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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23화 (123/134)

< 123화<삭독현현> >

사천 전역에 암독검룡 당연명에 대한 이야기가 들불처럼 번질 무렵.

이야기의 당사자는 이미 청성산(靑城山)에 당도해 있었다. 흑사련이 청성파를 멸문시키고 똬리를 틀었다는 곳.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군.'

당연명이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달빛을 쫓는다는 심상으로 창안된 경공一 추월광행 덕분에 준마를 타고서도 몇날며칠이 걸릴 거리를 단 하룻밤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폐맥은취를 해제한 뒤 시시각각 용솟음치듯 들끓어 오르는 진기가 있었기에 걸음걸음 마다 발바닥 용천혈로부터 뿜어지는 추진경파가 엄청났다. 다시 말해, 이동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저 심화방주 여설련의 신병을 흑사련에 인도하기 전, 만전을 기하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애초에 당연명은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이 어떠한 인물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심화방주 여설련의 신병을 넘기는 것만으로 일이 조용히 해결될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판단했다. 냉정하게 자신의 일이라 가정해도 그렇다. 만약 모친인 당지혜에게 모종의 일이 생긴다면, 전후사정 따위 따지지 않고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지 않을까.

흑사련주가, 당가를 멸할 정도의 힘이 있는데도 화를 억누르고 사리를 분별해 처신할 정도의 인격자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싸움을 피할 순 없겠지.'

심화방을 떠나오기 전, 당미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이 한 몸 빼낼 자신은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당연명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만약 흑사련주 유길준이 당가를 원한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그 자리에서 결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흑사련은 기이한 형태의 무림 세력이었다. 청성산에 위치한 흑사련 본단이 지닌 무력도 상당했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규모를 확대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덩치를 불려가는 타 무림 방파와는 다른 양상이다. 그럼에도 흑사련의 영향력은 사천 전역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스스로 흑사련의 휘하 방파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던 까닭이다.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난 흑사련주 유길준은 직접 창안하거나 개변한 무학을 휘하 인물들에게 아낌없이 내려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나 괜찮은 자질을 지닌 이에게는 더욱 뛰어난 무학을 내려주기도 했으니. 그동안 정도 대방파의 위세에 밀려 몰락을 거듭하던 사도 방파들이나, 사도 무학의 한계를 느끼고 좌절한 이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았을 것이다. 물론 무학만을 노리고 흑사련에 투신한 이도 적지 않았지만, 세가 작았던 초기를 제하고는 아무에게나 유길준의 무학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그만한 기여를 해야 했다. 공로를 세우거나 막대한 공물을 바치거나.

아무튼 흑사련주 유길준은 그런 식으로 사천에 군림하고 있었다.

'어차피 방파대전을 치르게 될 거라면...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옳아.'

당연명은 아직 흑사련의 휘하 세력이 집결하지 않은 지금이 적기라고 여겼다. 사천지회에 참가하여 원치 않게 유연희의 죽음과 얽히게 된 방파들을 제하더라도, 사천 전역에는 흑사련주 유길준을 신봉하는 방파들이 많았다. 겨우 당가 하나를 치겠다고 유길준이 소집명령을 내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유연희의 부고를 접한 이들이 공로를 세울 기회로 생각하고 당가로 몰려들 가능성이 있었다. 수천... 어쩌면 일만이 넘는 무인들이 합심하여 쳐들어올 수도 있으리라.

물론 그만한 인파가 가문에 들이닥친다 해도 당연명은 크게 두렵지 않았다. 독과 암기, 그리고 검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설령 일만에 달하는 인원이라 해도 살상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더군다나 가문의 무력도 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평범한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온갖 은원에 얽히게 될 것이고, 사파 무인들이라 해도 너무 많은 인명을 해하게 되면 더 이상 정도 무가로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미 마도와는 오랜 원한이 있고, 사도와는 척을 졌다해도 무방한 상황.

사실 당연명은 기질 상 정(正)이니, 사(邪)니, 마(魔)니 하는 구분에 딱히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당분간은 허울뿐이라 해도 정도 소속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언젠가 마광천주 연중혁에게 모친의 원한을 갚을 생각이었으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정도의 그늘에 있어야겠지.'

설령 허울뿐이라 해도 말이다. 게다가 흑사련주 유길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도 변수였다. 화경의 고수였던 공동파 태허를 간단히 패퇴시킨 것이나, 의형제라는 구환교검 상명일 역시 화경에 이르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유길준 역시 가늠하기 어려운 고수일 터였다. 그런 이를 가문에서 맞게 된다면 분명히 피해가 발생한다. 가솔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갈 지도 몰랐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홀로 흑사련을 방문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어쭙잖은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공을 탐해 당가를 지려던 방파들一 만약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는 신공절학을 하사해줄 존재가 갑자기 없어진다면 어찌될까?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어질 터였다. 당연명이 곧장 청성산으로 향한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소문이 번지는 것보다 먼저 흑사련주 유길준과 담판을 짓는다!

한 마디로 시간싸움인 것이다.

****

한나절 전.

흑사련주와의 결전까지 염두에 둔 당연명은 만전의 상태로 청성산을 오르고자 했다. 이미 독요청광기가 패력진기로 화할 수 있게 된 이상 큰 위기감은 없었지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준비가 철저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청각.'

[...날강도가 따로 없구나. 나에게 독기는 너희 인간으로 치면 선천진기(先天眞氣)나 다름없거늘.]

'독기를 끌어다 쓸 수 있음을 이점으로 제시했지 않나? 식신으로서 약속했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귀찮게 말을 걸어대는 네놈을 데리고 다닐 하등의 이유가....'

[아니, 뭐 이매망량은 농도 못하나? 거참.]

청각은 화들짝 놀라며 그동안 부지런히 축적해둔 막대한 독기를 내어놓았다. 이매망량으로서 누군가의 식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생사여탈권을 저당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까딱했다가는 정말로 존재를 말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명이 가볍게 경고하는 것도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였다. 덤덤하게 농인 척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대경한 상태였다. 그간 지켜본 바, 당연명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되는 이에게는 한없이 냉정했다. 특히 칼을 들이민 자에게는 더없이 무자비했고.

'...차라리 놈의 신뢰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청각은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당연명이 위기에 처하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갈구할 때, 무영객 그놈의 무학으로 자유를 흥정하려 했었다. 그런데 왠지 당연명이라는 존재를 알게 될수록 괜히 화만 입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계속 생겼다.

한편.

청각이 고민하거나말거나, 당연명은 다시금 폐맥은취를 시도했다. 독요청광기로 하여금 청각의 독기를 먹어치우게 하자 빠르게 내공량이 불어났고, 그걸 전신 십이경맥에 꽉꽉 눌러 담고 닫아 잠갔다. 화경에 이른 무위가 완전히 감춰지고, 호신강기 용린이 은은한 광채와 함께 전신을 둘렀다. 곧 그 광채마저 사라진다.

이미 상명일과의 결전 때, 당연명이 검강을 발현하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이 많았기에 구태여 성취를 감출 필요는 없었지만, 결전의 순간 폐맥은취를 해제하면서 얻을 수 있는 진기의 폭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폐맥은취는 원래 육신이 수용할 수 있는 진기의 몇 배를 담을 수 있는 무학이었다. 덤으로 상시로 펼쳐지는 호신강기를 얻고.

효율적이지는 않았다. 폐맥은취를 해제하는 즉시 육신의 수용량을 넘어선 진기가 시시각각 흩어지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그 막대한 내공량으로 말미암아 화경 고수끼리의 결전에서 압도적인 유리함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효율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호흡법으로 진기를 보충하는 것도 아니고, 식신 청각의 독기를 동원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다음으로는 몇 가지 깨달음을 정리했다. 가장 큰 소득은 역시 독요청광기로 패력의 성질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열화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는 검귀의 무학을 펼쳐낼 수 있다. 검신의 무위를 되찾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흑사련주 유길준과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지금의 당연명에게는 별 위기감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당연명은 그저 약간의 호기심을 가질 뿐이었다. 과연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나 무학의 이치를 한눈에 꿰뚫는다는 흑사련주는, 자신의 무학을 어찌 상대할까. 일백 년이 넘게 고련해 깨달은 검로도 파훼하거나 베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더 보완할 여지가 남았다는 뜻이 니까.

독요청광기의 패력진기화에 대한 깨달음과 전생의 무학을 가볍게 점검한 뒤.

당연명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적련연화술(的諫燃火術)이라 적혀 있다.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여설련의 품에서 떨어진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흑사련주의 개변을 거치지 않은 진본인 것 같았다. 여설련은 수혈을 짚어 재워두었기에, 당연명은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심상 세계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책장을 덮은 채로 멍하니 있던 당연명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몰아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런 거였군."

당연명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약간 달뜬 기색이 있다. 무언가 소득이 있었던 것일까.

'구결과 진기의 성질을 이용해 의념을 극대화했어. 특히 구결에는 무리(武보다 진언(眞言)이라 해도 좋을 만한 구절이 다수였다.

심상 무학이라더 니 술법에 가깝군.'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다. 이미 검의 끝을 보았다고 하는 당연명이기에, 단번에 적련연화술이 구현되는 이치를 꿰뚫어보았다.

애초에 당연명이 적련연화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양강 무학이라서가 아니라 심상 무학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사물의 본질을 의념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지一화경에 이르지 못한 자가 의념만으로 상대를 태워 죽인다는 점이 자못 흥미로웠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역시 강기(至氣)를 구현하고자 하는 범인들의 발버둥이었다. 태을묵검파의 태을쌍검식一 살기를 극대화해 검기를 강화하는 무학이 떠오른다. 묵검기라 했던가. 결국 이런 식으로 의념을 강화하는 것은 진정한 강기를 구현할 수 있는 자를 만나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제법 도움이 됐다.'

당연명은 책자를 공중에 획 던지고서는 의념을 집중했다. 한 줌 독수로 화해라一

그러자 거짓말같이 책자가 한 순간에 썩어 문드러지더니, 바닥에 떨어질 때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까맣게 타버리고 남은 재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특 건드리기라도 하면 부서져 바람결에 흩어질 것처럼 보인다.

어느새 진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당연명의 눈이 한쪽에 있는 바위로 향하자.

푸쉬익一

거짓말처럼 바위마저 연기를 뿜어대며 녹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군. 대량살상에도 쓸 만하겠어.'

당연명이 흡족하게 내심 중얼거렸다. 이건 적련연화술에서 심상을 얻어 만든 새로운 무학이었다. 구결과 진기의 성질로 의념을 극대화한다? 이미 자신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강력한 의념을 휘두를 수 있는 화경의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저 진기의 성질만으로 적련연화술과 같은 심상 무학을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원거리의 상대一 정확히는 기(氣)의 권역이 달는 범위에 있는 존재를 의념만으로 독살할 수 있게 됐다. 의념의 현현을 감지하거나 뿌리질 수 없는 이라면 영문도 모르고 죽게 되지 않을까.

[그 사이에 뭘 또 만들어낸 것이냐...? 무영객 그놈의 무학은 아닌데.]

식신 청각이 조금 질렸다는 듯 물음을 던졌다.

'흠.'

당연명은 생각했다. 이걸 용독술이라 해야 할까? 엄밀히 말하면 직접적으로 어떤 독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독공으로 분류하기에도 애매했다. 독요청광기가 지닌 성질一 강력한 독기를 이용하는 것이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심상 무학인 까닭이다.

'그래. 이 역시 독강(毒至)이라 봐야겠지.'

언젠가 화룡호독의 심상으로 열독강(熱毒至)을 펼친 일이 떠올랐다. 강기라는 것은 결국 강력한 의지의 집합체다. 새롭게 창안한 이 무학 역시 독강으로 분류하는 게 옳다.

그렇게 정리를 마친 당연명의 입술이 떼졌다.

"삭독현현 (鐵毒顯現)."

[...쇠마저 녹이는 독이 나타난다라_ 살벌한 작명이군.]

자신의 물음에 답한 것이라 여겼는지 청각이 감상을 읊는다.

이렇게 훗날 사천당가의 독강류 무학이라 불리는 비기들이 하나씩 창안되고 있었다.

어느새 한나절의 시간이 흐른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이제 청성산을 올라야 할 때였다.

해가 중천(中天)이었다.

< 123화<삭독현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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