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15화 (115/134)

< 115화<비극의 시작(3)> >

"네년이 정녕...!"

화아악一!

유연희를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여설련의 입에서 나오자, 순간적으로 상명일에게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옷자락이 파라라락 세차게 휘날린다. 구환교검 상명일은 화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으로, 의지가 일면 그에 감응하여 자연스레 진기도 반응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주변 일대가 갑자기 캄캄해지는 느낌이 든다. 상명일이 살심을 품는 것과 동시에 짙은 살기가 유형화되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온 까닭이었다. 그 역시 당연명처럼 검도 고수로서 고도로 정제된 살기를 구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일까.

그러나 상명일의 살기는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지켜보던 심화방도들이 착각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기세를 갈무리한 것이다. 극에 달한 진기운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

'흑사련주의 수양딸이라 들었는데. 정말 아끼나 보군.'

당연명은 상명일이 살기를 거두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고도로 정제된 살기는 사람의 심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가 그 살기에 억눌려 꼼짝 못하고 산 채로 잡아먹히는 것처럼, 아득한 경지의 존재가 작정하고 내뿜는 정련된 살기를 마주한 이들은 보통 움직이기는커녕 생각조차 이어나갈 수 없기 마련이다. 소림 무학처럼 부동심(不動心)에 특화되어 있다면 모를까.

상명일이 화경에 이른 존재라는 것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 살기의 권역을 확장하는 것만으로 여설련을 제압할 수 있겠지.

웬만큼 무공을 익힌 자라도 심혼에 타격을 받는 순간만큼은 사고가 정지할 수밖에 없고, 그 정도 빈틈이면 상명일과 같은 화경의 존재에겐 상대의 목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심화방주 여설련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당연명이 보기에 흑사련주의 금지옥엽인 흑사화 유연희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이었다. 귀한 신분답게 희귀한 영약을 상시로 복용한 것인지 체내에 작지 않은 기운이 잠들어 있긴 했지만 내력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호흡법으로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었던 것.

조금 의아한 일이긴 했다. 사도 무학의 대종사를 아비로 두고 있으면서, 무공을 익히지 않다니. 대학사의 자식이 글월 한 줄 읽지 못한다는 것과 진배없다.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흑사화 유연희는 범인이나 다름없었고, 만약 그녀가 상명일이 작정하고 내뿜는 살기를 찰나라도 접한다면 심혼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오줌을 지리며 잠시 혼절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백치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걸 고려해서 살기를 거둔 것이겠지.

구환교검 상명일은 길게 숨을 뱉어냈다. 심화를 다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좋다. 원을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상 대협."

"닥쳐라."

상명일은 떫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원래라면 삼초지적도 되지 않는 여설련에게 자신이 휘둘리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련연화술만 아니었다면.'

당연명의 짐작대로, 상명일은 유연희의 안위를 염려하여 살기를 거둔 것이었다. 고도로 정제된 살기를 여설련에게만 한정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둘이 너무 가깝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심화방주 여설련이 익힌 양강무학一 적련연화술도 변수였다. 적련연화술은 강력한 심상으로 구현되는 무공이기에, 빠르게 여설련의 머리통을 베어낸다 하더라도 의식이 남아있다면 적련연화술을 발동할 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위험이 크다.

그래서 결국 상명일은 내키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후기지수를 죽이기로.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당연명의 정면에 나타났다. 역시나 심상치 않은 신법.

"면목이 없군."

상명일이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화경에 이른 자신이 고작 아녀자의 사사로운 복수에 동원되다니. 그것도 한낱 후기지수를 상대로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유연희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녀는 흑사련주 유길준의 수양딸이기도 했지만, 사도육존 역시 뒷골목 흑사파 시절 따르던 두목의 유일한 혈육인 유연희를 딸처럼 여겼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나 명예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다.

"보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그대의 목숨을 취해야겠군."

"그렇군요. 댁과는 싸울 생각이 없었는데."

당연명은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상명일은 당연명의 말투가 묘하게 불손해졌다고 느꼈지만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놈 아닌가.

"배려라기엔 뭣하지만, 연이은 생사결로 소모된 내공을 보충할 시간을 주마. 다른 건 몰라도 흡정에 당하지 않았느냐. 필시 운기가 필요할 터."

상명일은 당연명이 효율적으로 생사결을 이어나가긴 했지만, 초붕문 소문주 엽청강과의 싸움에서 적잖은 내공을 소모했으리라 짐작했다. 아무리 독인지경에 올라 지독한 독기를 품고 있다 해도 사람을 한 줌 독수로 만들 정도였으니, 분명 상당한 양의 내공을 흡정당하지 않았을까.

상명일의 짐작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연명은 분명 엽청강이 경악할 정도로 많은 내공을 흡정당했었다. 그러니 엽청강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녹아내렸겠지. 하지만 그건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나 그런 것이고, 당연명의 입장에서는 폐맥은취를 위해 가득 채워놓은 열두 개 경맥 중에서 하나一 그것도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양이었을 뿐이다. 호신강기 용린이 깨지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그마저도 잠깐 사이에 식신 청각의 독기를 이용해 내공을 회복해둔 상황이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음.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약속컨대, 운기 중에는 결코 건들지 않겠다. 나 상명일의 이름을 걸지. 이렇듯 까마득한 후배를 상대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심지어 만전의 상태가 아닐 때를 노리는 것은 자괴감마저 들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걱정 마시죠. 만전의 상태이니."

게다가一 라고 말을 길게 늘이며 당연명이 말을 이었다.

"이미 같잖은 협박 따위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쪽의 이름이나 명성을 건다한들 제가 어찌 믿겠습니까? 그만한 무게감을 보여주신 것도 아니고."

상명일은 말문이 막혔다. 사도육존이 되고 난 후,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당연명이 생사결로 다른 사천지회 참가자들을 모조리 죽일 때도 크게 간섭하지 않았건만.

"또, 심화방주가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지도 않고."

당연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불꽃 문양이 수놓아진 무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화방도들이 분명했는데, 거의 모든 인원이 여인이었다. 여인들은 비파나 금(琴), 피리 따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여설련의 손짓에 따라 자리를 정하고 연주를 준비하는 듯했다.

상명일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 방주.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내게 당가 소가주의 처분을 맡겨 놓고서."

"상 대협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저는 놈에게 괜한 배려를 베풀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비로소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기왕이면 흥겨운 게 좋지 않나요? 연주 실력이 일품인 아이들이니 가볍게 즐겨주시길."

그렇게 말하며 여설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화방도들이 제각각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름다운 선율이 장내에 흘렀는데, 이게 바로 심화방의 대표적인 무학인 심심척음공(深心刺音功)이었다. 사람의 심혼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음공. 물론 상명일 정도 되는 화경의 무인에게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심심척음공은 연주자, 그러니까 음공을 펼치는 이들이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심심척음공을 익힌 이들이 자아내는 음파가 서로 중첩되는 곳이 가장 위력이 강해지는데, 당연명 일행과 상명일이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여설련과 유연희가 있는 곳에는 심심척음공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저 듣기 좋은 소리로 다가올 뿐.

아무튼 심심척음공의 곡조가 연주되는 동안, 그 영향이 미지는 영역 안에 있는 이들은 당연히 제대로 운기를 할 수 없을뿐더러, 심혼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성취가 낮은 이들은 곡조에 따라 널뛰는 진기를 통제하지 못해 주화입마에 빠지기도 한다.

여설련이 노린 것은 두 가지였다. 행여나 당연명이 운기를 통해 내공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당연명의 호위와 시종一 당미려와 제갈영영을 무력화하는 것.

예상보다 높은 무위를 지닌 당연명은 모르겠지만, 당미려와 제갈영영 정도는 주화입마에 빠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첩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제법 저 여아들을 신경 쓰는 것 같았으니 작은 복수 정도는 되지 않을까.

당장 연주가 시작된 지 불과 한두 호흡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당미려와 제갈영영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을 둘러싼 채 심심척음공을 펼치고 있는 이들은 어림잡아도 오십이 넘었다. 그만한 인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곡조를 연주하고 있었으니, 심심척음공의 위력이 몇 배나 증폭된 것이다.

그리고 음공 무학의 특징상, 곡조가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잠시 후에는 날뛰는 진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질 수밖에 없으리라一

그렇게 여설련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시끄럽군."

당연명이 나직이 말했다. 놀랍게도 심심적음공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늘어뜨린 그의 오른손 검지에는 어느새 작은 표창 하나가 반지처럼 끼워져 있었다.

표창은 둥근 고리에 작은 칼날 여러 개가 촘촘하게 붙어 있는 모양새였는데, 이건 당연명이 일찍이 우모침우와 함께 창안한 또 다른 암기 무학一 회선난무표(回旋亂舞線)를 펼질 때 쓰는 회선환(回旋環)이었다. 태을묵검파 막인후가 바로 이 회선환에 난자당해 죽었었다.

한데 하나만 꺼낸 것으로 봐서는 회선난무표를 펼칠 요량은 아닌 것 같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기도 했고. 회선난무표는 원래 일대일에서 극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암기 무학이지 않나. 아직 상명일과 결전을 치를 분위기는 아니었다.

'회 (回)'

당연명은 검지를 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회선환이 슈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칼날 부분이 그냥 둥그런 원으로 보일 만큼 빠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당연명이 가볍게 손가락을 퉁기는 것과 동시에 회선환이 휘리릭 날아오르더니 자취를 감줬다. 고속으로 휘돌며 내던 소리도 잠잠해졌다. 당연명의 눈은 어느새 진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이는 안법 시류안을 발동한 때문이었다.

진녹색 안광을 번득이며, 당연명은 '흐름'을 봤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감각도 주사망역으로 확장된 기감이 심심척음공을 펼치고 있는 오십삼 명의 심화방도를 낱낱이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연주에 집중하는 그들의 맥동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당연명은 심상으로 구불구불한 선을 그었다. 오십삼 명의 심화방도들一 그들의 경동맥을 하나로 잇는 '흐름'이었다.

마음속에 그린 선이 둥글게 원이 되는 순간.

당연명의 검지도 어느새 작은 원을 그리고 있었고.

연기륜으로 연결되어 있던 회선환이 나타나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선혈을 선율삼아.

< 115화<비극의 시작(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