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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28화 (128/134)

< 128화 <흑사련주 유길준(3)> >

유길준이 검지를 드는 순간.

길게 뻗은 손가락 끝으로 선홍빛 기운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커다란 덩어리를 형성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선홍빛 기운은 작은 점으로 응축됐다. 그러자 웅웅대며 대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기의 파장이 아주 짧은 간격으로 움트고 번져 나가는 까닭으로 보인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력을 담은 핏빛 구슬이 완성됐다.

복정신공(伏i神功)一 흑사련주 유길준이 공동파 태허와의 일전에서 그가 구사한 복마검법(伏魔劍法)에서 진기 증폭의 이치를 가져와 만든 무학이다. 지금은 지공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진기를 발출하는 무학에는 모두 적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복정신공 하나만으로 유길준의 무력이 크게 상승했다는 의미다. 유길준이 복정신공을 창안하고서, 기꺼운 나머지 태허와 현소를 살려 보낸 일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어쨌건.

핏빛 구슬은 완성되는 즉시 쏘아졌고, 찰나지간에 당연명의 코앞에 이르렀다. 태허가 받아칠 때 그랬듯 회피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들이닥치는 공격. 신법 암영을 제대로 펼칠 틈이 없었다.

'듣던 대로 괴물이군.'

당연명은 핏빛 구슬이 담고 있는 거력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떠한 이치로 이렇게나 진기를 증폭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이들은 받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 거력을 한 점으로 응축까지 시켜놓았으니. 보통의 내공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지금 당연명은 폐맥은취를 해제한 후 전신 십이경맥에서 막대한 진기가 용솟음치는 중이었다. 유길준처럼 진기를 터무니없이 증폭시키진 못하지만 일검에 거력을 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게다가 그에겐 만물을 쇠하게 하는 힘一 패력이 있었으니.

'깨부순다!'

마음이 동하자 곧장 진기가 타올랐다. 진녹색 불길이 참마검의 검신을 휘감는다. 검강의 현현이다. 독요청광기는 어느새 당연명의 의념에 따라 패력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쿵!

난데없이 당연명이 딛고 선 바닥 주변이 흉년의 논바닥마냥 쪄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발바닥 용천혈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진기를 쏟아낸 까닭이다. 이건 일종의 진각이었다. 쏟아낸 것만큼 커다란 반발력이 대지에서부터 되돌아온다. 그 솟구치는 종(縱)의 힘을 발목, 무릎, 허리, 어깨 등을 이용해 횡(橫)의 힘으로 바꾼다.

동시에 전완에서 상완에 이르는 팔을 뒤로 쭉 뻗었다 쾌속하게 일직선으로 내지른다. 횡의 힘이 더해져 검을 내지르는 동작이 무지막지하게 가속한다.

인간의 육신으로 구현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찌르기.

이 역시 검귀의 무학이었다. 검초 관(貫). 참마검이 무서운 기세로 공간을 꿰뚫었다. 곧 그 검극이 유길준이 쏘아낸 선홍빛 구슬과 맞닿았다. 쿠구국 소리와 함께 검과 구슬의 전진이 멈춘다.

잠시 때 아닌 고요가 찾아왔다. 핏빛 구슬에서 번지던 파장과 참마검에서 송곳처럼 뿜어지던 파장이 부딪쳐 상쇄되면서 그리된 것이었다.

참마검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백열하고 있었다. 검초 관(貫)은 검신보다는 펼치는 이의 육신에 부담이 가는 기예였기에, 당연명은 참마검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참마검에 한계가 찾아온 듯했다. 검강을 형성할 정도로 막대한 진기와 또 그만한 패력의 기운이 주입된 까닭일까.

'버터다오.'

당연명이 내심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고요가 깨졌다.

푸화아아아악一

선홍빛 구슬에서 연신 강력한 파장이 번져 나왔다. 진기 증폭이 끊이질 않는다. 반면 참마검은 완전히 붉게 달아올라 곧 검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선홍빛 구슬이 참마검을 짓이기는 건가 싶던 순간.

구슬에서 쉼 없이 터져 나오던 파장이 잦아들더니 표면에 쩌저저적 금이 가는 듯했다. 내부에서는 무언가 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듯 했다. 곧 자기(蓋器)가 깨져나가는 것처럼 구슬이 완전히 조각났다. 잘게 부서진 선홍빛 진기가 허공에 흩날린다.

"허."

흑사련주 유길준이 짧게 탄성을 내밸었다. 복정신공은 그가 창안한 수많은 무학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절학이라 불릴 만했다.

그런데 그런 복정신공이 겨우 찌르기 검초 한 번에 파훼됐다. 작정하고 안법을 동원한 채 당연명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유길준은 이게 무슨 엄청난 이치가 담긴 무공이 아니라 극한까지 단련된 기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다.

납득이 가질 않는다. 어떻게 평범한 찌르기가 이런 위력을 낼 수 있지...?

"놀랍군. 안색을 보아하니 가벼운 내상조차 입지 않은 듯한데."

당연명은 대답 없이 검을 회수했다. 한껏 백열했던 참마검이 서서히 원래의 색을 되찾는다. 당연명은 왠지 참마검이 신음을 흘리는 것 같다 여겼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군."

유길준이 말했다.

"본좌의 기감을 피해 성취를 숨기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일단 그 터무니없는 내공량은 어떻게 축적한 것이지? 본좌의 복정신공은 진기 증폭의 묘를 담고 있어서, 웬만한 내공으로는 맞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을 텐데. 수십 년 동안 고련했음이 분명한 공동의 도사 역시 가까스로 막아냈을 뿐. 내상을 피하지 못했거늘."

"무상함을 입에 담더니, 원수를 앞에 두고 궁금한 게 많군."

"어찌 궁금하지 않을까."

유길준은 입 꼬리를 끌어당기며 반문했다.

"무(武)의 이치를 완전히 통달했다 여기던 본좌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느꼈지. 한데 네놈을 보니 무언가 길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형(形)과 식(式)을 극한으로 연마하면 그러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진기 자체가 지닌 어떤 공능이 있나? 가만, 그러고 보니 본좌의 복정신공이 파훼되기 직전一 진기 증폭의 묘가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는데."

"..."

당연명은 내심 생각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라고. 흑사련주의 자질은 진짜였다. 그저 한 번 손을 섞은 것만으로 상대가 지닌 무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유추해 낸다. 심지어 패력의 공능마저 눈치 챈 것 같았다. 용이라는 것들은 다 이런 걸까.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오늘의 일을 겪은 흑사련주가 살아서 형(形)과 식(式)마저 완벽하게 다듬는다면 어마어마한 후환이 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독이 아니면 죽이기 어려울 거다.]

식신 청각이 말했다. 십독(十毒)인 자신의 독을 가져다 쓰라는 얘기였다. 하기야 용마저 죽일 수 있다는 이매망량 용살갈(龍殺繼)의 독이 바로 당가십독 중 팔독인 용살독(龍殺毒)이다. 옛날 무영객이 청룡을 살해한 독.

그러니 청각의 독기를 먹어치운 당연명의 독요청광기라면 능히 흑사련주 유길준을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알고 있다.'

당연명 역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중독을 시키느냐였다. 어쭙잖은 용독술로는 유길준을 중독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괜히 섣부르게 중독시키려다 도리어 독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게 될 수 있었다. 그러면 일이 더 어려워지겠지. 근접 거리에서 확실하게 중독시켜야 한다. 다만, 그러자니 유길준이 권장법의 고수인 것이 걸렸다. 거리의 이점을 포기하고 상대의 간합 안으로 들어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드물다.

[네가 뭘 우려하는지는 알겠다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 저만한 적을 상대로 약간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청각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미 당연명이 선보인 검초 섬(繼)과 검초 관(貫)一 두 가지 검초는 분명 위력적이었지만 흑사련주 유길준을 죽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청각은 지금 당연명이 밑천을 다 내보인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당장 당연명의 승패에 그의 소멸 여부가 걸려 있었기에 약간의 초조함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명에게 있어 진정한 문제는 단 하나 뿐이었다. 패력과 그의 검초를 감당할 만한 검이 없다는 사실. 스승인 검귀로부터 물려받아 쓰던 검들의 부재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섬강(繼至)은 확실히 무리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당연명은 참마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음 검초를 생각했다. 어떻게든 참마검이 버틸 수 있으면서, 유길준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만한 검초가 필요했다. 조금 전에 펼친 검초 관(貫)이 뇌리를 스친다. 그나마 검에 부담이 덜 가는 찌르기.

검초 섬(繼)에 진정한 위력을 실은 것이 섬강(殘至)이라면 검초 관( 廣)에도 역시 대응하는 것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모르겠군. 감히 본좌를 앞에 두고서."

여유 있는 웃음을 홀리며 유길준이 말했다.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해서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복정신공을 파훼했던 그 찌르기 검초, 다시 보여 봐라. 하나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네놈은 입보다는 몸으로 나누는 대화를 선호하는 것 같으니一 그렇게 덧붙이면서, 유길준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자색장포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치솟는 신형.

그런데 다음 순간.

마땅히 시작되어야 할 낙하가 없었다. 치솟은 상태 그대로 허공에 머무른 것이다!

체공이 가능한 신법은 극히 드물었다. 신법 자체가 지닌 오묘한 이치는 제하고서라도, 진기의 수발이 더없이 자유로워야 함은 물론이고 공중에서 부력을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내공량을 지녀야 하는 까닭이었다. 구파 중에서도 이러한 신법을 지닌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어쩌면 청성이나 아미에 그러한 신법이 남아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걸 유길준이 보고 새롭게 창안하거나 개변했다면 이렇듯 신법으로 체공의 묘를 보여주는 것도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이건 본좌가 처음으로 익힌 무학이니."

하늘에서 응혼한 음성이 들린다. 유길준이 음성에 내력을 실어 말하는데,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햇살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 후광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마치 전능한 어떤 존재가 강림하는 모양새로 보일 지경이었다.

우르르르릉一!

난데없이 뇌성에 비견될 정도의 굉음이 터지고, 갑자기 하늘이 조금 어두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유길준의 양팔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는데, 점차 어떠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흑사장 (黑始掌)...!"

멀리 떨어진 채 지켜보고 있던 흑사련 인물들 중 누군가가 경악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일전에 유길준이 펼치는 것을 보았던 것일까.

아무튼 그의 말마따나 흑사련주 유길준의 팔에서 형상을 갖춘 것은 두 마리의 뱀이었다. 선홍빛 기운이 한없이 짙어지더니 마침내 검게 변한다. 한쪽 팔에 하나씩 흑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은 천신을 방불케 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용틀임하는 두 마리의 흑사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막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유길준의 눈에서 선홍빛 안광이 터져 나오더니 흑사 두 마리의 크기가 별안간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신 번져 나오는 강력한 기파.

이미 겪은 바가 있었기에 당연명은 한눈에 유길준이 복정신공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웬만한 장정 서넛만큼 크기를 확대한 흑사들이 내포하고 있는 기운은 장난이 아니었다. 조금 전 지공의 형태로 펼친 복정신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마리의 흑사를 팔에 두른 유길준이 양 손바닥으로 아래를 겨냥했다. 그가 선홍빛으로 물든 눈을 번득이면서 말했다.

"진(眞) 흑사장(黑始掌)"

< 128화<훅사련주 유길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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