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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27화 (127/134)

< 127화 <흑사련주 유길준(2)> >

"한데 이상하군."

한 걸음을 내디딘 흑사련주 유길준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말한다. 안법을 동원한 것일까. 그의 눈은 신비한 빛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어떻게 성취를 감춘 거지? 네놈이 교검 형님을 해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검강을 발현했다지. 그런데 본좌의 기감으로도 네놈의 성취가 화경에 이르렀다고는 느껴지지 않아. 화경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마라. 피부 표면에 얇게 둘러친 호신강기가 본좌의 눈에는 아주 선명하게 보이니까."

폐맥은취의 효용을 입증하는 말이었다.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나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무학의 이치를 꿰뚫는다는 흑사련주조차도 당연명이 어떻게 화경의 무위를 감췄는지 간파하지 못했다. 그저 고절한 안법으로 호신강기 용린을 알아보고 화경이라 짐작할 뿐.

하기야 경맥을 아예 닫아 잠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터였다. 그건 사실 금제에 가까운 수법이었으니까. 심지어 십이경맥을 모두 가득 채울 정도의 내공을 쌓지 않으면 호신강기 용린도 발현되지 않는다.

당연명은 흑사련주의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한쪽에 널브러진 심화방주 여설련을 일별하며 물을 뿐이었다.

"모략이라 했을 텐데요. 심화방주가 노린 게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련주의 손을 빌린 차도살인지계라 할 수 있겠지요. 설령 죽었다한들 그녀의 의도대로 되는 것입니다. 련주께서는 심화방주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참이신지?"

"무상함을 느꼈다."

당연명이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지만 유길준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답했다. 덧없음을 얘기하는 그의 무미건조한 음성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무학에 대한 관심이나 열의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유길준이 이어서 말했다.

"정말로 소중히 여기던 것이 망가져 본 경험이 있나? 연배나 그 무위로 보아 아직 경험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본좌가 겪어보니,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도 잠시뿐이다. 분노가 극에 달하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덧없음을 느꼈다. 애지중지하며 공을 들였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기에."

"달관한 고승마냥 말씀하시는군요. 그런 것 치고는 심화방주를 향한 손속이 아주 무자비하셨는데."

"본좌가 무상함을 느낀 것과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심화방주 따위에게 본좌가 휘둘린다? 차도살인지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네놈도 본좌의 분노를 모면하고자 그녀를 데려온 것 아닌가."

"..."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一 분명 당가의 가규였지. 소싯적 본좌는 그 말이 아주 옳다고 여겼다. 가슴에 품고 살았지. 그러다 본좌를 거둬준 이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어찌 되었을 것 같나? 수백 년간 대방파를 자처하던 청성과 아미가 멸문하고, 점창이 몰락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정도 방파가 사천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지."

익히 아는 얘기였다. 흑사련주 유길준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고.

그때는 하나, 지금은 둘이 죽음을 당했군一 이라며 길게 말을 늘이는 유길준.

"너희 연놈 둘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당가는 물론이고, 사천 전체가 대가를 치러야겠지. 이미 네놈의 가문을 향해 본련의 사도육존一 내 의형들께서 병력을 이끌고 가셨다. 당가 또한 곧 사천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거다. 애초에 연희 그 아이 때문에 명맥이나마 이어가도록 해준 것이었으니."

당연명으로서는 유길준의 마지막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공을 익히기 힘든 유연희의 체질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니까. 유길준이 당가 약왕당에 유연희의 체질을 개선할 일말의 가능성을 걸고 성도 불가침의 명을 내린 내막 또한 알 도리가 없었다. 약왕당주였던 당일과 그 심복들을 부친의 원한으로 모조리 죽인 까닭에.

지금에 와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명이 반응을 보인 것은 그 앞의 말이었다.

"지금 뭐라 했지? 사도육존이 병력을 이끌고 갔다고...?"

존대를 멈췄다. 그만큼 심각한 사안인 까닭이었다. 당연명은 이미 사도육존의 일좌인 구환교검 상명일과 검을 나눈 경험이 있었다.

단 일검으로 격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명일의 수준이 낮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검신의 무위에 비해 아래였을 뿐.

나머지 사도육존 다섯의 무위가 어떤지는 모른다. 그러나 상명일 같은 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가문의 안위가 위험했다. 그나마 가주이자 모친인 당지혜가 화경에 이르러 있긴 했지만 그건 만년화리의 내단이라는 천고의 보물을 온전히 흡수하는 기연이 뒤따른 까닭이었다. 내공량은 몰라도 무공 성취나 실력은 분명 상명일보다 아래다. 강검(强劍)을 펼치지도 못한다.

당연명은 위기감을 느꼈다. 자칫 모친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 아닌가? 금지옥엽과 의형제를 잃은 마당이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병력을 편성했지. 사천에 대한 처분을 결정짓느라 남아 있었던 것이지 본좌 역시 오늘 길을 나설 참이었다. 먼저 출발한 이들을 경공으로 따라잡는 것은 여반장이니."

네놈이 이리 찾아와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一 라고 유길준이 덧붙이며 말했다.

하산하기만 하면 이곳 청성산에서 성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이들이 작정하고 경공을 펼치면 하루 이틀 만에 닿을 거리다. 드넓은 사천 땅을 고려하면 지척이라 할 만 했다. 어쩌면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흑사련주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속전속결 (速戰速決).'

당연명은 이 순간 싸움에 임하는 태도를 수정했다. 한가하게 스스로 쌓아올린 무위를 측량해본다던가 하는 생각을 모두 내던졌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시간도 아까웠다. 눈에 익은 가솔들과, 봉위대, 당이전, 당유리, 당미려 등 소가주 경합의 인연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연모하게 된 당미소一 그녀의 웃음과, 또 모정이 무엇인지 알려준 모친의 온기.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그들을 지켜야 했다. 목전에 있는 웬 미친 용의 분풀이에 그러한 삶이 망가져선 안 된다.

당연명은 스스로 가하고 있던 금제를 풀었다.

폐맥은취(閉版隱就) 해제(解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악_!

당연명의 전신 십이경맥에서 한껏 억눌려 있던 진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옷자락과 머리칼이 파라라락 정신없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기파가 연이어 터졌다. 주변을 에워싼 흑사련 무인들이 크게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감당하기 힘든 상대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촥!

당연명은 곧장 검을 휘둘렀다. 흑사련주를 노리고서. 어느새 참마검에는 진녹색 불길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검강의 발현이다.

"호오. 기대 이상이군."

놀라운 신법으로 순식간에 몸을 피한 유길준이 살짝 감탄하며 말했다. 유연희와 상명일의 죽음으로 무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그였지만 강자와의 대결은 기꺼운 모양이었다. 어느새 유길준의 입매는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어떤 호흡법을 익혔기에, 그 연배에 그러한 내공량을 지닐 수 있는 거지? 가산을 전부 네놈이 복용할 영약을 구입하는 데 쓴 게 아니고서야...."

당연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섞을 시간도 아까운 까닭이다. 신법 암영으로 순식간에 접근해 참마검을 휘둘렀다. 진녹색 불꽃의 궤적이 수도 없이 늘어난다. 어마어마한 쾌검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쫓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과과과과과광!!

맨손과 검이 부딪지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이 연달아 터진다. 흑사련주 유길준은 자색 장포를 휘날리며 선홍빛 강기를 두른 손으로 당연명의 검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놀라우면서도 기이한 광경이었다. 분명 유길준이 뿜어대는 진기는 사이한 느낌이 있었는데, 손놀림은 또 현묘한 것이 마치 도가 방파의 권장법을 보는 듯했다.

'...좀처럼 통하지 않는군.'

한참 검격을 쏟아내던 당연명은 결국 뒤로 물러섰다. 방금, 검강을 두른 채로 수십 차례의 검초를 펼쳤다. 허초 따윈 하나도 없이, 한번 한번이 위력적인 실초였다. 순간적인 내공 소모량이 어마어마했다. 전신 십이경맥에서 쉴 새 없이 솟구치는 진기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공격이었다. 당연히 막아내는 쪽도 강기를 구현해야 하니 내력과 심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연신 검초를 펼쳐내며 당연명이 지켜보니 유길준의 안색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이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사도 무학의 대종사라더니, 대체 얼마나 내공을 쌓고 또 진기의 효율을 끌어올린 것일까.

한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물러난 유길준이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놀랍군. 검법이 아니야. 매 검초가 그때마다 적절한... 아니, 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검로를 택해 들이닥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럴수 있지? 아무리 검술에 통달했다 해도 이건...."

유길준은 말끝을 흐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할 정도다. 그는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나서, 웬만한 무학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그 이치를 꿰뚫는데 익숙했다. 그런데 당가 소가주가 방금 선보인 쾌검식의 향연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이치나 흐름이랄 게 없었다. 쏟아내는 검초 하나하나가 완전히 별개였는데, 또 그 전부가 각기 다른 검법의 오의인 마냥 위협적이었다.

당연명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한시바삐 싸움을 끝내고 가문으로 복귀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저 흑사련주를 죽일 수단을 궁리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전생의 무위를 발휘하면 된다. 검귀의 무학이라면, 흑사련주라 해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러자니 문제가 있었다.

'버틸수 있을까.'

당연명이 힐끗 손에 쥔 검을 바라본다.

참마검(新魔劍)一 분명 천하에 드문 명검이었으나, 그 재질의 한계로 패력을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겨우 검초 섬(殘)을 한 번 구사하는 것만으로 녹아버릴 듯 백열했었으니, 섬강(繼至)을 펼치는 것은 무리라고 봐야 했다. 사실 평범한 쇠로 패력을 감당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긴 했다. 보통은 휘두르는 순간 망가진다.

어쨌건.

검초 섬 은 말 그대로 형(形)을 익히는 정도일 뿐이었다. 구환교검 상명일도 검초 섬(繼)에 당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자면, 섬강(殘至)을 구현해야 했다. 이미 독요청광기의 패력화가 가능했기에, 섬강(殘至)을 구현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검이 버텨줄 수 있는가 였는데一

'근접전도 쉽지 않아. 보아하니 적수공권으로 휘두르는 권장법이 장기인 것 같은데. 열독강을 시도하려다 오히려 이쪽이 당할 가능성도 있다. 암기 무학으로는 아예 승산이 없겠지.'

우모침우와 철편표는 일정 수준 이하의 무인들을 대량으로 살상할 때나 유용한 무학이었다. 지금처럼 아득한 수준의 고수를 상대할 때는 적합하지 않다. 애초에 강기를 두르고 펼치는 무학이 아니면 통하지도 않을 테고.

그때.

흑사련주 유길준이 말했다.

"보아하니 어쭙잖은 무학은 통하지도 않을 것 같군. 근래 괜찮은 깨달음이 있었는데, 네놈이라면 어찌 받아낼지 궁금하구나."

복정신공(伏正神功)이라는 것이다一 그렇게 말하며, 유길준이 검지를 들었다.

< 127화<흑사련주 유길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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