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비극의 시작(4)> >
당연명이 날려 보낸 회선환은 어느새 당연명의 검지로 돌아와 있었다. 암기회수 무학 연기륜 덕분이다.
직후.
푸확一!
제각기 악기를 들고서 연주一 심심척음공의 곡조를 이어나가던 오십삼 인의 심화방도들이 거의 동시에 목울대 주변 경동맥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낸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심화방도들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사라졌다. 털썩 털썩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한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시끄럽군一 이라고 말한 당연명이 무언가 작은 암기를 꺼내들고, 그걸 가볍게 튕긴 후 검지로 작은 원을 그리는 것까지는 이 자리의 모두가 목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작은 움직임으로, 한 순간에 오십이 넘는 사람을 죽일 줄이야...!
장내에 침묵이 감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은 자들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고, 산 자들은 입을 열기 힘들었으니까.
'역시 이 정도는 내버려두는군.'
당연명은 구환교검 상명일을 직시하며 생각했다. 방금 선보인 한 수는 연기륜과 회선환을 이용해 펼친 간단한 기예에 불과했다. 회선난무표처럼 복잡한 투로가 얽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빠르게 회선환을 던지고 회수한 것뿐이다. 화경에 이른 상명일의 기감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테지.
사실 당연명으로서는 이미 목표를 달성한 만큼 상명일과 싸울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상명일을 비롯한 사도육존은 흑사련주 유길준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의형제라지 않았던가. 다른 사도 방파는 몰라도 흑사련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생에서는 소중한 이들과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으므로.
그러니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심화방주 여설련을 죽이고 흑사화 유연희를 구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여설련이 유연희의 목덜미를 틀어쥐었을 때, 당연명은 우모침이나 회선환으로 암살을 시도할까 했었다.
하지만.
一제가 익힌 적련연화술에 대해 아실 겁니다. 상 대협의 검이 아무리 쾌속하다하더라도 제가 죽일 마음을 품는 순간, 아가씨는 불타 한 줌 재가 되고 말겠죠. 이미 내려놓은 목숨, 아가씨를 죽이고 저도 죽겠습니다.
여설련이 '적련연화술'을 입에 담자, 상명일이 살기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상명일 정도 되는 검객이라면, 분명 눈깜짝할 사이에 여설련에게 달을 쾌검식을 보유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유연희를 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물러난 것이다.
'일종의 심상 무학인가 보군.'
당연명은 내심 그 이유를 짐작했다. 꼭 화경에 이르러야만 의념이나 심상을 이용한 무학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의를 극대화해 검기와 결합시킨 태을묵검파의 묵검기처럼, 원초적이거나 근원적인 의념 혹은 심상一 열기(熱氣)나 한기(寒氣) 따위를 구결과 결합하여 만든 무학들이 있었다. 양강 무학의 한 갈래로 짐작되는 '적련연화술'이 그러한 심상 무학이라면 상명일의 검이 아무리 빨라도, 또 당연명의 출수가 아무리 은밀해도 여설련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유연희를 태워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상명일은 그걸 경계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당연명은 굳이 여설련을 노리지 않았다. 여설련을 노리는 것이, 상명일에게는 유연희를 노리는 것처럼 다가올 테니까. 조금이라도 여설련 쪽으로 회선환이 향할 기미가 보였다면 그의 검이 뽑혔을 것이다. 마주선 상황에서도 상명일의 정신이 온통 유연희와 여설련 쪽으로 쓸려 있다는 게 느껴진다. 과연 심화방도들에게 행해진 공격에 대해서는, 상명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어이가 없군. 막 가가가 당할 만도 해.'
여설련은 나름대로 정예랄 수 있는 수하들이 한 순간에 죽어나자빠지자 허탈함을 느꼈다. 그리고 애초에 참가자들을 동원한 생사결 따위는 당연명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상명일의 입에서 독인지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공 성취가 깊은데다가 이러한 암기 무학까지 보유하고 있다니. 연배가 무색하다. 후기지수의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한편으로는 다행한 마음도 들었다. 사도육존一 구환교검 상명일이라는, 무엇보다 확실한 패를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놈이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어도 화경에 이른 검객을 상대로는 살아날 방도가 없으리라...!
상명일이 말했다.
"처음 보는 암기술이군. 얼마나 숙련했기에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지? 연신 궤도를 틀어가며 정확히 경동맥만을 노리다니. 솔직히 감탄했다. 그대의 가문이 한때 독과 암기의 조종으로 불렸다는 게 납득이 간다."
"무의미한 칭찬입니다. 그쪽에게는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할 잡기일진대."
짙어지는 혈향을 느끼며, 당연명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사실이 그랬다. 회선난무표라면 모를까, 회선환 하나로는 상명일을 어찌할 수 없다. 화경에 이른 존재의 기감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은 극히 적었으므로.
"이래봬도 사도육존이라 불리는 몸이다. 겨우 멀리서 내던지는 암기 따위에 당해서야 체면이 서질 않지."
당연명은 묘한 눈으로 상명일을 바라봤다. 이대로 회선난무표를 펼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과연 화경에 이른 그는 검신이 만든 암기무학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상명일이 계속 말했다.
"다시 한 번 운기를 권하고 싶지만, 역시 거절하겠지. 어쨌거나 연거푸 손을 쓴 후배를 상대로 선공을 취하는 것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다. 해서, 그대에게 삼 초를 양보하마. 마음껏 기량을 펼쳐보아라. 원래 무인끼리의 싸움에서 선수를 양보하는 따위의 허례허식은 정파 놈들이나 챙기는 것이라 여겼다만, 이런 날이 오는군."
"삼 초나 양보하시다니, 후회하실 텐데."
"걱정 말고 전력을 다해라. 마지막 출수가 될 테니 말이다."
"전력이라.... 뭐, 알겠습니다."
당연명은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전력을 다하라一 그 말이 왠지 우스웠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전력을 쏟을 일이 없었다. 스승인 검귀가 귀천하고부터, 그의 전력을 받아줄 상대는 대자연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산봉우리를 베어낼 수 있을 무렵부터는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자제해 왔다.
'그나저나.'
역시 저만한 상대라면一 이라고 내심 중얼거리며 당연명이 참마검을 쥐었다. 회선난무표로 상대할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이내 접었다. 화경에 오를 정도로 고련과 깨달음을 거친 검객을 만날 기회는 드물다. 특히나 그러한 존재와 이렇게 생사를 놓고 검을 섞게 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 터였다.
가급적 검을 드는 일은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했지만, 검 한 자루로 화경이라는 지고한 수준에 이른 검객이 눈앞에 있고, 마침 명검이라 불릴 만한 검이 허리춤에 있다. 검객으로서 고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걸 어찌 참는단 말인가?
'확인해 볼 것도 있고.'
당연명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초붕문 소문주 엽청강이라는 놈과의 생사결一 그때 놈이 독요청광기를 흡정하여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불현듯 깨달은 바가 있었다.
스승인 검귀의 무학은 패력(敗方)一 즉, 쇠하게 하는 힘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 하여, 상극과 상생의 기운이 혼재하는 법이었으니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쇠함이 있으면 성함이 있는 법이었다.
패력진기를 감당할 수 있는 육신에서는 그 반발로 상상하기 힘든 거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펼치는 검귀의 무학은 그야말로 항거불능이었다. 심지어 검을 맞받아치더라도 패력진기에 침습당한 이는 심대한 내상을 입기 마련이었으니, 검공 중에서는 가히 최강이라 검귀가 자부했던 것도 납득할 만했다.
어쨌거나 당연명이 깨달은 것은, 이 '쇠함'이라는 개념 또한 어찌 보면 독(毒)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근육과 혈맥을 쇠하게 하고, 심장박동마저 느려지게 만들어 종래에는 단명하게 만드는 것이 독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一
'그래. 패력 또한 독에 불과했던 거지.'
그렇다면 패력진기 또한 구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쇠하는 기운, 그게 곧 독이었으니까. 그리고 전생처럼 용력지체를 타고나진 못했지만 패력진기로 인한 단명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금 체내에 충만한 기운은 독요청광기一 만독(萬毒)을 먹어치우는 기운이었으므로.
결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스르릉一 검을 빼어든다.
"호오. 지금 본인 앞에서 검을 뽑겠다는 건가? 무슨 속셈이지? 제법, 아니 상당히 좋은 칼이로군. 그저 장식용인 줄 알았는데 허름한 검집 속에 그런 날을 숨겨뒀다니. 다시 보니 명검이라 불려도 되겠어. 검명이 궁금할 정도...?"
구환교검 상명일은 말을 하다말고 멈줬다. 정면,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당가 소가주에게서 심상잖은 낌새가 느껴졌던 것이다. 검을 늘어뜨린 자세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해금할 생각인가?]
식신 청각이 물었다. 무슨 뜻일까. 당연명이 해금할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성취를 감추기 우I해, 또 호신강기 용린을 상시로 펼치기 위해 익혔던 무영객의 무학一 폐맥은취.
'그래. 어쨌거나 화경의 강자니까.'
[...이 몸의 독을 사용하면 될 텐데. 화경에 이르렀다 해도 내 독기를 버티는 것은 지난한 일일 터.]
청각은 조금 다급하게 얘기했다. 폐맥은취를 풀게 되면 그동안 쌓아뒀던 내공의 둑이 한꺼번에 터진다. 일시적으로 막대한 내공을 얻게 되지만 결국 그 내공을 몸에 담아둘 수는 없다. 인위적으로 경맥에 내공을 몰아넣고 폐맥하여 한계를 넘은 내공량을 수용하고 있던 것이니까. 원래 지니고 있어야 할 내공량으로 줄어들 때까지 시시각각 내공이 증발하겠지. 그리고 차후 당연명이 다시 폐맥은취를 하게 되면 청각 자신은 독기를 착취당할 게 뻔했다...!
'그냥.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당연명은 그렇게 말하고 폐맥은취를 위해 막고 있던 열두 개 경맥을 한꺼번에 해방했다.
어마어마한 내공이 일시에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화아아아악_!!
체외로 분출되는 기세도 엄청났다. 기파가 몇 겹으로 터져 나가는 상황. 옷자락과 머리칼이 쉴 새 없이 휘날린다. 가까이 있던 당미려와 제갈영영은 버티지 못하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비교적 거리를 두고 있는 여설련도 크게 놀란 눈으로 당연명을 쳐다본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기세다. 그 흑사련주 유길준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나 좌중의 그 누구보다 놀란 것은 바로 구환교검 상명일이었다.
"너!!!"
언제 뽑아든 것일까. 상명일의 손에는 그의 애검이 들려 있었다. 눈빛에는 당혹이 선명하게 어려 있었고, 이제까지 내비치던 여유 따위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한껏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상명일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화경에 이르러 있었군."
그 말에 모두가 놀랐다. 여설련도, 유연희도, 당미려도, 제갈영영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가의 소가주가,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청년이 절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말이다.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을 한 당사자가 사도육존의 일좌, 구환교검 상명일이었음에야.
모두가 숨을 멈추고 있는 와중에.
당연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약속대로 삼 초를 받아주시길."
구환교검 상명일은 사색이 되었다.
< 116화<비극의 시작(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