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생사결(5)> >
신법 암영(暗影)一 사천당가를 세운 장본인이자, 한때 천하제일살수였던 무영객의 무학이다. 은밀함이나 근접 기동성에 있어서는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무영객 이후로는 대성에 이른 자가 별로 없어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연명은 지금 폐맥은취로 인해 신법 암영을 극성으로 펼치지는 못했는데, 그럼에도 상명일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신법 성취가 대단하군. 안법을 가동 중인데도 눈이 따라가질 못하겠어."
보면서도 종적을 놓치다니一 구환교검 상명일이 정적을 깨고 감탄하듯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연배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당가 소가주 당연명이 움직이는 모습을 사도육존이라 불리는 그조차도 몇 번 놓쳤다. 신법 자체가 지닌 은밀함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명일이 당연명을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 대처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아니, 오히려 고수들끼리의 결전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법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고, 결국 감각도로 벼려진 기감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그건 화경에 올라 압도적인 기감을 보유한 상명일의 입장일 뿐이었다. 아직 안법 의존도가 높은 사천지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파장이 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셋이 죽었다.'
"가공할 신법이야. 저 송연적이 한 순간에 뒤를 빼앗기다니. 근접전에 능할 천진방 소방주가 장법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절명했다는 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소규모 대인전이 당가 소가주에게 마냥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겠어요. 암기 무학이랄 것도 없이 신법으로 근접해 우모침으로 찌르는 것이 다인데, 내공 소모가 크지도 않을 것 같고."
"...그보다, 저자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한 사람이 있기는 한가? 다른 건 몰라도 본가의 가전 안법 하나만큼은 명문대파의 그것과 비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하는데, 솔직히 우모침을 찔러 넣기 전까지 움직임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하기야 구환교검께서도 인정하실 정도이니...."
"이래서야 다음 생사결을 지를 자가 있을까. 개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소속 방파의 위신도 걸려 있어. 생각해 봐. 제대로 출수 한 번 못하고 죽어 나자빠졌다는 게 사천 전역에 소문으로 퍼지면.... 민초들도 우습게 여기지 않을까."
"천진방은 완전히 끝났다 봐야겠죠. 후계 다툼을 거치면서 송연적이 죽인 제자가 꽤 많다고 들었는데. 위협이 될 만한 인재를 모조리 처리하고 사천지회에 참가한 거라고."
"성도의 이권이 탐나긴 하지만, 당가 소가주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야.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어쭙잖은 욕심을 부리기보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지."
"비무도 아니고, 생사결이잖나. 딱히 당가와 원한 관계가 아니라면 나설 이유가 없지. 앞서 생사결을 치른 태을묵검파나 천진방이야 당가와 공동산에서의 원한이 있다지만.... 잠깐, 목영궁 역시 당가 소가주와 원한이 있지 않나? 웬 도사 놈들을 쫒다가 장태천 궁주께서 귀천하셨다고 들었는데."
"여기 이 분이 목영궁 소궁주신데."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감히 누굴 차도살인하려고...!"
참가자들이 설왕설래하는 동안, 상명일은 이번에도 당연명의 승리를 인정하고 천진방의 영역에 대한 이권을 약속했다.
"이번에도 일각의 휴식이 필요치 않겠군....?"
"예. 크게 움직인 것도 없으니."
상명일의 형식적인 물음에 당연명은 덤덤하게 답했다. 실제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호흡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라 허장성세로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무위가 생각보다 더 뛰어나구나. 역시 막 가가가 당할 만도 해.'
여설련은 아랫입술을 보이지 않게 살짝 깨물며 생각했다. 무언가 일이 순탄치 않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고작 두번의 생사결이 지났을 뿐인데, 더 이상 당연명과 생사결을 치르려는 참가자가 없어 보였다. 언뜻 들려오는 말소리에 당해낼 수 없다든가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내용이 심심찮게 섞여 있었다.
낭패였다.
물꼬만 터놓으면 성도의 이권을 탐하는, 자존심 강한 후계들이 끊임없이 당연명과 생사결을 치르며 체력과 내공을 깎으리라 여겼는데. 이래서야 차륜의 묘를 살릴 수가 없다.
여설련이 손짓으로 방도들에게 명하여 천진방 인물들의 시체를 치우도록 명하고.
상명일은 다시금 사천지회 참가자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혹 당가 소가주와 생사결을 치를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라."
"아무도 없나?"
상명일이 재차 물었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어찌 보면 정도 무가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사도 방파 전체의 위신이 크게 상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도를 걷는 이들은 원래 실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기질이 익히는 무학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나. 효율적으로, 빠르게 무력을 얻으려 한다.
일부러 진기 도인의 과정을 짧게 가져가 정순함을 버리고 내공의 빠른 축적을 노리는 이들이다. 뿐만 아니라 초식 간의 연결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않아도, 강력한 위력의 단발성 초식 하나만을 연마하길 선호한다. 그래서 사도 방파에는 고수가 별로 없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이 등장해 수많은 사도 무학을 창안하고 또 개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쨌건 열을 셀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사결을 입에 담는 이가 없었다. 각자 목숨을 간수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구환교검께서 허락하신다면, 한 번에 여릿을 상대하고 싶습니다. 물론 생사결로 말입니다."
"...합공을 용납하겠다는 말인가."
하긴, 원래도 합공의 양상이긴 했군一 그렇게 상명일이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사자가 괜찮다면야, 그리해도 상관없겠지. 시간도 아낄 수 있을 테고. 어차피 이대로는 그대와 생사결을 지르려는 자도 없어 보이니. 하면, 몇이나 동시에 상대할 요량인가?"
"건방지게 들릴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참가자 전원이 덤벼도 상관없습니다."
"뭐…?"
당연명이 내보이는 자신감에 상명일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역시 당연명이 가공할 암기 무학으로 수백에 달하는 인원을 살상한 적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각 방파의 후계들이다. 어려서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먹어 나이답지 않게 상당한 내공을 축적한 이들이 드물지 않다. 나름대로 귀한 신분인 것도 있고, 애초에 사천지회를 염두에 두고 양육된 까닭이다. 거기에 각파의 젊은 정예인 호위와 시종 역 인물들까지 합치면 웬만한 방파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전력이라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을 홀로 감당하겠다...?
'만용인가.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데.'
상명일은 미간을 좁히며 당연명의 성취를 다시 한 번 가늠했다. 화경에 이른 그의 기감으로 느껴지기로는 그저 나이에 비해 뛰어난 수준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극독을 이용해 살상력을 높인 암기 무학을 구사한다지만, 그 정도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상하고 있다. 그렇게 순순히 당할 리가 없을 터다. 여기서는 공간의 제약도 있어 사실상 포위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만한 인원을 상대로는 신법을 이용해 접근하는 전략도 무용하다.
당연명과의 생사결을 기피하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 역시 이번만큼은 자존심이 크게 상했는지 한 마디씩 뱉어댔다.
"죽고 싶은 걸까요."
"낯짝부터 재수가 없더라니만. 끝내 망발을 하는군."
"신법 좀 뛰어나다고 터무니없는 호기를 부리는 거지. 뵈는 게 없는 거야."
"설마 이만한 인원이 정말로 합공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도발한 게 아닐까. 벌써 생사결로 두 방파의 이권을 확보했으니, 좀 더 욕심을 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담 정말로 우리가 모두 나서면 어떨까요. 그리고 성도의 이권은 우리끼리 나누는 거죠...!"
"하긴 제 놈이 입으로 뱉은 것이니, 여간 낯짝이 두꺼운 게 아니고서는 무를 수 없을 테지."
사천지회 참가자들끼리 얘기가 오가면서, 점차 정말로 합공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그랬다. 이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각 방파의 후계들이 익힌 무학도 다양하니 공격 수단도 그만큼 다채로울 것이고, 당가 암기 무학이 뛰어나 봤자 산개한 이들을 상대로는 큰 위력을 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발언이 여러 번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때.
심화방주 여설련이 나섰다.
"당가 소가주. 그대에게 그만한 역량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런 식으로 생사결의 규칙을 바꾸는 것을 본 방주는 용납할 수 없다. 특히나 귀가의 무학은 대량 살상에 특화되어 있지 않나."
승패를 떠나 상당한 피가 흐를 것은 자명한 사실인즉一 여설련은 사천지회 참가자들의 면면을 스윽 훌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도 생각해보아라. 애초에 사천지회에서 이러한 생사결이나 비무를 통해 이권 다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은혜롭게도 련주께서 직접 창안하신 무학을 내려주시거나 휘하 방파의 무학을 개변하시어, 오늘날 여기 사천 땅만큼은 사도 천하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사도 세력이 강성하게 되었다. 이는 수백 년간 전례가 없던 일이다. 정(正)도, 마(魔)도 아닌 오롯이 우리 사도의 영역이 생긴것이다...!"
"방주의 말씀이 옳아."
"분명 련주의 은혜시지."
여설련의 말에 참가자들 대다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도 천하를 유지하기 우I해, 각 방파는 사천지회에서 후계를 통한 일종의 대리전을 치러 이권 다툼에 임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당가 소가주 당연명의 요청은 이러한 사천지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여, 본 방주는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입장으로서 생사결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을 재차 당부한다."
부디, 구환교검께서도 참작하여 주시기를一 이라고 말하며, 여설련은 다시 흑사화 유연희의 옆에 착석했다.
"확실히, 여 방주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상명일이 당연명을 보며 말했다.
"그대의 청은 불허하겠다."
잠시 말이 없어진 당연명을 보면서, 여설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당연명이 생사결에 아주 적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왜일까. 다른 방파들의 이권을 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직감에 따라 당연명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게 훼방을 놓았다.
적절한 명분을 제시한 덕인지 구환교검 상명일 역시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왠지 한 방 먹인 기분에 통쾌함을 느끼면서 여설련은 생각했다. 자, 이제 어찌할 테냐. 대량 살상이 가능한 암기 무학은 이제 무용해졌다...!
그때였다.
당연명의 입술이 달싹였다.
규칙이라一 말을 길게 늘이면서, 묘한 눈초리로 여설련을 일별한 뒤.
당연명이 재차 입을 열었다.
"분명, 생사결을 지목당한 이는 거부할 권한이 없다고 하셨지요."
기분 탓일까. 각 방파의 후계들은 왠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제가 생사결의 상대를 지목하도록 하겠습니다."
규칙대로 말이지요一 라고 덧붙이는 당연명의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 111화<생사결(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