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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25화 (125/134)

< 125화 <대면> >

원래는 유서 깊은 청성파 상청궁이 있던 곳.

거기엔 상청궁 대신 웬 웅장한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흑사련

전각과는 달리 소탈한 느낌을 주는 필체로 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의 취향이 반영된 것일까.

아무튼 그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은 한껏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상상도 못한 비보가 날아온 까닭이다. 무려 사도육존의 일좌인 구환교검 상명일과 련주의 금지옥엽인 흑사화 유연희의 부고였다.

당연히 흑사련 전체가 난리가 났다. 사도육존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진상을 파악하라 일렀지만, 당시를 목격한 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부고를 전하는 것을 공으로 여긴 것인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서는 당가 소가주와 심화방주가 흉수라 고하는 이들도 있었고. 결국 둘의 죽음은 빠르게 기정사실화되었다.

마침 출타 중이던 흑사련주 유길준도 소식을 접하고는 곧장 흑사련 본단으로 돌아왔다. 련주의 진노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일까. 왠지 그 뒤로 청성산 전체에 심상찮은 전운이 감도는 듯했으니, 비단 정문을 지키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숨을 죽이고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러한 적막을 깨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서는 인영이 있었다. 주변으로 훅 끼치는 먼지바람이 거세게 인다. 아주 먼 거리를 단숨에 도약한 것 같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흑사련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면서도 각자 병장기를 뽑아들고 경계 태세에 임한다. 제법 잘 단련된 태가 났다. 역시 흑사련 본단 소속무인들인 것일까.

서서히 먼지가 걷히면서, 또 정체불명의 인물이 걸음을 옮기면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엄청난 미형의 청년이었다. 범상치 않은 혈통을 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허리춤에는 낡은 검집의 기다란 장검을 패용하고 있었고, 한손에는 웬 산발 여인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있었다. 여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잘려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양팔이 없었다. 영락없는 죄인의 몰골.

"헛, 그 여 인은...!"

흑사련 무인들 중 하나가 산발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소스라지게 놀란다. 다른 이들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크게 놀란다. 마치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 럼.

"심화방주!"

"저 찢어죽일 년이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니...."

여설련은 단전이 깨져 젊음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또 치아까지 모조리 빠져 합죽이가 되어 있었지만 용케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목구비의 형태가 주는 느낌이 있는 까닭이다. 흑사련에 투신한 지 꽤 오래된 인물이니만큼 여설련은 흑사련 본단에도 제법 출입이 잦았다.

"귀하는 누구요? 무슨 일로 본련을 방문한 것인지...?"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흑사련 무인들 중 하나가 묻는다. 미청년은 흑사화 유연희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심화방주 여설련의 신병을 확보해 왔다. 그것도 살려서. 이건 분명한 공적이다.

소문에 의하면 여설련의 행방은 묘연했다. 유연희를 살해한 직후 그녀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재물을 챙겨서 도주했을 거다, 자결을 시도하는 듯했다一 이런 추측성 의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해는 된다. 다들 감당하기 힘든 사태에 놀라 도망지기 바빴던 탓이겠지. 그런데 이 영준해 보이는 청년이 흉수 중 하나인 여설련을 잡아온 것이다. 만약 그녀를 찾지 못했다면 련주의 진노가 어디까지 치솟았을지 모를 일이니 이건 반갑기까지 한 일이었다.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는 몰라도 외모와는 별개로 청년에게 호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련주께서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차후 상황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면 공적에 맞는 무학을 하사하실 테지. 상벌이 확실하신 분이니.'

다른 무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눈빛으로 청년을 향해 은근한 부러움을 내비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설련을 데려온 미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흑사련 무인들 모두가 경악하게끔 만들었다. 그 정체가 전혀 상상도 못한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사천당가 소가주 당연명. 사천지회에서 벌어진 혈사에 대해 흑사련주에게 해명코자 한다. 더불어 모든 일의 원흉인 심화방주 여설련의 신형을 귀련에 인도하고자 하니 길을 열어라."

****

대전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드넓은 공간.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의자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립(30살)을 좀 넘은 것으로 보이는 외양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그는 자색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준엄한 흑사련주로 행세할 때만 입는 옷이었다. 양쪽 어깨 부분에는 검은 뱀이 살아 움직일 것처럼 실감나게 수놓아져 있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흑사파 시절부터 이어진 흑사련의 상징이었다.

과연 사천의 절대자인 것일까.

사내는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도 전신에서 흐르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몸집에 비해 커다란 의자에 착석하고 있음에도 꽉 들어찬 느낌이 있었다. 아니, 이 넓은 공간에 홀로 존재함에도 허전함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천의 절대자, 흑사련주 유길준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상 형님. 연희야.'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귀천했다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그리며 속으로 불러본다. 상실감과 무력감이 전신을 짓누른다. 이전에도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다. 벌써 이십 년쯤 된 일이다.

'두목.'

험상궂은 인상이지만 사람 좋게 웃는 중년 사내의 얼굴이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자신에게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두목의 죽음을 접하고 내면의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것만 같은 감각. 그러나 초인적인 의지로 그러한 변화를 억눌렀다.

두목의 딸, 연희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의형제를 맺은 흑사파의 식구들이 있었다. 유길준은 염원했다.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사람으로서, 두목의 성(姓)을 이어받은 가족으로서 청성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힘을 갖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부지런히 호흡하고, 익힌 무학의 결점을 개변하고 또 개변해 보완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무학을 창안하면 됐다.

두목의 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홀로 강해져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 소중한 이들이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지도록 하는 게 옳다. 그래서 복수라는 동기를 앞세워 의형들 또한 무공을 익히게 했다. 그들의 체형, 기질, 오성에 맞춘 무공을 하나하나 창안해서 건넸다. 자질이 미천하다거나 입문이 늦었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만 쏟을 수 있다면 강해지도록 만들어줄 수 있었다.

결국 의형들은 구파의 장로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무위를 갖추게 됐고, 사도육존이라는 거창한 별호로 불리게 됐다. 길러준 두목의 원한을 갚으면서 청성은 물론이고 아미까지 멸문시켰다. 점창 역시 주력 고수들을 모조리 잃고 말았으니 사실상 멸문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소중한 이들을 잃지 않기 위해, 또한 두목을 잊지 않기 위해 흑사련을 만들었다. 세를 불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무림인이란 무학에 굶주린 자들이 었으므로. 적당한 무학을 만들어주거나 그들이 지닌 무학을 개변하여 그 위력을 높여 주는 것만으로 충성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사천을 자신만의 공고한 영역으로 만들어두었다. 무학을 내려주는 일을 남발하지는 않았다. 천하를 일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까닭이다. 그저 정, 사, 마로 대변되는 세 세력의 균형을 생각했다. 정도와 마도에 비해 사도의 힘이 크게 약했기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만 힘을 키워준 것이다. 사천에서만큼은 사도 천하가 될 수 있도록.

세를 더 확장할 욕심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사천 땅에서만큼은 소중한 이들이 주어진 삶을 온전히 향유하고, 또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 그거면 됐었다.

세력을 꾸리면서, 일부러 자질이 뛰어난 몇몇 인물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들에게 입혀놓은 은혜가 언젠가 소중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실 변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뿌려둔 은혜가 도리어 칼이 되어 소중한 이를 해쳤다고 한다.

심화방주 여설련.

어리석게도 여인의 몸으로 양강 무학을 익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구제해 주었다. 감사해하던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녀가 유연희를 살해했다. 왜?

'아니. 부질없다.'

유길준은 더 이상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저 살심이 치솟을 뿐이었다. 당장 눈앞에 여설련이 있다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놓지 않았을까.

그리고 짜증이 났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장난감이라는 것을 가져본 일이 없었지만, 유연희가 아끼던 인형이 망가졌을 때 온종일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고작 짚더미와 헝겊 따위로 만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소모하는 유연희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왠지 그 감정을 알 것도 같았다.

'...지치는군. 이제 그만하고 싶다.'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유길준이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왜 이리도 쉽사리 스러지는 것일까. 애지중지하려해도, 금세 망가지고 만다. 그리고 또 다른 놈들은 왜 자신의 '것'을 매번 망가뜨리는 것일까. 대체 왜?

'아무래도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길준은 결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눈을 떴다. 천하에는 자신의 것을 건드릴 잠재위험이 있는 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반면에 자신의 대처는 너무도 물렁했다. 일단 당하고 나서야 대응하는 식이었으니까. 이제는 바뀌어야 했다.

'모조리 죽여 없애면 된다. 본좌가 먼저...!'

큭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유길준.

휘어지는 그의 눈매 속에는 광기와 살의로 번득이는 눈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유길준이 거짓말처럼 뚝 웃음을 그치고는 말한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가 있었다. 일전에 객점에서 유길준을 찾았던 자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상념을 방해해서 송구합니다. 련주. 객이 찾아왔습니다. 그자가 련주를 뵙길 청합니다."

"객이라? 지금 같은 시국에 본좌를 만나고자 하는 것을 보면 둘 중 하나겠구나. 정말로 귀중한 것을 가져왔거나,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거나."

"당가 소가주 당연명이 심화방주 여설련을 데려왔습니다."

"뭐 라."

후우웅一!

순간, 유길준의 주변 공간의 대기가 한껏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살의를 느끼는 것만으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유길준으로부터 일 장(대략 3m) 정도 떨어져 있던 사내는 결국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 사내를 일별하며 유길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두 연놈을 직접 찢어 죽여야 성이 풀리겠다."

저벅저벅.

유길준이 꽤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사내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신법을 펼쳐 그 뒤를 따랐다.

****

당연명은 흑사련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이동했다. 포위된 채 안내되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연무장 같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죄인을 심문하는 자리 같기도 한 그런 장소였다.

"곧, 련주께서 오실 거다."

홀로 이곳까지 온 네놈의 배짱은 높게 사마一 그렇게 말하며 안내해온 흑사련 정문 무사들이 거리를 벌렸다. 언제든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서.

그들은 알까. 지금 당장이라도 당연명이 마음을 먹으면 그들 모두가 한 줌 독수로 화할 수 있음을.

아무튼 그렇게 서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당연명의 정면에 위치한 커다란 문이 끼기긱 움직이는 것과 함께 엄청난 기세를 풍기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인가."

오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하대.

그리고 거의 동시에.

식신 청각이 말했다.

[저놈. 용이다.]

< 125화<대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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