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비극> >
스르륵
당연명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법 암영을 시전한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경로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세게 휘도는 철편의 회오리가 뒤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당연명 본인의 기척이야 살문 신법인 암영의 공능으로 완벽에 가깝게 지워졌지만, 발산 기파를 이용한 철편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쾌속하게 음직이는 와중에도 철편표를 안정적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내력 운용의 수준이 극에 달했다는 방증.
한손에 철편표를 휘감은 당연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미려와 제갈영영의 근방이었다. 꽤 많은 수의 사파 무인들이 사방에서 그녀들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중이었다.
'살았다...!'
눈앞에 나타난 당연명의 등을 보며 제갈영영이 그렇게 생각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지금의 이 상황一 일천, 아니 이천이 넘는다 해도 믿을 정도의 인파가 심화방주의 협박에 따라 그들 세 사람을 노리는 와중에 안도감이라니?
물론 당연명이 화경에 오른, 그것도 사도육존 중에서 특히나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구환교검 상명일을 단칼에 죽일 정도의 고수라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든든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만한 인원에게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현양촌에서, 수십 명을 일격에 살해한 검초를 재현한다 해도...'
제갈영영은 무공 성취가 깊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검초를 펼지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심력이나 내력을 모두 상당히 소모해야 할 터. 그러한 검초를 연달아 수십 번이나 펼쳐내야 승산이 있었다. 문제는 당연명이 검을 아예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맹하게 휘도는 검편들의 기세가 제법 매섭긴 했지만, 저 이름 모를 암기 무학이 당연명이 그동안 보여준 검술보다 위력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상명일과 치른 결전으로 인해 더는 검을 쓰기 어려워진 것이 아닐까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제갈영영은 조금 전의 안도는 온데간데없이 새삼 불안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지금이야 자신들을 지켜주려는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불리해진다면 당연명이 혼자 도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없이 출중한 실력을 지닌 무가의 후계가 이런 곳에서 의리를 지킨답시고 죽음을 택할 리는 없지 않나.
'...언제 도주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야. 그렇게 되면 기껏해야 당미려 정도나 챙기겠지.'
제갈영영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무공 성취가 낮은 것이 아쉬운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토록 후회된 적은 없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벌여오긴 했지만 당미려의 무공 성취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흘륭한 편이었다. 한때 당연명과 함께 소가주 경합에 참가할 정도였다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에 반해, 제갈영영 자신은 일찌감치 수련을 등한시하고 여인으로서 타고난 미모를 가꾸거나 명가의 예법 따위를 익히는데 시간을 쏟아왔다. 지금 상황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것들 말이다.
인(人)의 장막이라 해도 좋을 만큼 적들이 두텁게 둘러싸고 있었지만, 당연명이라면 그들 사이로 일순간 활로를 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당미려라면 적어도 당연명의 발목을 잡지는 않겠지. 반면 제갈영영은 신법이나 경공에 자신이 없었다. 활로가 뚫려도 살아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약 살아난다면....'
제갈영영의 눈이 간절함과 어떤 각오로 빛났다. 지금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녀 내부의 어떤 본질적인 부분을 바꾼 것 같았다.
한편.
"연명. 자신이 있는 거지?"
당미려는 당연명의 등 뒤에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화경에는 또 언제 올랐대一 라고 장난스레 덧붙이면서. 조금, 아니 꽤 놀라긴 했지만 당미려는 당연명이 화경에 올랐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소가주 경합에 참가했을 때부터 당연명은 그녀를 비롯한 경합 7조에게 있어 불가해의 존재였으니까. 더군다나 흑사련주 유길준이나 마광천주 연중혁 같은 괴물들도 있지 않나.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명이 지닌 무위가 뛰어날수록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수월할 테니까. 아예 숨겨둔 몇 수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 당미려는 당연명이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을 상기했다.
그래一 당연명은 짤막하게 답하며 전방으로 손을 휘둘렀다. 장심에서 쉴 새 없이 지솟는 산(散)과 파(破)의 묘리가 담긴 기파가 호응하듯 움직 인다.
쾌속하게 다가서던 사파 무인들은 황급히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각자가 최대한의 빠르기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당연명이 장심으로 겨냥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철편표가 사파 무인들과 겹쳐졌고.
프스스스스슷
무언가 갈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철편표의 영역에 갇힌 사파 무인들이 시뼐건 넝마 조각으로 화했다. 옷자락은 물론이고 순식간에 전신 피부가 난도된 까닭이다. 경동맥을 비롯한 치명적인 급소를 당한 이들은 여기저기서 피분수를 뿜어댔는데, 그럼에도 제대로 된 비명을 내지르지 못했다. 벌린 입속 혹은 빵을 뚫고 들어간 날카로운 쇳조각이 혀를 잘라낸 것이다. 아예 목울대 쪽 성대를 길게 베인 이들도 있었다. 비명 같지도 않은 바람 소리를 내보지만, 그 미약한 소리 역시 철편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철편표에 갇힌 사파 무인들의 출혈이 엄청났다. 아주 빠르게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기파에 따라 휘도는 쇳조각들은 공격 부위를 가리지 않았다. 눈꺼풀이나 안구가 심각하게 훼손당한 이가 절대다수였다. 그들 모두가 암흑 속에서 죽어갔으리라.
까가가가강!
그나마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사파 무인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에 철편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당연명이 창안한 철편표는 산(散)과 파(破)의 묘리가 담긴 기파를 온갖 방향으로 발산하여 구사하는 암기 무학이다. 평범한 쇠로 만들어진 병장기 따위는 금세 깨지고 조각나 철편표의 위력을 더할 뿐이었다.
선혈의 회오리를 보면서, 당미려가 말했다.
"몇 명 정도는 내가 상대할 수 있으니까, 제대로 날뛰어 봐"
"그럴까."
당연명이 보기에도 특별히 주의할 만한 강자는 없었다. 화경이라는 지고한 위지에서 보면 다가오는 사파 무인들이 모두 고만고만한 무위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당연명은 애초에 방어적으로 음직이려던 생각을 완전히 고쳐먹었다. 당미려 또한 나름대로 실전을 경험한 가문의 후기지수다. 저 정도 수준의 무인들에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믿고 움직이자.
'미려한테는 경험을 쌓을 기회가 되겠지. 영영은....'
잠깐 무공 성추I가 일천한 제갈영영에게 생각이 미친 당연명이었지만, 이내 땅을 박찼다. 그녀는 한 번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제갈가의 인물이기에, 위험에 처한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참이었다. 여유가 될 때야 보호해주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까지 안위를 살필 의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살아나건 죽건, 모두 그녀의 운명이 아닐까.
짧은 상념을 접으면서, 훅 끼치는 바람과 함께 적들 앞에 당도한 당연명은 곧장 철편표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 반경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이 갈가리 찢겨나간다. 언젠가 성도에서 공동파 현소와 태허를 쫒아온 사파 무인들을 죽일 때 선보인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폐맥은취를 완전히 해제하고 있었으니까. 억눌려 있던 내공이 시시각각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발산 기파와 잘게 부서진 쇳조각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암기 무학一 철편표의 영역이 아주 비대해졌다.
당연명이 가볍게 손을 휘두를 때마다 십여 명이 철편표에 휘말린다. 팔다리 중 하나라도 걸려든 이들은 가차 없이 걸레짝이 되었다.
그렇게 휩쓸린 이들이 도륙당하면서, 선혈의 회오리는 그 빛깔이 더욱더 짙어졌다. 비현실적이면서도 섬득한 광경. 주변에서 괴물이니, 만천화우니 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만천화우는 무슨. 본 적도 없는 것들이 ]
식신 청각이 중얼거리는 것을 흘려들으면서, 당연명은 나머지 한쪽 손으로 마침 공중에서 떨어지던 칼을 하나 잡아챘다. 무얼 하려는 것일까. 눈치가 빠른 이들은 기겁하며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 설마 여기서 하나 더...?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적중하는 법이다.
'파 (破).'
당연명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칼날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직후에 왼손 장심에서 산(散)과 파(破)의 묘리를 실은 발산 기파가 거침없이 솟구친다. 새로운 철편표를 만들어낸 것이다. 양쪽에 각각 하얄고 붉은 기파의 회오리를 휘감은 당연명의 모습은 그야말로 풍신(風神)을 방불케 했으니...!
'지나치게 밀집해 있을 땐 확실히 철편표가 효율이 좋군.'
당연명은 눈에서 진녹색 안광을 토해내며 생각했다. 우모침우 또한 극독을 이용한 대량살상용 암기 무학이었지만 이만한 머릿수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암기 회수 무학 연기륜으로 흩뿌려진 우모침들을 회수한 뒤 다시 우모침우를 시전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철편표가 훨씬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프스스스슷
인간이 갈려나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당연명은 당미려와 제갈영영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삼아, 원을 그리며 철편표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보면 붉은색으로 질해진 원이 시시각각 그 반경을 넓혀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터다. 몇몇 운 좋은 이들이 철편표의 영역을 피해 당미려와 제갈영영에게 접근하기도 했지만, 당미려 또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홍사분 따위의 가루독을 뿌려 접근하는 이를 멈칫하게 하고, 장기인 비도술로 끝장을 냈다. 그녀들에게 십 보 안쪽으로 다가서는 이가 드물었다.
그 와중에도.
일백, 이백, 사백, 칠백....
당연명이 휘둘러대는 철편표에 의해 목숨들이 허망하리만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마침내 희생된 이들의 숫자가 일천을 훌쩍 넘어갈 때.
"그만!!"
심화방주 여설련이 외쳤다. 그녀의 눈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몹시도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 역시 사람을 가볍게 태워 죽일 정도로 냉혹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처럼 잔혹한 광경을 대하자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듯했다.
대적할 수 없다一 아직 당한 것만큼이나 많은 인원이 남아 있었지만, 여설련은 그런 직감이 들었다. 머릿수로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화경에 이른 무인을 절세고수라 부르는 이유가 새삼 실감이 난다.
여설련의 외침에 황급히 물러나는 사파 무인들.
그러나 당연명은 손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협박에 의한 것이라 하나 자신에게 칼을 들이민 자들을 쉽게 용서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사도 세력을 한껏 약화시키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사천 전역에 퍼져 있던 사파 무인들이 이렇듯 한 자리에 모이는 일도 드물 테니 말이다.
그런 당연명을 보며 여설련은 생각했다.
'지독한 놈. 네놈이 죽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건만...!'
준비한 모든 수단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설련은 결국 마지막 결심을 굳혔다. 흑사화 유연희 목덜미를 죈 손아귀에 힘을 준다. 그녀 또한 여설련의 결심을 느낀 것인지 맥박이 세차게 뛰었다.
"정말 송구해요. 아가씨."
여설련은 일부러 유연희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귓전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제압한 즉시 아혈을 짚어 말도 못하게 만든 것도 괜히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서였다.
흑사련주 유길준은 여설련에게 있어 삶을 이어가게 해준 평생의 은인 아닌가. 그런 사내의, 소중한 이를 그녀 자신의 원한을 위해 해코지하려 한다. 은(恩)을 원(怨)으로 갚는 격이다.
그야말로 배덕(背德).
그러나 이런 죄책감도 여설련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정인이었던 막인후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괴물이 되어있었기에.
'죗값은 구천에서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련주. 아아, 막 가가. 곧 볼 수 있겠군요.'
마지막으로.
여설련은 당연명을 향해 저주의 한 마디를 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련주께서 네놈을 죽이고, 사천에서 당가라는 이름을 완전히 지워주시리라."
곧 망자로서 조우할 날을 기다리마一
그렇게 말한 뒤.
여설련은 유길준이 개변해 준 양강무학一 적련연화술을 시전했다.
화르륵!
거짓말처럼 그녀의 손에서 불길이 일었고.
흑사화 유연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새카맣게 태워졌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120화<비극>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