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비극의 시작(5)> >
십방(什防)에는 지금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곳一 정확히는 심화방에서 사천지회가 열리니까. 사천 전역에 자리 잡은 각 방파의 후계들은 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속 방파의 전력 일부를 호위 병력 삼아 십방에 당도했다.
각 방파의 후계, 그러니까 사천지회 참가자들은 각자 적게는 삼십, 많게는 일백에 가까운 인원을 대동했는데 참가 인원이 대략 오십여 명이었으니 족히 이천이 넘는 병력이 이곳 십방에 주둔해 있는 상황이었다. 사천지회가 끝나고 되돌아갈 때 또 호위를 해야 하니까.
예기치 못한 불상사로 인해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문파가 갑작스레 심화방으로 바뀌었기에, 십방에는 그만한 인원을 수용할 만한 잠자리나 객점이 모자랐다. 기존에 터를 잡고 있던 상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평소보다 웃돈을 받고도 연일 만석인데다, 사파 무인들이 별다른 행패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지냈기 때문이다.
사천지회는 각 방파가 지닌 이권을 놓고 다투는 장이다. 그리고 그 이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심화방이 될 테니, 그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십방에서 말썽을 피울 방파는 없었다. 상인들로서는 아주 수월하게 폭리를 취할 수 있는 환경이다. 물론 그들이 취한 이득 일부가 심화방으로 흘러들어갈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쨌거나, 그렇게 조용히 지내던 사파 무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지, 이 기파는. 무신(武神)이라도 강림한 건가? 터무니없는 수준인데."
"사도육존 중 구환교검 상 대협께서 사천지회에 참가하셨다는 얘기가 있지 않았나. 흑사화 아가씨의 나들이를 겸해서 말이야. 상 대협께서 본신의 무학을 드러내신 게 아닐까. 후학들의 견문을 넓혀주시려고."
"그런 것 치고는 과하지 않나? 심화방에서 여기까지 떨어진 거리가 얼만데 이곳까지 기파가 느껴진다는 것은...."
"별일이야 있겠나? 술이나 마저 하세. 예년의 사천지회를 생각해 보면 적어도 십 주야는 걸릴 테니까. 아, 이때가 아니면 언제 원 없이 마셔보겠나?"
"알겠네. 그나저나 놀랍긴 하군. 대체 얼마나 심후한 내공을 지녀야 이만한 기파를 쏟아낼 수 있는 것인지....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일 지도 모르겠군. 상 대협께서 화경에 이르셨다는 얘기 말일세. 련주께서도 치하의 말씀을 건네셨다고."
"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이지. 상 대협께서 제대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하신 게 이립(而立 30세)이 거의 다 되었을 때라고 들었네. 련주께서 적잖은 도움을 주셨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타고난 무재나 쏟은 노력이 엄청났겠지."
"어쨌거나 본련의 홍복이로군. 련주께서 이룩하신 사도천하가 더욱 공고해지겠어."
"...잠깐. 모두 술잔을 내려놔라. 기파의 증폭이 심상치 않다."
"괜한 우려이십니다. 대주. 구환교검께서 계신데...."
"멍청한 놈. 취기를 흩고 기감을 제대로 벼려봐라. 이 어마어마한 기파를 발하고 있는 자가 상 대협이라면, 또 하나 막강한 기파를 발하고 있는 존재는 누구란 말이 냐...?"
"대주의 말씀이 옳다. 분명 차이는 있지만 막강한 존재감을 풍기는 존재가 둘이야. 마치 대치하고 있는 듯한 형국인데."
"그렇다면 상 대협 외에 누가...?"
"일단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다. 다른 방파에서도 나설 참인 듯하니 함께 움직인다. 그리고 만약 불상사가 생길 경우, 무엇보다 소방주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것을 잊지 마라."
"존명!"
****
한편.
주변 일대에 자리 잡은, 물경 이천이 넘는 사파 무인들을 긴장토록 만든 기파의 주인공一 당연명은 곧장 참마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좌하(左下)에서 우상(右上)으로 뻗는 검격.
'섬 (繼).'
허공에 붉은 선이 아로새겨진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빛살처럼 빠른 검초였다.
과앙一!
굉음과 함께 바닥이 쩍 갈라지며 흙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뿐 아니라 상명일의 뒤쪽 전각 또한 붉은 실선이 그려지더니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말이 절로 뇌리를 스칠 정도.
'됐다.'
당연명은 스승 검귀의 무학인 검초 섬(繼)을 펼치는 순간 깨달았다. 제대로 패력의 성질을 구현했음을.
전신에 흘러넘치는 내력을 패력심법의 운기법으로 발출했다. 독요청광기가 패력진기로 화한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동종(同種)의 진기가 아니라면 새로운 심법의 운기법을 따른다고 해도 그 공능을 온전히 가져올 수 없다. 이건 당연한 상식이다.
뿌리 깊은 대방파들은 심법을 몇 개씩 가지고 있는데, 그곳의 제자들은 배분이나 성추I, 사문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기초 심법부터 몇단계에 걸쳐 상승 심법을 익혀 나간다. 그렇게 심법을 바꿔도 문제가 없는 이유가 바로 기초 심법에서 비롯한 동종의 진기를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검귀의 패력심법과, 사천당가一 무영객의 독요청광심법은 명백히 다른 종의 호흡법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 연원이 겹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당연명은 패력진기의 쇠하게 하는 성질을 독으로 간주함으로써 독요청광기와 동종으로 만들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인지(認知)'했다.
화경이라 함은, 사물의 성질을 오로지 강력한 의념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지를 이른다. 그것이 바로 강기를 구현하는 원리인즉- 당연명이 패력을 독으로 인지하는 순간, 독을 먹어치우고 또 독으로 화할 수 있는 기운인 독요청광기의 성질 역시 패력의 그것을 띌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패력진기로 말미암아 거력을 발휘하는 반발로 감수해야 하는 노쇠一 그것마저 독으로 치부한다. 원래라면 범인보다 월등한 신체를 타고나 장수하는 용력지체가 아니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반작용이었지만 이제는 독요청광기 본연의 공능으로 무색하게 만들 수 있었다. 독요청광기는 본디 만독을 먹어치우는 기운이었으므로.
'섬강(繼至)까지는 무리겠어.'
당연명은 참마검의 상태를 일별하며 생각했다. 이미 검초 섬(■)을 펼치는 순간부터, 참마검은 백열하듯 한껏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현양촌에서 마교 천월대를 상대할 때보다 극명하다. 아마 제대로 패력을 구현한 까닭이겠지.
검초 섬(繼)은 셀 수 없이 많은 검로를 익히고 통달한 검귀가 마침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완벽한 횡격을 찰나지간에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창안한 단일 검초였다. 분명 산봉우리마저 잘라낼 정도로 강력했지만, 사실 그건 엄밀히 따지자면 검기의 영역에 불과했다. 화경에 이른 절세 고수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으레 그렇듯 강기(S氣)가 동원되어야 한다. 스승인 검귀 역시 흡성삼흉을 상대할 적에 섬강(繼至)으로 놈들을 베었다고 했다.
강기를 맞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강기뿐이었으므로.
후욱
극히 짧은 상념과 함께, 구름처럼 치솟았던 흙먼지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한 인영一 구환교검 상명일 이었다. 간단히 검을 휘둘러 일으킨 검풍으로 시야를 확보한 것이다.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조금의 상처도 없는 모습이었다. 과연 화경에 이른 무인이라는 것일까.
상명일이 말했다.
"뭐지, 방금 그 검초는? 듣도 보도 못한 위력이었다. 단순한 횡격이 아니더군. 상당한 연륜이 느껴졌고. 청성파 장로들의 검술도 이만큼 고절하지는 못했다. 정체가 무엇이냐? 정말로 당가 소가주가 맞기는 한가? 아니, 그 전에 화경에 이른 성취를 어떻게 숨겼지?"
"이제 일 초가 끝났습니다."
당연명의 말에 상명일의 안색이 굳었다. 방금 전 사선으로 들이닥친 검초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순간적으로 강기를 펼쳐 막아내기는 했지만, 그건 당연명이 강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방금 전 그 검초에 강기가 어려 있었다면...? 꼼짝없이 두 동강 나서 죽었을 지도 모른다. 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속도로 닥치는 검격이었으니.
"...대등한 경지에 도달한 이를 상대로 삼초를 양보하는 것은 오히려 무례가 되겠지. 그래서 그대도 강기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닌가."
"무례 아니고. 강기도 이제 쓸 참인데."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당연명의 말에 상명일은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이미 여설련의 협박으로 당연명의 목숨을 취하고자 나선 것 부터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당연명은 연달아 생사결을 수십 차례나 펼친 직후인데다, 한참 어린 후기지수였으니. 그래서 삼 초를 양보하겠다 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남은 이 초를 받아줄 순 없었다. 강기를 쓰지도 않은 일 초가 이리도 위협적이었는데, 작정하고 강기를 두른 공격을 연달아 두 번이나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그러나 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말을 다시 주워 담는 것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됐어."
당연명이 말했다. 하대다. 이제 완전히 말을 놓기로 한 것일까.
"약속을 지킬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으니까. 사파 잡배들이 그렇지. 전력을 다해 덤벼라. 그래야 덜 억울할 테니."
"...격장지계도 경지에 이르렀구나."
상명일은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전력을 다하라'는 말이 떠올라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도육존이라 불리게 된 후로 오늘처럼 치욕을 겪은 날이 있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삼 초의 양보는 없던 일이 되었으니까. 믿기지 않지만 당연명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엄청났다. 내공을 얼마나 축적한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전설 속 영물인 만년화리의 내단을 생일 때마다 챙겨먹었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완전히 진퇴양난이로군.'
한쪽에서는 유연희를 인질로 잡고 당연명이라는 괴물 녀석을 죽여 달라 하고 있었고, 그 괴물 녀석은 능히 자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강자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유연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니까.
'오늘 이 상명일의 명운이 끝장날 지도 모르겠구나.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상명일은 짧게 탄식을 뱉고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칠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 뿜어대는 기파로 보아 상대의 내공량은 분명 이쪽보다 위다. 그건 곧 폭발적으로 내공을 소모하는 검강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개 화경에 이른 고수끼리의 싸움은 검강의 유지 력에서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았으니.
'방법이 없다. 장기전은 불리해.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야 한다. 단발성 검초를 쏟아내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상명일은 그간 배우고 익힌 무학들을 떠올렸다. 심법부터 검법까지, 그 모든 게 의형제이자 련주인 유길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남들은 유길준이 일 각 만에 창안하거나 개변한 무학 한둘을 하사받은 것만으로도 신공절학이라 떠받들며 감읍하는데, 그를 비롯한 사도육존은 익힌 무학 전체가 유길준이 그들 개개인의 자질에 맞게 신경 써서 만들어준 것이다. 각자의 자질에 꼭 맞는 옷을 짜준 것이나 마찬가지. 늦게 무학에 입문했지만 성취가 압도적으로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구환교검 상명일은 환검(換劍)을 익혔다. 실초와 허초를 구분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검초는 일대일 대결에서 무척이나 유리했다. 상대는 허초를 실초로 상대해야 하니 그만큼 힘의 낭비가 심할 수밖에 없었고, 또 손발이 조금씩 엉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틈을 노리면 어느 정도 실력의 격차가 있더라도 치명상을 입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렇게 청성파 장로의 목숨도 거두지 않았던가. 얼굴에 검상이 남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단기 결전을 염두에 둔 상황이다.
상명일은 화경에 올랐을 때.
축하한다면서 흑사련주 유길준이 새로 창안해 건네준 무학을 떠올렸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 117화<비극의 시작(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