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흑사련주 유길준(5)> >
'수고했다.'
검을 내지르는 찌르기 자세 그대로 솟구치면서, 당연명은 내심 중얼거렸다. 녀석一 참마검은 흘륭히 제 몫을 해냈다. 덕분에 검초 창천관일(蒼天貫旧)이 본연의 위력을 제대로 내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참마검의 달아오른 검신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솟구치는 동안에도 점점 그 붉기를 더해갈 뿐. 아마 패력이 담긴 검귀의 무학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쩌저저정一 검신이 잘게 조각나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간신히 형체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제 한계에 달한 것이리라. 끝내 녹아내리듯 부서지는 참마검. 당연명은 검파를 놓았다.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검신이 있던 곳을 어루만지듯 스친다.
비산하려는 참마검의 조각들.
순간, 당연명의 눈이 번득인다. 그것들은 보통 날붙이의 조각이 아니다. 잠시나마 패력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련된 검의 파편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조금만 더 애써다오.'
뒤쪽으로 뻗은 당연명의 손바닥 장심에서 난데없이 거센 기류가 생성된다.
철편표(鐵片驅)였다. 산(散)과 파(破)의 묘리를 실은 기파를 온갖 방향으로 발산해 회오리를 만드는 검신의 암기 무학. 그 영역 안에서 빠르게 휘도는 쇳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암기였다. 하나 화경에 이른 유길준에게는 통하지 않을 무학이었다.
'그래. 원래라면 그랬겠지만....'
당연명은 한 팔로 다급히 지혈을 시도하는 유길준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검초 창천관일(蒼天貫旧)을 펼치면서, 참마검에는패력의 성질을 띤 진기가 가득 주입된 상태였다. 여전히 그 쇠하게 하는 진기가 남아서, 참마검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 당연명의 오른편에 형성된 것은 패력을 담고 있는 철편의 회오리인 것이다. 아무리 유길준이라 해도 쉽사리 막아내지는 못할 터였다. 적어도 작은 틈을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
마침내 당연명은 유길준의 눈앞에 다다랐다. 그처럼 체공할 수 있는 신법을 익히지는 못했다. 검술에 전념하느라. 그렇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라 해도 떨어뜨릴 수 있는 무력을 지 녔으니.
'삭독현현 (鐵毒顯現).'
당연명은 오른손의 철편표를 휘두르기 전에, 의념을 집중했다.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게 만든 원흉인 심화방주 여설련의 무학一적련연화술로부터 심상을 얻어 만든 무학이다. 기(氣)의 권역이 닿는 범위에 존재하는 원거리의 상대를 독살할 수 있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독강(毒至)이라 할수있겠지.
그러나 삭독현현은 구현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명의 권역이라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흑사련주 유길준의 권역이기도 하다는 의미였으므로. 유길준 역시 압도적인 기감을 보유하고 있는 강자다. 삭독현현이 펼쳐질 기미가 보이자마자 의념을 집중해 그걸 흩뜨렸다.
당연명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팔 한쪽을 잃은 데다, 의념을 집중하느라 유길준이 제대로 회피하지 못하는 그 찰나!
아래로 향하고 있던 오른손 장심을 유길준에게로 향한다. 한 팔을 잃긴 했지만 그는 권장법의 고수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근접하기 전에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약화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다. 맹수는 자그마한 사냥감을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하물며 같은 맹수와 생사를 놓고 다투는 싸움에서는, 아무리 신중함을 기해도 모자랄 터였다.
아무튼 그렇게 패력이 담긴 참마검의 검편(劍片)으로 이루어진 철편표가 유길준을 덮쳤다.
'산(散)과 파(破)의 발산 기파를 이용한 기예.'
유길준은 한눈에 철편표가 어떤 식으로 구현된 것인지를 꿰뚫어봤다. 타고난 대종사의 자질이 번득인 것이다. 원래라면 그 역시 역방향으로 발산 기파를 뿜어 대처했을 것이다. 찰나의 시간만 주어졌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삭독현현을 무위로 되돌리는 것에 집중하느라 때를 놓쳤다.
그래도 호신강기로 막는 것에는 무리가 없으리라 여겼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제법 뛰어난 병장기로 보이던 당연명의 검이 고작 검초 한 번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는 점과 그 잔류 진기를 지금 덮쳐오는 검편들이 머금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유길준이 겪어본 바, 당연명은 천하에 드물 정도로 강력한 검수였다. 아니, 고금을 통틀어도 드물겠지. 그런 검수가, 애검을 잃었다. 지금 몰아치는 공격들만 버티면 승산은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一
그런 생각을 하던 유길준이었지만, 이내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피부 위에 둘러쳐진 호신강기에 참마검의 검편이 닿았을 때였다.
카가가가가각一 쇳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나무 따위를 긁어내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쉼 없이 일었다.
'뭐지, 이 기운은?'
유길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호신강기(護身至氣) 역시 강기(至氣)의 일종으로,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이른 무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강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기를 발현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한데, 지금 그를 덮치고 있는 기파의 회오리一 그 안을 휘돌고 있는 수없이 많은 검편들은 강기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의념, 시전자의 강력한 의지를 상실한 강기는 그 위력을 잃고 그저 한낱 기운으로 격하되기 마련이니. 호신강기 앞에 힘을 쓸 수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마검의 검편들이 부딪칠 때마다 흑사련주 유길준의 호신강기가 점차 깎여나가는 게 아닌가?
유길준은 그동안 온갖 무학을 섭렵하면서, 다양한 성질과 공능을 지닌 진기들을 접해보았지만 이러한 기운은 생전 처음이었다. 직접 겪으면서도 믿기 힘들다. 고작 쇳조각에 담긴 진기가 뭐라고 강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패력(敗方)에 대해 무지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검귀의 호흡법인 패력심법은 태생적으로 튼튼한 혈맥을 타고나 영락하지 않고 장수하는 용력지체가 아니고선 감당할 수 없다. 범인이 익혔다간 경지에 이르기도 전에 요절하고 마는 것이다. 자연히 검귀의 무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고, 그 바탕이 되는 패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패력은 곧 쇠하게 하는 성질을 띤 힘이다. 설령 의념으로 날을 세운 강기라 할지라도 그 날을 부러뜨리지는 못할망정 무디게 할 수는 있었다. 당연명은 철편표를 이용해 유길준의 내공을 효율적으로 소진시킬 셈이었다.
카가가가가각一
계속해서 철편표가 유길준의 호신강기를 갉아먹고, 유길준은 심력을 소모해가며 호신강기를 보강했다. 유길준은 어느 정도 패력에 대해 눈치를 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대처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검편에 담긴 진기가 바닥나고, 평범한 쇳조각으로 화하길 기다릴 뿐.
한편.
당연명은 그런 유길준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다. 철편표가 사그라질 때까지 유길준의 내공을 갉아먹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당연명 자신에게는 체공을 계속할 수 있는 신법이 없었다. 철편표를 창안하면서 터득한 방법으로 왼손 발산 기파를 이용해 허공에 머무르고는 있었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었다. 자세가 불안정할뿐더러 유길준처럼 천고의 자질을 지닌 이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시간을 주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지금도 연신 안법을 동원하며 눈을 번득이는 것이 무언가 타개책을 궁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속전속결로 승부를 봐야 한다一 그렇게 생각하면서, 왼손으로 한 차례 발산 경파를 내뿜어 체공을 연장한 직후에 당연명은 품에서 작은 표창 여덟 개를 꺼내 허공에 늘어놓았다. 둥근 고리에 작은 칼날 여러 개가 촘촘하게 붙어 있는 모양새. 표창이라기보다는 반지에 가깝다. 바로 회선환이었다.
재빠르게 손을 놀려 허공에 흩뿌려진 회선환을 모조리 손가락에 끼운다. 여전히 오른손으로는 철편표를 펼치고 있었기에, 엄지를 제외한 왼손 모든 손가락에 두 개씩 회선환을 끼웠다.
'회 (回)'
슈아아아아아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하는 회선환. 어느새 당연명의 눈은 진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흐름을 보는 안법 시류안을 극성으로 발동한 것. 거치적거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 하늘이라 그런지 셀 수 없이 많은 투로가 보인다. 감각도 주사망역은 진즉에 펼치고 있었고, 암기회수 무학 연기륜으로 회선환을 연결하는 즉시 손가락을 퉁긴다. 엄청난 회전력을 품은 회선환 여덟 개가 휘리릭 당연명의 손을 떠난다.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는데, 곧 잔상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완전히 사라져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걸린 것이 불과 한 호흡一
철편표 속에서 당연명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유길준이 경계심을 끌어올리려는 순간, 퍼엉! 소리와 함께 당연명의 발치 공기가 터져 나간다. 발바닥 용천혈로 무지막지한 추진 경파를 뿜어댄 것이었다. 폐맥은취를 해제한 당연명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내공량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허공답보나 다름없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유길준과의 거리를 급격히 좁히면서, 당연명은 철편표를 해제했다. 온갖 방향으로 휘돌던 참마검의 파편이 멈춘다. 한편, 예상보다 일찍 철편표가 멎은 탓에 유길준은 당연명의 접근을 허용하고 말았다. 발을 디딜 곳이 있는 지상이라면 모를까. 허공에서는 아무리 유길준이라도 쾌속하게 방향을 전환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 척(약 60c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한 두 사람.
화르륵!
당연명은 어느새 꺼내든 수리검에 검강을 쐬워 곧장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십여 번의 검격이 유길준을 덮친다. 오른손에 수강을 두른 유길준이 기이한 움직임으로 그 모든 검격을 막아낸다.
'어디서 이런 놈이...'
유길준은 어이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듯했지만 맞상대하는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당연명이 펼쳐내는 한 번 한 번의 검격들- 그것들이 그리는 검로는 완전히 상리를 벗어나 있었다. 흐름? 법칙?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무학에 대한 이치를 단번에 통찰하는 자신의 자질이 이 순간만큼은 무용함을 절감했다. 그저 방어에 특화된 무학과 날카롭게 벼린 감각으로 그때그때 대응할 뿐.
그러나 어이가 없는 것은 당연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팔을 잘라내고서도 이 정도라니.'
흑사련주가 권장법의 고수라는 것을 상정하고 최대한 타격을 입힌 뒤에 접근했다. 한 팔을 잃었으니 처음처럼 수월하게 검을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유길준은 한쪽 팔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능수능란하게 당연명의 공격을 막아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적응이 된 건지 여유가 생긴 것인지 각법까지 섞어가며 도리어 반격을 가해오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공마저 회복하고 있다.'
무슨 호흡법을 익힌 것인지, 유길준은 싸우는 와중에도 조금씩 뿜어내는 기파가 강해지고 있었다. 패력이 담긴 철편표에 의해 깎인 내공량을 수복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팔다리를 감싼 선홍빛 진기가 점차 진해진다.
당연명은 승부를 보아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폐맥은취를 해제하면서 무지막지한 내공량을 얻었지만, 이렇게 강기를 쏟아내다 보면 곧 한계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청각의 독기를 흡수해 내공을 보충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청성산을 오르기 직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청각이 축적한 대부분의 독기를 먹어치운 까닭이다.
반면에 흑사련주 유길준은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금방 원래의 내공을 회복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만전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당연명의 내공은 바닥나고, 유길준의 내공이 우위를 점하게 될 공산이 컸다. 심지어 유길준에게는 진기를 증폭하는 무학마저 있었으니.
'결착을 짓는다.'
당연명은 수리검을 휘두르는 척 놓아버리고는, 방어초를 취하는 유길준의 손을 피해 그의 심장을 노렸다. 왼손으로는 검결지를 세워 검기를 발출해서 오른쪽 경동맥을 노렸는데, 유길준은 현묘한 손놀림으로 당연명의 왼손을 걷어내고, 나선을 그리면서 손을 회수해 심장으로 다가오는 당연명의 오른손을 손바닥으로 막아 세웠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오른손 장심을 맞대는 형국이 되었다.
'...!!!'
당연명과 유길준은 이번 한 수로 서로의 생사가 엇갈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직감했다. 대번에 양측에서 강기를 동원하는 낌새가 어린다. 극강에 이른 고수들이 각자 의념을 동원하자 주변 대기가 응응 진동하는 듯했다. 주변으로 무지막지한 기파가 번져 나갔지만 정작 두 사람 사이로는 기파가 상쇄가 되어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화르르류!
선홍빛과 진녹색의 불길이 마주 댄 두 사람의 손을 감싸고 타오른다. 명백한 강기의 현현.
스스로의 강기를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확신이 차 있었고, 입매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상황을 유도한 것은 당연명이었지만, 유길준에게 있어서도 내력과 강기를 겨루게 된 지금의 상황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수 없는 개변을 거친 호흡법一 흑사마라심공(黑弼魔羅心功)을 익히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내공 수복을 도모할 수 있었고, 또한 복정신공을 통해 강기의 위력을 시시각각 늘릴 수 있었다.
'본좌에게 강기로 승부를 걸어온 것이 네놈의 패착이다.'
유길준이 눈에서 선홍빛 안광을 발하는 것과 동시에.
조조조조—!
무지막지한 기파가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복정신공에 의해 단숨에 위력이 증폭된 선홍빛 강기가 당연명을 잡아먹을 것처럼 크기를 키웠다.
당연명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속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패독강(敗毒至 )'
< 130화<흑사련주 유길준(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