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그 (2)
세드릭은 본격적으로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으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온종일 빼곡한 서류 더미와 씨름을 벌여야 했으며 그 와중에도 둘러봐야 할 곳이 수두룩했다.
그런 그의 유일한 휴식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로젤리아의 그림이 빼곡히 걸린 방에서 한숨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달콤한 음식을 맛보았을 때 느끼는 황홀함처럼, 쾌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는 최근에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간 몇십 년 동안 해묵었던 갈증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기에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그림을 보면 묘한 충동에 휩싸이기는 하지만, 전처럼 벼랑 끝에 몰린 듯 감정이 극한까지 다다르지는 않았다.
로젤리아의 그림 솜씨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예전에도 완벽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정말 어느 전시장에 내걸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보좌관 제임스의 정보에 의하면 로젤리아는 시렌치움 학술원의 학생 중에서도 대단히 우수한 성적에 속한다고 한다. 학술원에서 주최하는 전시회가 열리기만 하면 그녀의 그림이 몰표를 받는다고 들었다. 구경꾼의 감정을 매혹적으로 건드릴 줄 아는 재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일과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세드릭은 보좌관으로부터 내일 일정에 관하여 간단히 보고를 받은 후, 곧장 그림이 보관된 방으로 향했다.
예전만 해도 그림을 걸 공간이 충분했는데 이제는 자리가 없어서 벽면에 일렬로 기대놓아야 할 정도로 선물로 온 그림 수가 상당했다. 그리고 마침, 오늘 또 로젤리아에게서 그림이 도착했다.
세드릭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그림의 포장을 벗겨냈다. 어두운 곳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색채감이 뚜렷했다. 로젤리아는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색의 조화를 기막히게 표현할 줄 알았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림을 들어 올리던 세드릭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것에 눈길을 돌렸다. 아이보리 색깔의 네모난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세드릭은 픽 웃었다.
일전의 대화로 어느 정도 경계심이 누그러진 건지 로젤리아는 가끔가다 선물에 서신을 동봉해 보내기도 했다. 내용은 소소했다. 그림에 대한 짧은 소개와 그녀가 요즘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감사 인사가 다였다.
언제나 한결같은 내용임에도 세드릭은 꼭 깜짝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이 되고는 했다.
그는 섬세한 손길로 서신을 펼쳤다. 오늘도 작품에 대한 소개로 서두가 시작되었다. 예술 영역에 큰 흥미는 없는 세드릭이지만 그녀가 보내주는 서신만큼은 꼭 조예가 깊은 사람처럼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읽고는 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려는지, 내리쬐는 햇볕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틈새에 감기가 잘 든다고 하니 모쪼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로젤리아가 보낸 서신을 읽다 보면 자연히 또랑또랑한 그 음성이 떠오른다. 한없이 머뭇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하여 제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는 명랑한 목소리.
세드릭은 같은 내용의 서신을 몇 번이나 읽어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달이 휘영청 뜬 밤하늘이 청명했다. 곧 여름이 올 것이라는 그녀의 말대로, 쾌청한 밤이었다.
세드릭이 로젤리아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 서신을 받고서 얼마 후의 일이었다.
조만간 여름이 올 것이라는 로젤리아의 서신대로 요 며칠 날이 급격하게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세드릭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으며 사용인들이 일을 하다가 이마를 닦아 내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여름의 날씨는 변덕쟁이와도 같았다. 기승을 부리듯 해가 쨍쨍 떠있다가도 물이 담긴 양동이를 뒤집듯 비가 예고 없이 와르르 내리기도 했다.
로젤리아가 갑자기 공작저를 찾아온 건 서늘한 폭우가 살벌하게 쏟아지던 때였다.
“공작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만.”
오늘은 비가 오기에 나가지 않고 정무를 보던 세드릭은 시녀장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의아하다는 듯 창밖을 돌아보았다.
“이 날씨에?”
비는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그 어떤 반가운 이가 왔다 해도 맘 편히 반겨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시녀장 마샤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한 세드릭이 깃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내내 문 옆에 숨어있던 로젤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드릭은 난데없는 로젤리아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하다가도 어스름한 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두 분 이야기가 끝나시거든 불러주세요.”
마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로젤리아를 안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지난번 다과를 먹던 때보다도 더욱 공기가 무거웠다.
“…죄송해요.”
문가에 서있던 로젤리아가 두 손을 포갠 채로 사과를 전했다. 여기까지 비를 맞고 온 것인지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더불어 단정한 학술원 교복도 잔뜩 젖어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말에 세드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곧장 로젤리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그녀는 겁을 먹은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세드릭은 그녀를 지나쳐 집무실 문을 열었다.
“마샤, 수건을 가져와. 그리고…….”
세드릭이 제 뒤에 있는 로젤리아를 흘끗 돌아보았다.
어딘가에 쓸린 것처럼 발그스름하게 부은 눈가, 날카로운 것으로 긁힌 자국이 선명한 뺨, 그리고 여린 살갗이 터져 핏방울이 맺힌 입술까지.
아롱아롱한 등불 빛에 비치는 얼굴은 상처로 엉망이었다.
“브루크를… 아니, 됐어. 수건만 부탁하지.”
마샤에게 지시를 내린 세드릭은 집무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여전히 어색하게 문가에 서있는 로젤리아를 데리고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소파에 앉힌 세드릭은 부지깽이를 들어 불길이 상당히 약해진 벽난로에 화기를 더했다.
그사이 마샤가 조용히 들어와 로젤리아에게 수건을 건넸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살뜰히 챙기는 행동과 달리 목소리는 사뭇 차가웠다. 로젤리아는 그것이 저를 향해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샤가 두고 간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닦으며 답했다.
“싸웠거든요.”
“누구랑.”
“음… 동급생이요.”
화르르.
벽난로가 잘 타오르는 것을 확인한 세드릭이 그제야 등을 돌렸다. 불빛이 반사되는 그의 얼굴이 불꽃처럼 새빨개서 꼭 분노가 가득 차오른 사람 같았다.
“누가 널 괴롭혀?”
그의 심각한 질문에 로젤리아는 풋, 하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 그녀가 웃자 세드릭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휘어진 입꼬리를 애써 가다듬은 로젤리아는 수건을 머리에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괴롭히는 게 아니라 싸운 거예요.”
“그거랑 그게 뭐가 달라.”
“당연히 다르죠. 괴롭히는 건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지만 싸운 건 저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라고요.”
로젤리아가 차이를 확실히 증명하려는 것처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의 의기소침한 모습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 감쪽같은 태세 전환에 진지했던 세드릭 또한 어느새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앉은 소파를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커다란 손에는 연고가 들려있었다.
세드릭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얼굴 들어.”
로젤리아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거절하자 세드릭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주는 중압감에 못 이겨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세드릭이 간단히 치료를 해주는 동안 로젤리아는 그를 힐끔힐끔 보았다.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갈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그 말, 아까도 했던 것 같은데.”
하얀 뺨에 길게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그가 작게 웃었다. 로젤리아는 뻘쭘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조금씩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어제 학술원이 방학을 했어요. 저는 따로 돌아갈 집이 없어서 방학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동급생하고 싸우는 바람에 강제 퇴실 조치를 받았거든요. 갑자기 나와야 하는 바람에 다른 방도가 없었어요.”
“집이 왜 없어?”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집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이야기에 세드릭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가 조금 침잠한 시선으로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세드릭 또한 괜한 질문을 했다는 마음을 버리고, 천연덕스럽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나도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로젤리아가 다시 한번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상처 부위를 세게 찔리는 바람에 아프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본인이 그리는 그림의 색조만큼이나 풍부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누가 너를 퇴실시켰지?”
“이사장님이요. 제가 싸운 애가 이사장님의 조카였거든요.”
마지막으로 입술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준 세드릭이 연고 뚜껑을 닫고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싸운 이유는?”
동급생과 다투었다는 사실은 잘도 말하면서, 아까부터 묘하게 싸운 이유에 대해서는 피하고 있는 그녀였다. 예상대로 로젤리아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일전 다과 자리에서의 그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로젤리아.”
대답을 채근하듯 이름을 부르자 로젤리아는 깜짝 놀란 것처럼 고개를 훅 들어 올렸다.
그녀의 생생한 반응을 보고서야 세드릭은 자신이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심코 불렀는데 그 이름을 발음하는 입술이 너무도 낯설어서 순간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서로 적잖이 놀라 실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 로젤리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침음을 냈다.
“걔가 제 그림을 멋대로 찢었거든요.”
세드릭은 그것이 이토록 격한 몸싸움을 할 정도로 기분이 상할 이유가 되는가 싶었으나, 그녀의 기분을 고려하여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공작님께 보내드릴 그림이었는데…….”
하지만 그 마음은 바로 이어진 로젤리아의 말에 깡그리 지워졌다.
“그 학생 이름이 뭐라고?”
로젤리아는 잠자코 듣다가 돌연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또… 아니, 이건 별거 아니에요.”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금방 입을 다시 닫아버렸다. 스스로 별것 아니라고 하니 세드릭은 더 묻지 않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낼 곳이 없다면 이곳에서 지내도 좋아.”
“정말이요?”
“애초에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그의 넉살맞은 반문에 로젤리아는 아니라는 말 없이 배시시 웃었다. 세드릭은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녀가 먼저 꺼내지 않으면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마샤.”
세드릭은 시녀장을 불러 로젤리아를 위한 침실을 마련해 주라 지시했다. 로젤리아가 그를 향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인 뒤 마샤를 따라 나섰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적대심 어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그녀가 사라진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갈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그 말은 적어도 로젤리아에게 세드릭이 있는 이곳은 안전하다고 인식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곳.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택한 안식처.
그러한 생각이 들자 희한하게도 흡족감이 들었다. 보살펴 주던 가여운 새끼 고양이가 처음으로 저를 따라와 준 기분이랄까.
‘새끼 고양이라.’
퍽 잘 어울리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세드릭은 조용히 발을 옮겼다.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착석하여 서류를 살피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둥둥 떠다녔다. 조금 전만 해도 서류 속으로 파고들 것처럼 바짝바짝 돋아나던 집중력이 희한하리만치 안개처럼 흩어졌다.
뇌리 속에 로젤리아와 나눈 대화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누가 너를 퇴실시켰지?’
‘이사장님이요. 제가 싸운 애가 이사장님의 조카였거든요.’
그리 답하는 로젤리아의 얼굴은 억울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이와 같은 차별을 당하는 게 결코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오늘 사건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이사장은 불상사가 발생했을 시 한 번도 로젤리아의 편을 든 적이 없을 것이다. 신분이 높은 공작에게 잘 보이려고 로젤리아를 압박하는 것만 봐도 뻔한 일이었다.
세드릭은 어느새 깃펜으로 흰 종이 위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동공이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는 곧 제임스를 집무실로 불러 들였다.
“오늘 시렌치움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조사해 봐.”
분명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학술원과 얽히는 일은 모조리 귀찮은 것으로 치부하던 그였으나 지금은 이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업무 지시일거라 생각한 제임스는 의외의 명령에 눈을 끔벅거리다가 얼른 그리하겠다 답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인적이 사라지고 다시 적막이 감돌자 서늘한 빗소리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 * *
“로젤리아 양과 싸운 학생, 베시 위즈리는 이사장의 조카가 맞답니다. 몸싸움을 벌인 이유도 공작님이 아시는 대로 그림을 찢어서가 맞고요. 그런데 보아하니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라 둘 사이에 심한 언쟁이 있었다는데…….”
“언쟁?”
“예. 저, 베시 위즈리 학생이 로젤리아 양에게 후원자 관련하여 먼저 시비를 걸었답니다. 그리고 그게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고요.”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은 오후, 제임스는 며칠 전의 지시로 발 빠르게 구해 온 정보를 상관의 앞에서 읊었다.
“후원자라니?”
“그 부분은 상당히 모욕적인지라 제가 입에 올리기는 좀 그래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관자놀이를 짚은 채 보고서를 읽는 세드릭의 시선이 점점 냉랭해졌다. 그 상황에 있던 학생에게서 구한 정보인지 보고서 기록은 꽤나 자세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후원자를 꼬셨냐, 몸을 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몸을 함부로 굴리는 애가 우리 학술원에 있다는 게 수치스럽다, 더럽다, 천박하다…….
읽는 것만으로도 그 입술의 천박함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세드릭은 골이 지끈거렸다. 저를 찾아왔던 며칠 전 밤, 로젤리아가 말을 하려다 말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베시 위즈리와 이런 말다툼이 있었다고 말하려다가 관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공작님, 혹시 몰라 함께 조사해 두었습니다.”
세드릭이 살펴보던 보고서 위로 또 다른 종이가 놓였다. 그가 눈만 들어 올려 이게 무어냐 시선으로 물었다.
“일전에 로젤리아 양을 후원하던 리베 백작에 관한 서류입니다.”
제임스는 혹시 제가 괜한 일을 벌인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기에 세드릭은 두말없이 서류를 채 갔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제임스가 가져온 서류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리베 백작이 그녀를 후원하던 도중 발생한 일에 관하여 쓰여있었다.
결론적으로 세드릭은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베시 위즈리의 천박한 언사를 읽는 것보다도 더욱 심기가 불편했다.
리베 백작의 소행을 보고 있자니 로젤리아가 왜 그렇게 세드릭을 경계하고 불편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후원 도중 툭하면 로젤리아를 저택으로 불러들였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매번 사색이 된 로젤리아가 다급히 저택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좋아할 줄 알고 한 행동이 괜한 짓이었군.’
로젤리아는 리베 백작처럼 자신을 저택으로 초대한 세드릭의 행동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세드릭,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끔찍한 리베 백작과 겹쳐 보였을 터. 그러니 차도, 디저트도 손대지 않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뾰족 세운 채 스스로를 방어한 것이었다.
“우리 사업 중 리베 백작가와 연결된 것이 있나?”
“예. 저희 상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항목이 꽤 있습니다.”
“다 끊어.”
“전부… 말입니까?”
제임스는 상관이 화가 난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일부도 아니고 전부를 끊으라 할 줄은 몰랐다. 서로의 사업과 투자가 촘촘하고 치밀하게 얽혀있는 수도에서 그런 식의 단절은 완전한 반목을 뜻했다. 그것은 자칫하면 공작가에도 좋지 못한 결과로 돌아올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드릭은 두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마쳤다.
“…예, 알겠습니다.”
조금 더 설득을 해볼까 했지만, 제임스는 얼마 안 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 또한 보고서를 정리하며 리베 백작의 추행에 대해 읽었기에 자비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로젤리아와 비슷한 또래의 여동생이 있는 그이기에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제임스가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세드릭은 오늘 치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러려고 했다. 또다시 머릿속을 이리저리 뒤엉키게 만드는 그녀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녀가 이곳에 없었다면 피어오르는 잡생각을 어떻게든 밀어내고 정무에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지금 그가 일하는 집무실 바로 밑, 2층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가 발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가슴을 뒤흔들었다.
세드릭은 고민 끝에 집무실을 빠져나와 2층으로 향했다. 마샤가 안내해 준 방으로 향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세드릭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살그머니 벌어지는 문틈으로 낯선 냄새가 풍겼다. 추적추적 고인 물기를 떠올리게 하는 끈적한… 염료의 냄새였다.
로젤리아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자그마한 바탕에 얼마나 집중을 하는지 그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듯했다.
그는 잠시 문가에 기대서서 그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윤기 있게 흘러내리는 연갈색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마샤가 내어준 간편한 드레스 위에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누가 보아도 완벽한 화가의 모습이었다. 로젤리아가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그림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공작가의 정원을 빼곡히 담고 있었다.
“로젤리아.”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뒤를 돌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세드릭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불렀다. 캔버스 위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던 로젤리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세드릭은 최대한 그녀의 그림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혹시나 평소처럼 저 그림에 매료되어 그녀 앞에서는 절대 보이면 안 될, 망할 스탕달 증후군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는 그림이 보이지 않는 쪽 소파로 가 앉았다.
붓과 염료를 간단히 정리한 로젤리아는 선뜻 옆자리에 앉지 못하고 근처에 섰다.
“왜 그러고 있어?”
로젤리아는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허락도 없이 옆에 앉아도 되는 건가 해서요…….”
세드릭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폭우가 내리던 지난 밤에는 잘도 옆에 앉던 그녀가 이제와 주저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웃는지 충분히 알았는지 로젤리아가 입술을 쭉 늘리며 변명하듯 속삭였다.
“그, 그날은 저도 좀 정신이 없어서……. 예전에 허락 없이 앉는 건 버릇없는 행동이라고 혼났거든요.”
세드릭은 이런 일로 그녀를 혼낸 것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조금 전 보고를 받았던 리베 백작, 아니면 그 이전에 그녀를 후원해 주던 귀족 중 한 명일 것이다.
“누가 널 혼냈지? 리베 백작?”
마주 잡은 손을 꾸물거리던 로젤리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꼭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의미를 내포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학술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들었어.”
혹 리베 백작에 대한 화제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세드릭은 태연하게 말문을 돌렸다. 이 사실 또한 놀라웠는지 로젤리아의 크게 뜬 눈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보고서로만 본 것과 달리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로젤리아를 빤히 바라보는데, 돌연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이 시점에서 사과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드릭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는 것인지 그녀의 낯빛은 먹구름이 몰려온 하늘처럼 어둡고 시무룩했다.
“왜 사과를 하지?”
세드릭은 혹시 자신이 놓칠 만한 부분이 있었나 대화를 되짚었으나 걸리는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되묻자 로젤리아는 염료가 군데군데 묻은 하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 때문에 공작님께서 듣지 않으셔도 될 말을 들었잖아요.”
그런 말은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녀가 들은 게 아닌가?
턱을 괸 세드릭은 로젤리아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한껏 가시를 세울 때는 마냥 삐딱하게 보이던 그녀는 사실 제 나이대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세드릭이 불시에 손을 뻗어 로젤리아를 끌어당겼다.
로젤리아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는 사이 그녀는 세드릭의 옆에 앉게 되었다.
“난 사과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하지만…….”
“설마 고작 학생 몇 명이 나에 대해 수군거린 걸로 내 평판에 타격이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런 순진한 생각을 했느냐는 듯 그의 음성이 평온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세드릭은 넋이 나간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두드려 정신을 깨웠다.
“너무 사과를 자주 해.”
미처 몰랐던 버릇에 대해 알게 된 것처럼 로젤리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세드릭의 손길이 닿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아…….’ 하고 침음을 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지금 그녀의 뇌리 속에는 제가 사과를 건넨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사과할 일이 아니면, 죄송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녀가 지금껏 사과를 한 일은 전혀 그럴 만한 일들이 아니었다.
후원자를 제외하고 갈 곳이 없는 애가 후원자를 찾아온 것이 왜 죄송한가. 다른 학생이 먼저 세드릭을 힐난하는 말을 꺼낸 일에 대해 왜 그녀가 죄송해하는가.
세드릭의 관점에서 그것들은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정 어려우면 사과 대신 다른 말을 해.”
“다른 말이요?”
“감사하다든지, 많잖아.”
세드릭은 그녀의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이상하게도 싫었다. 다른 말로 대체해도 되니 그 말은 하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로.
적어도 그녀의 사과가 저를 향할 때는 참을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것을 상상하니 목뒤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명백히 기분이 언짢아지는 증거였다.
“어쨌든, 사과를 받으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
“아, 네.”
“베시 위즈리가 평소에도 널 자주 괴롭혔나?”
처음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자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남의 눈치를 보며 말할 필요가 없는 위치인데도, 세드릭은 기민하게 로젤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로젤리아는 그가 학술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얘기를 꺼낼 때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인지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괴롭힌 게 아니라 싸운 거예요.”
세드릭 또한 저번처럼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얘기할까 하다가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잠자코 있었다. 머뭇거리던 로젤리아는 이내 무겁게 말문을 뗐다.
“베시 위즈리는 제가 중도 편입하기 전까지 늘 학술제 1등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같은 클래스로 편입을 하고, 학술제에서 1등을 했더니 그다음부터 눈에 띄게 시비를 걸더라고요. 베시 위즈리가 저한테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게 신분밖에 없으니 늘 그런 것들로만 말꼬리를 잡았어요.”
로젤리아의 다홍빛 눈동자가 빗물이 주르륵 떨어지는 창밖에 꽂혔다.
“시비를 걸어오는 걸 일부러 무시했더니 어느 날부터는 그림을 찢거나 도구를 망가뜨리는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걔가 이사장의 조카인 이상 대응해 봤자 저만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늘 참았는데…….”
“…….”
“그날은 제가 공작님께 보낼 서신을 몰래 훔쳐봤나 봐요. 그걸 같은 클래스 애들이 다 들을 만큼 크게 읽더니, 비아냥거렸어요.”
그녀는 베시 위즈리가 비아냥거린 내용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세드릭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임스가 건넨 보고서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상세히 적혀있었으니.
“이사장은 베시 위즈리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지?”
로젤리아는 동급생과 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퇴실 조치를 당했다. 거처도 마땅치 않은 그녀를 내쫓았다면 베시 위즈리 또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세드릭의 기대와 달리 로젤리아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베스 위즈리가 처벌을 받았을 리 없잖아요. 걘 지금 자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겠죠. 부모님과 이사장님께 제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네요, 분명 하고 있을 테지만.”
장난스레 툴툴거리는 로젤리아의 태도는, 이미 이런 일을 너무도 자주 겪어서 그다지 타격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하나둘씩 풀어놓는 이야기로 차곡차곡 쌓이던 세드릭의 분노는 그 슬픈 초연함을 깨달았을 때 정점에 달했다.
세드릭이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기자 그의 반응을 기다리던 로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님?”
“아, 그래.”
그는 머릿속으로 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두 연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을 세우고 나서야 침묵 속에서 벗어났다.
“넌 학술원에 어떤 경유로 중도 편입하게 된 거지?”
세드릭은 스스로 입을 열 때마다 놀라워했다. 그는 남에 대해 이렇게 무수한 관심을 품는 사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냉랭해 보일 정도로 타인에게 무심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로젤리아와 관련된 일은 자꾸만 궁금해졌다.
정확히는 그녀가 궁금했다. 할 수 있다면 저 자그마한 머리통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조리 살펴보고 싶었다.
“제가 머물던 고아원의 원장님께서 제 그림 실력을 보시고, 고아원을 후원해 주시는 높은 분께 부탁해서 학술원에 편입학 신청서를 넣어주셨어요. 저는 나이가 꽤 있을 때 학술원에 들어가게 된 거라서 신입생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거든요.”
로젤리아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후회가 돼요. 그때는 그림 그리는 게 너무 행복했는데 학술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런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왜?”
“뭘 하든 성적이 정해지고, 평가를 받아야 하잖아요. 또 결과가 좋으면 다른 동급생의 질투를 받고, 출신으로 무시도 당하고…….”
“이제는 전만큼 그림 그리는 게 즐겁지 않아요.”
세드릭은 그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측면으로 아슬하게 보이는 캔버스 위의 그림은, 대충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저 그림을 그린 그녀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전시장에서 로젤리아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세드릭이 일생 동안 겪어온 많은 경험 중 가장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머릿속이 몽롱하게 잠기는 감각. 모든 신경이 그림 속으로 아찔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황홀함은 완벽한 쾌락이었다.
“처음 네 그림을 보았을 때 놀라서 말이 안 나오더군.”
세드릭이 넌지시 건네는 말에 로젤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내 생에 처음 겪는 강렬한 경험이었어.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그림을 그린 학생의 이름을 보고 있었지.”
“…….”
“넌 분명히 대단한 실력이 있고, 나는 그래서 너를 고른 거야.”
애초 길게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은 없었다. 즐겁지 않다는 그녀의 마음 또한 존중받아야 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세드릭은 그저 ‘그녀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만을 분명하게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그림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훌륭한 여운을 남긴다는 것도.
그가 오래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로젤리아는 그의 말을 곱씹고 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필요한 게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마샤에게 말하도록 해.”
그 말은 그가 직접 그녀를 고른 것이니,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도와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로젤리아는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멍하니 있던 정신을 깨웠다.
전하고 싶은 말은 거기까지였는지 세드릭은 머뭇거림 없이 발을 돌렸다.
“공작님!”
그가 문을 나서기 직전, 로젤리아가 소파에서 일어나 다급히 말했다.
“감사해요.”
로젤리아는 앞으로 사과 대신 감사를 전하라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서있던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발을 옮겼다.
세드릭은 자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그녀의 침실을 빠져나오고서야 알아차렸다. 그게 너무도 어색해서 그는 한참이나 제 입가를 어루만지다가 발길을 돌렸다.
* * *
로젤리아는 남은 방학 동안 슐라크 공작 저택에서 매우 편안히 지냈다.
세드릭은 이제 그녀에게 우편이 아니라 직접 그림 선물을 받았다. 로젤리아는 그간 자신이 보내주었던 그림이 모여있는 방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이렇게 다 보관해 주실 줄 몰랐어요.’
‘그럼 버리기라도 했을까 봐?’
‘그건 아니지만……. 아는 분께 선물이라도 하실 줄 알았죠.’
‘그러기엔 아깝지.’
작품을 두고 건네는 후한 평에 로젤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순간 세드릭은 그녀의 귓바퀴가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사 당당하게 자신의 소견을 밝히는 그녀가 수줍어하는 것을 보니 꽤 느낌이 색달랐다.
로젤리아와 세드릭은 한 저택에서 생활했지만 자주 볼 일이 없었다. 로젤리아는 대체로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캔버스와 염료를 붙잡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세드릭은 그 시간에 서류 뭉치를 붙들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르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둘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치는 때는 대개 세드릭이 그녀를 찾아갈 때뿐이었다. 세드릭이 그녀를 보러 갈 때마다, 로젤리아는 작업을 하는 데 열중하여 그가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그는 인기척을 내지 않고 집중하는 그녀를 한참이나 엿보고는 했다.
더운 날씨에 로젤리아는 마샤가 마련해 준 드레스를 입었는데, 팔뚝과 발목이 드러나는 얇은 드레스였다.
분명 초반에는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에 집중을 하다가도 어느새 세드릭의 시선은 흰 눈처럼 뽀얀 피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꼭 순백의 캔버스를 떠올리게 하는 순수한 색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드릭의 목울대는 몇 번이고 꿀렁거렸다. 자꾸만 입 안쪽이 마르는 탓이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아차린 세드릭은 이후로 가급적 로젤리아를 보러 가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의 이런 음험한 시선이 꼭 더러운 리베 백작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저택에 머문다고 해도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세드릭은 남은 방학 기간 동안 뒤에서 손을 써 로젤리아에게 부당한 처벌을 내린 이사장을 갈아 치웠다. 그리고 새로 세운 이사장에게 동급생을 괴롭힌 베시 위즈리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리도록 요했다.
그 결과, 베시 위즈리는 한 달간의 정학을 받았다. 어지간해서 정학 처분을 하지 않는 학술원을 고려하면, 한 달이나 되는 정학은 그녀의 학생 기록부에 대단히 큰 오점이 되는 셈이었다.
제임스에게서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세드릭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랜만에 로젤리아를 찾아갔다.
똑똑―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여느 때처럼 응답이 없었다. 이쯤이면 그냥 들어갈 법도 하지만 세드릭은 그래도 만에 하나를 위해 언제나 노크를 잊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짙은 염료 냄새가 풍겼다. 처음에는 살짝 거북함이 들던 냄새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 후각이 마비된 건지, 아니면 이곳에 있는 그녀의 존재에 감각이 무뎌진 건지 모르겠다.
“로젤리아.”
오늘은 그녀에게 용건이 있어 온 것이기에 세드릭은 곧바로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웬일로 로젤리아는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지 않았다. 네모난 캔버스는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세드릭은 어렵지 않게 로젤리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캔버스 옆에 놓인 소파에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왜 여기서 자는 거지?’
몇 걸음만 가면 침대인데 이 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은 채 잠든 그녀가 이해 가지 않았다. 그녀를 깨울까 고민했으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로젤리아를 내려다보던 세드릭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축 늘어진 로젤리아의 팔을 제 목에 두른 세드릭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언제나 바라보기만 하던 가녀린 체구는 예상했던 대로 가벼웠다.
최대한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드릭은 침대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로젤리아가 잠투정인 양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보드라운 숨결이 살갗에 닿는 바람에 세드릭은 우뚝 멈춘 채 전신을 굳혔다.
그러다가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
세드릭은 순간 깜짝 놀랐다. 베개에 머리를 눕힌 로젤리아의 눈꺼풀이 푹 젖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혹시 옮겨주는 사이 깬 건가 싶어 세드릭은 전신을 망부석처럼 굳혔다.
“흐윽…….”
하지만 로젤리아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지 꾹 닫힌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대체 어떤 깊은 어둠을 헤치고 있기에 눈조차 뜨지 못하는 걸까.
그녀가 고개를 살짝 비틀자 눈꼬리에 아슬하게 맺혀있던 눈물이 살굿빛 뺨을 타고 애처로이 흘러내렸다.
“싫어요, 싫어……. 하지, 마요…….”
로젤리아는 숨이 막히는 것처럼 제 옷깃을 그러쥐었다. 깜짝 놀란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마치 저를 구원해 줄 동아줄을 발견한 것처럼 자그마한 손이 큰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에게 잡힌 것은 그저 손가락 하나였는데, 세드릭은 제 심장이 통째로 붙잡힌 것만 같았다.
손을 빼려고 했으나 어떻게 된 힘인지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세드릭은 허튼 시도를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왜 울면서 거부하는 걸까.
추측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도중, 세드릭의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리베 백작.
언제나 로젤리아를 저택으로 불러들여 성적인 무언가를 행하려 했던 추악하고 더러운 자.
혹시나 그에게 당한 일 때문에 그녀가 악몽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세드릭은 턱이 아릴 만큼 이를 악물었다. 역시 사업 투자를 끊는 것만으로는 너무 약한 형벌이었다.
눈물로 젖은 로젤리아의 뺨이 반질거렸다. 그게 몹시도 짙은 안타까움을 자아내 세드릭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슬쩍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은 무척이나 진귀한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살결로 스며드는 온도가 바깥의 날씨보다도 뜨거웠다. 온전한 그녀의 체온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 가빠졌던 로젤리아의 숨이 조금씩 제 속도를 되찾았다. 끊을 것처럼 세드릭의 손가락을 움켜쥐던 손힘도 점점 느슨해졌다.
세드릭은 그녀의 상체를 감싸는 드레스의 제일 윗단추를 톡 풀었다.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라, 순전히 그녀가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였다.
살짝 벌어진 틈새로 볼보다도, 팔목보다도 더 하얀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을 시야에 담는 순간, 세드릭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젤리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행여나 그녀가 깨어나 문을 열어보기라도 할까 봐 그는 당장 그 근처를 벗어났다.
아무 방에나 들어온 그가 문에 기대선 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슴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믿을 수 없는 일에 목구멍이 바짝 조여 숨을 내쉬기 어려웠다.
순간, 언제나 그녀의 그림을 볼 때만 나타나던 감각이 그를 밀물처럼 덮쳤다. 배 속이 횃불을 삼킨 것처럼 지글지글 끓으며 아랫도리가 일순 뻐근해지는…….
“미쳤구나.”
스스로를 자조하며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차마 아래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했다.
그는 제게 일어난 일이 진정으로 두려웠다.
* * *
“정말 직접 배웅하지 않으실 겁니까?”
마샤가 채근하듯이 물었다.
마치 일부러 다른 곳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처럼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세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긋한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마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과 함께 허리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가슴에 낙뢰가 들이찼던 그날이 지나고, 방학이 끝나 로젤리아가 학술원으로 돌아갈 날이 왔다.
세드릭은 아침 일찍부터 그녀가 돌아가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시했다. 하지만 그래 놓고 정작 배웅을 하는 자리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샤는 그런 그를 설득하러 왔던 것이었다.
우연히 그녀의 속살을 보게 된 날 느꼈던 감정은 자꾸만 형용 못 할 모멸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고 품을 감정은 아니라는, 죄책감 같기도 했다.
그 후로 세드릭은 로젤리아를 아예 찾아가지 않았으며, 가끔 마주칠 때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로젤리아는 이런 그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세드릭은 요 며칠 통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똑같은 구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었는데도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그는 잠시 마른 입술을 핥다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살짝 걷자 저택의 입구에 놓인 공작 가문 소유의 마차가 보였다. 마차의 앞에 서있는 로젤리아는 청량한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역시나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도무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그도 이렇게, 한 줌의 시선도 돌리지 못하고 온 신경을 빼앗긴 것일 터.
햇빛보다 더욱 찬란한 미소를 지은 로젤리아는 공작저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출발한 마차가 저 멀리, 대문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세드릭은 한순간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돌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세드릭은 언제 창가에 서있었느냐는 듯 황급히 의자에 착석했다. 서류를 살피는 척하고 있자 이윽고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주인님, 로젤리아 양께서 전해달라고 한 게 있습니다.”
마샤가 제 상체만 한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세드릭은 ‘로젤리아’라는 이름에 손끝을 굳혔다. 그녀의 이름이 귀를 스칠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움찔거렸다.
마샤는 그 물건을 세드릭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서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두고 간 것은 포장된 정사각형의 무언가였다. 세드릭은 포장을 풀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림이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젤리아가 그에게 아낌없이 주는 게 있다면 바로 자신의 그림이었다.
세드릭은 꼭 그녀를 대하듯, 리본 모양으로 묶인 노끈을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풀었다. 그리고 긴 손가락으로 겉 포장지를 뜯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그림을 발견하고 세드릭은 멈칫했다.
로젤리아는 풍경화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추상적인 대상을 그리고는 했다. 그 상상에서부터 흘러나온 표현력에 다채로운 색채감이 더해진 것이 바로 그녀의 작품이자 훌륭한 예술이었다.
그런 그녀의 작품에 처음으로 뚜렷한 선이 보였다. 명확한 대상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세드릭, 그였다.
순간 거울을 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림은 그를 잘 묘사하고 있었다. 세드릭은 조용히 손을 들어 저를 닮은 그림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몇 날 며칠 공을 들여 칠했을 염료가 손끝으로 세세히 전달됐다.
캔버스를 들어 올리자 아이보리색 서신 봉투가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그녀가 간혹 깜짝 선물처럼 끼워두던 서신이 오늘도 여전히 그림과 함께하고 있었다.
세드릭은 이제 제법 자연스러운 손길로 서신을 펼쳤다.
「제 후견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다홍빛의 압화가 달린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세드릭은 그 짧은 내용을 머릿속에 낱낱이 기록하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읽어 내렸다.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니던 죄송하다는 말이 아닌 감사하다는 인사. 이건 그녀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순수한 빛깔의 본심이었다.
그것을 되뇌자 가슴 안쪽이 빠듯하게 조였다. 마치 잠이 든 그녀를 보고 그릇된 욕심을 느꼈던 그날처럼.
세드릭은 들고 있던 서신을 그림 위로 내려놓았다. 누가 보아도 그인 것을 알아차릴 만큼 뚜렷한 초상화와 단출한 서신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는 서신에 또박또박 쓰인 글자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로젤리아의 순수한 마음이 손끝으로 스며들듯 전해지며, 세드릭이 품은 꺼먼 죄악감은 더욱이 몸집을 키워갔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재된 본심은 걷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다. 언제나 평형을 잃지 않던 그는 이상하게도 로젤리아를 만난 뒤로 이성이 자주 흔들렸다.
진정 두려운 것은, 앞으로도 그녀로 인해 흔들릴 일이 무척이나 많겠다는 생각이 든단 것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서서히 계절이 바뀌는 경계선.
그럼에도 더운 바람은 감출 수 없다는 듯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