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생사결(2)> >
구환교검 상명일은 거칠게 자랐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도육존이라 불리는 의형제들이 모두 그렇다. 지금이야 사천을 주름잡는 흑사련의 수뇌이자 사도 세력의 거물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뒷골목 흑도 출신들 아닌가.
다른 활패들과의 진흙탕 싸움이나 매운 입담에 익숙하다는 얘기다.
지금 그가 개미 운운하는 당연명의 도발적인 언사를 오히려 기꺼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닌 무위는 보잘 것 없었지만 호기로웠던 흑사파 시절을 잠깐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구환교검 상명일이 입매가 끌어당겨진 채로 말한다.
"당가 소가주 당연명. 유약한 이름과는 영 딴판이로군."
마음에 들었다一 그렇게 중얼거리는 상명일의 모습에 막천휘가 입술을 짓씹었다. 사도육존 중에서도 구환교검 상명일은 사도 방파에 속한 젊은 검객들에게 우상이나 다름없다. 막천휘 자신에게도 그랬고. 그런 그가 원수인 당연명에게 호감을 드러내자 속에서 시기심이 불길처럼 치밀었다.
복수심과 시기심이 어우러져 짙은 살의로 화한다.
'죽여주마. 놈...!'
어차피 생사결을 입에 담은 마당이다. 막천휘는 살의를 숨길 생각도 않고 눈을 번득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가 익힌 태을쌍검식의 진정한 위력은 묵검기를 구현했을 때 드러난다. 검식 자체도 충분히 강력했지만, 무엇보다 살기를 벼리고 벼려 검기와 합일시켜 만든 묵검기는 그야말로 보통의 검기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으니.
한편.
심화방주 여설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흘러가는군.'
막천휘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사천지회에 참가하고 또 당연명에게 생사결을 신청했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의도 한 바였다.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입장으로서, 당분간 방파간의 분쟁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태을묵검파의 영역을 지켜주는 동시에 후계인 막천휘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본능적으로 돌파구를 찾기 마련이니까.
실력에 자신이 있는 후계라면, 사천지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외면하기 어렵겄I지. 어떻게든 방파를 재건하고자 하는 욕심도 있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막천휘는 사천지회의 참가를 결정했다.
변수였던 것은 새롭게 당가 소가주가 된 당연명이 과연 사천지회에 참가할 것인지 그 여부에 대한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당가에서 제때 회신을 보내왔다. 사천지회에 참가하겠다고.
부친의 원수, 그리고 계승할 방파를 몰락하게 만든 장본인을 사천지회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막천휘는 어떠한 결정을 내릴까. 막천휘는 모르겠지만, 여설련은 막천휘가 어릴 때부터 그를 지켜봐왔기에 어떤 인물인지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애매한 재능에 비해 비대한 자신감을 지닌 녀석. 차례의 문제이지, 분명 생사결을 청할 터一 라고 예측했었다.
'첫 순번이라. 최상의 경우로군.'
여설련은 흡족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녀의 장기말一 막천휘가 생각보다 잘 음직여준 것이다. 개회를 선언하자마자 당연명과 생사결이라니.
여설련에게 있어 이번 사천지회는, 옛 정인인 막인후의 복수를 위한 무대였다. 어떻게든 당연명을 살해하기 위한 자리인 것이다...!
참가자들이 괜한 비무 따위로 자기들끼리 전력을 갉아먹는 일을 조금 우려했었는데, 일이 잘 풀렸다. 당가를 표적으로 첫 생사결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어디, 막 가가를 죽인 실력을 보여 봐라.'
여설련은 당연명을 경시하지 않았다. 그간 소문으로 접한 당연명의 무위는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연배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 다수였기에, 아직도 당연명의 진실한 무력 수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과장 섞인 소문으로 치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여설련은 알고 있었다. 원래 무림에서는 종종 상리를 벗어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흑사련주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어땠나. 사천 무림은 완전히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더랬다. 그 역시 상리를 벗어난 존재였으니.
어쨌거나 막인후의 원한을 확실히 갚기 위해, 여설련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사천지회라는 판을 깔고서一 그 위에 이중 삼중으로 덫을 놓았다. 마음 같아서야 직접 손을 쓰고 싶었다. 살갗을 벗기고 힘줄을 잘라낸 후, 팔다리를 몇 조각으로 토막 낸 다음 적련연화술로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고 싶다. 당가 또한 멸문시키고픈 마음이다. 그러나 섣불리 행동하다가 자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누가 막인후의 원한을 갚는단 말인가.
여설련은 직접 손을 쓰는 후련함보다, 확실한 복수를 원했다. 그게 가능해진 것은 또 하나의 변수一 흑사화 유연희와 구환교검 상명일의 사천지회 참석 덕분이었다.
'천명이겠지. 막 가가의 원통함을 갚으라는.'
메마른 입술을 살짝 할으며, 여설련이 생각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감각이 있었다.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다. 결국 당연명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대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예기치 않게 구환교검 상명일이 왕림한 것이다.
그의 존재는 그녀가 놓은 덫을 완성시키기에 그야말로 적임이었다. 여설련은 상명일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살심을 품는다면, 당연명은 결코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물론 상명일을 음직이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일단은 생사결一 첫 번째 덫부터 시작해야겠지.
사천지회에서의 생사결은 말 그대로 소규모 대인전이다. 참가자 본인과 호위, 그리고 시종을 포함한 최대 세 명이 상대측과 생사를 다투는 싸움이다.
즉, 당가의 암기무학이 아무리 대량살상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한 번의 생사결에서 손을 쓸 수 있는 것은 고작 셋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백 명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가졌는데도 셋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명백히 당연명이 펼칠 암기무학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생사결의 상대로 지목된 자는 결투를 거부할 수 없으며, 결투가 끝난 뒤 일각(15분)으I 휴식이 주어진다一 라는 규칙.
당연명이 생사결을 통해 막천휘를 죽이더라도, 생사결은 계속 이어질 공산이 컸다.
'차륜전이 가능해지니까.'
이곳 심화방에 모여 있는 사천지회의 참가자는 오십이 넘는다. 그 모두가 사천 전역에서 모여든 각파의 후계였다. 나름대로 실력과 자존심을 갖춘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 더해 방파의 젊은 고수를 둘씩 이끌고 왔다. 적은 인원이 아니다. 거의 이백에 가까운 수였다.
과연 막천휘가 이 자리에서 절명한다고 해서, 겁을 먹고 움츠러들 이가 있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성도의 이권을 탐내고 앞 다투어 생사결을 요청하겠지. 그리고 생사결이 거듭될수록 당연명의 생명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무려 오십 번이 넘는 생사결을 치러야 하니까.
'아무리 지닌 무위가 대단하더라도, 내공만큼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일각은 그야말로 숨 돌릴 틈밖에 되지 않는다. 전투의 피로를 씻어 내거나 소모된 내공을 회복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결국 생사결을 몇 번 거지다 보면 당연명은 지닌 내공을 모두 소모해 죽음에 이르거나, 생사결을 거부할 것이다. 혹은 단번에 참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겠지. 그 잘난 암기 무학으로 말이다.
여설련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생사결에 대한 권한을 참관인 신분인 구환교검 상명일에게 넘겼다. 그가 생사결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모든 절차를 관장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당연명이 절차나 규칙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하게 둔다면, 그건 상명일의 체면이 크게 상하는 일이 된다.
화경에 이른 검객의 진노를 사고서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이게 두 번째 덫이었다.
세 번째로는....
여설련의 눈에 조금 망설이는 빛이 스쳤다. 흑사련주의 수양딸, 흑사화 유연희를 눈에 담으면서다. 면사를 쓰고 있었지만 유연희가 당연명에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저만한 용모를 지닌 사내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가 어렵겠지.
여설련은 걸음을 옮겨 유연희 옆에 자리했다. 상명일이 딱히 경계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다가설 수 있었다.
"아가씨. 당가 소가주가 마음에 드시 나요?"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여설련이 말했다. 친근하기 짝이 없는 어투.
유연희는 작게 뭐라 속닥였다. 여설련과 여인끼리의 대화를 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일별하며 상명일이 시선을 돌렸다. 이제 생사결의 시작을 선언할 참이었다.
여인 둘을 제외하고 장내의 모든 이가 상명일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한 쪽의 생명은 스러지겠지만."
구환교검 상명일이 말했다. 어느새 웃음기를 싹 지우고 엄숙한 표정이다.
"무인으로서 살다 보면 언제고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온다. 허망하게 죽는 경우도 허다하지. 어찌 보면 이만한 관중이 있는 곳에서 생사결을 펼질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상대를 죽여라一 그렇게 당연명과 막천휘의 생사결이 시작됐다.
양측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당연명은 홀로 가만히 서 있었고, 막천휘를 비롯한 태을묵검파 측 셋은 스르릉 검을 빼들었다. 셋이 모두 쌍검을 구사하는 모양이었다.
특이한 것은 막천휘의 기수식이었는데, 다른 둘과 달리 부(父)자로 양손을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불길한 흑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맙소사. 묵검기잖아...! 태을쌍검식을 제대로 익혔다는 방증이야."
관전하던 자들 중에 누군가 감탄한 어조로 작게 말한다. 원래 태을묵검파의 장문이었던 막인후의 명성은 꽤나 널리 알려진 편이었다.
비단 사천 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을 넘어서까지 그 이름이 자자할 정도였으니 그의 독문 무공인 태을쌍검식 역시 유명했다. 기수식이나 그 특징이 워낙 특이하기도 했고.
알아보는 이가 있는 게 당연하다.
한편.
그러거나 말거나.
막천휘는 엄청난 집중을 쏟으며 검초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칼에 승부를 내야 한다!'
막천휘는 당연명이 태을묵검식이나 묵검기를 겪어보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니, 파악하고 있으리라 보는 게 이치에 맞다. 공동산 혈사 당시 부친인 막인후가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당한 것이 아니고서야.
이미 검초가 노출된 적이 있다면 검을 오래 섞을수록 불리했다. 어떤 식의 공격이 닥칠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 대비가 용이해지니까.
차라리 전력을 쏟은 단발성 검초로 승부를 보는 게 나으리라.
'독과 암기를 주의해라.'
막천휘는 호위와 시종 역의 제자들에게 눈짓으로 말했다. 당부와 함께 슬슬 공격을 가하라는 신호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둘은 자연스레 호를 그리며 각자 당연명의 좌우를 점해 갔다.
셋이서 하나를 합공하는 형국.
곧 호위와 시종이 동시에 당연명의 좌우를 공격하면, 막천휘는 빈틈을 포착해 태을쌍검식을 쏟아낼 참이었다. 어쭙잖은 암기 따위로는 막아낼 수 없을 터다. 패용하고 있는 허름한 검을 뽑아 검기를 휘두른다 해도 마찬가지.
'이길 수 있다...!'
막천휘의 눈에 자신감이 어렸다.
< 108화<생사결(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