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비극의 시작(2)> >
"끝났군."
구환교검 상명일이 말했다.
오십 번이 넘는 생사결이 연달아 치러졌다. 그럼에도 혈향은 그리 짙지 않았다. 대부분 우모침, 그러니까 독에 당해 죽은 까닭도 있고, 그때그때 심화방 인물들이 시신을 치운 덕분도 있었다. 심화방도들이 당연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공포, 경외, 경악 등 다양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연배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무위와, 그보다 충격적인 손속을 목도한 까닭이다. 오십이 넘는 각 방파 후계와 딸린 인원들을 생각하면 백오십이 흘쩍 넘는다. 그만한 인원을 하루아침에 죽여 놓고 눈 하나 깜짝 안하다니. 당가의 소가주답게 독심(毒心)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여 방주. 사천지회를 더 이어갈 이유가 있나?"
"......"
상명일의 물음에, 심화방주 여설련은 침묵했다.
본래 사천지회는 참가자들一 사천 전역의 각 방파 후계들이 각자의 이권을 놓고 다투는 장이다. 그동안은 그런 다툼을 상대측과 어지간한 원한이 있지 않은 한 대부분 비무로 해결해왔고, 또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가 소가주 당연명이 생사결의 형식을 빌려 다른 참가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상황이다. 더 이상 이권을 놓고 다툴 상대가 없다. 이건 그동안의 사천지회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원래 보름의 기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던 사천지회였지만, 상명일의 말대로 행사를 더 이어갈 이유가 없다. 개회식을 마친지 얼마나 되었다고 폐회식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지독하구나. 설마 정말로 나서지 않을 줄이야.'
여설련은 상명일을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사천지회에 참가한 이들 대부분은 흑사련 휘하 방파의 후계였다. 그들이 적당히 죽어나가면 상명일이 생사결을 제지하거나 당연명에게 약간의 응징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기어이 전멸할 때까지 방관하기만 했다. 이유가 짐작되기는 했다.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은 자존심이나 고집이 범인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여설련이 생사결의 규칙 운운하며 주장했던 내용에 상명일 본인도 동의를 했으니 나서지 않은 것이겄I지. 당연명이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었으니까.
구환교검 상명일쯤 되는 존재는 스스로 했던 말에 얽매이는 경우가 잦다. 그렇기에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여설련은 이대로 사천지회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건 막인후의 복수를 위해, 어떻게든 당연명을 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대였으므로.
설계한 덫 중 둘이 이미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다. 이제,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세 번째 덫을 꺼내야 했다. 물론 내키지 않는 것일 뿐, 망설임은 없다. 이미 결정은 내린 뒤였으니까.
"이른 감이 있지만 사천지회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여설련의 침묵을 뜻대로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상명일이 선언하듯 말했다.
"당가 소가주 당연명. 오늘을 기해 그대의 가문은 논란의 중심에 설 것이다. 이만한 일을 벌여놨으니 당연하겠지. 생사결의 과정이 공정했음은 내가 보증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한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디 귀가가 감당할 수 있길 바라지. 그동안 본련에서 성도를 귀가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또 가급적 불가침하라는 지침을 내렸지만 이제는 그러기 힘들 것 같군."
그동안 당가는 자리한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자중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당가 약왕당이 민생에 크게 도움이 되니 성도를 침범치 말라는 흑사련주 유길준의 엄명이 있기도 했지만, 당가가 워낙 쥐죽은 듯 지내왔기에 다른 사도방파들도 그러려니 그들의 존재를 용납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후계가 당가의 소가주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연 각 방파들이 조용히 넘어가려 할까. 분명 하루가 멀다 하고 청을 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약왕당도 없으니.'
세간에야 흑사련주가 민생을 염려하여 의술에 조예가 깊은 당가에 자비를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흑사화 유연희一 사천의 절대자이자 사도 무학의 대종사인 유길준의 수양딸인 그녀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었다. 특이한 체질을 타고나 전신 경맥으로 진기가 통할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까닭이다. 정확히는 내가기공을 익히기 어려운 체질이라 해야겠지.
이건 병 같은 것이 아니기에 의술에 기댈 것도 아니었고, 유길준이 손을 쓸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당사자인 유연희는 괜찮다면서 범인의 삶을 살겠다고 했지만, 유길준과 사도육존은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一 독과 약에 능한 당가라면, 약왕당이라면 무언가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가로서, 독과 약이 전신 경맥에 어떤 영향을 끼지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가 되어 있을 테니까.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으므로.
당가가 명맥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언제고 유연희의 체질을 개선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근래에는 아예 수하를 통해 약왕당주 당일을 포섭하고, 그에게 간접적으로 밀명을 내린 차였다. 운기할 때마다 통증을 느끼는 이를 구제할 방법을 찾으라고. 당연히 유연희의 신분은 노출시키지 않았다. 만약 당일이 방도를 찾아내더라도 그게 흑사련주의 유일한 여식을 구제할 수단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순순히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당일은 꽤 그럴듯한 방법을 찾아냈었다. 일종의 마비독을 이용해서 경맥의 감각을 일시적으로 무디게 하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할경우 독기가 세맥에 축적되어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경맥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효과는 유지하면서, 독성은 줄이는一 그런 연구를 몇 년째 해오고 있었다.
연구가 꽤 진척을 보인 시점부터는 당일이 약왕당 인원을 데리고 흑사련에 투신하도록 종용했다. 방파를 하나 세워 그곳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겠다, 흑사련주가 직접 창안한 신공절학이 포상으로 내려질지도 모른다一 그렇게 유혹하자 당일은 금세 넘어왔다. 그가 원래 야욕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전대 약왕당주를 끌어내렸을 때부터 짐작했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그렇게 공을 들인 약왕당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새롭게 소가주가 된 당연명에 의해서. 죽은 부친의 원한에 약왕당주 당일이 얽혀 있었다든가. 입수한 정보로는 그랬다.
당일이 맡았던 연구一 경맥 마비독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없었다. 기존 약왕당 인물들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기다림이 수포가 된 셈이었다.
그 후, 당가에서 약왕당을 대신할 조직으로 의각을 신설했다고 들었지만, 더 이상 상명일을 비롯한 사도육존은 이전처럼 당가를 비호할 생각이 없었다. 예전에야 당연히 유연희가 무공을 익혀야 한다고 여겼고, 또 당가에서 방도를 찾아내지 않을까 하고 가능성을 걸어본 것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유연희 본인이 범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충분히 만족해했고, 또 사도육존 또한 유연희가 무공에 뜻이 없다면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들이 지켜주면 되지 않나.
흑사련의 일은 대부분 사도육존의 의중에 따라 결정된다. 련주인 유길준은 그저 군림할 뿐.
더 이상 흑사련은 당가를 비호하지 않을 테니, 아마 당가는 오늘의 일로 생긴 원한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일단 심화방이 위치한 이곳 십방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각 방파에서 끌고 온 호위 병력이 인근에 진을 지고 있지 않나. 자신들의 작은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흉수를 곱게 돌려보낼 이들이 있을까.
'욕심이 과했어.'
상명일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번 사천지회에 얽혀 있는 방파만 오십여 곳이다. 연이은 생사결에서 모두 승리한 당연명은 분명 그들에게 막대한 이권을 요구할 수 있겠지만, 그 이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사천지회를 주관한 심화방이다. 심화방이 흑사련 휘하 방파 중에서도 제법 세가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오십여 방파의 영역에 대한 이권을 모두 보장해주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상명일이 보기에, 이번 사천지회는 당가에 득보다 실이 많았다. 명성을 얻었다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살아남은 이가 있어야 제대로 그 이름이 알려질 터인데, 생사결을 관전하고도 서 있는 것은 당연명을 비롯한 당가 인물들과 상명일 자신, 그리고 심화방주 여설련과그 방도들뿐이다.
아, 유연희도.
거기까지 생각이 달은 상명일은 문득 오싹함을 느꼈다. 개회 이틀 전에 느꼈던 불안감一 이번 사천지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했던 꺼림칙한 감각이 다시금 치밀어 오르면서다. 불안감은 순식간에 격화했고, 상명일은 화들짝 놀라며 유연희를 쳐다보았다.
시종일관 살갑게 굴던 여설련에 대한 경계를 자신도 모르게 풀고 있었다...!
"...여 방주. 지금 뭐하는 짓이지?"
"움직이지 마세요. 상 대협. 저를 너무 놀라게 하면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갈지도 모르니까요."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상명일은 처음으로 노기를 보였다.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이 작게 꿈틀거린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살벌한 느낌이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여설련은 지금, 흑사련주 유길준의 금지옥엽인 흑사화 유연희의 가녀린 목을 뒤에서부터 틀어쥐고 있었다. 그녀를 방패로 삼은 형국이다.
유연희는 뒷목이 잡힌 채 그저 숨만 쌕쌕 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말을 하지 못하도록 아혈을 짚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면사로 가려져 있었지만 아마 두 눈은 공포로 얼룩져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을 겪은 것은 처음일 테니 말이다.
"실성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그 손을 놓아라. 만약 그 아이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난다면 련주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는 것이지? 심화방은 풀뿌리 하나 제대로 남는 것이 없을 것인데. 아니, 그보다 은을 원으로 갚을 셈인가? 양강무학을 익혀 죽어가던 여방주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누구인지 정녕 잊었나...?"
"...잊지 않았죠. 련주께선 여전히 저 여설련의 은공이십니다. 구명지은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한낱 미천한 기녀 출신이었던 제가 이만한 지위에 오를 수 있게 적련연화술까지 손봐주셨으니 말이죠. 분명 평생을 두고 은혜를 갚아도 모자랍니다. 본방 또한 그분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죠."
"여 방주의 마음은 매년 보내오는 공물로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지? 부탁할 것이 있다면 말로 하면 되지 않나."
"저는, 흑사련 휘하 심화방의 방주이자, 련주에게 신세를 갚을 몸이기 전에, 한 명의 여인입니다."
난데없는 여설련의 말에 상명일이 의문을 표했다. 무슨 거창한 요구를 하려는 것인가 했는데 갑자기 여인 운운하고 있으니....
심화방주 여설련이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 옛 정인一 태을묵검파의 막인후가 저 어린 당가놈에게 죽었습니다. 그 원한이 너무도 사무쳐서, 이런 일을 꾸미게 되었으니 상대협께서는 헤아려 주시기를."
"...지금 나보고 당가의 소가주를 죽여 달라는 것인가? 연희를 볼모로."
"그러합니다. 만약 제 눈앞에서 저놈을 찢어 죽여주신다면, 아가씨를 놓아드리고 저는 자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여한은 없으니까요."
"내 검은 아직 약관에 이르지도 않은 아이를 상대로 휘둘러지기엔 너무도 무겁다."
"못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여설련은 비통한 기색을 지우고는 독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익힌 적련연화술에 대해 아실 겁니다. 상 대협의 검이 아무리 쾌속하다하더라도 제가 죽일 마음을 품는 순간, 아가씨는 불타한 줌 재가 되고 말겠죠. 이미 내려놓은 목숨, 아가씨를 죽이고 저도 죽겠습니다."
구환교검 상명일을 동원하는 것一 이게 그녀가 준비한 마지막 덫이었다.
< 114화<비극의 시작(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