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고목신공>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일각(약 15분) 정도나 되었을까一 그래, 분명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라진 생명들의 수가 상당했다. 호위와 시종 역의 인물들을 포함하면 벌써 서른이 넘는다.
모두가 당연명과의 생사결로 귀천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몹시도 허망했다. 생사결을 개시하라는 구환교검 상명일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두세 번의 호흡 만에 이승을 하직했으니까.
당연명이 결전에 임하는 방식은 매번 같았다. 신법 암영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단장열지독이 발린 우모침을 상대의 빈틈에 꽂아 넣는다. 단장열지독에는 청각의 독기가 스며들어 있었기에 적중당한 이들은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곧장 절명했다.
반복적인 방식이었지만 한 번이라도 받아지거나 회피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겨우 후기지수 수준인 그들이, 폐맥은취로 인해 제대로 된 무위를 보이지 못한다고 하나 지고한 경지에 이른 당연명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바로 다음 생사결 상대를 지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목숨 셋을 거둔 당연명이 말했다. 이제는 구환교검 상명일도 따로 생사결의 승리나 당가가 얻을 수 있는 이권 따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했던 까닭이다. 당연명이 상대를 지목하면 그저 생사결의 개시를 명할 뿐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생사결을 이어갈 셈이지?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답이 없어.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는 저 모습을 봐. 사실상 만전의 상태라 봐야 해. 이러다 우리가 몰살당할 거다. 생사결의 형식을 빌려서."
"몰살...? 농이 심하군. 설마 우리가 다 죽을 때까지 구환교검께서 지켜만 보고 계실까. 적당할 때 나서주시겠지."
"당신. 머릿속이 꽃밭인가요? 어찜 그리 안일하죠? 당장 다음에 그대의 차례가 닥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게다가 구환교검께서는 이 생사결을 멈출 명분이 없어요. 아까 심화방주가 말했죠一 생사결의 규칙을 준수하라고. 구환교검께서도 일리가 있다 말씀하셨으니 이제 당가 소가주의 생사결 신청을 막아 세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는 그저 규칙대로 하는 것이니...."
"역시 아까 합공을 해야 했는데...."
"다들 잊고 있는 모양인데, 당연명 저놈은 한때 오대세가라고까지 불렸던 뿌리 깊은 정도 무가 출신이야. 그러니 힘닿는 데까지 우리를 제거하려 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냐. 아마 생사결은 계속 이어지겠지."
"절망적이군. 어쪄면 보름이 아니라 오늘 하루 만에 사천지회가 끝날 수도 있겠어."
"그래도 놈이 생각이 있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생사결을 멈출 거다. 지금 여기 십방에 모여 있는 각 방파의 세력들을 생각해 봐라. 수백... 아니, 일천이 넘는 병력이 심화방을 에워싸고 있을 것 아닌가. 그 모두와 척을 질 셈이 아니라면 적당히 하겠지."
"쉿. 당가 소가주가 다음 상대를 지목한다...!"
"초붕문이군."
당연명은 사천지회에 참가한 사도 방파 대부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리키며 생사결을 신청했는데, 이번에는 목내이처럼 극도로 마른 몸을 지닌 사내를 골랐다.
지목당한 사내, 초붕문 소문주 엽청강은 약간 떫은 얼굴로 나섰다. 그의 피부는 까무잡잡한 편이었는데, 걸음을 옮기는 순간 피부가 쩌저적 갈라지더니 그대로 굳어 고목나무 같은 모습으로 화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선 호위와 시종도 엽청강 정도는 아니지만 전신에 비늘을 두른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 잘난 우모침도 이번만큼은 무용할 것이다.'
엽청강은 속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어차피 생사결 상대로 지목된 이상 피해갈 방도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연명을 죽이고 명성과 함께 온갖 이권을 틀어쥘 셈으로 결전에 임할 셈이었다.
초붕문은 고목신공(格木身功)이라는 무학으로 유명했다. 문주 엽인제가 젊은 시절 이름 모를 라마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무공이었는데, 수련자는 익히면 익힐수록 신체가 고목처럼 말라간다. 처음에는 피부에 비늘 같은 것이 씌워지면서 조금 마른 체형이 되는 것뿐이지만, 종래에는 완전히 목내이 같은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더불어 나무껍질 같은 피부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피부는 검기조차 막아낼 정도로 튼튼했다.
또한 고목신공을 대성하게 되면 내부 장기와 뼈 역시 더없이 튼튼해지는데, 웬만한 내가중수법에도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몸은 말라가지만 근육의 밀도가 높아져 오히려 이전보다 완력은 훨씬 강해지는 공능이 있었다. 엽청강 역시 거의 대성에 가깝게 고목신공을 익혀 두꺼운 철판마저 내공 없이 으스러뜨릴 수 있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또한 공수입백인이 장기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고목신공은 언뜻 보면 외공의 한 갈래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고목신공의 진가는 육신을 강화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상대의 내공을 흡정(吸精)하는 것이 바로 고목신공의 진정한 공능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초붕문주 엽인제가 라마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고목신공은 온전치 않았다. 흡정의 묘를 펼지기 위한 구결 몇 개가 실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엽인제는 흑사련주 유길준에 대한 풍문을 듣자마자 문파의 터전을 아예 사천으로 옮기고, 흑사련에 투신했다. 대종사의 자질을 지닌 유길준은 어렵지 않게 고목신공의 나머지 구결을 유추했고, 보다 완전하게 개변해주기까지 했다.
초붕문 내부에서는 이제 고목신공을 신공(身功)이 아니라 신공(神功)으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흡정의 공능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때 흡성대법(吸星大法)이라는 무학으로 다른 이가 지닌 내공을 강탈해 쉽게 고수가 된 이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흡성대법을 이용하면 내공 축적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물론 빼앗은 내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 따로 필요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혼자서 심법 수련을 통해 내공을 쌓는 것보다는 훨씬짧은 세월을 요했다.
당시 흡성대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이들 셋을 흡성삼흉(吸星드凶)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자신들보다 낮은 경지의 무림인들을 걸어다니는 영약 정도로 취급했다. 정, 사, 마를 가리지 않고 쓸 만한 내공심법을 익힌 자라면 닥치는 대로 납치해 흡성대법을 펼쳤는데, 흡성삼흉에게 당한 이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쌓은 내공은 물론이고 선천지기까지 빼앗겨 처참한 몰골로 죽어나갔다.
결국 흡성삼흉은 무림 역사상으로도 드물게 정, 사, 마 모두로부터 강호공적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흡성삼흉은 의형제를 맺고 늘 같이 다니는데다가 그중 둘은 이미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까지 오른 강자였기에, 선뜻 그들을 처단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흡성삼흉은 마음 내키는 대로 무림을 횡행하며 조롱하듯 흡성대법을 계속해서 펼쳐댔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 흡성삼흉에게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고 무림에서는 이제 흡성삼흉에 대해서는 거의 단념하고 있었다. 어쪄다 마주하게 되는 횡액 정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흡성삼흉의 목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검귀(劍鬼)라는 자에 의해서였다. 일인전승 문파의 계승자로 알려진 그가 흡성삼흉의 목을 가지고 나타나 현상금을 수령하며 한 말은 아주 유명했다.
一새로 창안한 검초를 시험해 보려 했는데, 일초지적도 안 되더군.
아무튼 그렇게 흡성삼흉의 무학인 흡성대법은 자연스럽게 사장되었고, 그 후로는 약간이라도 흡정의 공능을 지닌 무학을 선보이게 되면 흡성대법을 익힌 것으로 몰려 죽음을 피하기 힘들었다. 흡성삼흉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이 워낙 많았던 까닭이다. 꽤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초붕문의 고목신공이 흡정의 공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엽청강 역시 그동안은 딱히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생사결의 순간 아닌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뭐든 동원해서 생존을 꾀해야 했다.
그리고 고목신공에 잠들어 있던 흡정의 공능을 일깨워준 것이 바로 흑사련주 유길준이지 않나. 구환교검 상명일이 눈지를 채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놈의 움직임은 어차피 따라잡기 힘들다. 우모침을 찔러 넣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나아.'
엽청강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고목신공으로 강화된 육신을 믿고 회피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반격하기로. 일단 흡정의 공능을 펼치기만 하면 자신의 승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초붕문주와는 안면이 있지. 그럼 그대가 엽청강이겠군."
"그렇습니다. 구환교검 상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생사결이 끝나고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엽청강은 두 손을 마주 모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이제까지 등장한 이들에 비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여태 당연명이 압도적으로 생사결의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을 보았을 텐데도.
"부디 그러길 바라지."
상명일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당가 소가주 당연명과 초붕문 소문주 엽청강은 생사결을 개시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번에도 역시 당연명의 신형이 스르르 허공으로 녹아든다. 몇 번이고 보면서도 믿기 힘든 신법 성취였다. 목전에서 모습을 감추는데도 감지할 수가 없다...!
'...어디냐.'
엽청강은 한껏 긴장한 채로 전후좌우를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 언제든 우모침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면 즉각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당연명이 나타난 것은 호위와 시종 쪽이었다.
컥!
육안으로 이미 그들의 비늘 덮인 피부가 단단하리라 예상한 까닭일까. 당연명은 정면에서 호위 무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비명은 그래서 들린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호위 무인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는데, 당연명은 의도한 대로 됐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혓바닥에 우모침을 푹 찔러 넣었다.
호위 무인의 안색은 금세 거무죽죽하게 변하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자라 같은 놈이...!"
근처에 있던 시종 무인이 눈에 불뚱을 튀기며 당연명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방금 죽은 호위 무인은 동문사형제이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였다. 친우의 죽음에 격분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것이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죽음을 맞이할 것이니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인 것 같기도 했다.
'예 (銳)'
당연명은 살짝 옆으로 걸음을 옮겨 달려드는 사내를 피하는 한편으로, 우모침에 예(銳)의 묘리를 실어 그의 정수리를 향해 힘껏 내리 찍었다. 보아하니 피부를 강화하는 종류의 무학을 익힌 듯한데, 머리털이 무성한 것으로 봐서는 두피까지 강화하지는 못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우모침의 예기를 북돋우면 두피 정도는 뚫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든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었지만,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시종 무인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푹 하며 우모침이 그의 정수리를 뚫고 들어간다. 끄륵 하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시종 무인 역시 숨이 끊어졌다.
어느새 죽은 초붕문 인물 둘의 피부에 돋아 있던 비늘 형상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명은 곧장 고개를 틀어 날아온 주먹을 피했다. 뒤늦게 훅 바람이 끼친다. 어느새 접근해 온 엽청강이 쾌속하게 주먹을 내지른 것이었다. 당연명은 길게 뻗어져 있는 엽청강의 팔一 그 중 전완과 상완을 엇갈리게 가격했다. 팔꿈치를 지렛대 삼아 팔을 완전히 부러뜨리는 한 수였다. 적잖은 내공까지 실었으니 웬만한 이들은 아예 팔이 찢겨 나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런데 뼈가 부러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팡一 하는 가죽 북 터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놀랍게도 고목신공으로 강화된 엽청강의 얇은 팔이, 당연명의 공격을 버텨낸 것이다.
'의외로군.'
당연명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보다 팔이 튼튼하다고 생각하며 엽청강의 목을 틀어쥐었다. 팔은 몰라도 목은 쉽게 강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일단 목젖이 눌리면 당장 호흡에 차질이 생기니까. 벌린 입으로 단장열지독이 발린 우모침을 박아 넣어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연명은 엽청강의 눈이 득의한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걸려들었구나一 말라비틀어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엽청강은 당연명의 손목 쪽 내관혈을 잡아챘다.
그리고 곧장 고목신공의 진가인 흡정의 공능을 시전했다...!
< 112화<고목신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