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그녀 (1) (4/8)

3장 그녀 (1)

학사모를 쓴 로젤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졸업식 일주일 전부터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지더니, 결국 졸업식 당일인 오늘은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숨을 별로 크게 내쉬지도 않았는데 뿌연 입김이 안개처럼 흘러나와 시야를 적셨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학생들마다 저를 보러 온 이들과 마주한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무리 중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은 로젤리아가 유일했다.

그녀의 시야에 다른 학생의 손에 들린 꽃다발이 들어왔다. 로젤리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있었다. 빈 건 고작 손인데도 마음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몰려왔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사람의 기분마저 청승맞아졌다.

‘돌아가야지.’

로젤리아는 화려한 꽃다발 대신 단출한 짐으로 양손을 무겁게 채운 뒤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아직도 졸업식의 여운이 끝나지 않았는지 바깥은 저마다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학술원에 자주 말을 섞었던 친구가 없는 로젤리아는 그들 사이를 고독하게 지나갔다.

같은 클래스였던 학생들이 지나가는 로젤리아를 알아차리고 흘끔거렸다. 로젤리아는 그들과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정문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느라 끙끙거리던 로젤리아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서야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이유를 알아차렸다.

칠흑처럼 새까만 마차가 학술원의 정문 앞에 서있었다. 칼바람에 흩날리는 마차의 깃발에는 넝쿨에 감싸인 푸른 장미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고급스러운 문양은, 슐라크 공작 가문의 고유 문양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며 이 추운 겨울바람과 잘 어울리는 냉랭한 인상의 미남자가 내렸다. 주변을 가벼이 둘러보던 슐라크 공작이 우두커니 서있는 로젤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큰 키와 어울리는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세드릭을, 로젤리아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졸업 축하한다.”

세드릭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의 것보다도 커다랗고, 호화롭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로젤리아에게 건넸다. 아직도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 게 믿기지 않아서 로젤리아는 멍하니 서있었다.

그는 꽃다발을 받지 않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두 손에 무겁게 들린 짐을 알아차리고 뒤를 향해 눈짓했다.

얼른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보좌관 제임스가 로젤리아의 손에 들린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제야 손이 빈 로젤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꽃다발을 받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얼굴이 빨갛군.”

로젤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세드릭은 동문서답을 했다. 그의 지긋한 시선에 로젤리아는 화들짝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밖에 좀 오래 서있어서 그런가 봐요.”

“마차에 타서 얘기하지. 짐은 이게 전부인가?”

“네.”

아직도 그가 저를 보러 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로젤리아는 머리가 띵했다. 그녀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것은 바깥과 달리 따스한 마차 안에 들어오고 나서였다.

“공작님?”

얼떨결에 그의 옆에 앉게 된 로젤리아가 그를 불렀다. 맞은편, 제임스와 간단히 대화를 나누던 세드릭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쁘지 않으세요?”

“바빠도 네 졸업식은 와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말에 로젤리아는 괜스레 수줍은 마음이 들었다.

저 당연하다는 말투는 늘 그에게 있어 그녀가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의 행동은 그저, 궁핍하고 가난한 피후견인을 챙기자는 다정한 마음에서 기인한 게 분명할 텐데도.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언제나 그랬듯, 섣부른 오해를 얼른 갈무리하며 로젤리아는 제 품에 가득 찬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향기가 후각을 감미롭게 자극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 꽃다발도요.”

세드릭에게 사과 대신 감사를 표하라는 말을 들은 뒤로 로젤리아는 곧잘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에게나 고맙다는 인사를 남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후한 마음은 언제나 자신의 후견인인 세드릭에 한해서만 작용하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그새 많이 길었네.”

꽃다발에 얼굴을 묻은 로젤리아를 쳐다보던 그가 넌지시 읊조렸다.

감상처럼 툭 꺼내놓는 말은 오랜만이라는 인사와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방학 동안 그의 저택에서 머물던 로젤리아가 학술원으로 돌아가고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자그마치 1년 반 만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로젤리아도 막바지에 다다른 졸업제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세드릭 또한 공작으로서의 정무에 임하느라 바빴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젤리아는 꼬박꼬박 그에게 그림과 서신을 보냈다.

하나 바뀐 점은 예전에는 우편부가 그녀의 그림을 공작저에 가져다줬다면 근래는 보좌관인 제임스가 직접 학술원으로 찾아와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래.”

세드릭이 잔잔한 미소를 그린 채로 답해주었다.

조금 전 제임스를 바라볼 때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다정한 웃음이었다. 저 웃음을 눈에 담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또다시 자신이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로젤리아는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시간 괜찮나? 잠깐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아, 네. 어딘데요?”

그는 대답 없이 제임스에게 눈짓을 했다. 제임스가 마부에게 로젤리아는 알지 못하는 어느 거리의 이름을 댔다.

그사이 로젤리아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학술원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있지도 않은데 꼭 정든 곳을 떠나는 듯한 아쉬움이 들었다.

별안간 로젤리아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후견인인 세드릭을 처음 만난 곳이 학술원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사소한 것들도 하나하나 그와 연결하는 자신을 깨닫고 로젤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먼저 내린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유 모를 긴장감에 로젤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럽게 손이 맞닿는 순간, 로젤리아는 무심코 발을 헛디뎠다. 자칫하면 마차 밑으로 고꾸라질 뻔한 그녀를 세드릭이 단단히 잡아주었다.

“조심해야지.”

“앗, 네……. 감사해요.”

허리를 힘 있게 감싼 그의 손길이 어색했다. 로젤리아는 두 다리가 땅에 닿자마자 화들짝 그에게서 멀어졌다. 넘어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건만, 꼭 넘어지기 직전인 사람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녀가 무사한지 빠르게 살핀 세드릭은 이상이 없음을 깨닫고 먼저 발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로젤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세드릭은 마치 이 건물의 주인처럼 성큼성큼 안으로 향했다. 잠시 주저하던 로젤리아는 멀어지는 그를 헐레벌떡 따라갔다.

“여기는…….”

“이곳을 공개 전시장으로 사용할 생각이야.”

주변을 둘러보기 바쁜 로젤리아를 향해 세드릭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로젤리아는 꽤 익숙한 구조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술원에 있는 전시장 또한 이런 구조처럼 생겼다.

흥미로워 이리저리 발을 옮기던 로젤리아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홈이 파인 윗부분에 설치된 등불, 그 불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전시 공간. 그곳에 익숙한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젤리아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그 옆의 공간에 걸린 그림 또한 눈에 익었다. 그리고 그 옆도, 또 그 옆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로젤리아가 그에게 선물한 그림이었다.

“그 방에 보관해 두기에는 아까운 그림이지.”

불현듯 들리는 말에 로젤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선 세드릭이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확인 사살로 로젤리아는 정말 이게 모두 자신의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빛깔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로젤리아의 작품이 크고 웅장한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자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드넓은 공간에 자신의 그림이 빼곡했다. 그 사실은 로젤리아의 가슴을 뜨거운 흥분으로 벅차오르게 만들기 충분했다.

세드릭은 얼마든지 더 돌아보아도 좋다고 덧붙였다. 로젤리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전시장 내부를 원 없이 구경했다.

한 바퀴를 돌고 온 그녀는 의문점이 생겼다.

“하나가 없어요.”

세드릭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의 초상화. 그녀가 방학이 끝나고 학술원으로 돌아가던 날, 그에게 선물했던 그림이 이곳에 없었다.

그녀가 넌지시 입에 올린 의문에 로젤리아를 멀거니 구경하던 세드릭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느 전시장에도 걸지 않아.”

세드릭이 분주히 움직이느라 살짝 흐트러진 로젤리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게 느껴져 로젤리아는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나만 볼 거거든.”

그녀의 연갈색 머리칼에 그의 하얀 손가락이 얽혔다. 실타래처럼 얽힌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온 그의 손가락이 로젤리아의 뺨을 살짝 스쳤다. 아주 사소한 접촉에도 로젤리아는 뒤집어진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렸다.

“다른 전시장도 몇 곳 더 만들 테지만, 네 그림은 수도의 중심에 있는 이곳 전시장에만 걸어둘 계획이다.”

긴장하여 온몸을 굳힌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드릭이 전시장을 쓱 훑어본 후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의 손길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던 로젤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도의 중심에 있는 이곳 전시장. 그 말은, 그녀의 작품을 제국의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걸겠다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공작가의 사업으로 이루어지는 전시장이니 그녀가 슐라크 공작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후원제로 맺어진 관계에서,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당한 정도가 있는 법이다.

로젤리아가 생각하기에 지금 그가 벌이려는 일은, 후에 그녀가 받게 될 명성의 값어치보다도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제 막 학술원을 졸업한 학생에게 이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귀족 후견인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느냐고.

그의 다정은 이미 정도를 지나친 지 오래였다. 어느 후견인이 기숙사에서 퇴실 조치를 당해 쫓겨난 피후견인을 자신의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겠는가.

사실 로젤리아는 그때, 후원제로 맺은 관계가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그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여유로운 태도로 그녀를 받아주었고 더불어 그림 작업을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로젤리아는 그와 자신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자 사회적 지위의 냉혹한 차이. 제 자신의 위치를 알기에 로젤리아는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세드릭이 자꾸만 성큼성큼 선을 넘어오고는 했다. 아니, 그렇게 느껴지게끔 행동을 했다.

왜 이렇게 다정한 건지 묻고 싶었고, 정녕 후원자라서 제게 잘해주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그가 만약 이런 도움을 주는 게 정말 순수한 ‘동정’의 의미라면 로젤리아는 이 관계를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자신이 바라는 대답이 안 나올지도 모르기에, 또 그에게 자신이 그저 사소한 존재임을 확인받을까 봐 섣불리 질문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로젤리아의 마음은 언제나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했다.

“…감사해요.”

복잡한 마음을 애써 털어낸 뒤, 로젤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 세드릭 또한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간단히 구경을 마친 후 두 사람은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졸업도 했으니 이젠 어디로 갈 생각이지?”

마차에 올라타기 전 세드릭이 물었다. 로젤리아 또한 그 문제에 대해 졸업식 한 달 전부터 고민하던 차였다.

“학술원에 들어가기 전 머물던 고아원으로 돌아가려고요.”

“데려다주지.”

세드릭의 짧은 지시에 공작가 소유 마차가 움직였다. 수도 외곽에 위치한 고아원으로 향하며 로젤리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여러모로 바빠서 고아원에 통 연락을 하지 못했다. 친부모처럼 저를 살뜰히 보살펴 주던 원장님을 만날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설렘은 고아원 앞에 도착하는 순간 산산이 조각났다.

“고아원이 왜…….”

허름하지만 번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고아원 건물은 철거 직전의 폐건물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로젤리아는 당황하여 마차에서 뛰어내려 얼른 고아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불안감을 자아내던 외양대로, 고아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고아원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그런 아이들을 살갑게 챙기는 원장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아원 한 바퀴를 돌아 꼼꼼히 확인한 로젤리아는 의기소침하게 마차로 돌아왔다. 어느새 마차에서 내려 기대서 있던 세드릭이 다가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에게 따로 연락 온 것은 없었나?”

“네.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는데…….”

아무래도 고아원이 철거된 듯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닥쳐온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로젤리아는 머리가 띵했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바로 그녀의 거처였다. 한순간에 갈 곳을 잃은 로젤리아는 황망함에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로젤리아를 힐끔, 이어 쓰러질 듯 위태로운 고아원을 힐끔 본 세드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 오겠어?”

불안감에 정처 없이 요동치던 로젤리아의 시선이 대번에 그에게로 향했다. 마차에 등을 기댄 세드릭이 팔짱을 낀 채 담담히 시선을 겹쳤다.

“…네?”

“저번에도 지냈잖아, 내 저택에서.”

그가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로젤리아는 그 의미를 완벽히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프러포즈를 받은 듯 이상야릇한 기분을 자아내는 말에 사고 회로가 뻣뻣이 멈춰버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는 그를 보니 제 헛된 기대감이 더더욱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가 공작님께 폐를 끼치면…….”

“폐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지난번에 내쫓았겠지.”

솔직히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그를 의식하게 되는 바람에 되도록 그와 떨어져 있고 싶지만 그건 마땅한 거처가 있을 때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로젤리아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할 불운한 처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을 길거리에서 보내게 생기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세드릭, 그이다. 결코 로젤리아가 먼저 그에게 저택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조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 합리화를 하면서도 그녀는 자꾸만 높아지는 심장 박동 수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면…….”

로젤리아는 감사하다는 의미를 담아 허리를 꾸벅 숙였다.

세드릭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는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후 마차에 올라탔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이 신열이 퍼진 것처럼 뜨거웠다.

정확히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을 제 손으로 어루만지던 로젤리아는 그의 뒤를 이어 마차에 올라탔다.

* * *

세드릭의 말대로 일전에 짧게나마 함께 지낸 적이 있다 보니 다시금 같은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정해진 기간이 없다 보니 서로의 존재가 더욱더 여실히 느껴졌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로젤리아는 황급히 협탁 위에 놓인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은 오전 7시 30분 직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꼭두새벽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시간이 로젤리아에게는 무척이나 늦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화들짝 침대에서 내려와 네글리제를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침실을 빠져나왔다.

분주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로젤리아를 발견한 시녀들이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평소 같으면 머쓱함에 쭈뼛거렸을 로젤리아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시간도 없어 묵례로 맞대응한 후 얼른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식당 앞에 도달한 로젤리아는 허둥지둥하는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이제와 만지는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그제야 일어나 거울도 한 번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리아는 울상을 지은 채 머리칼을 정리하고 눈곱이 붙었는지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급하게 갈아입느라 흐트러진 드레스를 정돈한 후 식당 문을 열었다.

허둥지둥하는 그녀와 달리 식당은 여느 때의 아침처럼 평화로웠다. 커다란 테이블에 둘 음식을 하나둘씩 가지고 나오는 시녀들과 향기가 가득 퍼지는 차를 내려놓는 시녀장 마샤, 그리고 상석에 앉아 오늘 날짜가 찍힌 신문을 읽는 세드릭이 보였다.

마샤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세드릭의 모습은 마치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했다. 그 근사함의 9할이 저 잘난 외모 덕분이었다.

로젤리아는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지만, 그는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창틈으로 파고드는 햇살마저도 어떠한 특수 효과처럼 느껴지게 하는 사내였다.

낮이건 밤이건 상관없이 발휘되는 수려함에 홀려 로젤리아는 문가에 멍하니 서있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신문을 읽던 세드릭이 눈을 들었다.

“일어났구나.”

부드럽게 깔리는 저음은 미처 깨지 못한 그녀의 감각을 모두 깨울 만큼 감미로웠다.

로젤리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석 옆에 앉으니 마샤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그녀의 앞에 포크와 나이프를 놓아주었다.

세드릭은 아침에 식사를 잘 하지 않았으며 주로 차로 공복을 달래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시녀들이 바쁘게 내온 음식들은 모두 로젤리아를 위한 것이었다.

사실 로젤리아 또한 아침부터 입맛이 그리 썩 도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이것이 그와 유일하게 아침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서 억지로 포크를 들었다.

두 사람의 아침 식사는 오늘 처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개월 전, 매번 침실에 콕 박혀 식사를 거르기 일쑤인 그녀의 행동을 못마땅해한 세드릭의 지시로 처음 시작되었다.

‘앞으로는 아침마다 내려와서 식사를 하도록 해.’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제 마음에 들 때까지 손을 놓지 않는 그녀는 완벽한 올빼미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침마다 세드릭의 기상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란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세드릭과 같은 집에 살면서 좀처럼 그를 마주칠 기회가 없어서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중이었다. 먼저 찾아가자니 그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고, 그렇다고 마냥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기약 없는 약속에 목을 매는 미련한 행동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가 고민을 해결해 준 셈이었다. 그의 지시에 따르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그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로젤리아는 아침마다 그가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멍하던 머리가 확 깨어나는 순간은 잔뜩 흐트러진 자신과 달리 당장 출타를 해도 이상이 없을 만큼 번듯한 그를 마주했을 때였다. 두근거림이 활짝 핀 꽃처럼 만개해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탓이었다.

“오늘도 늦게 들어오세요?”

레몬 향의 소스가 뿌려진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던 로젤리아가 슬그머니 물었다.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그녀가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던 세드릭이 대답 없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로젤리아는 제 입가에 닿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경직됐다. 그녀의 입가를 쓸고 멀어지는 그의 손가락 끝에 노란색 소스가 묻어있었다. 로젤리아는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을 손등으로 비비적거렸다.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

일주일에 적어도 네다섯 번,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선 세드릭은 매번 자정을 넘겨서야 돌아오고는 했다. 물론 로젤리아도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나, 혹 피곤한 그를 귀찮게 하는 일이 될까 찾아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무척이나 귀중했다.

“참, 로젤리아.”

햇볕이 포근하게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보던 세드릭은 돌연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빵을 한 조각 베어 물던 로젤리아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앞으로 초상화 제작 의뢰가 들어왔어.”

“초상화요?”

“그래.”

로젤리아가 졸업하는 날 그가 데려가 준 전시장에는 근 몇 개월간 그녀의 그림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운영이 시작되며 ‘코델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전시장은 몇 개월 만에 벤트 제국 수도의 유명한 문화 재단이 되었다.

그 유명세에 발돋움이 된 것이 바로 로젤리아의 그림이었다. 입장료를 낼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오픈되는 코델리아 전시장에서 그녀의 그림이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세드릭이 겪었던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형용 못 할 황홀한 감각을 자아내는 그녀의 그림은 콧대 높은 귀족들의 이목까지 사로잡았다. 평민 출신 화가인지라 평가가 절하될 만도 한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슐라크 공작가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는다는 점에 있었다.

오히려 ‘그 슐라크 공작가가 후원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실력 있는 화가’라는 점에서 그녀의 값어치는 나날이 높아졌다.

“할 수 있겠나?”

학생일 적부터 뒤를 돌봐준 후견인이라면 강압적으로 지시를 할 법도 한데, 세드릭은 언제나 그녀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로젤리아는 단 한 번도 그의 지시를 거부한 적 없지만, 싫다고 했다 해도 그는 별말 하지 않았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예술이 돈 있는 자들의 고상한 취미로 여겨지는 이곳, 벤트 제국에서 초상화 제작은 굉장히 돈이 많이 드는 의뢰였다. 아마 그녀 앞으로 초상화 제작 의뢰를 넣은 이들은 보지 않아도 귀족들일 게 뻔했다.

그러니 그녀가 그들의 초상화를 훌륭하게 그려낸다면 의뢰에 딸린 거액은 물론이고 세드릭에게 명예까지 쥐여줄 수 있을 것이다. 로젤리아가 슐라크 공작 가문에 소속된 화가인 이상, 그녀의 명예는 곧 세드릭의 명예가 되었다.

세드릭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로젤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초상화를 제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녀로서는 관찰하고, 손만 움직여 대상을 그대로 본뜨면 되는 일이었으니 어려울 일은 없었다.

다행히 의뢰를 맡긴 귀족들은 모두 그녀의 초상화를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미천한 신분인지라 로젤리아 앞에서는 마냥 쌀쌀맞던 귀족도 후에는 세드릭을 통해 그녀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다음에도 초상화 제작을 맡기겠다는 서신은 언제나 함께였다.

로젤리아는 문득, 오래전 세드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후에 공작가에서 주관할 예술 사업을 위해서 네 작품이 필요해. 네 작품은 귀족들 간의 거래 물품으로 쓰일 예정이지.’

‘거래… 물품이라니요?’

‘정확히는 자금 세탁용.’

불쑥 떠오른 대화에 로젤리아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 초상화 제작을 위해 준비하던 새하얀 캔버스가 눈앞에 있었다.

‘이런 초상화들이 그때 말씀하신, 자금 세탁용인 건가?’

자신의 작품이 오로지 탐미적인 용도로만 사용되길 원하는 화가에게 그 제안은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지저분한 잇속을 챙기는 데 제 귀중한 작품이 이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 당시의 로젤리아에게는, 저를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보다 몇십 배는 낫게 들리는 제안이었다.

평민인 그녀에게는 힘 있는 후견인이 필요했으며, 그 후견인으로 제게 더러운 성적 욕망을 품지 않은 자를 원했기에. 차라리 세드릭처럼 바라는 바를 노골적으로 밝혀오는 자가 더욱 대하기 편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세드릭의 뜻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그녀를 후원한 것이라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만약 그 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자신을 챙겨준 그에게 로젤리아는 따지고 들 명분도,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지금까지 나를 챙겨주신 거니까.’

세드릭의 다정한 행위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걸 깨달을 때면 가슴 안쪽이 아릿아릿해지고는 했다. 이러한 차이를 되새길 때면 후견인과 피후견인이라는 갑과 을의 관계가 너무도 명확히 가슴속에 박혔다.

그러니까, 그에게 로젤리아는 그저 값나가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분께 무슨 잘못이 있겠어. 이게 다 공사 구분 못 하고 반한 내 잘못이지.’

제 마음만 잘 간수했더라도 이런 식으로 미련하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깊은 한숨을 내쉰 로젤리아는 세팅을 마치고 창가에 걸터앉았다.

예쁜 눈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스산한 겨울이 지나고, 산뜻한 바람이 부는 따스한 봄이 돌아왔다. 로젤리아가 그에게 반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에겐 세드릭이 봄 같은 존재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훌쩍 다가와 있어 꽁꽁 얼어있던 마음을 녹여주는, 그런 계절 말이다.

처음에는 의심이 들었다. 후원제를 빌미로 저를 어떻게 해보려던 리베 백작처럼, 혹은 그 이전의 후견인처럼 세드릭 슐라크도 그런 악질적이고 추잡한 사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날 때마다 그런 음험한 내색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의심을 허무하게 만들 정도로 건전한 관계가 지속됐다.

마침내 그가 먼저 후원의 이유를 밝히고서야 로젤리아는 그에 대한 의심을 한 꺼풀 벗겨냈다. 단단한 겉껍질이 벗겨지니 그 안에 감춰진 무른 속살은 세드릭 슐라크 앞에서 너무도 쉽게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그는 어느 때건 다정하고, 어른스러우며, 진중했다. 단언컨대 그녀와의 관계에서 한 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젤리아는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더욱 꽁꽁 숨겼다. 세드릭과는 달리 불순함으로 얼룩진 제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후원으로 얽힌 그와의 관계가 허무하게 끊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언제나 차분함을 잃지 않는 그는, 혹 그녀가 그릇된 감정으로 저를 난처하게 만들기라도 할까 봐 관계를 정리하려 들 것이다.

홧김의 고백으로 틀어지느니 영원히 침묵을 지킴으로써 로젤리아는 그의 곁에 남기를 고집했다.

이제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세드릭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창가에 머리를 기댄 로젤리아의 눈길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그녀의 시야에 반질거리는 시커먼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세드릭을 발견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던 로젤리아는,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을 보고 멈칫했다. 세드릭이 여인의 손을 붙잡아 준 채로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뜻밖의 장면에 한참이나 굳어있던 로젤리아는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화들짝 창가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세드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젤리아, 준비됐나?”

“아, 네.”

창밖 따위 본 적 없다는 듯 로젤리아는 캔버스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문이 더욱 열리며 세드릭이 문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스 장갑을 낀 고운 손이 그 위에 얹어지며 창밖으로 본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세드릭이 여인을 로젤리아의 맞은편으로 이끄는 동안, 로젤리아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삽시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준비된 의자에 착석한 여인은 지금껏 초상화 제작을 위해 방문한 그 어떤 귀족보다 아름답고 품위 있어 보였다. 기사처럼 그 옆에 선 세드릭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도 했다.

상체를 기울여 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인 세드릭이 로젤리아를 향해 눈짓했다. 로젤리아는 허둥지둥하는 손길로 밑그림 작업을 할 펜을 들어 올렸다. 그만을 응시하던 여인이 처음으로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로젤리아는 왠지 모르게 기가 죽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괜히 시선을 피하며 평소에는 말하지도 않는 시작을 알렸다. 그건 울렁거리는 그녀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각오와도 같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여 대상의 선을 따기 시작하면서도 로젤리아의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부유했다.

일단, 여인과 세드릭이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서있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도 신경을 콕콕 건드렸다. 자꾸만 손이 엇나갈 뻔한 것을 막느라 등 뒤로 진땀이 흘렀다.

그러던 중 세드릭이 여인에게서 떨어져 로젤리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되어 손끝이 굳었다. 심장 박동 수가 서서히 높아졌다.

“로젤리아.”

그는 빙글 돌아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세드릭의 음성이 로젤리아의 귓가를 간지럽히듯이 건드렸다.

로젤리아가 목을 움츠리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칸트 공작가의 영애니, 신경 써서 해주었으면 해.”

공작가의 영애라니, 어쩐지.

여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여기기는 했다. 로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엇나가려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뒤에 선 세드릭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다만, 그가 바라보는 게 자신인지 아니면 캔버스 위에 서서히 그려지는 영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로젤리아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어찌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어깨 근육이 뻐근했다. 그녀가 작업을 할 때면 본인도 집무실로 돌아가 정무에 임하던 세드릭이 오늘은 웬일로 자리를 지켰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임하는 작업은 평소보다 배는 힘들었다.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있던 세드릭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어느 정도 진행됐나?”

“밑그림을 마쳤으니 이제 저 혼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드릭이 지긋한 시선으로 캔버스 위를 훑었다. 마치 점검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로젤리아는 꼭 과제를 확인받는 학생의 마음이 되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아직 완성본은 보지 못했지만, 마음에 들어 할 것 같구나.”

그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건네는 칭찬에 로젤리아는 환히 웃었다.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세드릭은 머뭇거림 없이 영애를 향해 발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상승세를 타던 기분은 그가 멀어지자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아래로 내닫기 시작했다.

로젤리아는 영애에게 정중히 손을 뻗는 세드릭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예쁜 비단으로 만들어진 영애의 드레스가 실내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후광 같았다.

로젤리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발목이 드러나는 자신의 드레스와 그 위에 걸친 작업용 앞치마는 이리저리 염료가 묻어 엉망이었다. 당장 연회에 참석해도 무리가 없을 영애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꼴이었다.

공작가 영애와 비교할수록 자신의 모습이 꾀죄죄하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세드릭의 정복과 영애의 화려한 차림새는 우아한 한 쌍처럼 잘 어울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또다시 기가 죽었다.

로젤리아는 그가 영애와 나란히 선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누가 보아도 조화로운 쪽은 그와 자신이 아니라 그와 저 영애였으니.

그들이 나란히 문밖을 나서는 순간, 로젤리아는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에게 훌쩍 다가온 완연한 봄은 세드릭, 그에게도 다가올 수 있는 따듯한 계절이란 것을.

* * *

로젤리아는 마샤가 가져다준 식사를 기계적으로 입에 넣으면서도 넋이 나가있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세드릭과 칸트 영애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자신이 너무도 안일했다. 왜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가정은 해보지 않았을까. 이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말이 있나 보다. 그녀는 제 사랑에 눈이 멀어 그의 사랑을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우울하다.’

깨작깨작, 식사를 계속 할수록 입맛은 더더욱 떨어졌다. 자꾸만 뇌리 속에 아까 전, 그와 공작 영애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잔상처럼 어른어른거렸다. 결국 마샤가 챙겨준 식사의 반도 먹지 않고 상을 치웠다.

로젤리아는 캔버스 앞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초상화를 완성시켜야 하는데 영 의욕이 나지 않았다. 고작 밑그림만으로도 영애의 모습에서는 기품의 오라가 폴폴 풍겼다.

원래 로젤리아는 그리 자존감이 낮지 않았는데 세드릭과 함께한 후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존감에 흠집이 하나둘씩 생겼다.

함께 살고 있지만 그는 너무도 높은 곳에 있는, 바라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욕심을 버리자고 마음먹으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늘 충동과 기대를 부추겼다. 제 멋대로 기대해 놓고서 그의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 상처를 받는 자신은 그야말로 바보 천치였다.

“…작업이나 하자.”

로젤리아는 자꾸만 틀어지려는 생각을 바로잡고 작업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쨍쨍 떠있을 시간부터, 노을이 지고, 마침내 하늘이 시꺼먼 심연처럼 물들었을 즘에야 그녀는 손에서 붓을 놓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10시에 다다르는 시각이었다.

로젤리아는 협탁 위에 놓인 등불을 들어 어둠에 상당히 가려진 캔버스를 비추었다. 그녀가 몇 시간 내리 작업한 초상화는 당장 전시장에 걸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래서 더욱 억울했다.

연적일지도 모르는 자의 초상화를 왜 이렇게 열심히 그린 것일까. 세드릭은 공작가의 영애이니만큼 잘 부탁한다고 했지만 그런 대외적인 사정을 모르는 그녀가 알게 무언가. 당장 날카로운 펜촉으로 초상화를 잘게 잘게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야말로 추잡한 질투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난폭한 충동은 사그라들었다. 이걸 찢으면 세드릭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중증이다, 참.’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영애의 초상화를 응시하던 로젤리아는 문득, 제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이 저택 1층의 가장 은밀한 방에 보관되어 있었다. 다른 그림은 모조리 전시장에 내건 세드릭이 오로지 자신의 초상화만큼은 그 방에 보관해 두었다.

로젤리아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복도는 사위가 어둑했다. 그러고 보니 영애와 함께 저택을 나섰던 그가 다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선뜻 찾아가 보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되레 울적해졌다. 자신이 영애였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고 그를 찾아갔을 텐데.

또다시 자조적인 생각으로 빠질 것 같아서 로젤리아는 부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지런히 걷다 보니 1층 방 앞에 도착했다. 꾹 닫혀있어야 할 문이 살짝 열려있어 로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있나?’

세드릭의 말로는 이 방엔 그와 그녀만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로젤리아가 아니라면 세드릭, 그가 와있다는 건데…….

“…하아.”

세드릭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던 로젤리아는 안쪽에서부터 들리는 묵직한 저음에 움찔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로젤리아의 머릿속에 순진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내밀한 분위기에 로젤리아는 문 틈새로 귀를 기울였다.

“후우… 제기랄.”

연이어 거친 음성이 귀를 뜨겁게 스쳐 지나갔다. 낯익은 목소리는 그의 것이 맞았다. 그런데 호흡이… 왜 이렇게 가쁠까?

눈을 끔벅끔벅거리던 로젤리아는 순간 드는 야릇한 생각에 얼굴을 확 붉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설마설마했지만, 한번 든 의심은 스며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고조될수록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의 앓는 소리와 겹쳐 쩌걱, 쩌억거리는 질척한 소리도 들렸다. 로젤리아는 혹여나 제 숨소리가 샐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보면 안 될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러면서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안이 궁금해졌다. 본능의 꼬드김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문 틈새를 훔쳐보았다.

근육이 탄탄한 것이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뒤태 또한 분명 세드릭이 맞았다. 찰나 혹시, 아주 혹시 세드릭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극도의 불안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방에는 그 혼자였다.

문을 등지고 앉은 그의 상체가 더운 호흡에 맞춰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쩍쩍거리는 정체 모를 야한 소리가 차츰 커졌다.

아무리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저 장면을 목격하니 오직 한 가지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재빨리 발을 돌렸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침실로 올라왔다. 침대에 몸을 말고 누운 로젤리아의 가슴이 빠르게 들썩거렸다.

본 것은 고작 그의 뒷모습인데, 차마 말로 표현 못 할 음란한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나 머릿속을 뜨겁게 적셨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달아오른 숨결이 가라앉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자꾸만 멋대로 모습이 그려졌다. 마치 그녀가 캔버스 위에 그리는 그림처럼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소파에 앉은 세드릭, 단정한 바지춤이 풀어져 있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끈적거리는 질퍽한 소리와 끓어넘치는 그의 신음.

어느새 그녀의 캔버스 위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상상이 구체화될수록 로젤리아는 어쩐지 가랑이 사이가 가려워지는 것만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근질거림에 로젤리아의 손은 무심코 치맛자락을 들쳤다. 성스러워 보일 만큼 하얀 속옷을 느릿하게 파고드는 손길이 음흉했다.

“…흐.”

가늘고 긴 손가락이 음부에 슬쩍 닿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소변을 본 것처럼 아래가 살짝 젖어있었다. 굳어있던 그녀의 손가락은 곧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휩싸여 요사스럽게 움직였다. 음부를 가른 손가락이 살점 사이로 빼꼼 모습을 드러낸 클리토리스를 스쳤다.

“아!”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로젤리아의 발끝이 확 움츠러들었다. 눈앞이 번쩍이는 아찔한 쾌락에 아랫입술을 감쳐문 로젤리아는 머지않아 다시 손을 움직였다. 조금 전 너무도 기분이 좋았던 곳을 중점적으로 비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더욱 많아지며 그녀의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불 아래로 숨겨진 허리가 저도 모르게 들썩들썩거렸다.

“앗, 흣…….”

귓가에 그의 신음이 자꾸만 메아리쳤다.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평소 단정하고 정제된 낯이 격한 쾌락에 굴복하여 일그러진 것을 상상하니 아랫배가 찌릿찌릿거렸다.

야릇한 상상에 바짝 선 클리토리스를 비비는 손길이 빨라졌다. 그림이 보관된 방에서 들리던 찌걱거리는 소리는 이제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하응!”

몽롱하게 잠긴 눈으로 헐떡이던 로젤리아는 오래지 않아 짧은 절정을 느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쾌락은 늪처럼 아득하고 깊어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턱을 치켜든 채 전신을 굳히고 있던 그녀는 탈력감과 함께 그대로 늘어졌다.

천장을 바라보는 로젤리아의 다홍빛 눈동자가 짙게 요동쳤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해봤을, 그녀 인생에 처음으로 해본 타락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사실보다 세드릭이 과연 누구를 상상하고 있었을지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는 과연 누구를 떠올리고 있었을까. 오늘 저택에 데리고 온 영애? 아니면 로젤리아는 알지 못하는 제3의 여인?

의문이 짙어지는 와중에 그녀는 한 가지는 명백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후보에 자신은 없을 것이라고.

* * *

다음 날, 로젤리아는 웬일로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지만 그가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어쩐지 민망하여 그를 마주칠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것은 어젯밤 우연히 목격한 그의 수음 탓도 있었지만, 그런 그를 그리며 저 또한 낯부끄러워지는 행위를 했다는 점이 더욱 큰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더욱 큰 애로를 몰고 왔다. 로젤리아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세드릭이 시녀를 그녀의 침실로 보낸 것이었다.

“아가씨.”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이불을 뒤집어쓴 로젤리아가 움찔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나요?”

여기서 깨어난 티를 내면 시녀는 자신을 당장 식당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어쩌지? 무슨 변명을 해야 하지? 로젤리아는 찰나 머리를 쥐가 날 정도로 굴렸다.

이윽고 한 가지 그럴싸한 변명이 떠올랐다.

“아뇨, 일어나긴 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네? 어디가 아프신가요?”

세드릭으로부터 그녀를 극진히 모시라는 명을 받은 시녀는 몹시 놀라 화들짝 물었다. 로젤리아는 그녀가 속은 듯하여 조심스레 이불을 끌어 내렸다. 눈만 보이게끔 한 로젤리아가 속삭이듯이 답했다.

“머리가 좀 아파서요.”

“당장 의사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괘, 괜찮아요! 조금 쉬면 나아질 것 같아요……!”

당장 침실을 나서려는 옷깃을 겨우 붙잡아 말리니 시녀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로젤리아가 의사를 원치 않는 눈치여서 졸지에 고민에 싸였다. 시녀는 로젤리아의 의견을 따라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건지 그녀의 침대 밑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감기가 드신 건가요?”

“감기까진 아니고 두통 정도예요.”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듯한 시녀의 모습에 괜히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게 세드릭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아서 로젤리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시녀는 두통에 좋은 차를 가져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께도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로젤리아는 제가 예상했던 그대로 벌어지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침실을 나가려던 시녀는 그 한숨에 발목이 잡힌 듯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그냥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걸로 해주시겠어요?”

시녀는 망설이다가 로젤리아의 뜻에 따라주었다. 로젤리아는 전적으로 제 의견에 따라주는 그녀를 꼭 기억하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침실을 나선 시녀는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향긋한 차가 함께였다.

“저기, 오늘 공작님은 저택에 계시나요?”

“아니요. 지금 막 출타하셨어요.”

로젤리아는 그제야 안도감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시녀는 혹 상태가 안 좋아지거든 꼭 저를 불러달라고 부탁한 후 침실을 빠져나갔다. 거짓말을 한 게 있기에 아픈 척을 하던 로젤리아는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마차에 오르는 세드릭이 보였다. 로젤리아는 차를 마시며 그가 저택을 나서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늘도 그 영애를 만나실까?’

어제 눈앞에서 보았던 모습의 잔상이 로젤리아의 마음속에 너무도 큰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인지 마치 피해망상과도 같은 의문이 스르르 떠올랐다.

‘안 만나셨으면 좋겠어.’

간절한 바람이 가슴속에 응어리졌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자격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까지 이렇게 마음을 삼키고, 삼키고, 또 삼켜야 할까.

‘만약 공작님께서 영애를 무척이나 좋아하시고, 그리고 나중에…….’

불쑥 떠오른 단어에 로젤리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중에 결혼을 하시게 되면.’

사랑의 온전한 결실, 두 사람을 한 단위로 묶는 제도. 바로 결혼이었다.

세드릭이 지난번 온 공작 영애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면, 자신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로젤리아는 애타는 속에 어느새 다 들이켠 찻잔을 내려놓고 캔버스 앞으로 다가갔다. 마무리 단계 직전인 공작 영애의 초상화를 내려놓고 다시 펜을 들었다.

대상을 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손이 쓱쓱 움직였다. 언제나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드릭의 모습이 백지장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 다른 인물을 그리는 데 드는 시간에 비해 절반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보지도 않고 그렸는데.

로젤리아는 펜을 내려놓고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저를 향하던 그의 눈동자는 고작 자신의 그림 실력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그림보다 더욱 따스하고 다정하니까.

그녀는 세드릭의 신체 부위 중 온전히 저를 담는 눈동자가 가장 좋았다. 바다를 닮은 듯한 푸른 눈동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아늑했다. 그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제 모든 감각이 잠식당한 것만 같았다.

로젤리아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캔버스 위에 수놓아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그를 만질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꿈에 그리는 대상처럼 그림을 그려두고 그 위를 쓰다듬는 정도, 말이다.

‘…잊자.’

처음부터 이 마음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소중한 보물을 가진 것처럼 품에 꼭 간직하고 있자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허용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혹여나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로젤리아의 입장은 변할 게 없었다. 여전히 마음을 숨겨야 하는, 불쌍한 피후견인일 뿐이니까.

이 속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뜨거운 감정은, 버리지 않는 이상 더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참아보려는 인내심까지 꿀꺽 먹어치운 채로 제 존재를 밝히려 들 것이다.

살면서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가난과 기침, 그리고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가. 로젤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굴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세드릭이 그녀가 제멋대로 그어놓은 선을 넘을수록, 로젤리아는 자신의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나 마냥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음을 알았다.

‘잊어야 해.’

그러니 간직할 수 없다면 버리는 수밖에.

염두에 둔 것이 완연한 각오로 뒤바뀌는 순간, 가슴이 멍든 것처럼 지끈거렸다. 표현할 수조차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은 이토록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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