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33화 (133/134)

<133화<농락>>

'무슨...!'

탈명도 백영산은 기겁했다. 불현듯 들려온 음성과 함께 그의 권역을 건드리는 강대한 의념을 느낀 것. 강기(罡氣) 발현의 징조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또한 화경에 이른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인지했다고 해서 온전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백영산이 화경에 오른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의제(義弟)인 상명일이 먼저 화경에 오른 것에 자극을 받아 부단히 수 련을 하긴 했지만, 어떤 벽에 가로막혀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상명일과 유연희의 부고를 전해 듣고는 갑작스레 경지를 뛰어넘게 됐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간혹 작은 깨달음이나 충격이 계기가 되어 벽을 넘고 새로운 경지에 발을 내딛는 경우도 있었다. 백영산처럼.

어쨌거나, 화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백영산은 강기나 의념을 다루는데 그리 익숙하지 못했다. 또한 당가주 당지혜를 상대 하면서 심력을 상당히 소모하기까지 한 상황이었으니. 그의 권역이긴 했으나 심상 무학의 형태로 펼쳐지는 강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한 이유였다.

주변, 그것도 극히 좁은 범위만 겨우 방어할 수 있었다. 백영산의 신경은 다른 사도육존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

백영산과는 흑사파 시절부터 함께해 온 의형제들이자, 사도육존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고강한 무위를 이룩한 이들의 육신이 허무하 게 녹아내렸다. 지금은 멸문하고 없는, 옛 살수 문파들이 흔적을 없앨 때 사용했다는 화골산(化骨散)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다 봐야 했다. 뼈라도 남긴다는 화골산과 달리, 지금 백영산을 제외한 사도육존들은 뼛조각조차 흐물흐물 녹아 그 형체를 잃어 갔으니.

으으ᅳ

알아듣기 힘든, 그러나 끔찍한 고통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한 신음성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비명 을 토해낼 머리통이 금세 녹아 독수가 되어버린 것. 먼저 머리털과 이목구비가 불길에 타들어가는 백지장처럼 사그라들더니, 피부가 녹아내리면서 두개골이 드러나고, 또 그게 녹아내리면서 잠깐이지만 속에 든 뇌수까지 적나라하게 모습을 보였다. 머리통을 잃은 육신 은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댔다. 볼 것도 없이 모두 절명― 사도육존의 최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참담하고, 또 허무했다.

충격적인 광경 때문인지 일순 장내가 조용해지는 듯한데.

어느 샌가 백영산의 앞에는 웬 사내가 나타나 등을 보이고 있었다. 살짝 보이는 옆얼굴만으로도 그가 쉽게 보기 힘든 미남임을 짐작 할 수 있었는데, 조금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그의 생김새가 당가주 당지혜와 미묘하게 닮았다는 것까지 알아보았을 것이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가주... 아니, 어머니.”

“무탈한 것 같아 다행이구나. 걱정했단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답하면서, 당연명은 약간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다. 다른 것보다, 일단 자신의 안위부터 살피는 모친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 다. 가문이 위기에 처해있는 이 상황에서도 모친은 오직 자신을 염려한다. 검신으로서 익숙하진 않았지만, 걱정을 받는 느낌이 달가웠 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야!

안도와 함께 시선을 조금 앞으로 옮겼다. 모친을 지키듯 서 있는 외팔의 사내. 강기에 의해 지져진 듯한 오른 어깨에서는 핏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그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방증이다. 그저 지혈을 하지 못해 빠르게 낯빛이 창백해져 갈 뿐.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을 떠올린 당연명이 입술을 뗐다.

"당계중"

"호원대주 당계중이 소가주를 뵙습니다...!"

당계중은 하나 남은 왼손을 들어 올려 대강 예를 표했다. 비록 한 팔을 잃었으나 의연한 모습― 당연명은 잠시 말없이 그의 오른 어깨를 바라봤다. 가문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모친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신법이 재빠르고, 또 원거리 의 적마저 살상할 수 있는 심상 무학을 지니고 있다지만 모친을 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찰나를 벌어다 준 것이 바로 눈앞의 당계중이었다.

‘명백한 구명지은이다.'

당연명은 모친이 더 이상 강기를 발현하기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아봤었다. 아마 당계중이 없었다면 분명 모친을 살아서 마주하기 힘들었겠지. 더군다나 원래부터 좌수를 주로 쓰는 것이 아닌 이상, 무인에게 있어 오른팔은 거의 생명과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신체 부위였다. 그런 오른팔을 희생하면서까지 모친을 지켜낸 것이다. 한때 장로원 소속이었던 당계중이었지만, 당연명은 더 이상 그의 충절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지혈부터 해라."

"예."

"진심으로 고맙다. 네 공은 절대 잊지 않겠다.”

당연명은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은원을 확실히 하는 당가의 인물로서,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좌수검(左手劍)은 염두에 뒀던 적이 없는데'

검술을 전수하는 것까지 고려하면서, 당연명은 천천히 돌아섰다. 일단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껏 경계하고 있는 듯한 중년의 도객이다. 모친을 죽이려 했던, 그리고 거의 죽일 뻔했던 이다. 당연명은 생각했다. 삭독현현에 쉽게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야겠다고.

"...네놈이, 당연명이구나."

탈명도 백영산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송옥과 반안이 울고 갈 정도의 절세 미청년― 그의 손에 의제인 상명일이 죽었다는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믿기 힘들었다. 다른 의형제들과 달리 제자조차 두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해온 것이 구환교검 상명일이다. 그러한 집념 덕분일까. 마침내 상명일은 천하의 누구와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을,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했다. 련주인 유길준도 인정했었다. 이제 그를 상대할 만한 이는 천하에 스물을 넘지 않을 거라고. 이곳 사천 땅에서는 명실상부 이인자라 할 수 있었고.

그런데 그런 상명일의 검강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부러지고, 또 목숨을 잃었다― 백영산은 격노했다. 상대가 당가의 인물인만큼 독 같은 비열한 수단을 쓴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때마침 운명인지 백영산 자신도 화경에 올라섰기에, 걸음을 재촉하여 련주인 유길준이 오기도 전에 먼저 당가를 쳤다. 유길준이 나서게 되면 너무 쉽게 복수가 끝날 것이 자명했기에. 다른 사도육존, 의형제들도 동의했다.

승산은 충분했다. 본단의 정예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온데다가, 또 이동하는 경로에 위치한 흑사련 휘하 방파들의 병력까지 차출해 서 끌고 왔기에 머릿수는 이쪽이 우위일 수밖에 없었다. 주의할 것은 화경에 올라 상명일의 목숨을 취했다는 소가주 당연명― 그놈 하 나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당가에 도착해보니, 당연명이라는 놈은 보이지 않고 당가주 당지혜가 예상외의 무위를 보이는 게 아닌가? 화경에 오른 것은 그렇다 쳐도, 무슨 절세 영약이라도 복용한 것마냥 강기를 쉼 없이 뽑아댔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납득이 됐다. 어미가 이 정도이니 그 자식도 화경에 오를 수 있었겠지. 온갖 추측이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그간 장로원을 눈속임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숨어서 몰래 힘을 기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당가의 전력이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하기도 했고.

그러나.

드디어 마주하게 된 당연명의 존재감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당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조금 전 등을 돌리고 제 어미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도, 감히 도를 휘둘러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신 감각이 경고를 쏟아낸 까닭이다. 도를 뻗는 즉시 손이 잘려 나가게 될 거라고.

탈명도 백영산은 의형제들의 죽음에 분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장 피부로 찌르는 듯이 느껴지는 생존에 대한 위협이 생생했던 것.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이 오싹함을 더했다. 이러한 감각은 예전 청성파 멸문 당시 유길준이 살의를 드러냈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육존?"

당연명이 물었다. 바닥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그러자 당계중의 잘린 오른팔, 그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당연명의 손아귀로 들어온다. 심후한 내공이 있어야 시전 가능하다는 허공섭물의 기예인 것일까. 적아를 막론하고 경악이 번져나간다.

"탈명도. 백영산이다."

"잡배의 이름 따윈 관심 없다. 심화방에서 내게 죽은 한 놈을 빼면 다섯이 있어야 할 텐데, 왜 넷뿐이지?"

백영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것은 당가 내원의 식솔들의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다. 어떻게든 련주인 유길준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내원을 둘러싼 진법을 공략하러 갔을 겁니다. 소가주.”

빠르게 지혈을 마친 당계중이 말했다. 백영산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당계중을 노려봤다. 사사건건 자신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 는 놈....!

"시간을 끌어볼 셈이었나? 무슨 속셈인지 알겠군. 필시 흑사련주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일 테지."

당연명은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들의 련주― 유길준은 이승을 하직했다.”

"뭐?"

백영산은 놀라 되물었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러나 이어지는 당연명의 말에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진(眞) 흑사장(黑蛇掌)이라더군. 놈의 비기.”

“네놈이 그걸 어떻게...?”

백영산은 대경했다. 흑사장ᅳ 흑사파 시절 두목의 장기였던 흑사장법은 유길준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무학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흑사장법은 무학이나 장법으로 칭하는 것조차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하찮은 손놀림이었다. 그러나 유길준은 흑사장법을 개변하고,

개변하고, 또 개변해 기어코 신공절학으로 탈바꿈시켰다. 대종사의 자질을 지닌 유길준 나름대로 두목을 기리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이 렇듯 의미가 깊은 무학이었기에 유길준은 여간해서는 흑사장을 시전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얼마 전 에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드디어 흑사장을 완성했다며 '진(眞)'자까지 붙이기에 이르렀는데, 이건 사도육존 정도 되는 최측근이 아니 고서야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직접 상대해봤으니까. 제법 파훼가 힘들었지."

"거짓말하지 마라! 길준이 어찌 네놈 따위에게...."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군. 뭐, 황천으로 가보면 알게 될 거다. 네놈들 흑사파 의형제들 간의 우애가 그리 두터우니 마중을 나와 있지 않을까"

"망할 자라 새끼가!"

백영산은 뒷골목 시절에나 내뱉던 욕설을 입에 담았다. 핏발 선 눈으로 당연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기세가 매섭다. 이제 그도 당연 명이 하는 말이 사실이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날 길은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유길준은 오지 않 을 테니까. 살 희망을 내려놓자 뒤늦게 치민 원한이 골수까지 닿는다.

화르륵!

백영산의 도에 검붉은 불길이 치솟는다. 뒤를 생각지 않고 강기를 뽑아낸 것. 죽음을 각오하고 내뿜는 그의 살의(殺意)는 무시무시했다.

당연명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백영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친께 위협을 가한 놈이다. 원래 쉽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꼭 잔혹하게 죽이는 것만이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제놈이 여태 쌓아올린 무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어 떨까. 절망과 치욕 속에서 죽어가도록.

결정을 내린 당연명이 말했다.

“당계중. 잘 봐둬라.”

네게 가르칠 검이다― 그리 말하며 당연명이 단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정면에서는 백영산이 필살의 기세로 도격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당연명의 단검에서는 강기가 아닌 일 척(약 30cm) 가량의 검기만이 솟아 있을 뿐이었는데.

"!!"

백영산은 다급하게 도를 틀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당연명의 단검이 택한 검로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옳았다. 순간적으로 당연명의 단검이 완전히 다른 시간축을 흐르는 듯 매끄럽게 그의 전완을 노리고 들어왔던 것. 미리 도를 틀 지 않았다면 꼼짝 없이 팔을 잘릴 뻔했다.

'이런 미친...!'

백영산은 지금 전신에 호신강기를 두를 여력이 없었다. 검기라 해도 제대로 베이면 당연히 신체가 절단날 수밖에 없다. 도강을 두르 고서 검기를 두른 단검을 막고자 애쓰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미 당연명의 검로는 또 한 번 변화한 뒤였다.

이번엔 복부를 꿰뚫을 듯한 찌르기.

백영산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분명 오른팔 전완을 베는 동작이었는데 언제 검을 회수해서 다시 찔러 들어오고 있단 말인가? 일 단은 막아서는 게 먼저였다. 근육을 쥐어짜내는 감각으로 힘을 줘서 겨우 도의 궤도를 튼다.

그러나 당연명의 검로는 또 왼팔 상완을 노리는 동작으로 변화해 있었으니.

그 순간.

백영산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작정이었다. 이대로 놈의 의중대로 끌려 다니기만 하 는 것보다 승부를 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기를 유지하느라 터무니없는 양의 내공이 소모되고 있었으므로. 왼팔을 내주고 당연명의 목숨을 취할 참이었다.

그러나.

백영산이 대응을 포기한 순간.

그의 왼팔을 타고 오르던 당연명의 검로가 또 한 번 변화했고,

촤아악—!

그대로 백영산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당연명의 단검을 바라보는 탈명도 백영산. 움직임을 멈춘 그의 도에서는 어느새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검기조차 일으키지 않은 당연명에게 속절없이 밀리다 목숨을 빼앗긴 것― 그 사실을 깨달은 백영산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절망감과 치욕감으로 범벅이 된 표정이었다.

당연명의 의도대로.

단검에서 검기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흔들흔들하는 육신 위에 위태하게 놓여있던 백영산의 머리통이 툭 떨어지고 말았고.

쿵 뒤로 넘어진 시신은 목으로 피를 왈칵왈칵 쏟아냈다.

탈명도 백영산은, 그렇게 당연명의 검술에 철저히 농락당한 채 절명했다.

< 133화<농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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