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 (1)
세드릭이 로젤리아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공작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세드릭 슐라크.
그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로서 옹알이를 시작하기 전부터 주위에서 무수한 주목과 관심을 받았다. 비범한 공작의 머리와 아름다운 공작 부인의 외모를 물려받은 그는, 단언컨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차기 공작감이었다.
조금은 삐뚤어질 법도 한데, 그는 공작이 정해놓은 코스를 밟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훌륭히 성장했다. 바른 몸가짐, 가문을 이끌어갈 통솔력, 우아한 기품과 교양.
다른 이들은 세드릭, 그가 진정 품위를 지킬 줄 아는 귀족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출신이나 행보는 당연했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웬만한 영식들도 피해 가지 못하는 사교계의 추문을 한 톨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사생활이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와 친밀하게 지내고, 누가 누구와 반목을 하는지가 굉장한 가십거리인 사교계에서 이성과 관련된 추문은 몇 날 며칠은 회자될 사건이었다.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교계에 발을 들여본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치기는 그 두려움을 모조리 잊게 할 정도로 뜨겁고 열렬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피가 끓는 나이의 영식들은 아름다운 영애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기 바빴으며 영애들끼리 모인 티 파티에서는 제법 멀끔한 영식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한창때인 상황 속에서 가십거리와 추문이란 봄에 부는 바람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준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영애가 수두룩했으나, 벤트 제국에서 그를 본 사람은 손에 꼽았다.
호사가들은 그의 이런 행동을 두고서 갑론을박을 펼쳤다. 누군가는 초대받은 자리에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이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했고, 누군가는 다른 귀족과 어울릴 필요가 없을 만큼 공자 스스로 고귀하다 여기는 자만 때문은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짙어지는 의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귀족 중의 귀족이나 다름없는 세드릭 슐라크에게는 아무도 모를 결함이 있었다. 이것은 그 어떤 호사가들도 추측하지 못할 은밀하고 깊은 비밀이었다.
바로 그가 성적인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학적 용어로는 발기 불능이라고 설명될 이 현상은 그의 불우한 가정사에 기인했다.
남들에게 보이는 화려한 면과 달리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공작가의 가정 환경은 굉장히 불안정했다.
세드릭의 아버지인 슐라크 공작은 아리따운 공작 부인에 대한 집착이 너무도 심했다. 의처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으로 공작 부인을 향해 짙은 집착을 드러내던 공작은, 아내가 다른 사내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폭력적인 성향을 표출했다.
세드릭 슐라크가 그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깨어나 방을 빠져나온 세드릭은 식당으로 가던 도중 살짝 열린 부부의 침실 문을 보게 되었다. 안쪽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어린 세드릭은 호기심을 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어린 그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마치 잔혹한 악마처럼 여린 어머니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소리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였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뒤에서 반복적으로 허리를 쳐올리는 아비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짐승 같았다. 더러운 욕망밖에 남지 않은 끔찍한 짐승 말이다.
세드릭은 그것이 부부간의 성관계이자, 자신이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유모의 설명에 의하면 그 행위는 대단히 애틋하고 아름다운 행위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건 그가 직접 목격한 현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때, 어머니는 분명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본 ‘행위’는 끔찍했고, 축축했으며, 음습했다.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학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헉헉거리며 연약한 어머니를 짓뭉개던 아버지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커가는 내내 그를 괴롭혔다. 우연히 본 지난날, 그 기억 속에서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형언 못 할 죄책감으로 남았다.
그 죄책감이 정점에 도달한 때는 그가 11세경, 공작 부인이 숨을 거두었을 때였다. 그리고 세드릭과 공작 사이가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세드릭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참지 못하고 14세가 되었을 때 저택을 떠나 이웃 제국, 아젠타의 학술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드릭은 자신이 여타 남자아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학 중 깨달았다.
그가 다닌 트라우벤 학술원은 각국의 귀족들이 모여있는 학술원으로, 유학생은 4인 1실로 기숙 생활을 했다. 세드릭과 함께 방을 쓴 영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인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상은 같은 클래스의 예쁜 여학생이 되기도 했고, 혹은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화제는 자연스럽게 은밀한 부분으로 파고들었다.
세드릭은 그날의 대화를 통하여 몽정이나 자위와 같은 불건전한 행위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른 사내들이 머릿속으로 여자를 그리며 페니스를 딱딱하게 세운다는 것도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왜냐하면 세드릭에게는 그런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해서 세드릭 슐라크가 그것을 경험할 수는 없었다. 어떤 야릇한 장면을 상상한다고 해도, 어렸을 적 몰래 보았던 부모님의 충격적인 정사 장면이 그 위를 그림자처럼 덮어버린 탓이었다.
학술원 생활 중 반반한 세드릭에게 접근한 여학생은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세드릭은 그들에게 관심도 없을뿐더러 괜히 제 결함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나돌까 봐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의 결함이 썩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내치고는 상당히 청렴한 생활을 하게 됐다.
4년 후 세드릭 슐라크는 본국인 벤트 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인 슐라크 공작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미 아내가 하늘로 떠난 직후부터 시름시름 앓던 그는 결국 세드릭이 귀국하고서 3년 후 숨을 거두었고, 세드릭은 그간 꾸준히 받았던 후계 수업을 토대로 별 탈 없이 공작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몇 년간 젊은 공작으로서 아버지의 몫을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세드릭에게 어느 날 보좌관이 말했다.
“공작님, 내일 오전에 시렌치움 학술원 전시장에 방문하겠다고 기별을 넣어뒀습니다.”
“시렌치움 학술원? 갑자기 무슨… 아.”
뜬금없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던 세드릭은 곧 그 용건을 떠올렸다.
벤트 제국에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사회적 환원 차원에서 후원이 필요한 학술원의 학생들을 돕는 제도인 ‘후원제’가 존재했다.
이 제도는 순전히 미혼의 귀족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간혹 혼인을 한 귀족들과 학술원 학생 사이에 불상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불륜이 중죄에 속하는 벤트 제국에서는 그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귀족의 대상을 미혼으로 제한했다.
세드릭 또한 작위를 가진 어엿한 귀족이자 미혼이었으니 정식으로 후원제에 참여해야 했다. 그를 위하여 시렌치움 학술원에 방문하기로 한 것이었다.
벤트 제국 내에 후원제를 받는 학술원은 여럿 있었는데 그중 지명률이 가장 높은 곳은 단연 시렌치움 학술원이었다. 학문보다는 예술 영역에 중점을 두는 학술원으로, 학생들 중에는 화가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았다.
후원제가 시작될 때면, 획일적인 학생이 많은 학문 학술원보다 각자의 개성과 특징이 뚜렷한 시렌치움 학술원으로 귀족들의 이목이 몰리고는 했다.
후원 대상을 잘 고르면 후에 후원자는 크나큰 부와 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 후원받은 이가 사회에 나가 성공하게 되면, 그 영광은 자연히 후원자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갑게 얼굴 한 번 맞댄 적 없이 돈만 부쳐도 가능한 법이다. 학도의 길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자본, 즉 뒷배가 되어줄 돈이기 때문이다.
‘귀찮군.’
세드릭은 몰려오는 두통에 눈가를 손으로 주물렀다.
공작가에서 살펴야 할 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시간이 무척이나 빠듯한데 이 와중에 학술원까지 들러야 한다니, 정말 피곤한 제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미혼인 그에게는 이 제도를 피해 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도가 있긴 하겠지만, 괜히 귀찮을 일 하나를 피하려다가 열을 해결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기에 그러지 않는 것이었다.
세드릭은 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내일 전시장을 대충 둘러보다가 아무 학생이나 고르고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 * *
시렌치움 학술원은 그가 타국에서 다녔던 학술원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이곳은 귀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니라 실력만 있으면 두루두루 입학할 수 있는 곳이기에 아무래도 자본력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의 이사장은 어떻게든 고위급 귀족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이들 중 한 사람만 잡아도, 그때부터 피후견인이 졸업할 때까지는 풍족한 지원이 약속되는 셈이니. 그들이 받을 전폭적인 지원은 학술원을 향한 지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드릭은 후원제를 위하여 마련한 전시장으로 향했다. 성전처럼 자못 고요한 공간에는 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작품을 관람하러 오는 전시장에서는 아는 이를 만나도 말을 걸지 않고 묵례로만 인사를 전하는 것이 예의였기에 다들 조용히 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전시장 내부는 대체로 새하얬고, 아무 자국 없는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세드릭은 다른 이들처럼 뒷짐을 진 채 벽에 걸린 그림들을 관람했다. 네모난 캔버스의 밑에는 작품에 대한 소개와 학생의 이름이 단출하게 적혀있었다.
세드릭은 하품이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런 예술 계통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이기에 다채로운 그림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하얀색은 하얀색이고, 까만색은 까만색이라는 느낌이랄까. 솔직히 그의 눈에는 그 작품이 그 작품처럼 보여서 매우 지루했다.
‘아무나 고르고 어서 돌아가야겠군.’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따분함을 느끼며 세드릭은 코너를 돌았다.
그의 발이 향한 곳은 전시장의 구석진 자리로, 다른 작품들보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자리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많은 머릿수가 구석진 자리의 작품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도 유난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고요한 정적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세드릭 또한 벽면에 우두커니 걸린 작품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전시장에 들어온 이래 쭉 나아가던 세드릭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구석진 자리는 탁 트인 전시장 중 유일하게 빛이 차단된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위에 걸린 작품에서는 화려한 빛이 쏟아졌다.
아니, 단순히 빛을 발한다기보다는 사람의 이목을 속수무책으로 잡아당길 정도로 호화로운 매력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구경하는 많은 이들 또한 그런 식으로 작품에 홀린 듯했다.
작품은 특정한 무언가를 그린 게 아니었다. 풍경화 같으면서도 묘하게 추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색감과 색감이 서툴면서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 사이에 모든 시신경이 퐁당 잠긴 것만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느낌에 가슴이 욱신거리며 조여왔다. 누군가 망치로 심장을 내리친 것처럼 심장 박동 수가 높아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세드릭은 매우 불편한 변화를 인지했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설고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고개가 자연스레 아래로 향하는 순간 세드릭은 똑똑히 발견했다. 자신의 바지춤이 불룩해져 있는 것을.
‘…섰다고?’
세드릭은 몹시도 당황하여 말문이 턱 막혔다.
먹이 사슬의 포악한 순리처럼, 너무도 저열하던 부모의 정사를 본 후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말을 하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얼굴로, 그러니까 넋이 나간 얼굴로 작품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림이 전해주는 이상야릇한 감각은 여전했다. 찰나 파도처럼 몰아치던 모멸감과 자괴감은 다시 그림을 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꼭 그림이 그의 이지(理智)를 억지로 붙잡아 황홀경 속에 처넣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렁처럼 깊고 아득한 감각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세드릭의 시선이 자연스레 작품의 밑으로 향했다. 작품의 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종이에 가지런히 써진 이름이 보였다.
“로젤리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낯선 이름이 작품만큼이나 강렬하게 머릿속에 박혔다. 그러는 사이에 아랫도리는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뻐근하게 저려왔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잔뜩 적셨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 * *
세드릭은 일주일간 혼돈에 빠져있었다. 일평생 세워본 적 없는 물건이, 어느 학생의 예술 작품을 보고 섰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탓이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함이었다면 갈수록 자괴감이 강렬한 해일이 되어 그를 덮쳐왔다. 언제나 속전속결로 처리하던 업무의 속도가 느려질 정도로 그는 시시때때로 저답지 않은 혼란에 잠겼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일주일이 지난 아침, 보좌관의 말을 들었을 때였다.
“공작님, 시렌치움 학술원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지난번 방문 때 후원할 학생을 고르지 않으셨다고…….”
세드릭의 깃펜이 우뚝 멈췄다. 그는 깃펜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 일로 결정을 미루십니까? 혹,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책상의 맞은편에 서서 그의 눈치를 살피던 보좌관 제임스가 물었다. 평소 일 처리에 군더더기가 없던 세드릭이 웬일로 별것 아닌 일에서 지지부진하게 굴자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세드릭은 난처한 마음에 설명도 못 하고 이마를 매만졌다. 세드릭의 가신들은 그가 연회 자리를 피하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이유를 그저 어렸을 적 가정사의 영향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대 슐라크 공작의 심각한 의처증은 공작가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정도로 공공연한 문제였다. 어렸을 적 공작과 자주 삐걱거렸던 세드릭이니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긋지긋해졌다거나, 혹은 저 또한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워 그런가 하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남모를 그의 결함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이 가문에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세드릭이 어릴 적부터 공작가 주치의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 브루크였다.
브루크가 그의 결함에 대해 알고 있는 까닭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세드릭이 혹시나 자신의 증상이 어떠한 다른 신체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그에게 자문했기 때문이었다.
브루크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이후 그 감정은 안타까움과 난처함으로 변했다. 부모님의 정사 장면에 충격을 받아 신체적인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앞으로 가주로서 후계자를 양성해야 할 그의 책임에 대한 난처함이었다.
공작 가문으로부터 매년 거액의 급여를 받고 오직 이 집안을 위해 일하기에 항시 대기 중인 브루크는 얼른 세드릭의 집무실을 찾았다.
보좌관을 내보내고, 세드릭은 학술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짧게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브루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설명했다.
“공작님의 그러한 증상은 의학적인 증상이라기보다는… 스탕달 증후군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스탕달 증후군?”
“예. 훌륭한 예술 작품을 보고 순간적으로 극도의 흥분 상태에 휩싸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 흥분의 범위는 정신적이기도 하고 신체적이기도 한데, 공작님의 경우에는 신체적인 증상으로 두드러지는 것이지요.”
“…고작 그림을 보는 것으로 그런 일이 가능해?”
“예술의 경지는 일반인이 헤아려볼 수 없을 만큼 깊은 법이니까요. …그나저나 저는 오히려 이번 일이 공작님께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좋은 기회라니?”
“공작님의 신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세드릭이 가늘게 뜬 눈으로 브루크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취조를 하는 듯한 시선에 브루크는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냈다.
“공작님께서 이제 공식적으로 작위도 물려받으셨으니, 공작 부인을 맞으실 준비를 하셔야지요.”
브루크의 말속에 담긴 의미가 저절로 읽혔다. 공작 부인을 맞이해 아이를 가지려거든 우선적으로 성 기능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세드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의학적인 소견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판단하에 브루크가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아 고민하던 세드릭은 잠시 후, 결심한 듯 보좌관을 불렀다.
“시렌치움에 다시 한번 방문해야겠다.”
제임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준비하겠다며 얼른 발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문 너머를 응시하던 세드릭이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푸르른 하늘을 보자 색채감이 뛰어나던 전시장의 그림이 떠올랐다. 가슴이 쿵쿵 울렸다. 이것이 기대감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세드릭은 알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달리는 마차를 타고 시렌치움 학술원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갑작스러운 슐라크 공작의 방문 소식에 학술원 이사장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문을 알지 못하던 이사장은 후원제를 위해 다시 방문했다는 말에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감돌았다. 지난번 방문 때 후원 학생을 고르지 않고 그냥 돌아갔기에 그가 다른 학술원을 둘러보러 간 줄 안 모양이었다.
“혹시 염두에 두고 온 학생이 있으신지……. 없으시면 제가 우수 학생으로 추천을…….”
“아니.”
그의 단호한 대답에 당장 우수 학생 목록을 꺼내려던 이사장이 움찔했다.
“지난번 전시장을 둘러보았을 때, 로젤리아라는 학생이 있던데.”
세드릭이 누굴 말하든 전부 내어줄 수 있는 이처럼 귀를 쫑긋 기울이던 이사장이 눈을 크게 떴다. 곧 그는 어색한 침음을 반복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로젤리아 학생의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혹 지금 그 학생을 맡고 있는 후원자가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저, 하오나…….”
로젤리아의 이름이 거론된 후로 이사장은 눈에 띄게 안색이 파리해졌다. 꼭 그의 결정을 어떻게든 무르게 하고 싶은 눈치였다.
세드릭은 머뭇거리는 이사장을 채근하는 것처럼 빤히 응시했다. 이사장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로젤리아 학생이 유독 문제가 많아서…….”
“문제?”
“지금까지 연결된 후원자와 불상사가 좀, 빈번히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후원자가 몇 번이나 바뀌기도 했고요.”
이사장은 지금, 세드릭이 고르려는 학생이 꽤나 골치 아픈 문제아라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세드릭이 아무런 말이 없자 이사장은 제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학생 기록부를 뒤져 서류 한 장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서류에는 ‘로젤리아’ 학생에 대해 세세히 나와있었다.
로젤리아에게는 별다른 성이 없었다. 그것으로 유추하건대 그녀는 변변한 성도 가지지 못한 평민인 듯싶었다.
동시에 그러한 연유로 이사장이 그다지 그녀를 곱지 않게 본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신분제가 뚜렷한 제국이니만큼 위아래에 대한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네.”
세드릭은 의미 없는 글자만 나열된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다리를 꼬아 앉으며 차분히 제 뜻을 전했다.
“나는 이 학생을 후원하도록 하지.”
그의 단호한 전언에 이사장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공작이 자신의 학술원에 다니는 학생을 후원하게 된 것이 기쁜지 이사장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면 지금 로젤리아 학생을 부르겠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후원을 해주실 아이니 한번 만나보시는 게 좋겠지요.”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던 세드릭의 가슴이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후원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발걸음한 것은 맞지만 직접 대면하는 것까지는 계획에 없었다.
그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것인지 이사장은 곧장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정처 없이 떠돌던 세드릭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기척을 향해 돌아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든 것은 통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을 잔뜩 머금은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었다. 다음으로 허리춤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흰 피부가 눈에 띄었고, 자그마한 얼굴 안에 자리 잡은 섬세한 이목구비가 그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청초한 색채와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얼굴은 한 폭의 명화처럼 곱고 예뻤다.
그녀, 로젤리아는 꼭 그녀 자신이 그린 그림처럼 생겼다. 한마디로, 사람을 홀릴 줄 아는 얼굴이라는 소리였다.
“로젤리아, 인사드리거라. 앞으로 너를 후원해 주실 슐라크 공작님이시다.”
이사장의 간단한 소개와 지시에 로젤리아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로젤리아의 시선에 얽힌 삐딱함과 불만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홍차를 떠올리게 하는 다홍빛의 눈동자에 차갑게 날이 서있었다.
그녀가 꿈쩍하지 않자 곁에 선 이사장이 어서 빨리 인사 올리지 않으면 혼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강압적인 지시에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로젤리아의 태도에서는 도무지 진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세드릭은 제게 의문 어린 적대감을 표출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 *
3주에 한 번 내지는 한 달에 한 번, 슐라크 공작가에는 선물이 도착한다.
바로 시렌치움 학술원에서 보내는, 정확히 말하자면 로젤리아의 이름이 적혀있는 그녀의 그림이었다. 후원제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되면 후원받는 학생은 감사의 의미로 이렇게 선물을 보내고는 한다.
세드릭은 처음 그녀의 그림이 도착했을 때 몹시도 당황했다. 그가 로젤리아를 후원 대상자로 고른 것은 순전히 그녀의 그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발기 불능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런데 그 문제 해결의 핵심인 그림이 느닷없이 선물로 오니 꼭 제 흑심을 들킨 것만 같았다.
그날 전시장에서 경험했던 대로, 로젤리아의 그림은 여전히 신비로운 힘을 품고 있었다. 주치의 브루크의 말을 빌리자면 스탕달 증후군이라고 하는 그 말도 안 되는 증상은 언제나 한결같이, 꾸준히 일어났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하얀 종이 위로 그려진 선에, 형형색색의 색감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고, 그러다 보면 생전 반응 없던 페니스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이 말 못 할 괴이한 성벽이 있나 고민이 들 정도로 자극적이고, 자괴감 어린 현상이었다.
넓은 저택은 휑하게 느껴질 만큼 장식품이 없었으나 세드릭은 그녀가 보내준 그림을 단 한 점도 걸지 못했다. 제 저택 아무 곳에서나 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층 복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에 그 그림들이 보관되기 시작했다. 그림이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일수록 그 방 안에서 세드릭이 머무는 시간 또한 점점 길어졌다. 그 시간은 순수한 감상을 위한다기보다는 뜨거운 열락을 겪는 시간에 가까웠다.
처음에 그는 곧추선 자신의 성기를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뻑뻑하게 느껴질 만큼 아랫도리가 당기는데도 수음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마른세수를 하고, 한숨을 내쉬고,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달아오른 성기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 시절 같은 방을 썼던 남학생들의 이야기를 상기하며 처음으로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수풀 사이로 용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스스로 보아도 징그러울 만큼 크고, 거칠었다. 세드릭은 속는 셈 치듯 미숙한 손짓으로 기둥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 순간 이전의 답답함을 전부 해소해 주는 짜릿한 희열이 전신을 훑었다. 묵직하게 차오른 숨이 그의 혀끝에서 연달아 터졌다. 어쭙잖게 몇 번 흔든 것으로 사정에 다다른 그는 극락과도 다름없는 쾌락에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제야 세드릭은 왜 남학생들이 이것에 그리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보는, 두려울 정도의 쾌감이었다.
서툰 쾌락의 맛을 알게 된 세드릭은 차츰 그 맛에 중독되었다. 로젤리아의 그림이 보관된 방에서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또 도착했네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그녀를 후원해 준 지 1년이 지났다.
보좌관 제임스는 몇 주가 흘러 도착한 새로운 그림을 열어보고 감탄했다. 로젤리아의 실력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는 바로 이런 때였다.
그뿐이 아니라 그녀의 그림을 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본 이처럼 누구든지 매료되어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매번 그림을 보내주는데, 공작님께서도 선물을 하나 하는 건 어떠십니까?”
“선물?”
꽤 혹하는 제안이었다. 세드릭은 제임스에게 로젤리아 또래의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넌지시 물었다.
“무얼 주면 좋아하지?”
일평생 여자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기에 대체 어떤 선물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턱을 문지르면서까지 고심에 잠긴 그를 바라보던 제임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장신구나 드레스가 좋지 않을까요?”
세드릭은 전에 보았던 로젤리아를 떠올렸다.
학술원 교복을 입는 그녀에게 장신구나 드레스는 너무 시기 이른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신분이 평민인 그녀에게 그것들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혹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기에 신중해야 했다.
제임스는 이후 몇 번이나 의견을 제시했지만 전부 세드릭의 성에 차지 않았다. 제가 애초에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은 마음에 어색하게 웃던 제임스는 불현듯 결이 다른 선물을 떠올렸다.
“저택으로 초대하는 건 어떠십니까?”
충분한 성의를 보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임스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엷게 웃었다.
그의 허락을 기점으로, 로젤리아를 초대하기 위한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주일 후, 화창한 오후.
세드릭은 손님이 도착했다는 말에 일찍이 정원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그가 바로 몸을 일으키기에는 당장 손봐야 할 서류의 양이 상당했다.
세드릭은 자신이 조금 늦을 것이라는 전언과 함께 미리 마련해 둔 다과를 아낌없이 내어주라고 지시했다.
사각사각.
그렇게 마지막 서류 검토를 마친 세드릭은 느지막이 몸을 일으켰다. 한 자세로 몇십 분간 있었더니 목이 여간 뻐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가봐야 했다. 오늘은 그의 초대 서신을 받고 로젤리아가 저택에 온 날이었으니까.
창밖으로 확인한 날씨는 나와서 보니 더욱 좋았다. 그들의 재회를 환영이라도 하듯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살이 녹음 사이로 잔뜩 스며들었다. 정원사의 철저한 관리하에서 정원은 아주 멋들어진 절경을 이뤄냈다.
정문을 빠져나와 잠시 걸으니 정원에 놓인 파티 테이블 하나가 등장했다. 주로 산책을 좋아하는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테이블이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자그마한 뒤태가 보였다.
“늦어서 미안하군.”
신경 써 준비하라 이른 테이블보 위로, 갖가지의 디저트들과 금빛 테두리가 아롱아롱 새겨진 찻잔이 놓여있었다. 세드릭은 등을 보이던 로젤리아의 맞은편 의자를 빼내며 넌지시 말했다.
연신 눈을 내리깔고 있던 로젤리아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그녀는 세드릭이 맞은편에 앉기 무섭게 몸을 일으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꼭 형식적인 말을 쥐어 짜내듯 딱딱하고,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거기다가 표정은 또 어떠한가.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억지로 온 티가 팍팍 났다.
세드릭은 학술원에서의 첫 만남이 떠올라 그녀를 바라보다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로젤리아는 그를 힐끔 보고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착석했다.
“차는 입에 좀 맞나?”
그가 로젤리아의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그녀가 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앞에 놓인 차는, 한 입도 대지 않은 듯 양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챈 듯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로젤리아가 마지못해 답했다.
“…네.”
세드릭은 그녀가 현재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초대를 해놓고 불편하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그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선물로 준 작품은 고맙구나. 저택으로 직접 보내줄 줄은 몰랐는데.”
“그건… 제가 보낸 게 아니라서요.”
“그럼?”
로젤리아는 이마저도 답하기 곤란한지 한참이나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모른 척 물은 것과 달리 세드릭도 잘 알고 있었다. 학술원으로 들어오는 거액의 후원을 유지하기 위해 이사장이 지시한 일일 터였다.
“그래도 네 이름으로 보낸 것이니, 네게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뜻밖의 말에 로젤리아가 다시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마치 들짐승 앞에 놓인 초식 동물처럼 눈치를 살피는 게 여실한 태도였다.
세드릭은 찻잔을 기울이며 차분히 테이블 위를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차뿐만 아니라 그의 지시하에 테이블을 채운 모든 다과가 내온 상태 그대로였다.
로젤리아는 세드릭의 호의가 역겹기라도 한 것처럼 손대기를 조용히 거부했다. 불분명한 호의가 불편한 것처럼, 분명한 적대감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늘 초대를 한 게 마음에 들지 않나?”
평온하지만 직설적으로 묻는 말에 찻잔 표면을 덧그리던 로젤리아의 손짓이 멈칫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끝내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그게 세드릭에게는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읽혀서, 그는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로젤리아가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순진한 다홍빛 눈동자가 왜 웃느냐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표정으로는 오기 싫었다는 게 보이는데 대답은 전혀 달라서 말이야.”
“…….”
“내가 부른 게 여간 맘에 들지 않았나 보구나. 시간을 빼앗아서 그런가? 미안하게 됐어.”
담담히 건넨 사과에도 로젤리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드릭은 그녀의 반응을 채근하지 않고 정원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요 며칠 확인하지 못한 사이 예쁜 장미가 곳곳에 피어있었다. 눈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장미의 꽃송이 밑으로 금방이라도 살갗을 찢으려는 가시가 잔뜩 돋쳐있었다.
마치 로젤리아 같았다. 작품과 본인의 외모는 시선을 잡아끌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그 행동에는 타인을 경계하는 가시만이 잔뜩 있었다.
“…저는.”
별안간 로젤리아가 입을 열었다. 세드릭이 물어야만 답을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향해 먼저 운을 뗀 것이다.
“공작님께서 저를 왜 후원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로젤리아는 그에게 말을 걸면서도 그를 응시하지 않았다. 오로지 세드릭의 일방적인 시선만이 이어졌다. 간단히 말한 그녀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한참이나 입술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세드릭은 향긋한 차를 마시며 얌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무얼 원하느냐니, 물음이 다소 모호했다.
세드릭은 순간 질문이 향하는 대상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로젤리아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로젤리아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 아닌가. 어찌 됐건 그녀는 세드릭의 후원을 받는 입장이니까.
세드릭이 지긋한 시선으로 그녀를 담으며 물었다.
“내가 너에게 특별히 원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 굳이 저를 후원해 주실 이유가 뭐가 있나요?”
“글쎄. 네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답하니 로젤리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진솔한 세드릭의 답에도 허무맹랑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비릿한 실소를 머금었다.
“다들 말로는 그러죠.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이고, 주변에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다들?”
“공작님은 제 첫 후원자가 아니세요. 전 공작님 같은 후원자들을 많이 만나봤어요. 처음에는 하나같이 작품을 보고 후원을 해준다고 하세요. 하지만 아니잖아요.”
“결국 원하는 건 따로 있으신 게 아닌가요?”
언뜻 그녀의 눈빛에서 묘한 기색이 스쳤다.
세드릭은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가 학술원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로젤리아에 관하여 이사장이 했던 얘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로젤리아에게는 후원자가 있었지만, 결국은 후원자가 바뀌었다. 그리고 로젤리아는 새로운 후원자인 세드릭의 초대를 받아서 여기까지 왔음에도 태도가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순전히 그녀를 위해 준비한 차와 다과 또한 전혀 건들지 않았다. 그 태도는 단순히 무시를 넘어선, 일종의 거부 수준이었다.
곰곰이 헤아려보던 세드릭은 일순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생각에 설마설마하고 생각했다. 눈치가 빠른 것이 이럴 때는 꽤나 곤혹스러웠다.
“내가 너에게 성적으로 무언가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후원제에서 꾸준히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후원자와 후원 대상 간의 성범죄였다. 아무래도 금전 관계로 엮인 갑과 을이기에 후원자가 그릇된 욕심을 품는다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후원자 중 나쁜 마음을 먹고 학생들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상당했다.
세드릭은 그녀가 그러한 사건의 피해자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젤리아의 표정이 더없이 굳어지는 걸 보며 그는 제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너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세드릭은 수상한 것이 들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듯 자신이 먼저 느리게 쿠키를 집어 들었다. 살짝 베어 물자 혀를 녹여 없앨 듯한 단맛이 입 안에 잔뜩 퍼졌다. 평소 단것을 싫어하는 그에게는 고역인 맛이었다.
그럼에도 세드릭은 태연하게 쿠키를 씹어서 마침내 목 안으로 삼켰다. 초콜릿 특유의 꺼글꺼끌한 맛이 입 안에서 가득 맴돌았지만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저 네 작품이 맘에 들었을 뿐이고, 그걸 그린 네가 눈에 든 것뿐이야.”
그의 해명에도 다홍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심 어린 기색이 가득했다.
세드릭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저보다 여섯 살 어린, 더군다나 여자인 아이를 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것이 그녀가 겪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세드릭은 의심을 잔뜩 머금은 그녀에게 최대한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애초에 네 작품을 보고 불능이던 내 성기가 갑자기 정상이 되었다고 할 수 없을뿐더러, 그간 후원자와의 관계에서 성적으로 상처를 받은 그녀에게 그런 사정은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한숨과 함께 계획에도 없는 말을 끄집어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후에 공작가에서 주관할 예술 사업을 위해서 네 작품이 필요해. 네 작품은 귀족들 간의 거래 물품으로 쓰일 예정이지.”
“거래… 물품이라니요?”
“정확히는 자금 세탁용.”
로젤리아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느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금 세탁이라니, 그건 엄연한 불법이었다.
그녀가 정말 깜짝 놀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드릭은 별것 아닌 일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초연했다. 오히려 뜻밖의 거창한 계획을 듣게 된 로젤리아가 어버버하며 당황해했다.
“그, 그런 걸 저한테 말하셔도 되는 건가요? 제가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퍼뜨리면 어쩌시려고…….”
“내가 언제든 네 약점을 쥘 수 있는 입장이듯, 너한테도 내 약점을 쥐여주는 거야.”
“…….”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할 것 없다고.”
후원 관계는 서류상으로도 금전상으로도 갑과 을이 명확한 관계였다. 그러니 로젤리아가 일방적으로 후원을 받는 을의 입장에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위치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의 경계심을 풀어주고자 세드릭은 직접 제 약점을 드러내 주었다. 이건 검을 쥔 적수에게 팔을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사실 세드릭은 그녀의 귀한 작품을 그런 더러운 용도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실제 목적은 자신의 결함을 고쳐보기 위해서였으나 지금은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또 그녀의 경계심을 푸는 게 관계를 이어가는 데에 필요한 요소인 듯하니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세드릭은 자신이 왜 이렇게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성적인 충동을 느끼게 해줬다고 하지만, 그게 이토록 필사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을 터. 저조차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그녀와의 관계가 허무하게 끊기는 것은 원치 않았다.
로젤리아는 자신의 약점을 직접 그녀의 손아귀에 밀어 넣어준 것이라는 그의 말에 넋이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얼이 빠져있던 로젤리아는 잠시 후, 간단한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껏 손 한 번 대지 않은 쿠키를 집어 든 것이다.
그것을 조심스레 베어 물며 시선을 맞춰오는데, 세드릭은 그런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가슴 안쪽이 간지럽고, 왠지 모르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는.
그게 ‘사랑스럽다’는 감정이란 것을 깨달은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