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용각> >
스으으_
빠르게 크기를 키워가던 선홍빛 강기가 웬일인지 확장을 멈췄다. 아니, 오히려 점차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선홍빛 강기를 시전한 당사자인 흑사련주 유길준의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미암아 이 축소가 그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유길준은 당연명의 강기에서 느껴지는 성질이 조금 전 자신의 호신강기를 깎아내던 검편에 담긴 진기의 그것과 몹시 흡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본디 강기(至氣)란, 심상을 현실로 끄집어낼 정도로 강력한 의지의 집합체다. 때문에 강(强)의 묘리를 제대로 접목시킨 강기는 그 바탕이 되는 심상이 흐트러지지 않는 한 쉽사리 부러지거나 깨지지 않는다. 강기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강기뿐인 이유기도 했다.
더군다나 강기의 유지를 위해서는 심력을 기울인 의념과, 땔감처럼 소모되는 막대한 진기가 필요한 법이다. 화경 고수끼리의 대결이 흔히 서로의 내공량을 겨루는 양상으로 흐르는 까닭이었다. 복정신공을 손에 넣은 뒤, 유길준은 누구를 상대로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하기야 증폭의 심상을 담은 강기를 누가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무슨 심상을 담아 만든 것인지, 당연명의 강기는 그의 강기가 증폭하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부러지거나 깨지는 것은 아니지만, 강기 자체가 영락해가고 있었다. 의념과 내공량을 끝없이 밀어 넣고 있었음에도.
한편.
'예상대로군.'
당연명은 태연한 얼굴로 집중을 유지했다. 앞서 지공 형태의 복정신공을 검초 관(貫)으로 파훼한 바가 있었고, 또 복정신공이 접목된 진 흑사장 까지 겪었다. 유길준이 구사하는 진기 증폭 무학에 대한 대처를 짧은 시간이나마 염두에 두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 유길준이라면 그 증폭의 묘를 결국 강기에도 응용하고자 했을 테니까.
사실 대처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것들을 파훼한 것이 바로 패력을 바탕으로 한 검귀의 무학이었으니까.
증폭(增幅), 흥(與), 성(盛) 따위의 심상을 단번에 찍어 누를 패(敗)一 그것 역시 독(毒)일지니.
전생의 무학에서 그 근간을 이루던 패력과, 현생의 무학에서 새롭게 바탕이 된 독을 모두 심상으로 삼아 강기를 발현했다.
패독강(敗毒문)一 새로운 독강류 무학의 탄생이었다.
'쇠 (衰)해라.'
패력의 성질을 띤 독요청광기를 장작 삼아 강력한 의념을 불태운다. 패(敗)의 심상이 담긴 강기가 유길준의 선홍빛 강기를 압도한다.
진녹색 불길이 선홍빛 불길을 살라먹는 듯하다.
유길준은 완전히 낭패한 표정이었다. 복정신공으로 강기가 증폭되는 것보다 당연명의 강기로 인해 영락하는 부분이 훨씬 컸던 것.
상식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의념과 내공량이 아직 온전한데도 발현한 강기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강기가 소멸할 지경. 만약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것은 자명했다. 이미 한 팔을 잃은 마당인데, 다음엔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죽음을 상정하면서, 유길준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여기서 밀려날 순 없었다. 어차피 퇴각이 불가하다면, 차라리 전력을 쏟자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린 뒤 온전히 강기를 구현하는 것에만 심력을 쏟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응응대며 유길준의 선홍빛 강기에서 파장이 아주 짧은 간격으로 터져 나온다. 당연명의 패독강에 밀려 크기가 쪼그라들었던 유길준의 강기가 재차 증폭을 시도한다.
'...!!!'
이번엔 당연명의 눈에 놀람이 어린다.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꺼져 가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나듯이 유길준의 강기가 화르륵 타올랐던 것. 물러날 수 없는 것은 당연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사련주쯤 되는 이를 상대로 이만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자신의 무학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는 당연명이었다.
'무조건 여기서 결착을 봐야 한다.'
당연명 역시 전심전력을 다하자, 유길준의 선홍빛 강기는 더 이상 증폭을 거듭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락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강기가 지닌 심상 수준이 비등한 까닭일까.
그렇게 대치 형국을 유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의 신형이 점차 낙하하기 시작했다. 유길준도 그렇고, 당연명도 그렇고 더 이상 체공을 위해 기울일 일말의 심력도 남지 않은 탓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면서 오른손을 마주 댄 채, 옷자락과 머리칼을 휘날리며 떨어진다.
낙하하는 와중에, 당연명 쪽에서 먼저 변화가 일었다. 기파가 눈에 띄게 사그라지더니 전신을 상시로 보호하고 있던 내공갑주一호신강기 용린이 깨졌다.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기에, 시시각각 소모되는 내공량이 무지막지한 까닭이었다. 폐맥은취를 해제하며 전신 십이경맥에서 솟구친 막대한 내공량이 이제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
내력 고갈의 징조는 유길준에게서도 나타났다. 그의 호신강기도 점차 옅어져 갔던 것. 수없는 개변을 통해 터무니없는 내공 회복력을 지닌 호흡법一 흑사마라심공을 만들어냈지만 그것도 지금은 무용했다. 온 정신을 강기 구현에 쏟아 붓고 있는 까닭이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당연명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만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점차.
유길준이 쏘아냈던 진(眞) 흑사장(黑弼掌)에 의해 엉망이 된 지면이 가까워온다. 추락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내공량의 바닥을 보인만큼 당연명의 진녹색 강기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죽어라, 놈!'
유길준은 희열 섞인 선홍빛 안광을 번득이며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강기에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유길준의 호신강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쿠응一!!
하는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이 지면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잠시 후.
완전히 가려진 시야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린 이의 떨떠름해하는 음성이 들린다.
"...네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악감(惡感)은 없었다.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었지."
높은 산중이라 바람은 시시때때로 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문득 불어온 바람에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면서, 두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손을 마주대고 있는 당연명과 유길준이었다. 완전히 내력이 고갈된 것인지 두 사람 모두 강기를 거둔 상태였는데, 당연명의 왼손一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에 어느새 회선환이 돌아와 있었다.
'아슬아슬했군.'
당연명은 유길준의 몸 여기저기에 생겨나는 혈선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놈에게 근접하기 전 미리 뿌려두었던 회선환들. 엄청난 회전력이 가미된 그것들을 아주 멀리 보내놓았었다. 기감에 쉬이 잡히지 않도록.
그 뒤에는 유길준의 전력을 끌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적당히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대로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압박을 가했다.
실제로 패독강을 이용해 유길준을 상대로 확연한 승기를 잡았었고. 그러나 유길준이 전력을 다하자, 서로가 급격하게 내공을 소모하는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호신강기 용린이 깨지고, 유길준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짜낼 때는 분명 위기이긴 했다. 다만 의도된 위기였을 뿐一 기다리던 순간을 포착한 당연명은 왼손을 까닥여 암기회수 무학 연기륜을 발동했다. 한껏 집중하고 있는 유길준의 기감이 이전만 못
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서. 지면에 부딪치는 시기도 공교로웠다. 시야를 가려주고, 희미한 소리나 미세한 기척마저 숨겨주었으니까. 유길준도 서로가 전력을 다하는 순간에 그러한 공격이 닥쳐오리 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검신이 창안한 암기 무학一 회선난무표(回旋亂舞線)의 제 이 초였다.
"...본좌가, 겨우 이런, 얕은 수작에."
유길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을 겨우 쥐어짜내는 기색이 역력하다. 회선환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 것인지 목에도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시종일관 선홍빛으로 빛나던 안광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새카만 눈동자는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사천당가의 인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뒀어야지."
"뭐...? 그런一"
검술을 지니고서 당가 운운하는 것이냐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유길준은 말을 뱉기가 힘들었다. 문득, 지난 삶이 떠오른다. 시작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세상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소년의 몸이었고, 정처 없이 떠돌며 말을 배우고 옷과 먹을 것을 홈쳤다. 그러다 만난 것이 두목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거두고, 길러준 사람. 그러나 지키지 못했고, 또 그의 딸인 유연희마저 지키지 못했다. 그때마다 내면의 무언가가 뒤틀리며,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화하려는 자신을 느꼈지만 겨우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흑사파 시절의 인연들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사도육존으로 불리는 의형제들....
그러나 이렇게 죽음을 마주하고 보니, 역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흐릿해져가는 시야로, 당가 소가주의 얼굴이 보인다.
'죽이고 싶다.'
드그 드 그 드그 드 그 드그
갑자기 그의 심장이 터무니없는 빠르기로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모하려는 감각. 빛을 잃어가던 동공이 난데없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다. 맹수의 그것처럼 변한 것이다.
[빨리 손을 써라! 놈이 각성하기 전에!]
식신 청각이 이변을 눈치 채고는 당연명에게 다급히 말했다. 당연명도 눈이 있으니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열독강(熱毒至).'
화룡호독의 심상을 담아 만든 독강류 무학이 펼쳐졌다. 여전히 유길준은 당연명과 손을 맞대고 있었기에 그대로 열독강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화르르륵!
거세게 일어난 불길이 유길준의 자색 장포와 살갗을 태운다.
카아아아아악一!!
유길준의 입이 벌어지면서,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하다. 당연명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끌어 모아 열독강을 유지했다. 완전히 태워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점차 비명과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유길준이 완전히 새카맣게 변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풀썩 쓰러져 재가 되었다.
그제야 열독강을 거두는 당연명.
유길준이었던 것의 잔해에는 회백색의 재와, 엄청난 열기에도 온전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뻣조각 같은 것이 있었다.
'놈의 뿔이었어.'
당연명은 마지막 순간에 유길준이 몸부림칠 때, 그의 머리를 뚫고 이 뻣조각이 솟아오르는 것을 목도했다. 왠지 조금만 늦었더라면 온전히 용으로 각성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신 청각이 말했다.
[예상은 했겠지만, 저건 용각(龍角)이다.]
'용각?'
[그래. 크기는 좀 작다만. 아마 제대로 각성을 마치지 못한 아룡의 것이라 그렇겠지. 챙겨두는 게 좋을 거다. 용각에는 용의 영성이 담긴다. 다른 뼈마디와는 달리 썩지도, 부러지지도 않지. 어찌 보면 금속에 가깝다고 해야 할 거다. 실제로 무영객 그놈은 용각으로 암기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몇 번 했었지. 방사들의 힘을 빌렸던 것 같은데, 대체로 실패하고 말았지. 아무튼 귀물이니 챙겨둬라.]
'이걸로 병장기를...?'
당연명은 일단 유길준이 남긴 뿔一 용각을 챙겨들었다. 화룡호독의 열기마저 견뎠으니 확실히 범상치 않은 귀물이긴 했다. 청각에게 약간의 독기를 넘겨받아 내공을 회복한 후. 곧장 감각도 주사망역을 펼쳤다. 갈 길이 급하긴 하나 흑사련의 잔당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미 유길준으로부터 가문에 병력을 보냈다는 얘기를 들은 참이다. 놈들이 먼저 칼을 들이댔고, 당가의 인물로서 당연명은 흑사련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놓을 요량이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내력을 회복해야 움직일 수 있을 테니, 그동안 잔존 병력을 모조리 처리하면 되겠지.
유길준이 쏘아냈던 진(眞) 흑사장(黑掌)에 의해 봉우리 자체가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너져 있는 상황이었다. 깔려 죽은 이들이 다수인 건지 의외로 살아남아 기척을 흘리는 이가 많지는 않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에 큰 충격을 받고 망연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구파 중 셋을 무너뜨리고, 사천을 완전히 장악한 거인一 흑사련주 유길준의 죽음을.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앞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은 자색 장포를 걸친 흑사련주가 아니라, 사천당가의 소가주였다.
눈치 빠른 몇몇은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서 경공을 펼쳐 도망가려 했지만 당연명은 그런 이들부터 우모침을 던져 죽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흑사련 본단이 자리하고 있던 청성산 봉우리에서는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131화 용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