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비극의 시작(7)> >
심화방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나 높다란 전각 지붕 위까지 올라서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사천지회에 참가한 각 방파 후계들이 이끌고 온 호위 병력이다. 물경 이천에 달하는.
그들 대부분은 조금 전 벌어진 결전을 목도하기에 충분한 안법 성취를 지니고 있었다. 빠르게 이야기가 오간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 상 대협이 당하시다니. 사도육존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시는 분께서."
"잠깐, 애초에 구환교검 상 대협이 맞긴 한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은 확실히 그분의 용모 특징과 일치하기는 한데."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멍청아. 본련을 방문했을 적에 가까이에서 존안을 뵌 적이 있다. 련주의 의형이신 상명일 대협이 분명하셔."
"대주. 아무래도 구환교검이 화경에 올랐다는 소문이 진실이었나 봅니다. 방금 그건 누가 봐도 검강 아니었습니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입니다만, 모를 수가 없겠더군요. 그토록 맹렬하게 타오르는 기운이라니. 검기 따위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듯했습니다."
"그래.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지. 나 역시 소싯적에 남궁세가의 검왕이 검강을 발현하는 것을 우연히 본 게 다다. 하나 상명일의 검강 발현보다 놀라운 것은 그 검강이 자기(蓋器)마냥 깨져나갔다는 거다. 무학에 관한 성취가 어지간히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면 강기를 두르고 싸울 때의 승패는 대체로 내공량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통념일진대. 강기의 유지력이 아니라 그 위력으로 승부가 갈린 거야. 충격적인 일이지."
"...그보다, 본문 소문주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심화방도들도 죽어 나자빠져 있고. 저들이 들고 있는 악기로 보아 심심척음공이라도 펼쳤던 게 아닌가 싶은데. 사달이 나도 크게 난 것 같습니다만."
"저기! 본궁 소궁주께서 누워 계신다...! 얼른 생사를 확인하고 구출을...."
"뭐? 구출? 너, 눈알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냐...? 너희 소궁주뿐 아니라 본가 소가주, 저기 해월곡이나 현중도문의 후계들도 모두 죽었어...! 무슨 극독에라도 당했는지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있는 게 보이지 않는 거냐?"
"진정들 하시오.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상 대협을 저 지경으로 만든 자의 정체부터 알아냅시다. 이쪽에선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군. 아직도 저자의 검에 맺혀 있는 진녹색 강기로 보아, 명백한 화경의 고수인데... 대체 저만한 고수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설마 외부 세력이 이곳 사천 땅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을 테고."
"쉿. 저쪽에서 정체를 알아본 이가 있는 모양이오. 뭐라고 떠드는데...?"
"본인이 독순술(讀腸術)을 조금 할 줄 아오. 어디 뭐라는지 봅시다. 당가… 연명... 소주, 아니 소가주...? 당연명...?"
"...설마 당가 소가주 당연명을 말하는 것인가? 한낱 후기지수가 사도육존을 꺾었다고?"
"말도 안 되는 일! 저자는 지금 독이나 암기도 아니고, 정정당당하게 검으로 맞섰지 않나. 무엇보다 화경에 오른 무위를 어찌 설명할텐가...! 내 듣기로 당가의 소가주는 아직 약관이 채 되지 않았다던데."
"아니, 본인은 그저 독순술을 행했을 뿐이오. 나보고 따지면 어쩌자는...."
"그런데 심화방주가 데리고 있는 여인은 누구지? 면사를 착용하고 있어 분간이 어렵군. 마치 인질을 잡고 있는 모양새인데.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잖아."
"...설마해서 하는 말인데, 흑사화 아가씨는 아니겠지?"
"그게 무슨 헛소리냐? 심화방주 여설련은 본련에서도 특히나 충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거늘. 그녀가 매 해 련주께 바치는 공물이 얼만지 알고 하는 말인가? 그리고 만약 저 여인이 흑사화 아가씨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전을 확보해야 해. 이미 구환교검께서 변고를 당하신 마당이다. 남은 사도육존이 모두 나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흑사화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련주께서 친히 나서시겠지. 관련된 이는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할 거고. 이 자리에 참석한 방파 수십 개가 모조리 멸문당할 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미치겠군.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저길 봐라."
누군가의 말을 마지막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구환교검 상명일의 죽음보다 더욱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심화방주 여설련이 제압하고 있던 여인의 면사를 거칠게 잡아 뜯고 난 직후였다.
여기저기서 경악이 빠르게 번진다. 이런저런 행사에 참가하길 좋아하는 흑사화 유연희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많았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 그 누구도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 연속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히꾹거리며 딸꾹질을 하거나 헛숨을 들이켜는 자들이 적지 않다.
"모두 짐작하듯이."
심화방주 여설련이 입을 열었다. 멀리까지 전달되도록 내력을 실은 목소리. 태연한 척 말을 꺼냈지만 사실 그녀 역시 심경이 복잡했다. 당연명을 살해하기 위해 준비한 마지막 덫一 유연희를 인질로 삼아 상명일을 동원하는 계획까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믿기지 않게도, 당연명 역시 화경에 올라 검강을 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정인이었던 막인후가 당한 것도 이해가 된다. 어찌 저 연배에 저만한 실력을 지닐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여설련이 계속 말했다.
"여기 이분은 흑사화 아가씨입니다. 네, 련주님의 금지옥엽이시죠. 만약 이 자리에서 흑사화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당신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요?"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멸문부터 걱정해야겠지. 흑사련주 유길준이 구파 중 하나였던 청성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가 무엇이던가. 흑사파 시절 자신을 거둬주고 길러준 두목이 강호행을 나선 청성파 제자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까닭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사람이 얽힌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길준이었다. 흑사화 유연희는 수양딸이라고는 하나 딱히 다른 혈육도 없는 유길준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천 땅에 어마어마한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각 방파에서 나온 여러분 모두 합심하여, 구환교검 상명일을 죽인 저 당가의 어린 괴물을 처치하도록 하세요. 당장 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흑사화 아가씨를 죽이고 본녀 또한 죽을 참입니다. 사천지회에 참가한 방파의 명부는 이미 본련에 들어갔으니,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화를 피할 수는 없겠죠. 사천 땅을 완전히 떠난다면 모를까."
"...심화방주. 대체 왜 이런 짓을?"
"보아하니 상 대협 또한 그대의 협박에 굴하여 당가의 소가주와 결전을 치른 것 같은데. 대체 그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당장 제 말을 따르라고 했을 텐데요...!"
여설련은 검강을 흩뜨리고 납검하는 당연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유연희의 연약한 목덜미를 쥐고 있는 손에 약간 힘을 가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버둥거린다.
그 모습을 본 사파 무인들이 사색이 되었다. 이제 그들의 머릿속에서 자파의 후계가 죽은 것 따위는 조금도 중요한 사안이 되지 못했다. 흑사화 유연희가 죽으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생각만 가득할 뿐.
"진정하시오. 심화방주. 우리 해월곡은 그대의 뜻을 따를 테니."
"우리 초붕문 역시 마찬가지요."
"현중도문 또한...!"
이천이 넘는 사파 무인들로 이루어진 병력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여설련이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대로 당가 소가주 당연명을 살려 보낼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사도육존의 일좌, 구환교검 상명일을 해한 자다. 흑사련에 속해 있건 아니건, 사천 땅을 살아가는 사도 무인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
물론 석연찮은 점은 있었다. 단신으로 수백의 인원을 연거푸 살상했다는 당연명의 암기 무학에 대한 풍문이나 조금 전 보았던 검강- 그 진녹색 빛무리 같은 것들 말이다.
"제아무리 화경에 올랐다 해도, 사람에 불과하다. 이곳에 모인 인원이 물경 이천이 넘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어. 상 대협과의 일전에서 강기를 꺼내들었으니 내공 소모량이 극심할 테지. 기세로 보아 아직 상당한 내공을 남긴 듯하다만, 단전이 하수분(河水孟화수분)도 아니고, 분명 그 끝이 있을 거다."
"우모침을 주의해. 풍문에 따르면 당가 소가주는 하늘에서 우모침이 비처럼 쏟아지는 암기 무학을 구사한다고 했다. 겨우 그런 세침류 암기로 사람을 죽일 정도이니, 필시 어마어마한 극독을 쓸 거다. 마찬가지로 용독술의 낌새가 포착된다면 큰 소리로 알려라."
"검강을 발현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해. 허리춤의 검은 장식이 아니다. 납검하기 전에 잠깐 보았는데 허름한 검집에 비해 검날이 제대로 연마되어 있었어.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만들어진 명검이란 뜻이다."
사파 무인들은 대적(大敵)을 마주한 것처럼 서로 주의할 사항들을 읊으며 거리를 좁혔다. 개중에는 심심척음방에 동원되지 않았던 심화방도들도 있었는데, 방주인 여설련이 저렇듯 반 협박으로 사파 무인들을 움직이는 상황이니 그들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당연명은 서서히 밀려오는 인파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구환교검 상명일에게 다가섰다. 그는 빛을 잃은 눈으로 서 있었는데, 너절해진 소맷자락 밑으로 늘어뜨린 오른손에는 반파된 검을 꽉 쥐고 있었다. 죽어서도 검을 놓지 않는 모습이 검객다운 최후였다.
"가는 길은 심심치 않겠군."
그렇게 시신에 말을 건네면서, 당연명은 상명일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상명일의 검 또한 상당한 명검이었다.
사도육존이라는 위명에 어울릴 정도. 검강을 두른 채로 부러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파 (破).'
속으로 중얼거리며 파(破)의 묘리를 담은 진기를 홀려 넣는다. 그러자 찌저저정一 소리와 함께 상명일의 검이 수십 개 철편으로 부서져 내렸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는 당연명이 그저 손만 가져다 댔는데 검이 깨진 그릇마냥 산산이 조각나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몇몇 인물들만이 그게 아주 고절한 내력운용 수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뿐이었다.
당연명은 낙하하는 철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철 조각들의 하강이 멎는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데, 당연명의 손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철편이 허공을 유영하듯 움직인다.
"지금...!"
당연명이 무언가 수상한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챈 이들이 신법까지 펼치며 거리를 빠르게 좁힌다. 몇몇은 당미려와 제갈영영을 향해 쇄도하기도 했다. 심화방 정문 앞에서 방명록을 작성할 때 그녀들이 당연명과 함께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그때였다.
당연명의 손바닥 장심을 기점으로 거센 기류가 푸확 터져 나왔다.
후욱一!
머리칼과 옷자락이 뒤편으로 파라락 휘날릴 정도로 강력한 기파의 회오리였다. 산(散)과 파(破)의 묘리를 실은 기파를 온갖 방향으로 발산하여 만든 것이다. 기파의 회오리는 허무하게 흩어지거나 하지 않고 일정 영역을 계속 멤돌면서 세를 확장해갔다. 당연명이 의념을 실어 통제하는 까닭이었다.
'돌아라.'
자연히 회오리 안에 갇힌 철편들 또한 기류에 따라 휘돌기 시작했다. 기세가 맹렬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인다. 영역 안에 들어서는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건 거침없이 분쇄해버릴 것만 같은 기세...!
사천당가 암기 무학의 정점이라는 만천화우.
그걸 모조로 검신이 새롭게 창안한 암기 무학一 철편표(鐵片驅)였다.
< 119화<비극의 시작(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