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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8)

프롤로그

번성하고 영화로운 제국, 벤트의 수도.

어젯밤부터 내린 눈은 오늘 아침이 되어서 그쳤으나, 길거리는 날씨의 여파로 꽁꽁 얼어있었다. 이따금 몰아치는 바람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인적이 드문 거리를 밝히는 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린 등불의 희미한 빛뿐이었다.

감색으로 물든 하늘을 따라 사위가 고요한 거리 속에서, 유일하게 해가 쨍쨍한 대낮처럼 환한 장소가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빛이 스며 나오는 입구는 금융 기관처럼 엄숙해 보였으며 그 안쪽으로는 잔뜩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걷는 발걸음들이 보였다. 부러 의도하고 그렇다기보다는 저 안에 걸린 십수 가지의 그림에 집중하여 저도 모르게 소리를 죽인 탓이었다.

그 광경에 깊은 시선을 던지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환하게 퍼지는 달무리와 어우러져 번민을 띠는 것처럼 보였다.

삐딱하게 시가를 물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조각처럼 섬세하고 수려하여 어둠 속에서도 괴괴히 빛을 냈다. 사내는 날카로운 칼바람과 살 떨리는 추위에도 꿈쩍하지 않고 마차에 기대서서 화려한 공간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들어가 보지 않으십니까?”

사내가 가만히 있기를 한참,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는 그를 따라 대기하던 보좌관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사람처럼 깊게 숨을 마신 사내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흩날리듯이 흘러나왔다.

정신이 들기 무섭게 심장이 아릿아릿하다. 질긴 고무를 입에 문 것처럼 질근질근 씹던 시가를 내린 사내가 반도 안 피운 그것을 발로 지져 껐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쏟아지듯 몰려와 배회하던 궐련 향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폐부를 가득 채운 알싸한 향은 여전히 짙었다.

“됐다.”

겨울바람이 나부끼는 길바닥 위로 중저음이 무겁게 울렸다.

단 한 마디로 대화를 갈무리한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살갗을 찢을 것처럼 부는 바람이 사라지자 또다시 몸속에 슬금슬금 열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서코트 아래로 아슬하게 가려진 국부가 어느 틈에 불룩해진 것이 보였다.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자조하며 사내가 피식 웃었다.

‘한 발 빼고 갈까.’

저를 바라보는, 티 없이 맑은 얼굴을 상기하자 발기한 아래가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미리 진정시켜 놓지 않으면 저택에 도착해서도 이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발기한 이 부위를 드러낸 채 마차에서 내리면 어떠려나. 사용인들은 사색이 될 것이고, 시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만 출발해.”

사내, 세드릭이 불룩해진 바지춤을 서코트로 가리며 지시했다.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창밖으로 비치는 화려하고 커다란 장소를 다시금 눈에 담았다.

[코델리아 전시장]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한 공간의 이름이 그의 시야에 스쳤다.

코델리아는 슐라크 공작가에서 주관하는 예술 부문 사업의 업체명이었다. 공작가의 지휘 아래 음악, 미술, 연극을 통튼 모든 예술 산업은 코델리아라는 이름으로 이 수도를 웅장하게 채웠다.

반대로 말하자면 코델리아라고 새겨진 모든 것들이 슐라크 공작가의 소유권 안에 있으며, 그 가문의 주인인 사내의 손바닥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전시장이 사라지자 세드릭은 푹신한 의자에 제대로 몸을 기댔다. 이곳에서 저택까지는 금방일 것이다. 세드릭은 도무지 발기가 가라앉지 않는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느리게 가주었으면 하는 마차가 언제나 그랬듯, 불붙은 것처럼 빠르게 저택으로 향했다. 흉악하고 차가운 쇠창살 대문을 넘어서 널따란 정원을 지난 마차가 다소 급하게 멈추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시녀장이 나와 그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무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세드릭은 느긋해 보이지만 실상은 넓은 보폭으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그사이, 다행히 솟구쳐 오른 바지춤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홀을 지나 계단으로 향하며, 세드릭은 굳이 보지 않아도 뒤를 따르고 있을 시녀장에게 물었다.

“어디 있지?”

“작업실에 계십니다.”

곧바로 침실로 향하려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여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예.”

“식사는?”

“매 때마다 가져다 두기는 하였습니다만…….”

지시대로 챙기기는 했지만, 그걸 먹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쯧, 혀를 차며 올라온 계단을 다시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녀장은 할 말이 없다는 양 두 손을 곱게 포갠 뒤 한 발 물러나 그의 앞에서 비켜섰다.

저를 어렸을 적부터 키우다시피 모셔온 시녀장이 얼마나 유능한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와 관련해서는 모든 게 예민하다 느껴질 정도로 신경이 바짝바짝 곤두서고는 했다.

시녀장이 말한 작업실로 향하며 세드릭은 차가운 밤공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가죽 장갑을 느릿한 손길로 벗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발은 어느새 작업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고리를 붙잡고 문을 열자 진득한 염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들에게는 눈살 찌푸릴 정도로 고약할지 몰라도, 그에게는 오늘 그 어떤 것보다도 반가운 향이었다. 업무를 보면서도 하루 종일 코끝에 맴돌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향기.

그가 들어가고 묵직한 나무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세드릭 슐라크와 그의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문. 오늘따라 유독 거대해 보이는 문을 가만히 주시하던 시녀장은 이내 조용히 어둠 속으로 발을 물렸다.

한편, 세드릭은 한 발 떼기 무섭게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발치에 치인 종이가 팔랑, 소리를 내며 존재를 알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가에 선 채로 안을 살펴보았다. 웬만한 방보다 넓은 공간은 응접실 두 개를 인위적으로 이어 붙여 만든 작업 공간이었다.

그렇게나 너른 공간의 바닥은 이리저리 흩날린 종이로 엉망이었다. 사용인들의 업무 태만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들은 허락 없이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세드릭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다급하고 긴장한 눈빛이었다.

머지않아 그는 기둥 옆 소파에서 뻗어져 나온 가녀린 팔을 발견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달빛을 받으며 축 늘어진 손목 위에는 이 저택에 있는 장신구 중 가장 비싼 값을 자랑하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얼마 전 그녀의 생일날, 그가 직접 선물한 것이었다.

세드릭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금세 소파 앞에 도달했다. 팔만 보이던 인영이 선명해지자 머릿속이 다시금 이런저런 번잡함으로 뒤엉켰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 모로 누운 여인이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세드릭은 찬찬히 다리를 굽혀 앉으며 그녀를 자세히 훔쳐보았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자각조차 못 하는지 칠흑빛 동공이 숨길 틈 없이 노골적이며 뜨거웠다.

그의 시선이 유난히 자주 스치는 곳은, 다름이 아니라 붉은색으로 물든 도톰한 입술이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마디가 굵은 엄지가 말랑한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대로 입술 안쪽까지 밀어 넣고 싶다는 욕망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문득 여인이 ‘으음.’ 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세드릭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어루만지던 입술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작은 몸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발에 치이는 종이를 밟으며 그는 작업실 안쪽에 있는 푹신한 침대 위로 그녀를 내려놓았다.

통창이 설치되어 있어서 어느 때건 추운 기운이 넘실거리는 작업실에서 유일하게 바람이 들지 않는 공간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한번 붓을 들면 도통 작업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그녀 때문에 세드릭이 실내를 개조한 것이었다.

몸이 흔들리자 곤한 잠에서 깼는지 여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잠꼬대를 할 것처럼 오물오물 움직였다. 그러다가 아주 느릿하게, 길고 짙은 속눈썹이 위를 향했다.

몽롱함에 취한 다홍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 오셨어요?”

잠기운에 푹 젖은 목소리가 이처럼 귀를 자극하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기껏 바깥바람으로 억눌러 온 열감이 다시 피어오르는 듯해서,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 표정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여자가 꼬물꼬물 상체를 일으켰다.

“죄송해요. 늦은 시간에 제가 귀찮게…….”

“왜 소파에서 자고 있지?”

그녀의 말을 싹둑 자르며 그가 물었다.

비몽사몽하던 그녀가 일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작업 공간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가리켰다.

“마무리가 조금 아쉬워서 손 좀 본다는 게…….”

“식사는?”

“했어요. 마샤 님이 가져다주셨거든요.”

마샤는 시녀장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식사를 챙겨주었다는 말이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세드릭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잠시 여자를 지켜보다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이불을 붙잡아 그녀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자상한 손길을 따라 다시 침대에 누운 채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세드릭이 저택으로 돌아오면 매번 똑같이 내뱉는 인사였다. 그를 바라보며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웃던 여자는 얼마 안 가 눈을 살그머니 감았다. 잠기운이 여전히 만연한 모양이었다. 또 며칠 날밤을 새운 게 분명하니 굳이 깨울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느덧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쉬는 그녀의 이불을 잘 정리해 주었다.

세드릭은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곧바로 작업실을 나가지 못했다. 창밖의 월광과 협탁 위 꺼져갈 듯 희미한 불빛이 비추는 여자, 로젤리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저어 놓는 번민의 원인은…….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던 찐득한 염료의 냄새마저 그윽한 향기처럼 느껴지게 하는 존재, 바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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