했다. 당연명이 소가주에 오르는 과정에서, 당가 장로 둘을 죽인 사실이나 또 성도 인근에서 이백에 달하는 사파 무인들을 놀라운 암기 무학으로 살해했다는 소문을 접한 것이다. 오지랖 넓은 것으로 유명하던 목영궁주 장태천도 죽었다지. 이건 목격자도 많아서 거짓일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크게 방심했거나 오합지졸들이라 당한 것일 터.'
막천휘는 제대로 기감을 펼쳐놓고 전투에 임한다면 암기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곧장 생사결을 청하면 수작을 부릴 틈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결을 통해 당연명을 죽인다면, 얻을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부친의 원한을 갚을 수 있고, 당가가 자리한 대도시 성도의 온갖 이권을 가져올 수 있다. 오 년간 보장되는 이권들은 태을묵검파를 재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다른 참가자들 중에서도 성도의 이권을 노리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닭 쫒던 개 신세가 될 것이다. 당연명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성도의 이권을 걸고 싸울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짧은 시간 동안 당연명이 쌓아올린 명성은 장난이 아니었다. 태을묵검파와 천진방, 그리고 목영궁의 주인들이 모조리 당했고, 그의 손에 죽은 사파 무인들의 수만 벌써 사백에 달했다. 만약 당연명이 사파 무인이고, 죽인 이들이 정파 출신이라면 무림공적이 되어도 진즉에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당연명을 죽일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명성까지 얻을 수 있으리라.
사천지회가 시작되자마자 막천휘가 당연명을 지목하고 나선 것은 이러한 계산에서였다.
"좋다. 그럼, 당가 소가주는 나서라."
"당연명입니다."
목소리와 함께 걸어 나오는 미청년이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참가자들 중에는 당연명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심화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연명은 외딴 곳에 방을 배정받았으니까. 태을묵검파의 후계 막천휘도 참가 사실만 알았지 실제로 원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당연명이 심화방 정문 접수대에 섰을 때 목격한 이들이 알아봤을 뿐이다.
"당가 소가주라고...? 잘생겼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는데.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송옥과 반안 둘 중 하나의 환생이라 해도 믿겠군."
"소문대로의 실력에, 저런 용모라면 하늘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개안하는 기분이네. 당가에 없던 호감도 솟아나는 느낌이야. 그래, 모름지기 저 정도는 되어야 귀공자니 옥면이니 칭할 수 있는거 아니야? 뻔뻔한 놈들이 너무 많아."
"혹시나 생사결로 죽게 되면 얼굴 가죽을 꼭 도려내야겠어. 저 얼굴로 면구를 만들면 부르는 게 값일 듯한데."
사도 방파의 후계들은 당연명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한편으로, 빛이 나는 외모를 보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들어댔다. 특히 여인들은 노골적으로 당연명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호감을 표했다. 그 모습을 본 제갈영영이 눈을 부라렸지만, 그럴수록 표현이 더 적나라해질 뿐이었다.
그들이 조용해진 것은 당연명이 구환교검 상명일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상명일의 옆에 있던 흑사화 유연희는 그제야 당연명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밸곤 유연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명일이 말했다.
"여 방주로부터 비무대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고 듣긴 했다만.... 본디 무림에서의 생사결이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법. 태을묵검파의 막천휘와 당가의 당연명一 두 사람의 결투를 이 자리에서 진행하겠다. 혹여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하라."
"없습니다."
"저 역시."
막천휘와 당연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장소의 이동도 없이 이 자리에서 대전이 벌어질 듯하자, 다른 참가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 둥글게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생사결에서는 호위와 시종을 동원해도 된다. 그대들은 일문의 후계인 까닭이다. 일신에 지닌 무위 역시 중요하겠지만, 수하의 무력 또한 그대들의 능력인 셈이지. 당가 소가주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나 보군."
상명일은 당연명의 뒤에 서 있는 호위와 시종, 당미려와 제갈영영을 일별하며 말했다. 그가 보기에 제갈영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당미려는 제법 무공을 익힌 태가 났지만 다른 후계들이 대동한 자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사천지회 참가자의 나이는 스물다섯 아래, 호위와 시종은 약관에 이르지 않은 자여야 한다는 연령 제한이 있었기에, 다른 방파나 가문의 후계들은 대부분 약관 정도로 보이는 인물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규칙이야 그렇지만, 나이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도가 없기에 방파나 가문에서는 젊은 나이의 고수들 중 젊게 보이는 이들을 딸려 보내는 편이었다.
막천휘가 호위와 시종 역으로 대동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남지 않은 태을묵검파 제자들 중에서, 이십대의 나이로도 발군의 실력을 지닌 이들을 데려왔다. 태을쌍검식을 익히지 못했다 뿐이지, 그들의 실력은 막천휘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리 되면 사실상 삼 대 일로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천휘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생각이 있는 건가? 도대체 사천지회를 뭐로 보고...."
"호색한(好色漢: 여색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내)이 따로 없군. 필시 밤시중을 들게 할 요량으로 데려왔겠지?"
"잘생긴 놈들은 얼굴값을 한다더니...."
"소가주의 취향인가? 시녀 쪽은 제법 예쁘장하긴 하다만...."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음담패설이나 다름없는 말들에 당미려와 제갈영영의 얼굴이 한껏 굳어진다. 생사결을 앞두고 자연스레 찾아온 긴장 때문도 있을 터였다.
"말했지. 시체들이라고."
당연명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말뜻을 깨달은 당미려와 제갈영영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이번에는 구환교검 상명일을 향해, 당연명이 말했다.
"개미 따위를 눌러 죽이는데, 굳이 수하의 손을 빌리진 않지요."
뭐? 크하하하핫一!
상명일은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광소를 터뜨렸고.
졸지에 개미가 되어버린 막천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 107화<생사결(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