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비극의 시작(6)> >
얼마 전 흑사련주 유길준과 구환교검 상명일의 대화.
一련주로서, 또 사사로이는 아우 되는 이로서 교검(授劍) 형 님의 성취를 경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형께서 타고난 자질의 한계를 딛고 조화경에 올라서고자 얼마만한 노력을 쏟아 부었을지 이 우제는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듭니다.
一...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련주께서는 제대로 무공에 입문하신지 오 년도 되지 않은 때에 화경에 들어서셨으니. 저 같은 범인의 이십년 세월에 달하는 노력은 가늠하시기 힘들 만합니다. 더군다나 우제(愚弟)라니요. 평소에는 쓰시지 않던 말 아닙니까. 이 우형(愚兄)을 희롱하기로 작정하신 모양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우(愚: 어리석다)'라는 말에 어울릴진대. 이립이 다 되어서야 글을 깨쳤지 않습니까.
一하하, 그저 농입니다. 제가 의형들 아니면 누구한테 이리 장난을 치겠습니까. 다들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리기 바쁜데.
一아무튼, 기껍기 그지없습니다. 다른 의형들께서도 교검 형님처럼 얼른 화경에 올랐으면 좋겠군요. 그래야 이 우제.... 아니, 아우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얼굴의 검상은 그대로시군요? 환골탈태를 거치셨는데도.
련주께서 미리 말씀해주신 덕분에 환골탈태가 시작되자마자 정신을 단단히 붙들 수 있었지만, 자질이 미천하여 전신 근육의 얼개를 다시 짜는 것만으로도 버겁더군요. 안면부의 피부를 수복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실리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검상이 제법 사내답기도 하고 말입니다. 연희 녀석은 질색을 하지만....
一하기야 검상이 생기기 전 교검 형님의 얼굴은 문사라 해도 믿을 만큼 유약한 인상이셨지요. 예전 흑사파 시절, 다른 패거리와시비가 붙었을 때 일부러 미간에 힘을 과하게 주던 형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름대로 흉악한 표정을 지으신 것이겠지만 소제의 눈에는 경극에 임하시는 것만 같아 조금 웃음이 나왔었지요.
一제가 언제 그랬다고...! 흠, 오늘따라 농을 많이 하십 니다. 련주. 치하하시려고 부른 줄 알았습니다만.
一후후. 정말로 그만하겠습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형님께서는 제 조언에 따라 환검을 익히셨습니다. 신체적 특징이나 성향이 변화무쌍한 초식을 펼치는데 유리할 것이라는 소제의 판단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환골탈태를 통해 근육의 얼개를 완전히 새롭게 짜신 까닭이지요. 요컨대, 강검(强劍)을 펼질 기량을 갖추셨다는 뜻입니다.
一강검이 라시면...?
一상 형님께서는 허초와 실초를 넘나드는 환검을 통해 유검(柔劍)의 묘를 자연스레 깨우치셨을 겁니다. 본래 유검은 멸문한 청성과 같은 도문에서 주로 익혀왔지요. 아시다시피 그들의 무학은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함)에 주안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지에 이른 도사들의 검이 과연 부드럽기만 하던가요? 아니었을 겁니다.
一...확실히 련주의 말씀대로, 청성파 장문인의 검초는 폭풍처럼 맹렬했습니다. 제가 상대한 장로들의 검도 마냥 부드럽지는 않았고.
一기억하고 계시니 설명이 쉽겠습니다. 부드러움을 토대로 진정한 강함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가 방파들 대부분이 추구하는 오의입니다. 그들의 유검은 결국 강검을 구현하기 위한 초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자기들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一그걸 한눈에 꿰뚫어보신 련주께서 대단하신 거지요.
一아무튼 소제는 일찍이 청성의 검법을 낱낱이 분해하여 즉시 강검을 구현할 수 있도록 재구성했습니다. 개변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만, 날 때부터 질긴 힘줄과 튼튼한 경맥을 지녔다는 용력지체가 아니고서야 범인의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겠더군요. 혹은 화경에 오르면서 겪게 되는 환골탈태로 근육의 얼개를 완전히 다시 짜거나.
一용력지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겠습니까? 그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닌지.
一글쎄요. 소제도 기록으로만 접한 지라. 관련해서는 옛날 검귀라는 자가 후인을 구하기 위해 용력지체를 타고난 이를 수소문하고 다녔다고 짤막하게 적혀 있더군요. 끝내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一검귀라면 당시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던 인물 아닙니까? 청성과 아미에서 분류한 것이 일치하던데.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이 듭니다. 어찌면 검귀 그자의 무학이 강검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지...?
一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여간 이제 기량을 갖추셨으니 강검을 상 형님께 전수하고자 합니다. 모쪼록 다른 의형들께서도 자극을 받아 정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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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환교검 상명일이 떠올린 것은 만변귀일검결(萬變歸一劍談)이었다.
련주인 유길준으로부터 전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취가 깊지는 않았지만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변귀일검결은 상명일이 익힌 환검一 거기서 체득한 유검의 묘를 하나로 집대성하여 강검으로 탈바꿈시키는 단 하나의 검초였다.
유길준은 그에게 만변귀일검결을 매 검격마다 일상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화경 고수끼리의 결전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만약 검결을 대성했더라면....'
상명일은 아쉬움을 삼켰다. 아직 그의 만변귀일검결은 완벽하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화경에 오른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동안 검을 휘두르며 깨달은 바를 겨우 한 번의 검초에 녹여내는 일이 간단할 리가 없다.
그러나 강검이 아니면 당연명을 대적할 방법이 없다. 내공량에서 현저히 밀린다는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유길준이 말하길, 화경 고수끼리의 결전은 강기의 유지력一 즉, 내공량에서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검강을 비롯한 강기 자체가 지닌 파괴력이나 내구성이 다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까닭이다.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의지의 집합체가 서로 부딪지는 것이니 병장기마냥 부러지거나 하는 일이 드물다. 대지 형국이 길어지고 내공량으로 승부가 결정지어지는 이유 였다.
결국 달리 말하자면 상대의 강기를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강기를 정련해야 승산이 있는 것이다. 유길준은 검강 정련의 첫걸음으로 강검의 구현을 꼽았다. 예로부터 정도 구파의 고수들이 사도나 마도의 고수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냐면서.
내공량 자체는 오히려 사도나 마도 측이 더 뛰어난 경우가 많았음에도 말이다.
'단번에 놈의 강기를 무너뜨리고 목을 베어내야 한다!'
상명일은 만변귀일검결을 펼치기 위해 엄청난 심력을 소모해야 함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직 강검을 연달아 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기회는 한 번 뿐이다.
"어디, 그 입담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인지 겨루어 보자꾸나."
상명일은 일부러 당연명을 자극하듯 말을 던지고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가 휘둘렀던 환검의 검로들一 그 궤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셀 수 없이 많은 선들. 그 선 하나하나가 실초도, 또 허초도 될 수 있었다. 그 자유로운 전환이 바로 유검의 이치였다.
'진정한 강(强)은 유(柔)에서 기인하는 것인즉.'
만변귀일검결의 핵심요결을 속으로 되뇌는 것과 동시에, 강력한 의념을 검에 싣는다.
화르륵!
상명일의 검에서 대번에 불길이 인다. 화경에 이른 검객들의 특권一 검강을 발현한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부수고 벨 수 있겠다는 전능감과, 엄청난 탈력을 함께 느꼈다. 강검을 토대로 정련된 검강을 발현한 까닭이었다. 환골탈태를 거치며 강화된 육신으로도 강검 구현에 따른 부담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걸 어떻게 매 검초마다 펼친단 말인가...?
그로서는 오직 한 번이 한계였다. 이번에 휘두를 검초 한 번에 명운이 걸려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든다.
한편.
상명일의 검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당연명이 말했다. 여전한 하대.
"별호가 교검이기에 난잡한 검술을 보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대로 된 검강을 피울 줄 아는군. 강검(强劍)이라."
"!!!"
상명일은 크게 놀라 집중이 흐트러질 뻔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눈앞의 미청년은 독인지경에 이른것으로 짐작되는 독공 성취와, 화경에 이른 무위, 그리고 터무니없는 수준의 내공량에 더해 강검마저 알아보는 견식까지 갖췄다. 생전처음으로 련주인 유길준과 비교할 만한 존재를 마주한 느낌이다. 당가에서 용이 자라고 있었구나...!
"말했듯이 전력을 쏟아야 할 거다. 강검에도 고하가 있는 법이니."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함께, 당연명의 참마검에도 진녹색 불길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검초 섬(繼)을 펼친 뒤 백열되듯 붉게 달아올랐던 검신은 어느새 본래의 색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건 참마검이 명검이라는 방증이었다. 패력을 담아내고도 멀쩡했으니 말이다.
'강(强)'
당연명은 강(强)의 묘리를 검강에 실었다. 검신의 영역에 이르렀던 당연명은 검법이나 검술, 검결의 핵심 오의를 추려 자유롭게 무학에 접목할 수 있었다.
중(重), 쾌(快 ) 환(換), 파(破 ) 산(散 ) 착(着), 단(斷), 예(銳) 따위의 묘리들一 대부분의 검법은 이 중 한둘을 극의로 삼아 만들어지곤 했다. 그러나 강(强)을 극의로 삼은 검법은 몹시 드물었다. 범인의 육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니까.
一유(柔)에서 강(强)을 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나약한 놈들이나 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익힌 패력(敗方)은 그 자체로 강(强)을 지향하는 힘일지니.
스승이었던 검귀의 말.
요컨대, 부드러움 따위보다 쇠함이 극에 이르러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극강(極强)이라는 얘기였다.
당연명의 강검(强劍)이, 상명일의 그것보다 우위인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촌각의 대치 후.
두 사람의 신형이 급격히 가까워졌고.
서로의 강기가 강(强)을 겨뤘다_ 아니, 사실 '겨뤘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았다.
부딪치자마자 쪄어어어어엉一!!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의 강기가 완전히 터져 나갔으므로. 잠시도 버티지 못한 것을 겨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타오르던 불꽃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이라 해야 할까. 붉은 빛의 파편이 팔방으로 흩어진다.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참마검이었다.
구환교검 상명일은 허망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연희. 연희를."
유언은 그게 다였다. 그의 눈에서 빛이 빠르게 사라진다. 상체를 가로지르는 검상이 몹시 치명적이었다. 심장을 비롯한 내부 장기가 한 순간에 타들어간 것 같은데,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나 다름없는 검강에 베인 탓이다.
상명일은 그렇게 선 채로 절명했다.
사도육존의 일좌이자, 흑사련주 유길준의 의형제, 구환교검이라 불리는 환검의 달인, 근래에는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까지 오른 인물이 채 약관도 되지 않은 당가 소가주의 손에 살해당했다...!
이 충격적인 광경을, 때마침 당도한 이천이 넘는 사파 무인들이 목격했다.
< 118화<비극의 시작(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