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흑사련주 유길준(1)> >
강하다!
당연명은 흑사련주 유길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전신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태어나서, 아니 전생의 기억을 되찾고 나서 처음이다. 이렇게 긴장하는 것은.
'용이라더니.'
과연 존재감이 남달랐다. 단순히 화경에 이른 무위를 드러낸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화경에 이른 공동파 태허에게서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스승이었던 검귀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듯했다.
격(格), 혹은 종(種)이 완전히 다르다一
차분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 그러나 당연명은 그 안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어떤 흉포함과 광기를 느꼈다.
[아직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군. 다행한 일이다. 단순히 쌓은 무학을 가지고 겨루게 되겠어.]
식신 청각이 안도하듯 말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룡(兒龍)이 각성을 거쳐 완전히 용으로 거듭나게 되면, 악룡일 경우 오행의 기운一화(火), 수(水 ) 목(木 ) 금(金 ) 토(土) 중 한 가지 기운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당연명의 무위가 범상치 않은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용을 상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리라는 것이 청각의 예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이라는 족속들은 검이나 도, 창과 같은 평범한 날붙이로 상대하기 힘들었다. 화경에 이르러 강기를 구사할 수 있는 고수라 해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검강이나 도강 따위로는 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애초에 용의 비늘조차 강기가 아니면 칼이 들어가질 않는다. 상시로 호신강기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영객이 폐맥은취를 통한 호신강기의 이름을 용린(龍織)이라 칭한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용들이 가만히 공격에 당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오행의 기운을 이용한 위력적인 공격을 가해올 텐데, 이걸 막아내기 위해서는 또 호신강기가 아니면 어렵다. 공방(攻防)에 모두 강기를 동원해야 하니 내공과 심력의 소모가 무지막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방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싸움을 조금 용이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영체나 다름없는 이매망량을 주로 상대하는 방사들. 그들의 술법인 방술(方術)은 용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물론 어쭙잖은 수준의 방술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고매한 경지에 다다른 방사들의 방술이 유효할 뿐이었다. 무영객 또한 종종 방사들의 도움을 얻어 악룡들을 처리하곤 했다.
지금은 방사도 없고, 사천당가 출신인 것이 무색하게 당연명의 무위는 암기무학이나 독공보다는 검술 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느낌이었으니, 청각의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당연명의 식신이 된 이상, 그가 죽으면 청각 자신도 소멸하게 된다...!
'...그냥 만천화우를 알려줄 걸 그랬나.'
약간 그런 후회도 들었다. 무영객 최고의 비기一 만천화우를 진작에 전수해줬다면 걱정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무영객의 독문 무학 만천화우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혼자 힘으로 선룡인 청룡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말도 안 되는 암기 무학 덕분이었다고했다.
하지만 만천화우의 구결이나 그 전수는 청각이 내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가치가 큰 것이었다. 언젠가 다시금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려면 당연명과 협상할 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청각이 생각하기엔 아직 때가 아니었다. 당연명이 무력의 부족을 실감했을 때. 그때가 적기이리라.
한편.
다행한 일이다一 라는 청각의 말에, 당연명은 도리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상대, 흑사련주 유길준이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인지한 까닭이었다. 달갑지 않았다.
전생一 일백 년이 넘게 산속에서 수련을 하며 검의 극을 쫓았던 검신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몹시 낯설었다.
이건 투쟁심이었다.
만전의 상태인 자신의 무력이, 어디까지 통하나 시험하고픈 마음.
이번 생은 평범하게 살겠다 다짐했지만, 그 역시 검신이기 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듯 전생에 이룩했던 무위를 제대로 측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피가 끓었다. 상대가 용이 아니었으면 모르되, 용이라는 걸 확인한 이상 부딪칠 생각이었다.
어차피 평범한 삶을 위해서, 용이라는 족속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물며 흑사련주 유길준은 선룡이 아니라 악룡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자 아닌가. 이 자리에서 후환을 없애는 게 옳다.
그렇게 결론지으며,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말학, 당가의 연명이 흑사련주를 뵙습니다."
형식적으로나마 일단은 예를 갖추고, 존대를 한다. 상대의 진실한 정체가 인간이 아닌 용이라는 것을 알고, 또 죽여 없앨 생각이긴 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수준의 강자 아닌가. 대뜸 싸우기보다는 몇 마디 말을 섞고자 했다. 강자에 대한 예우라고도 볼 수 있었고, 기왕 심화방주 여설련을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 마음이 인 까닭도 있었다.
기세를 드러냈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흥미로웠던 걸까.
이채를 띠며 장차 악룡이 될 자가 말했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제 발로 이리 찾아와주다니 말이다. 그것도 심화방주까지 데리고서."
"사천지회에서 변고가 있었던 것은 들으셨을 걸로 짐작합니다."
"암. 두 연놈이 내 의형과 하나뿐인 딸을 살해했다지."
"모략이었습니다. 여기 심화방주가 꾸민."
그렇게 말하며 당연명은 한 손에 틀어쥐고 있던 여설련을 앞으로 내던졌다. 철퍼덕 내동댕이쳐지면서, 그녀가 신음을 흘린다. 유길준이 나타나기 직전, 당연명은 여설련의 수혈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옅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으음一 하며 신음을 흘리던 여설련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내공을 잃어버린 뒤, 기감마저 둔해졌겠지만 당장 바로 앞에서 흑사련주 유길준이 기세를 흘리고 있는 마당이다. 피부로 와 달는 섬득함이 있을 터. 눈을 떠 주변을 확인하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게 어렵사리 눈을 뜬 여설련이 점차 주변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양팔이 없어서, 턱을 받침 삼아 목을 꺾고 겨우 정면을 올려다본다. 누군가의 발치가 보이는데, 익숙한 자색 장포 자락이 보인다.
허업一 하는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여설련의 시선이 점차 상승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경악과 황망함, 두려움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다. 두 눈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양쪽 어깨에 얼핏 보이는 검은 뱀의 형상을 지나, 마침내 얼굴에 시선이 닿는다. 눈이 마주친다.
"련주...!"
"오랜만이군. 여 방주."
"저는, 저는...."
여설련은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며 격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사화 유연희를 죽이고, 자결을 시도하려다 당가 소가주 당연명에게 제압된 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흑사련주가 있는 게 아닌가!
흑사련주 유길준은 그녀에게 있어 평생의 은인이었다. 시한부나 다름없던 목숨을 구해주고, 기녀나 첩으로 살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부귀와 힘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정인이었던 막인후를 더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막인후에게도 상승의 검공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복수귀가 되어 이 모든 은혜를 원한으로 갚았다. 패륜이 따로 없다. 하여 련주를 뵐 낯이 없어 죽고자 했는데,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대면하게 되다니.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억지로 허리 기립근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무릎을 꿇는다. 아무리 팔이 없기로서니 련주의 앞에서 흉하게 엎드려 있는 건 예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였다.
"면목이, 면목이 없습니다...."
"아아. 됐네. 추궁할 생각은 없으니."
"예…?"
여설련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유길준이 공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자네가 왜 그랬는지는 이제 궁금하지 않아. 어차피 연희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고, 교검 형님 역시 귀천하셨지. 그저 고마울 뿐이야."
이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一 그렇게 말하며 유길준이 숙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좌악 소리와 함께 여설련의 무릎이 잘려 나갔다. 단단해 보이는 돌바닥에도 길게 흔적이 남았다. 수기(手氣)를 날려 보낸 것이다.
여설련은 끔찍한 고통에 입을 벌렸지만,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선 유길준이 그녀의 목을 틀어쥔 까닭이다. 그대로 손을 들어 올리자 여설련의 무릎 부위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잘려나간 부위에서는 허연 무릎 뼈가 돌출되어 보일 지경이었고 무릎 위쪽 허벅지가 쉴 새 없이 경련했다.
"팔이 없는 건 조금 아쉽군."
유길준은 그렇게 말한 뒤 여설련을 향해 숙숙 손짓하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무릎 쪽을 향해서였다.
사악, 사악一
예리하게 무언가를 벗겨내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곧이어 여설련의 아래에 얇게 저민, 둥근 형상의 가죽 같은 것이 핏물과 함께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여설련의 허벅지가 점차 짧아지기 시작했다.
몹시도 잔인한 광경에 흑사련 무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련주인 유길준은 지금, 여설련을 숫제 저미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크게 떠진 여설련의 눈이 하얄게 변하자 유길준이 손짓을 멈추며 말했다.
"안되지. 이 정도로 실신이라니."
• •
유길준이 여설련의 혈도 몇 군데를 짚자, 화들짝 놀라며 여설련이 정신을 차렸다. 인위적으로 진기를 통하게 하여 정신을 잃지 못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대종사의 자질을 지닌 유길준에게는 더없이 간단한 일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길준은 여설련의 뒷목 부근을 짚어 나갔다. 그러자 여설련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느끼는 통증은 종전보다 몇 곱절로 다가올 테지."
"...려, 련주, 차라, 리 죽음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여설련이 애걸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이제 시작인데."
그 말과 함께 다시 잔인한 손짓이 시작됐다.
사악, 사악一
여설련은 살갗을 저미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지만, 그때마다 유길준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여설련의 몰골은 이제 누가 봐도 끔찍하게 변해 있었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 절로 배어나온 땀 같은 분비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벌린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허벅지가 모두 잘려 나가고, 골반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야 유길준의 손이 멈췄다.
"흥이 식는군."
여설련은 이제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것으로 보였다. 하기야, 강제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 뒤에 계속 다리가 썰려 나가는 통증을 맛봤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여설련은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출혈이 엄청났다. 유길준이 입고 있는 자색 장포는 이제 원래 적색이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길준은 감흥 없는 눈으로 여설련의 얼굴을 바라보다 목울대를 잡은 손에 그대로 힘을 줬다. 뚜둑 거리며 여설련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보나마나 즉사다. 여설련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사라진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힘을 주는 유길준.
과직!
뼈가 완전히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설련의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되어 땅바닥에 툭 떨어진다. 마침내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안식을 찾았다. 모진 고통 속에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인의 복수를 위해 유연희를 죽인 것을 후회했을까.
끔찍한 광경을 자아낸 유길준이 가볍게 기파를 터뜨려 옷자락과 손에 묻은 핏물과 살점들을 털어냈다. 지옥의 나찰이 현현한 게 아닐까 싶은데.
"다음은 네 차례다. 행여나 자결은 꿈도 꾸지 말도록."
흑사련주가 나직하다 못해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고.
스르릉_
당연명은 참마검을 뽑아들었다.
< 126화<흑사련주 유길준(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