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위기> >
성도(成都).
사천에서 손꼽힐 정도로 번성한 곳이자, 아주 오래 전부터 당가의 터전이었던 곳.
一당가 약왕당이 민생에 크게 도움이 되니, 불가침하도록 하라.
흑사련주 유길준의 비호 아래 상당한 세월 동안 평화를 누려왔던 이곳의 하늘은 지금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다. 하늘뿐만이 아니다.
지상은 어떠한가一 여느 때라면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일 대로에는 가지각색의 무복을 입은 자들이 병장기를 꼬나 쥔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불가침의 영역인 성도나 흑사련 치하의 사천 땅에서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다른 성(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서로의 명운을 걸고 다투는 방파 대전이 발발했을 때의 광경이다.
무거운 적막이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성도의 양민들은 감히 나다닐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거처에 숨어 벌벌 떨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직 사태가 끝나지 않았음을 아는 까닭이다. 난데없이 사방팔방에서 나타난 무림인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급습한 당가의 무력대.
예기지 못한 때 쏟아진 독과 암기에 당해 쓰러지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쓰러진 이들을 짓밟거나 타넘고 밀고 들어오는 새로운 인파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가의 무력대가 지니고 있던 독과 암기를 모두 소진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당가 무력대는 쫓기듯이 퇴각했고, 흑사련 소속으로 보이는 사파 무림인들은 그들을 쫓으며 당가가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사위가 조용해진 틈을 타 도주할 법도한데 대부분의 양민들은 미처 피신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두려움에 떨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왔던 만큼, 그들에게 오늘의 소란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게 느껴졌을 테니까.
적막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후욱一 끼치는 바람과 함께 홀연히 내려서는 인영이 있었다. 흑색 무복을 입은, 엄청난 미형의 사내.
'조금 늦었나.'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당연명이 내심 중얼거렸다. 청성산에서 내공을 어느정도 회복하자마자 경공 추월광행을 쉼 없이 펼쳐 성도에 당도한 참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의 말에 따르면 하루 이틀 정도 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됐지만,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다.
적의 말을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더러, 유길준과 마찬가지로 의형제를 잃은 사도육존들이 병력을 독려해 빠르게 움직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당도해보니 과연 성도는 한바탕 싸움을 치른 뒤의 모습이었다. 아직 외곽인데도 대로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널린 시신들이 보인다.
당미려와 제갈영영이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었다. 방파 대전을 준비하라는 자신의 당부가 잘 전해진 것으로 보였다.
시신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던 당연명의 표정이 약간 침중해진다. 널브러져 있는 이들 대다수는 흑사련 휘하 사도 방파의 인물들로 보였지만, 드문드문 당가의 무복을 입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얼굴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당가의, 그리고 자신의 식솔들이다.
'...감히.'
당연명은 익숙치 않은 감정을 느꼈다. 분노一 홀로 검귀의 삶을 살았던 전생에는 그다지 겪을 일이 없던 것이다. 수련하다 벽에 가로막혀 성취가 정체됐을 때 스스로에게 느낀 환멸 정도가 다였다. 사람이라면 응당 느끼기 마련인 오욕질정(S慾七情)에서 완전히 멀어진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검신지경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一
아무튼 평범한 삶을 추구하면서, 검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사람다워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의 삶에 들어오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모친으로 시작해서, 경합 칠조의 친우들, 봉위대, 당미소, 다른 가솔들....
모두 소중한 존재다.
그런 이들을 건드린 것이다. 흑사련과 그 휘하 방파들은.
유길준에게도 말했다시피, 당연명은 딱히 사도(邪道)라 하여 악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적당히 균형을 이루며 사천 땅에서 조용히 살아가려 했었지. 그러나 그들은 당가를 건드림으로써 명백히 선을 넘었다.
당가의 인물은 원한을 결코 잊지 않는다. 아니, 잊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몇 곱절로 갚는다. 그게 사천당가의 가규고, 당씨 성을 지닌 이들이 품어야 할 독심(毒心)이다.
"........."
당가 소가주 당연명은 시신들을 일별하며 호흡을 골랐다. 도착이 조금 늦긴 했지만, 시신들의 상태로 보아 아직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가문에서는 아직 전투가 한창일 공산이 컸다. 잠깐 사이 내공을 적당히 회복했다. 독요청광기로 하여금 식신 청각의 독기를 먹어치우게끔 한 덕분이다.
걸음을 옮기는 당연명의 신형이 점차 흐릿해진다. 흡사 허깨비를 보는 듯하다. 그의 입술이 살짝 떼졌다.
"결정했다."
본가의 피해가 경미하더라도, 이 땅에서 사도를 완전히 척결해주마一 그렇게 나직한 읊조림이 희미해지면서 끝났을 때는,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아 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
사천당가.
한때 세가로 불렸던 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웬만한 마을보다 규모가 컸다. 그런데 그토록 넓은 영역이 인파로 북적였다. 현판이 걸린 정문을 비롯해 외원의 건물들은 완전히 무너져 있거나 반파된 상태였고, 적막에 휩싸인 성도 여기저기와 다르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그걸 뚫고 내지르는 고함 따위가 뒤섞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독왕대는 물러나서 독을 정비해라. 암왕대는 아끼지 말고 암기를 쏟아내! 가주께서 시간을 끄시는 동안 최대한 머릿수를 줄여 놓아야 한다!"
"외원의 가솔들은 모두 내원으로 대피한 게 맞나? 이장로 당명신 일가가 이동한 방향이 미심쩍은데...."
"대주께 고합니다! 내원 동쪽의 진법이 일부 무너졌다고 합니다. 제갈가 인물들이 급히 보강하고는 있는데 시간이 필요한 상황인지라, 병력 지원을 요청해왔습니다!"
"...내원이 뚫리면 끝장이다. 거기엔 무공 성취가 일천한 식솔들밖에 없어. 가족들이 모조리 죽을 거다. 무조건 사수해야 한다. 정비를 끝마친 독왕대는 곧장 동쪽 내원으로 가라. 부대주가 이끌도록!"
"명을 받듭니다!"
"호원대주. 잠시만 적들을 막아주시오. 암기 보급을 마치고 곧장 합류하리다. 내원의 진법이 무너지는 통에...."
"들었습니다. 암왕대주. 안심하고 이쪽은 우리에게 맡기시오. 그보다 동쪽의 진법이 뚫린 것이 아마 사도육존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넷이서 가주의 손발을 묶어두고 하나가 진법을 파훼하는 전략이 아닌가 싶은데. 급파한 독왕대가 당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닐지...."
"...일부라도 봉위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전세(戰勢)가 이 정도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을 빼낼 여력은 없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놈들의 머릿수를 줄여놓는 것입니다. 슬슬 가주께서도 힘에 부치시는 것이 역력해 보입니다."
호원대주 당계중이 말끝을 흐리며 땅을 박차고 앞으로 쇄도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사파 무인의 전신을 단검으로 난도질했다. 사지의 주요 근맥과 혈맥을 재빠르게 베어내는 단검술이 압권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단검을 우측으로 던진다. 삼 장(약 9m) 쯤 떨어진 곳에서 검을 내리치던 사파 무인이 목덜미에 단검이 꽂힌 채 쿵 쓰러진다. 그 시신을 밟고 또 싸움이 벌어진다. 당계중은 품에서 다시 단검을 꺼내 사지 근맥이 잘려 풀썩 주저앉은 정면 사파 무인의 머리채를 잡고는 검기를 발현해 머리통을 스걱 잘라냈다.
'끝이 없군.'
손에 든 머리통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는 또 빈틈을 보이는 사파 무인을 향해 단검을 던지며, 당계중이 짧은 상념에 빠졌다. 그는 원래 삼장로 직속의 파룡대를 이끄는 전도유망한 인물이었다. 당시 가문의 실세이던 장로원의 칼이었으니까. 그러나 당연명의 손에 대장로와 삼장로가 죽고, 그 둘의 직속 무력대였던 준령대와 파룡대는 암왕전 산하로 들어가 호원대로 합쳐졌다.
장로원 소속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던 그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외원 호위一 그야말로 한직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수련 시간을 보장받지도 못한 채, 번을 서며 근무에 임해야 했으니까. 소가주 당연명이 내린 일종의 징계였다.
불만을 가질 법도 했지만, 당계중은 성실하게 맡은 직무에 임했다. 휘하 대원들이 기존 외원 호위무사들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도록 하고, 결코 불만어린 잡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휴식시간을 포개 수련에 매진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소가주의 자리를 거머쥐는 광경을 목전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 무시무시한 무위에 완전히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확신했다. 소가주 당연명이야말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인물이라는 것을.
봉위대주 당원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자신도 소가주의 옆에서 가문의 부흥에 한 팔을 거들고 싶었다. 그러나 장로원에 몸담았던 자신을 신용할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외원 호위 따위로 소가주의 신뢰를 살 수 있을 리도 없었고.
그렇기에, 당계중은 가문에 위기가 닥친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가주 당연명은 이 자리에 없고, 어쪄면 이곳에서 자신을 포함한 가문 전체가 멸문할 수도 있었다. 당장 저기 독봉, 아니 가주 당지혜가 사도육존의 손에 무너진다면 바로 끝장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강기를 뽑아낼 정도의 무위를 드러냈지만, 안타깝게도 사도육존들 중에서도 한 명이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탈명도(奪命刀) 백영산.'
그는 사도육존 중에서도 특히나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한 이였다. 한 번 도를 휘두르면 무조건 하나의 목숨이 스러진다 하여 붙은 별호. 눈에서 불뚱을 튀기며 백영산이 휘두르는 도법은 과연 매서웠다. 흑사련주 유길준이 그의 몸에 꼭 맞게 창안해준 도법일 테지.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도강一 그 검붉은 불길은 엄청나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걸 상대하는 가주 당지혜는 푸르스름한 강기를 손에 두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내공이 심후한 것인지, 싸움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강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공의 분명한 우위에도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백영산이 혼자가 아닌 까닭이었다.
사도육존 중 상명일을 제외한 다섯一 그중 넷이 당지혜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암왕대주 당적휘에게 말했듯 내원을 지키는 진법을 파훼하러 간 것이리라.
백영산이 도강을 두른 공격을 가하고, 당지혜가 막는 틈을 타 나머지 셋이 합공하는 형국이었다. 당지혜는 강기를 두르고 있었기에, 백영산의 공격이 아니고서는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듯해보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당지혜의 내공도 슬슬 바닥을 보이는 것인지 푸르스름한 강기의 색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것은 당계중뿐만이 아니었다.
"독봉. 네년의 질긴 목숨도 여기까지다!"
"드디어 연희와 명일의 넋을 기릴 수 있겠구나."
"당가를 멸문시키면 그 소가주라는 놈이 본련을 찾아오겠지."
"이곳에선 쥐새끼 하나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사도육존들은 각자 할 말을 내뱉으며 병장기와 권각을 내질렀다. 당지혜는 여태까지처럼 수강을 휘둘러 막았지만 그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심지어 약간의 내상을 입은 듯 입가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리는데.
공격을 가한 뒤 반동을 이용해 회전력을 가미한 탈명도 백영산의 도가 거암(巨巖)마저 단번에 포갤 기세로 내리쳐졌다. 그리고 마침 그때 당지혜의 수강이 완전히 흩어졌다. 당지혜의 안색이 완전히 낭패한 기색으로 가득해졌다.
그때.
살벌한 공격이 난무하는 곳으로 뛰어드는 이가 있었으니.
"가주ㅡ"
당지혜의 내공이 고갈될 낌새를 미리 눈치 챘던 당계중이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가루독 따위를 흩뿌리면서 신법을 동원해 당지혜와 백영산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원래라면 다른 사도육존들이 제지했겠지만, 그들은 이미 한 차례 공격을 가한 뒤였기에 당계중을 막지 못했다.
당계중은 백영산의 도격을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그의 손목 내관혈을 노렸다. 적어도 그 궤도에 미미하게라도 영향을 줄 수 있길 바라면서. 그렇게 그의 전력이 담긴 단검이 백영산의 손목을 향해 휘둘러졌지만.
좌아악一
세찬 도격은 그대로 내리그어졌다.
그리고 툭 떨어지는 육편(肉片).
단검을 쥔 팔이었다. 당계중의 오른팔이 어깨 바로 아래부터 잘려 나간 것.
탈명도 백영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몹시 불쾌한 일을 겪은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고작 단검 따위에 그의 도격 진로가 틀어진 것이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영산 역시 당지혜와 공수를 주고받으면서 내력이 크게 소모되었기에 가능한 일.
그의 입장에서 당지혜는 다잡은 고기나 다름없었다. 손목 안쪽에는 내관혈을 비롯해 미세한 도법의 운용을 가능케 하는 주요 혈맥이 자리하고 있었고. 어쭙잖은 단검 따위에 상처를 입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리치는 순간 살짝 도를 틀어 당계중의 어깨를 잘라낸 것이다. 당지혜는 아슬아슬하게 앞섶을 조금 잘렸을 뿐이다.
그래봐야 촌각의 목숨을 부지할 뿐一 그렇게 말하며 재차 백영산이 도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아스라이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삭독현현 (鐵毒顯現 )"
동시에, 백영산을 제외한 사도육존이 끔찍한 몰골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132화<위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