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흑사련주 유길준(4)> >
흑사장법 一
이것은 한때 사천의 작은 마을에서, 뒷골목 활패들을 모아 두목 노릇을 하던 이의 장기였다. 유씨 성을 가진 그는 원래 제법 유복한 집안의 서자였는데, 배다른 장자와의 후계 다툼에서 밀려나 결국 집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도 천성이 밝았던 그는 오히려 자유를 얻게 되어 만족하며 살았다. 적다고도, 그리 많다고도 할 수 없는 재물이 수중에 있었으며 그래도 아들이라고 부친께서 어릴 적부터 가문의 내공심법을 익히도록 허락해주어 미미하게나마 내력을 다룰 수 있었다. 이만하면 웬만한 양민들보다는 훨씬 나은 삶 아닌가.
자유를 만끽하며 사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던 그는 갑자기 어느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한 기루에 들렀다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여인을 만난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용모나 재주가 빼어난 것도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마음이 갔다. 미색이 변변찮아 몸을 팔지도 못한다며 기루의 주인이 다른 여인을 지명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그녀를 택했다.
'소녀가 미숙하여....'
송구하다는 말을 연신 입에 담으며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는 모습이 어설펐다. 루주의 말대로 술시중에 관한 예법은 하나도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술잔을 내려놓고 그저 이야기를 나눴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느낌. 집안에서 쫓겨난 이후로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가정사를 읊는다.
제법 성공한 상인이셨던 부친. 본처가 세상을 떠나고 쓸쓸하셨는지 새로 들인 첩一 그게 자신의 모친이며, 산고(産苦)로 돌아가셨다고. 원래도 자신의 위로는 본처 소생의 나이 든 형님들이 여릿 계셨는데, 안 그래도 후계 다툼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차에 자신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느냐. 부친이 계실 적에는 몰랐는데 떠나시고 나니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자신의 처지가 생생하게 느껴지더라. 그래도 형님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듣자하니 다른 가문에서는 후계 다툼 때문에 골육상쟁까지도 벌어진다던데 나에겐 그래도 굶어죽진 말라며 몇 푼 던져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도량이 넓은가一 하는 그런 얘기들.
'이거, 추태를 보였군. 어쪄면 그대가 더 힘든 삶을 겪었을 지도 모르는데.'
'아닙니다. 이 하찮은 것이 공자께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것을요.'
'아니, 하찮다니. 스스로를 그렇게 비하하지 마시오.'
'송구합니다. 행여나 불편하셨다면 용서를....'
'...이미 몸에 밴 듯한데. 정말 미안하다면 이번엔 그대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겠소?'
'흔하고, 보잘 것 없는 얘기입니다. 괜히 귀를 어지럽히는 게 아닐까 우려되는데....'
'그래도 듣고 싶소.'
'...소녀가 태어난 해에는 큰 흉년이 몇 년째 지속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식을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는 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기루나 객점에 푼돈을 받고 자식을 팔아넘기는 일이 흔했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얘기는 그렇게 밤새도록 이어졌고. 며칠 만에 깊은 정을 나누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유씨 사내는 남은 재물을 몽땅 털어 기루를 사들였고, 여인과는 혼인을 치렀다. 기루를 굳이 없애지는 않았다. 사내는 그동안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사고방식이 틀에 박히지 않았다는 소리다.
무릇 부양할 가족이 있거나 천애고아 출신인 기녀들에게는 생계를 해결할 수단이 필요했고, 고된 일과를 보내는 이들 역시 가끔은 마음 편히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곳이 필요한 법이었다. 게다가 당장 기루를 없애도 어차피 필요에 의해 또 생겨날 테니, 차라리 자신이 오갈 데 없는 기녀들을 보살피며 제대로 일할 수 있게 뒤를 봐주자는 생각이었다.
부친의 상재가 그에게도 이어진 것일까. 아니면 순전히 운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녀들이 제대로 먹고 쉴 수 있게 음식과 잠자리의 질을 높이자 장사가 크게 잘되기 시작했다. 기녀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기녀의 수를 늘리지 않았고, 오히려 일을 그만두기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넉넉한 재물을 챙겨주며 새로운 일자리까지 알아봐주었다. 그러한 마음씀씀이에 감동한 기녀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고, 유씨 사내가 맡은 기루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다.
그러나 제법 큰돈을 벌게 되자, 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퉤. 귀하가 이곳에서 편히 장사를 할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택인지 아쇼?'
마을의 상인들에게서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는 놈들. 그들은 유씨 사내가 무공을 익혔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동안 부딪치지 않으려 했지만 기루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하루하루 커져가는 게 보이자 결국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기루는 보호해 달란 적도 없고, 굳이 보호해주지 않아도 되니 물러들 가시오.'
'허. 여태 보호해줬더니 그 은혜도 모르고?'
'억지도 정도껏 부리시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얘들아, 쳐라!'
유씨 사내는 뒷골목 활패 십여 명과 싸움을 벌이게 됐고, 힘겹게 그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가 다룰 수 있는 내력이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일반 양민의 완력에 밀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더군다나 제대로 된 호흡법이 아닐지언정 그는 단 하루도 수련을 거른적이 없었다.
'유씨의 무공이 엄청났지. 일장에 한 명씩 나가떨어지더군.'
'거봐. 몰락한 무가의 후손이 분명하다니까.'
'팔에서 검붉은 기운이 용틀임하는 것이 꼭 뱀이 타고 오르는 듯했네.'
유씨 사내의 무위에 대한 소문은 하루아침에 마을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실 제대로 갈고 닦은 진기가 아니라 통제를 잃은 기운이 거무튀튀한 빛깔로 피부 바깥으로 유형화했을 뿐이고, 마땅한 병장기가 없어 손바닥으로 후려쳤을 뿐 장법이라 부를 만한 무학도 아니었다. 팔을 휘감은 기운 역시 뱀 같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토룡(土龍: 지렁이)에 가까웠고.
그러나 때로는 소문이 무서운 법이었다. 유씨 사내는 자신의 무위를 두고 떠도는 소문을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그의 성명절기는 흑사장법(黑弼掌法)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마을의 뒷골목 활패들을 규합해 흑사파를 만들었다. 이 역시 어차피 필요악이라면 자신이 도맡아 관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다. 보통 뒷골목 활패가 되는 이들은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거나, 마땅한 생계 수단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무림을 동경해 스스로를 흑도(黑道)라고 칭하는 놈들도 있는데, 실제로는 무공 한 자락 구사하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흑사파는 원래부터 마을에서 보호비를 걷던 뒷골목 활패들과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받아들였다. 흑사파의 두목이 된 유씨 사내는 그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점차 번성해가는 마을을 노리는 이들이 생겨날 것을 예상하고, 흑사파로 하여금 정말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온종일 고된 수련을 겪느라 혈기가 꺾이고, 또 인내심이 바닥난 이들은 흑사파를 떠나 평범한 삶을 살기도 하고, 아예 마을을 떠나기도 했다.
이즈음에 유씨 사내는 딸을 얻어 이름을 연희라 지었다. 다만, 얄궂은 운명인지 그의 모친처럼 그의 처 또한 산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가 한 소년을 만난 것은 폭우一 달조차 식별이 불가할 정도로 쏟아지는 빗속에서였다.
****
'두목.'
찰나지간, 유길준은 감상에 젖었다. 흑사장을 펼칠 때마다 그가 떠오른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주고 길러준 인물. 성을 모른다고하자 잘 되었다며 유씨 성을 쓰라고 했었다.
그에게서 처음 배운 것이 바로 흑사장법이었다. 사실 무학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조악한 장법이었지만, 유길준에게는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다.
하여, 흑사장법을 개변하고, 개변하고, 또 개변했다.
삼류장법에 불과하던 흑사장법이 거듭된 개변 끝에 흑사련주라는 위명에 걸맞는 성명절기로 화했다. 얼마 전 복정신공을 얻고 나서는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진(眞)'자를 붙이기까지 했다.
진(眞) 흑사장(黑 )
강맹한 기운을 품은 두 마리의 흑사가 손을 떠나 하강한다.
쿠르르릉!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였다. 피할 곳은 없다. 거대한 흑사는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당장 이곳 청성산의 봉우리 하나가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력이 담겨 있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다 해도 충격까지 막아내지는 못할 터. 당연명뿐만 아니라 수하들 역시 휩쓸려 죽겠지만, 유길준은 더 이상 그들의 안위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두목의 유일한 혈육이자 수양딸로 받아들인 유연희.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흑사련이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건 시작이다.'
당연명을 죽이고, 당가를 멸문시키고, 유연희와 상명일의 죽음에 관련된, 아니 일일이 따지기도 귀찮으니 사천의 모든 생명을 죽이고 말테다一 그렇게 다짐하는 유길준의 눈이 섬득하도록 붉은 빛으로 번득였다.
한편.
하강하는 흑사 두 마리를 응시하며, 당연명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뒷발을 뒤로 뻗은 뒤에 무릎을 낮추면서 한껏 땅을 민다. 주우욱 고랑이 생겨나면서 땅이 파인다. 그리고 검초 관을 펼질 때처럼 참마검을 뒤로 뺐다.
식신 청각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검초로 어찌할 수 없을 텐데...! 차라리 호신강기를 보강하는 것이....]
당황한 태도가 역력하다. 조금 전 지공 형태의 복정신공을 겨우 파훼한 검초 관(貫). 그러나 지금 내려오고 있는 두 마리 흑사에게서 번져 나오는 파장은 조금 전의 선홍빛 구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장 당연명의 생사에 자신이 소멸할지 말지가 걸려 있으니 청각이 허둥지둥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격을 맞닥뜨려야 하는 당사자인 당연명은 더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마치 거력을 담은 흑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아니, 실제로 당연명은 하강해오는 흑사에게는 더 이상 신경을 할애하지 않았다. 보고 있는 것은 그 너머一 흑사련주 유길준이었다. 해를 등지고 선.
검파(劍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기원한다. 이번 한 번만 버텨다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널 휘두를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널 기억하마一 참마(新魔).
그렇게 속으로 되뇌는 것과 동시에.
화르륵!
검신에 진녹색 불꽃이 타올랐고.
'창천관일 (蒼天貫 S):
푸른 하늘의 붉은 태양을 단번에 꿰뚫겠다一 라는 심상으로 창안된, 검초 관(貫)의 완성형인 무학이 펼쳐졌다.
번쩍一!
순간 하늘이 태양을 유실한 것처럼 어두워졌다고 느낀 것은 착각일까. 어둠 속을 가르고 진녹색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푸확 솟구쳐 올랐다. 마치 하늘 끝까지 닿을 것처럼 기다란 불꽃의 궤적이 허공에 수놓인다.
유길준은 처음으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체 뭐란 말인가, 방금 그 검초는...?
일점으로 응축된 강력한 기운이 진(眞) 흑사장(黑!te掌)을 꿰뚫고, 자신에게 닿았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로 절명할 뻔했다. 유길준은 문득 허전해진 왼편을 보았다. 어깻죽지부터 팔이 아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 그 진녹색 불꽃이 지나간 흔적이다.
자색 장포의 어깨 부분에 있던 흑사 문양 역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짓이겨져 있다.
'...아까 그게 전력이 아니었다니.'
그러나 경악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을 내지르는 자세 그대로 치솟고 있는 인영이 있었던 것이다. 추진 경파가 무지막지한 것인지 흑사를 뚫고 상승하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크기를 확대해온다.
바로 당연명이었다.
< 129화<흑사련주 유길준(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