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생사결(4)> >
막천휘를 비롯한 세 사람의 신형이 모두 널브러지고 나서도, 선뜻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천지회 참가자들은 하나하나가 각 방파의 후계이자,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다. 상대의 병장기를 맨손으로 잡아채는 공수입백인 정도는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병장기를 말함이었다.
병장기에 검기나 도기 따위가 씌워졌을 때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굳이 예리하게 벼려진 날 부분이 아니라도 병장기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예기를 띄게 되는 까닭이다. 그런 것을 맨손으로 잡아챘다가는 손이 잘려 나가기 십상이었다.
권공이나 수공의 고수들이야 지닌 무학의 특징으로 손을 보호하는 기예가 있기 때문에 공수입백인을 일상적으로 행한다지만, 그들조차 어지간히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고서는 간단한 권갑 정도는 착용하기 마련이었다. 상대가 익힌 내공 기질이나 무학의 특징에 따라 발현되는 검기의 성질도 달라지는 까닭이다. 태을쌍검식의 묵검기처럼.
자칫 만용을 부리다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나버릴 수도 있었으니....
당연명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호신강기 용린에 의해 상시로 보호받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강기라 해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호신강기다. 그야말로 절세갑주一 한낱 검기 따위로 흠집 낼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적당히 하려고 했건만.'
남들이 보기에는 오연한 자세로, 당연명은 내심 중얼거렸다. 설마 그 상황에서 깨달음을 얻을 줄이야.
공수입백인을 펼친 것은 순전히 즉흥적인 대처였다. 우모침을 찔러 넣고자 가까이 접근한데다가, 청각의 독기가 스민 단장열지독으로 말미암아 금세 막천휘의 숨결이 끊어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에 묵검기가 짙어지더니 막천휘가 반격을 해왔다.
아마 기습적인 공격을 위해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였던 것, 그리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찾아온 회광반조, 복수심, 절박함 따위가 겹쳐져서 만들어진 최후의 일격이었을 터다.
물론 당연명의 입장에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회피하기에 마땅치 않았을 뿐.
결국 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는데一 허리춤에 달린 참마검을 뽑으려다가, 구환교검 상명일의 존재를 의식한 당연명은 차라리 공수입백인으로 대응하는 것이 낫겠다 판단했다. 검객으로서 화경의 경지에 이른 상명일의 앞에서 검을 휘둘렀다간 폐맥은취로 성취를 숨긴것이 무색하게 경계를 살 공산이 컸으니까.
다만 검기가 둘러진 검을 대상으로 펼친 공수입백인도 평범한 기예는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경계를 사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지금 내려앉은 침묵은 그런 경계심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다一 그렇게 당연명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제법이다."
구환교검 상명일이 입을 열었다.
"그 연배에 내가기공 뿐만 아니라 외문무공까지 깊게 연성한 것인가? 들은 적이 있다. 당가의 암기무학 중에는 지극히 날카로운 것들을 다루는 게 많다지. 예리한 날붙이들을 다루기 위해 특수한 수갑(手甲)을 착용하다 아예 외공 무학으로 대체했다면서."
"...본가에 그런 게 있긴 하지요."
당연명이 떨떠름함을 숨기며 답했다. 상명일이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가문의 암기무학은 암기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했다. 당연명이야 수리검이나 비도, 우모침과 표창 같은 기본적인 암기만을 다룰 뿐이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개량되어 온 수많은 형태의 암기가 존재했다. 특히나 위력적인 암기들은 만지는 것만으로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 상명일의 말마따나 그것들을 다루기 위한 방도로써 양손에 한정된 외공이 발전해왔다. 약물을 병행해 손의 피육을 극도로 단련하는 것이다.
상명일은 당연명이 그러한 종류의 외공을 익혔으리라 여기는 듯했다.
"어느 정도 예기를 막아줄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검기에도 상하지 않는 모양이군. 외공 수갑이라 불러도 되겠어. 좋은 구경을 했다."
"과찬이십니다."
"어쨌건, 승부는 가려졌다. 이번 생사결의 승자는 그대다. 당가는 차후, 태을묵검파의 영역에 대한 이권을 요구할 수 있다. 물론 문파의 명맥을 끊을 정도의 지나친 요구는 삼가라. 적당한 수준이라면, 주최자인 심화방에서 향후 오 년간 이권을 보장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연명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태을묵검파의 이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미 사도 천하가 되어버린 사천이다. 성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타 방파의 영역에 대한 이권을 얻어봤자 제대로 관리가 될 리도 없고, 심화방 같은 사파가 보장해주는 권리를 신용할 생각도 없었다.
차라리 여기서 사파 세력을 크게 줄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유리할 터였다.
한편.
다른 참가자들은 그제야 멈췄던 숨을 말과 함께 내뱉기 시작했다. 방금 있었던 생사결에 대한 감상평이 줄줄이 쏟아진다.
"당가 소가주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최소한의 음직임으로 검격들을 피해내더군. 신법이 장기인 걸까."
"안법 또한 상당한 수준이겠지. 검의 궤도가 적나라하게 보여야 그런 회피가 가능하니까. 하기야 수십 수백 개의 암기를 다루는 가문의 후계이니 안법이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도 그렇지만, 우모침을 다루는 솜씨가 인상적이었어요. 출수가 얼마나 빠른지 눈으로 쫒아가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검격을 회피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을 처리했잖아요."
"직접적으로 태을묵검파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건 독이야. 우모침에 발린 양이면 극히 미미한 양일 텐데, 한두 호흡 만에 다들 숨이 끊어졌어. 엄청난 극독이라는 얘기지. 어찌면 당가십독을 가지고 온 것일지도 몰라."
"그나저나 막천휘. 그자가 마지막에 보여준 검격은 실로 예사롭지 않았는데. 묵검기가 완연한 흑색을 띠지 않았나. 갑자기 그렇게 된것으로 봐서는 죽기 직전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그로서는 안 된 일이지. 하필이면 상대가 수갑(手甲)을 착용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외공을 익히고 있다니. 완전히 상정 외였을거야."
"어쨌거나 소문의 암기무학은 구경하지 못했군요. 생사결과 같은 소규모 대인전이라서 일까요...?"
"내공 소모가 심한 기예라서 그런 것일 지도. 의외로 이 생사결이란 방식이 당가 소가주에게는 불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럼, 다음 생사결은 그쪽이 나서는 게 어떠한지?"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당연명의 무위를 가늠하고자 애썼다. 검기를 두른 검을 부러뜨리는 공수입백인이 조금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특수한 외공을 익힌 덕분이라는 상명일의 확신에 가까운 말에 다들 그러려니 납득하고 있었다. 한때는 무림에 외문무공이 성행했던 때가 있었다. 소림을 위시한 여러 불문 방파에서 강력한 외공을 극한까지 수련한 인물들이 등장한 까닭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신체를 단련하는데 성공한 외공고수들은, 그야말로 금강불괴의 육신을 지닌 존재들로 여겨졌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옛일에 불과했다.
내가기공이 중시되는 현 무림에서는 외공을 은연중에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당연명이 외공을 익혔다고 생각되자, 참가자들 역시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봐야 외공에 불과하다면서.
구환교검 상명일이 크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일각동안, 당가 소가주 당연명에게는 생사결에 따른 휴식이 주어진다. 혹, 그에게 다음 생사결을 청할 자가 있다면 지금 얘기하라. 일각 후에 곧장 진행할 터이니."
상명일의 말에 장내가 부산스러워졌다. 서로 생사결에 나설 것을 종용하는 말소리들.
당가의 영역인 성도의 이권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원래라면 당연명과의 비무를 통해 이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 차례 생사결이 끝난 뒤였다. 비무 따위를 염두에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당연명이 보여준 무위가 가볍지 않았고 딱히 내공을 크게 소모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기에 다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기회주의적인 면모들이 사파의 후계들다웠다. 승산이 보이면 서로 나서려 하겠지.
와중에 심화방 방도들이 조용히 다가와 태을묵검파 인물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피가 거의 흐르지 않았기에 금방 말끔하게 치워졌다.
반각(약 7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서.
군중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이가 있었다. 별다른 병장기가 보이지 않는다. 황색 무복을 입은 적수공권의 사내였다. 그의 뒤로는 어느새 마찬가지로 황의를 입은 인물 둘이 서 있었다. 사내의 호위와 시종으로 짐작됐다.
"다음은 저희 천진방에서 나서겠습니다. 본방 역시 당가 소가주에게 원한이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야 없겠지요."
사내는 구환교검 상명일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당연명과의 생사결을 청했다.
"천진방이 참가했었군...! 전대 방주 정연승이 후계를 정해놓지 않고 공동산 혈사 때 귀천하는 바람에 제자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그랬지. 아닌 게 아니라 원래 이번 사천지회의 주관을 맡기로 한 것은 천진방이었잖나. 심화방이 아니라. 내분 때문에 차례가 넘어간 것이지. 저자가 천진방의 후계로 참가한 것을 보면 대강 정리가 된 모양이야."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에요. 방주였던 정연송이 몇 번 공식 행사에 대동하고 다녔거든요. 신임이 꽤 두터워보였는데, 결국 그가 천진방의 후계가 된 모양이네요. 이름이 아마, 송연적이 던가...?"
"확실히, 천진방이라면 가능성이 있겠어. 장법을 특기로 하는 만큼 근접전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천진장은 내가중수법의 정화라고 할 수 있으니 외공 따위로 어찌하기도 힘들 테고."
새롭게 등장한 천진방 사내의 승산을 높게 치는 이들이 많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송연적이라 밝혔다.
"좋다. 그럼, 반각 후에 당가 소가주 당연명과 천진방 소방주 송연적과의 생사결을 시작하겠다. 양측은 결전을 준비하도록."
"괜찮습니다. 바로 진행하셔도."
당연명은 송연적을 힐끗 보고는 구환교검 상명일에게 말했다. 천진방 역시 기억에 있었다. 태을묵검파와 함께 공동산에 온 놈들이다.
제법 강맹한 장법을 펼치던 중년인도 뇌리에 떠오른다. 화룡호독의 심상을 담은 열독강으로 뻣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었지.
"...휴식을 취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보시다시피 그다지 내공을 소모하지 않은 터라."
"좋다. 본인이 그렇다면야, 시간을 더 낭비할 필요 없겠지."
두 번째 생사결을 시작하라一그렇게 상명일이 내력을 담아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삼 대 일의 대결 구도였다.
막천휘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당연명이 먼저 움직였다는 점이었다. 상명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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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적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막천휘를 상대하는 당연명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 싶어 나선 것이었다. 회피하는 음직임이 제법 날렵하긴 했지만 적수공권으로 근접 박투를 일삼는 자신들만큼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셋이서 합공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한 번만 공격이 적중하면 내가중수법으로 내부를 완전히 진탕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 움직임은...?
'종적을 완전히 놓쳤다.'
안법을 발동하고 있는데도 눈이 당연명의 신형을 따라잡지 못한다. 스르르 잔영을 남기며 사라지는 모습이 허깨비를 보는 듯했다.
'어디냐.'
놓친 것은 놓친 것이고, 일단은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송연적은 기감을 한껏 돋우고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던 와중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뒷목에 느껴지는 살짝 따끔한 통증과 함께.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오는군."
사천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연명할 수 있었을 텐데 말야一
당가 소가주의 말이 아스라이 멀어지듯 들린다고 생각하며, 송연적은 의식이 끊어졌다.
역시나 절명.
그리고 송연적의 신형이 채 쓰러지기도 전에 컥 하며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두 번 들렸다. 호위와 시종 역을 맡은 천진방 인물들도 우모침에 찔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스르륵一
신법 암영을 펼쳐 원래 있던 자리도 돌아온 당연명이 상명일을 보며 말했다.
"끝났습니다만."
상명일이 생사결의 개시를 입에 담은 지 불과 세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110화<생사결(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