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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그녀 (2) (5/8)

4장 그녀 (2)

세드릭을 잊자, 그렇게 결심했다.

그날부로 로젤리아는 제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몇 번이나 덧그리며, 마음을 확고히 굳혔다.

먼저 첫 번째로 아침마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헐레벌떡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가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희한한 건 예전엔 그 시간에 깨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는데, 깰 필요도 없는 작금은 그의 기상 시간만 되면 눈이 저절로 번쩍번쩍 떠진다는 것이다. 예전에 이랬으면 좀 좋았겠느냐고 속으로 자조하면서도 이제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세드릭은 몇 달간 약속을 잘 지키던 그녀가 갑자기 예전으로 돌아가자 의아한 듯했으나, 새벽까지 작업에 몰두하느라 그렇다고 여긴 것인지 굳이 그녀를 깨우려 들지는 않았다. 대신 마샤에게 식사를 꼬박꼬박 챙길 것을 당부했다.

두 번째로 로젤리아는 전보다 작업량을 늘렸다. 손을 쉬고 있다 보면 자꾸만 잡생각이 떠올랐고 그중 대다수가 세드릭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림에 매진하여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려 애썼다.

늘린 작업은 그녀의 개인 작업이었고, 반대로 초상화 제작 의뢰는 전보다 줄였다. 왜냐하면 로젤리아에게 의뢰를 넣는 것은 귀족이 상당수였고, 그들을 로젤리아의 작업실로 이끄는 것이 세드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혹 정무를 뒤로한 채 그녀가 초상화를 그릴 때 자리를 지켰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그때가 견디기 어려워서 로젤리아는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상념에 젖어있던 때,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로젤리아는 급히 시간을 확인하고 문으로 달려갔다.

“로젤리아.”

아마, 오늘 초상화 의뢰를 맡긴 귀족을 여기까지 안내한 세드릭이 문 앞에 서있을 것이다.

세드릭을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오랜만’이라는 감상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그간 그를 열심히 피해 다녔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 번은 꼬박꼬박 만났는데, 아침 식사를 함께하지 않은 후로는 일주일 넘게 그를 보기 힘들었다. 그 말인즉슨 로젤리아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루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저 혼자 아등바등 노력했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로젤리아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무심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고작 얼굴 한 번 본 것만으로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이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이리저리 요동쳤다. 눈이 마주치자 뛰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제 존재감을 여실히 알렸다.

그의 뒤로 보이는 인영에 정신이 든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젤리아가 세드릭의 뒤편에 서있는 귀족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여자가 아닌 남자 귀족이었다. 그가 저번처럼 아름다운 영애를 데려왔다면 로젤리아는 또다시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작업 내내 괴로웠을 것이다.

흑발의 세드릭과는 달리 찬란한 금발의 머리칼을 지닌 사내는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를 향한 그녀의 인사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로젤리아 양.”

로젤리아는 갑자기 손을 끌어당기는 그의 행동에 흠칫했다. 금발의 사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귀족의 격식 있는 인사였으나 이런 걸 처음 겪어보는 로젤리아는 느닷없는 접촉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금발의 사내는 굳어있는 그녀의 손등에서 입술을 떼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우연히 전시장에서 로젤리아 양의 작품을 보고 슐라크 공작님께 최대한 빨리 만날 수 있게 해달라 채근을 했다니까.”

그는 마치 친우를 만나듯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게 상당히 당혹스러워서, 로젤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지금까지 만났던 귀족들은 단 한 명도 그녀에게 이런 호감을 보인 적이 없었다. 높으신 분들은 그녀의 그림 실력은 믿어도 그녀 자체를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젤리아를, 조금만 호의를 보여도 당장 기어오를 듯한 천한 빈민으로 보았다. 귀족에게 마땅한 이름이 없는 평민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대하는 사내의 태도가 낯설었고, 그만큼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에…….”

로젤리아는 당황하여 세드릭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팔짱을 낀 채 사내가 하던 것을 지켜보던 세드릭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장 손을 뻗었다.

“테누이스 후작.”

낮은 울림이 사내의 낯선 행동을 단박에 제지했다. 호명된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경고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사내가 냉큼 손을 뒤로하며 싱긋 웃었다.

“잘 부탁해.”

필요 이상으로 휘어진 입매가 어쩐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 * *

테누이스 후작과의 작업은 영 순조롭지 못했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던 그는 여타의 귀족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작업이 이어지는 도중 로젤리아에게 숱하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상하다고 느낄 수 없을 만큼 소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라서, 로젤리아는 찝찝하지만 대답을 해야 했다.

사실 작업이 순조롭지 못한 이유는, 테누이스 후작의 연이은 질문 세례보다는 세드릭의 존재 여부가 더욱 컸다. 테누이스 후작과 함께 실내로 들어선 그는, 공작 영애가 왔을 때처럼 오늘도 한쪽에 앉아 작업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를 등지고 선 로젤리아는 등줄기로 꽂히는 강렬한 시선에 작업 내내 식은땀을 흘렸다. 테누이스 후작이 건넨 질문에 대답을 할 때마다,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세드릭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테누이스 후작은 원래 눈치가 없는 사람인지, 심상치 않은 세드릭의 기색을 읽지 못하고 자꾸만 질문을 이어갔다. 테누이스 후작에게 대답하랴, 뒤에 앉은 세드릭의 분위기를 살피랴, 그 사이에서 로젤리아는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공작님,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작업실에 방문했다. 바로 세드릭의 보좌관이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세드릭을 부르는 표정이 꽤나 초조했다. 턱을 괸 채 로젤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던 세드릭은 갑작스러운 부름이 맘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휘다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문 쪽으로 가리라 예상했는데 그는 의외로 로젤리아에게 다가왔다. 세드릭 특유의 체향이 코를 스치자 로젤리아는 전신을 딱딱하게 굳혔다. 농축된 긴장감에 정수리가 저릿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저자가 허튼짓이라도 하거든 바로 소리치도록 해.”

세드릭 또한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테누이스 후작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나 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욱 뒤숭숭하게 만드는지는 알고 있나 모르겠다. 현재 그녀에게 더한 긴장감을 안겨주는 것은 후작이 아닌 세드릭, 그였다. 등 뒤에 바싹 닿은 그의 존재감이 로젤리아의 심장을 콩콩 울리게 했다.

얼른 그가 멀어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끌어안고, 그녀는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세드릭이 꼿꼿하게 굳은 로젤리아의 팔목을 한 번 꽉 잡은 뒤 서서히 멀어졌다. 그토록 제게서 멀어지기를 바랐으면서, 희한하게도 막상 그가 멀어지니 아쉬움이 들었다. 이제 이런 갈팡질팡하는 마음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익숙했다.

그가 작업실을 나서자 중압감이 느껴지던 공간 속에서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아무래도 불편하던 이유 중 세드릭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티 나지 않게 한숨 돌리고, 로젤리아는 테누이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학술원을 졸업한 지는 이제 반년 정도 됐나?”

호흡을 깊이 들이마신 테누이스 후작이 숨을 내뱉으며 질문을 던졌다. 로젤리아는 그의 날렵한 턱선 부근을 쓱쓱 소리가 날 정도로 강조해 그리며 답했다.

“네. 이제 7개월 정도 됐습니다.”

“슐라크 공작님과는 언제 처음 만났지?”

턱선을 마치고 굵직한 목선으로 서서히 내려가던 로젤리아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지금까지는 그녀와 관련된 것만 묻더니, 세드릭이 나가자마자 그는 세드릭과 관련된 질문을 입에 올렸다.

로젤리아가 펜촉을 캔버스 위에 댄 채로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제가 학술원에 있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공작님께서 잘해주시니, 아직까지 후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겠지?”

로젤리아의 눈가에 깃든 의구심이 짙어졌다. 그녀는 어느새 손을 완전히 멈춘 채 테누이스 후작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홍빛 눈동자에 깃든 이채가 날카로웠다.

마치 뱀처럼 사특한 눈빛으로 시선을 겹쳐오던 그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이제껏 입은 열심히 움직여도 소파에서는 일어날 태세를 보이지 않던 후작이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하니, 로젤리아는 경계심을 칼날처럼 세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자가 허튼짓이라도 하거든 바로 소리치도록 해.’

세드릭은 무언가 알고 그런 말을 한 걸까?

로젤리아가 순한 눈매를 매섭게 치켜뜨자 테누이스 후작은 그리 경계할 것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로젤리아 양,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그대를 해하려는 게 아니니까.”

저를 안심시키려는 말에도 로젤리아는 긴장을 쉬이 놓을 수 없었다. 테누이스 후작의 모습 위로 학술원을 다닐 적 만난, 리베 백작의 모습이 덧씌워진 탓이었다. 좀처럼 방어 태세를 풀지 않는 로젤리아의 태도에 테누이스 후작은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제 뜻을 증명하려는 듯 두 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졌다.

“그대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제안이요?”

“내가 그대의 새 후견인이 되고 싶어졌거든.”

뜻밖의 제안인지라 로젤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테누이스 후작이 차분히 설명했다.

“코델리아 전시장을 갔다가, 로젤리아 양의 그림을 보고 굉장히 놀랐어.”

테누이스 후작은 내내 한 자세로 앉아있었던 게 찌뿌둥했는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작업실 내부를 길게 가로질렀다.

테누이스 후작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로젤리아는 예전에 했던 세드릭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세드릭 슐라크도, 지난날 저렇게 말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일생토록 경험해 본 적 없는 강렬한 순간이었어. 그대의 작품에 매료되었달까.”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의 비슷한 말. 그런데도 그 의미가 주는 무게감이나 느낌이 퍽 달랐다.

세드릭 슐라크가 저 말을 건넬 때는 그 어떤 칭찬보다도 진실되게, 그리고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정말 가슴속에 담아둔 말을 꺼낸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테누이스 후작이 건네는 말은 그렇게까지 그녀의 속내 깊숙이 닿지는 못했다.

로젤리아는 삽시간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봤다. 답은 아주 쉬웠고, 매우 단순했다.

테누이스 후작은 세드릭 슐라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공작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젤리아는 그의 제안을 단번에 쳐내지 못했다.

“후작님께서도 그것들을 전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로젤리아는 그를 잊기로 결심했으나 그것은 퍽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흔들리는 이 줏대 없는 마음이 가장 큰 문제였다.

후작의 제안을 듣고 든 생각은 하나였다. 그와 멀어지면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 또한 가라앉지 않을까, 그를 향해 쉼 없이 펄떡이던 심장이 제 속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해줄 것을 약속하지.”

후작이 이번만큼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와 마주 보고 선 로젤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동시에 어딘가 초조한 기색을 띠자 테누이스 후작이 손을 들어 보였다.

“지금 바로 답을 할 필요는 없어. 그대도 어느 정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작업실 문밖 저 너머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게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꽤나 조급한 게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하지. 다음에 다시 한번 방문할 테니 그때 대답을 들려주었으면 해.”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세드릭은 제가 나갈 때와 달리 소파에서 일어서 있는 테누이스 후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챈 로젤리아가 다급히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님.”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 테누이스 후작과 나눈 이야기를 세드릭에게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갑자기 멋대로 마무리를 짓는 로젤리아를 바라보던 후작은 발맞춰 주려는 것인지 나긋이 웃어준 뒤 문가로 향했다.

후작이 세드릭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으나 세드릭은 답 없이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게 꽂힌 것을 알면서도 로젤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화구를 정리했다.

“…가지.”

이윽고 세드릭이 테누이스 후작을 배웅하기 위해 발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서야 로젤리아는 참아온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드릭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편함보다는 불편함이 앞섰다. 그것은 결코 불쾌함으로부터 기인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너무 좋아서,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어쩔 줄 몰라서 나오는 반사 현상과도 같았다.

뒤숭숭한 마음에 로젤리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해줄 것을 약속하지.’

테누이스 후작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잔상처럼 뇌리에 어른어른거렸다.

* * *

“하아…….”

로젤리아는 깊은 한숨과 함께 팔짱을 꼈다.

빛이 길게 파고드는 캔버스 앞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환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그야말로 걸작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로젤리아의 굳은 인상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작게 혀를 차더니 머뭇거림 없는 손길로 캔버스를 찢었다. 이미 찢어진 종이가 너저분하게 늘어진 바닥 위로 몇 조각이 더 얹어졌다.

도통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테누이스 후작의 제안과 세드릭에 대한 생각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그녀를 괴롭혔다. 테누이스 후작은 둘째 치고, 세드릭의 생각은 그녀를 미치도록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녀보다 한참 어른인 세드릭 슐라크는 이미 혼기가 차고도 남은 나이었다.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그의 결혼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 생각에 결정타가 된 것은 며칠 전 우연히 들은 대화 때문이었다.

며칠 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잠시 작업실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구석에서 비질을 하던 시녀들은 근처에 로젤리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잘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어제는 심지어 칸트 공작님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셨더래! 정말로 주인님과 공작 영애의 혼사가 추진될 건가 봐.’

‘공작 영애라면 지난번 방문하셨던 그 아름다운 분 말이지?’

‘맞아. 초상화 의뢰를 위해 오셨다는 분.’

‘두 분,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마치 세기의 로맨스 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꺅꺅거리는 시녀들의 모습에 로젤리아는 심장이 얼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온몸이 뻣뻣해진 상태로 몇 분이나 꼼짝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만간 세드릭의 결혼 소식이 들려올지 모른다. 아직 감정을 전부 털어내지 않은 그녀의 상태로는 그 소식을 듣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테누이스 후작의 은밀한 제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무서워.’

그렇다고 하여 테누이스 후작이 세드릭처럼 순전히 제 그림에 관심이 있다고만 단언할 수도 없었다. 그 또한 귀족이었으니 리베 백작처럼 속에 더럽고 음습한 욕망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겉이 화려한 만큼 속은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게 또 귀족 아닌가. 세드릭과 만나기 전 그녀에게 손을 뻗쳤던 귀족들의 역겨움을 이미 겪어봤기에 로젤리아는 그런 쪽으로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도 저도 고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로젤리아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유난히 덥지 않았던 여름이 부드럽게 지나가고 제법 쌀쌀한 가을이 도래하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나뭇잎이 예쁜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세상은 저리 아름다운데 그녀의 마음은 헛헛하기 그지없었다.

몇 번 더 펜을 들었지만 끝내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 아니, 끝내기는 했으나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결국 마지막 그림마저도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로젤리아는 울적한 마음에 간만에 일찍 작업을 마감하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멍하니 있자니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귓바퀴가 확 달아오르는 음란한 기억. 몸서리칠 만큼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배 안쪽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런 기억.

눈앞이 새까맣게 물드니 또다시 그날 훔쳐보았던 세드릭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사내의 젖은 탁음은 어제 들은 것처럼 귓가에 선명했다.

로젤리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늘어지던 호흡이 차츰 불에 덴 듯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상상만으로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부근에서 맴돌던 그녀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될 짓을 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심히 두근거렸다. 로젤리아의 손길을 따라 얇은 이불 위로 야릇한 주름이 그려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손이 속옷을 파고들고, 마침내 감추어진 밀부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똑똑.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둥소리보다도 더욱 큰 굉음이었다.

로젤리아는 속옷에서 화들짝 손을 빼내고, 덮어쓰고 있던 이불을 들추었다. 헐레벌떡 침대에서 내려오는 그녀의 걸음새가 다급했다.

“누, 누구세요?”

여린 미성이 요동쳤다. 바깥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머리를 얼른 정리하고 문가로 향했다.

기껏해야 시녀, 아니면 마샤가 아닐까 예상한 문 앞에는 세드릭이 서있었다.

“…공작님?”

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놀란 로젤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대상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자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업 중이었나?”

세드릭이 열린 틈으로 내부를 살펴보며 묻는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방금 하려던 짓을 들킨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로젤리아는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 작업은 일찍 끝냈어요.”

“그럼 지금 시간이 있겠군.”

뜻밖의 등장에 이어 뜻밖의 말이었다.

세드릭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따라오라 말했다. 일단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로젤리아는 그가 저를 찾는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스치는 것이 있었다. 며칠 전 들었던 시녀들의 대화였다.

‘정말로 주인님과 공작 영애의 혼사가 추진될 건가 봐.’

혹시 그가, 제가 두려워하던 그 소식을 입에 올리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만약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태연한 척할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안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막아줄 듯한 너른 등은 만져보고 싶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로젤리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소심한 손끝이 그의 등에 닿기 직전, 세드릭이 부지런히 옮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로젤리아는 행여나 제 행동을 넘어 마음까지 들킬까 봐 황급히 손을 뒤로 감추었다.

“여기.”

그녀를 돌아본 세드릭이 어느 문고리를 눈짓했다. 열어보라는 뜻인 것 같아서 로젤리아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그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애당초 로젤리아는 자신의 침실과 식당, 그리고 예전에 한두 번 가본 그의 집무실이 아니고서야 이 저택 모든 곳이 낯설었다.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자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들어가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로젤리아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가 안내해 준 장소는 그녀가 침실 겸 작업실로 쓰는 방보다 세 배는 넓어 보였다.

벽면이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어 실내임에도 정원에 있는 것처럼 숨이 탁 트였으며, 공간은 완벽하게 둘로 나누어져 있어 창이 끊기는 부분부터는 완벽한 침실의 형태였다.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온종일 작업에 임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이리 와.”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로젤리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소파로 향했다. 세드릭의 옆에 앉아야 하나 고민하던 로젤리아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녀를 흘끔 본 세드릭이 소파 옆에 놓인 서랍 첫 번째 칸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을 꺼낸 그가 놀라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다가와 로젤리아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공작님?”

로젤리아는 한쪽 무릎을 꿇은 그의 행동에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제지한 세드릭이 서랍에서 꺼낸 것을 들어 보였다.

남색의 케이스, 그리고 그 안에는 투명한 빛깔의 보석이 금빛 줄에 촘촘히 꿰인 팔찌가 들어있었다.

세드릭이 고상한 손길로 로젤리아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 로젤리아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경직돼 있었다. 케이스 위에서 반짝이던 팔찌가 어느새 그녀의 손에 채워져 있었다.

“이걸 왜…….”

“생일 축하한다.”

팔찌가 걸린 손목을 내려다보던 로젤리아의 눈이 커졌다. 서서히 올라오는 시선에 놀라운 기색이 가득 흘렀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봄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리아는 빠르게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을쯤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요 며칠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가 많아 아예 잊고 살았다. 더불어, 고아인 그녀에게는 실제 태어난 날이 아니라 고아원에 입소한 날짜가 생일이 되었기에 큰 의미를 가지지도 않았다.

늘 생각해 왔다. 진짜도 아닌 생일,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게 축복을 받으니 별것 없다 자부하던 날도 굉장히 특별한 날처럼 다가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생일인 거.”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 건지 가슴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울렁울렁거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폭발하듯, 울컥하고 올라왔다.

팔찌에 걸린 보석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자세히 보니 보석이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고인 탓이었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까 봐?”

오히려 그녀의 질문이 우습다는 듯 그가 짧은 실소를 지었다.

“이 방도 함께 주는 선물이다. 요즈음 작업 열심히 하던데.”

그건 그를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기 위한 변명일 뿐인데. 다정한 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렇게 친히 작업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의 다정함은 언제나 한계치를 모르고 높아졌다. 고작 빈궁한 피후견인에게 해주는 것치고는 너무도 과분한 것들이었다.

아아, 로젤리아의 속이 더욱 심하게 울렁거렸다.

“응접실 두 개를 이어 만든 공간이니 지금 쓰는 침실보다 훨씬…….”

훌쩍.

말문을 이어가던 세드릭은 그녀가 내는 소리에 멈칫했다.

로젤리아는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당황할지도 모르니 당장 그쳐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런 그를 두고 테누이스 후작에게 가겠다는 건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단 것을. 테누이스 후작이 무얼 해주든 간에, 그건 세드릭이 해주는 것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더욱 비싼 선물을 준다고 해도, 더 좋은 전시장에 그림을 걸어준다고 해도, 이보다 더 넓은 작업실을 마련해 준다고 해도 로젤리아에겐 결코 세드릭을 이길 만큼의 값어치 있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세상에 있어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죄송해요.”

“…왜 사과를 하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로젤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그의 앞에서는 예쁜 곡선을 그리던 입매가 오늘은 축 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애써 참아보려 입술을 깨무는데도 자꾸만, 틈을 비집고 울음이 새어 나갔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로젤리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억지로 얼굴이 드러난 로젤리아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낯이 볼썽사나울 게 뻔했다.

“왜 사과를 하느냐고 물었어.”

그에게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그에 더하여 한순간이나마 흔들렸던 자신의 마음도.

로젤리아의 손을 움켜쥔 그의 악력이 점점 세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인내심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로젤리아.”

세드릭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저음으로 채근했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지난번, 테누이스 후작님께서… 제 새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심해처럼 깊고 아득한 그의 동공이 일순 냉랭해졌다.

“…그래서.”

“…….”

“거절했어?”

그의 눈동자에 초조한 빛이 감돌았다. 그녀가 반드시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는 얼굴이었다.

로젤리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히 긍정이 나오리라 예상한 세드릭은 그녀가 답지 않게 망설이자 점점 표정이 굳었다.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로젤리아가 힘겹게 입을 여는 순간 고여있던 눈물이 살굿빛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몰라.”

사회적인 지위로 보나 후원제에서의 관계로 보나, 세드릭 슐라크는 누가 보아도 갑의 입장이었다. 그러니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걸복걸해야 하는 쪽은 분명 로젤리아일 텐데.

“날 선택하면 되잖아.”

희한하게도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뉘앙스는 그가 풍기고 있었다.

“제가 공작님을 선택하면요?”

로젤리아는 투박한 손길로 눈물 젖은 뺨을 닦았다. 세드릭이 채워준, 수갑 같은 아름다운 팔찌가 찰랑―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럼 저는 앞으로도 계속, 공작님의 곁에 있어야겠죠. 공작님께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로젤리아는 이 마음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다가 끝내 못 이기고 버리려고까지 각오했다.

하지만 그가 또다시 헛된 기대심을 품게 만든다. 그의 다정은 그녀에게 맹독과도 같았다. 대체 어느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생일을 챙긴답시고 이토록 좋은 작업실을 제작해 주고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화려한 팔찌를 선물하겠는가.

그러니 또다시 스멀스멀 안개처럼 자라나는 기대감은 모두 그의 탓이었다.

아까부터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울렁울렁거리던 그녀의 마음이 서투르게 진심을 뱉어냈다.

“저는, 저는 그러기 싫어요…….”

경직되어 있던 세드릭의 눈매가 서서히 커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얼빠진 표정이다.

그녀의 애달픈 읊조림 뒤로 싸한 정적이 실내에 내려앉았다.

놀라워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서야, 로젤리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입에 올린 것인지 깨달았다. 눈앞이 새하얘지며 사고 회로가 고철 덩어리처럼 뻣뻣해졌다.

로젤리아는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해요.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눈물을 채 닦아내지도 못하고, 로젤리아는 작업실에서 빠져나왔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허둥지둥 제 침실로 돌아온 로젤리아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헉헉, 다급한 숨을 내뱉었다. 혹시나 그가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다행히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게 다행인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은연중에, 그가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던 게 아니었을까.

문에 기대서 있던 그녀가 주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어둠이 선연한 곳에서 보석이 달린 팔찌가 찰랑, 하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 * *

로젤리아는 다음 날, 정말 아무런 일이 없었던 양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애썼다. 어제 건넸던 말이 아무것도 아님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위하여 몇 달간 발길을 뚝 끊었던 식당에까지 갔다.

세드릭은 갑자기 나타난 로젤리아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그녀가 평소처럼 나오니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화두에 올리지는 않았다. 다만, 식사 내내 지긋한 시선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오늘부터 공작님께서 선물해 주신 작업실을 쓰도록 할게요.”

“…그래.”

“그리고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 같아서요. 팔찌 감사해요.”

세드릭이 선물로 준 팔찌가 로젤리아의 손목에 걸려있었다. 갓 구운 식빵을 쥐느라 손을 움직일 때마다 영롱한 보석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오색찬란한 빛을 발산했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그런 로젤리아를 응시하던 세드릭도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서로 웃고 있지만 미묘한 긴장감이 식탁 위를 감돌았다.

로젤리아가 긴장을 푼 것은 그가 정무를 위해 식당을 나섰을 때였다. 평소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입에 욱여넣은 식사가 끝났을 즘엔 속이 얹힌 것 같아서 로젤리아는 소화제를 하나 먹어야 했다.

누구보다도 편했던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그 누구보다 불편해진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 원인이 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티를 내지만 않았어도 관계가 이렇게 서먹해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다시 사이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세드릭을 위해서 로젤리아는 그 앞에서 마냥 태연한 척 굴었다. 그녀가 건넸던 이상한 말도 애초 별것 아니었다는 것처럼.

하루, 사흘, 일주일.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아무렇지 않게 보이게끔 노력한 결과, 세드릭은 그날의 일을 모두 잊은 것처럼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로젤리아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일을 하고 돌아온 그가 작업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휴식을 취하다가 잠깐 선잠이 든 로젤리아는 갑자기 저를 안아 올리는 손길에 화들짝 깨어났다. 이후 저를 껴안은 이가 세드릭이라는 것을 알고 더더욱 놀랐다. 그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박동하는 것을 숨기느라 혼났다.

그가 제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데에 아쉬움도 들었지만 로젤리아는 차라리 이처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무럭무럭 자라나던 그녀의 욕심은 한 번 표출된 뒤 지레 겁을 먹고서 저 깊은 본심 안에 숨어버렸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로젤리아의 생일이 속한 계절이자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계절, 가을은 빠르게 지나갔다.

초겨울이 성큼 다가옴에 따라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로젤리아는 두터운 케이프를 걸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꺼먼 하늘은 곧 눈이 내릴 것처럼 아득하고 묘연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에 학술원을 졸업했다. 그날은 펑펑 눈이 내렸고, 저마다 축하를 받는 학생들 사이에서 로젤리아는 외톨이처럼 홀로 서있었다.

칼바람이 외로움이 되어 사무치던 그날, 세드릭이 유일한 보호자로서 로젤리아를 축하하러 와주었다. 그때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벅찼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 중 자신이 가장 행복했으리라고, 로젤리아는 자부할 수 있었다.

쿵!

창가를 서성이던 로젤리아는 갑자기 문을 내리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말았다. 그 상태로 잠시 굳어있던 로젤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문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따라 심장이 둥둥둥, 울렸다.

설마 공작저에 수상한 사람이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건 이미 문을 열고 난 이후였다.

다행히도 문 앞에는 그녀에게 익숙한 사람이 서있었다.

“…공작님.”

안도하여 펄떡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킨 로젤리아는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깔끔하게 넘기던 흑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단정한 차림새는 누가 함부로 잡아 뜯은 것처럼 흐트러져 있었으며, 무척이나 또렷하여 마주 보고 있으면 잘못한 게 없어도 괜히 오금이 저리는 파란 눈동자는 몽롱하게 잠겨있었다.

웬만해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 그가 오늘은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잔뜩 풀어져 있었다. 얼마 안 가 코를 스치는 냄새에 로젤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님, 술 드셨어요?”

자세마저도 흐트러져 벽에 힘겹게 기대서 있던 그가 로젤리아의 질문에 몸을 바로 세웠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그가 입을 열자 술 내음이 짙어졌다. 대답이 뻔한 질문을 반문으로 받아치는 것을 보니 정말 취하기는 취한 모양이었다.

로젤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실로 들어서려는 그가 비틀거리기에 얼른 부축해 주었다. 작업실 안 소파에 그를 앉힌 후, 로젤리아는 얼른 물을 한 잔 가지고 왔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

이렇게 단정치 못한, 아니, 애초에 술에 취한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로젤리아는 의아함보다 놀라움이 컸다.

그녀가 준 물 잔을 단숨에 비운 세드릭은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렸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해.”

그게 되겠느냐고, 로젤리아는 진정으로 묻고 싶었다.

그녀가 제 곁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세드릭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이상하게도, 색스럽게 느껴지는 눈웃음이었다.

“네가 그림 그리는 게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이것도 알코올의 영향인가? 오늘따라 그는 유독 거침이 없었다.

로젤리아는 적응이 되지 않아 눈을 끔벅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캔버스로 다가갔다. 앞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취한 그가 날이 새도록 소파에 앉아있을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로젤리아는 살짝 마른 붓에 물을 묻히고 연분홍빛 염료를 찍었다. 마침 꽃잎을 표현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녀가 손목의 강약을 조절하여 캔버스 위로 아름다운 예술을 그려냈다. 붓을 유려하게 움직이면서도, 그에게로 향하는 신경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여백을 채우던 어느 순간이었다.

“정말 꽃 같아.”

그녀도 모르는 새에 몸을 일으킨 그가 소리도 없이 뒤에 서있었다.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기도 전에 손이 덥석 붙잡혔다. 로젤리아는 제 손등을 덮고도 남는 커다란 손바닥의 열기에 흠칫했다.

“사람 홀리는… 꽃.”

그는 분명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게 분명한데, 내리깐 저음이 귓가에 사정없이 파고드니 그 대상이 꼭 그녀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고, 공작님.”

로젤리아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팔을 비틀었다.

그런 그녀를 제지하려는 듯 쉬이, 하고 속삭인 그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연분홍빛 염료가 묻은 붓이 그의 손짓에 따라 너울지듯 흔들렸다. 나른한 붓질이 제 살결에 닿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등에 맞붙은 그의 가슴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팽창하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로젤리아는 술 냄새가 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풍기는 것은 마치 향수처럼 감미로웠다. 그와 이리도 가까이 맞닿은 상황이 낯설고 어색하여 로젤리아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긴장감에 손과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로젤리아.”

나지막한 음성이 고막 위로 메아리쳤다. 그의 호흡이 바로 귀 옆에서 느껴졌다.

마치 유혹처럼 은밀하게 다가오는 부름에 눈을 질끈 감았던 그녀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세드릭의 시선은 캔버스가 아닌, 말간 그녀의 얼굴에 꽂혀있었다. 특히 붓에 묻은 염료보다 붉은 빛깔의 입술에.

그와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로젤리아는 숨조차 쉬이 내쉴 수가 없었다. 등에 맞닿는 그의 가슴으로부터 평소보다 빠른 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모를 박동이었다.

분위기가 묘했다. 얼결에 스친 시선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그 순간, 그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덩달아 로젤리아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붓이 밑으로 떨어지며 바닥이 연분홍빛 염료로 지저분해졌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에 조금도 신경 쓸 수 없었다.

향기처럼 성큼 다가온 그의 존재에 이끌려, 그녀가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그와 입술이 맞닿았다는 황홀감에 그녀는 잠시, 제가 저지른 짓을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낙뢰처럼 몰아친 현실에 로젤리아는 당황하여 당장 입술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세드릭이 그것을 제지했다. 분명 먼저 입을 맞춘 것은 로젤리아였지만 타오르는 기세는 그가 더욱 극렬했다. 가벼운 버드키스 정도로 맞붙었던 입술이 딥키스로 발전한 것은 순전히 세드릭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읏!”

로젤리아는 순식간에 제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이며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손길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사정없이 덤벼드는 그를 이겨내지 못하고 더듬더듬 물러나던 로젤리아는 갑자기 어딘가에 오금이 탁 부딪히는 바람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뒤에 놓인 것이 푹신한 소파라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것에 안도할 겨를은 없었다. 몸이 젖혀진 그녀를 따라 상체를 기울인 그가 벌어진 로젤리아의 입 속으로 혀를 난폭하게 쑤셔 넣은 탓이었다.

시선처럼 뜨거운 혓바닥이 예민한 점막을 이리저리 훑었다. 모든 숨결을 순식간에 그에게 뺏겼다.

쪽, 쪼옥.

저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그는 마치 풋사랑에 눈이 먼 청년처럼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부족한 호흡을 이겨내지 못하고 헐떡이며, 로젤리아가 다급히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잠, 흣, 잠깐만요.”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그래서 로젤리아는 지금이라도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고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저를 미는 그녀의 손을 도리어 제 목에 두른 뒤, 깊게 입술을 겹쳤다. 말을 하려고 연 입술 너머로 세드릭의 혀가 다시 능구렁이처럼 끈적하게 넘어왔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나는 그의 혀가 구석에 숨은 로젤리아의 혀를 찾아내 질척질척하게 얽어왔다. 그녀의 입술 주변은 이미 타액으로 축축했다. 맞닿은 입술 속에서 두 개의 혀가 외설적으로 비벼졌다. 침을 삼키고 싶어도 포식자처럼 자그마한 입 속을 아무렇게나 휘저어 대는 그의 혀 때문에 무리였다.

“흐응…….”

혀가 맞닿은 채 비벼지자 감당 못 할 전율이 등줄기를 간지럽혔다. 오싹한 쾌감에 로젤리아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야겠다 하는 생각은, 기분 좋은 감각에 금세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가 턱을 비틀며 더욱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로젤리아의 입술을 타고 다디단 신음이 흘렀다.

벗어나고 싶은데 이상하게 벗어나기 싫었다.

제 마음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모순적이었다. 이대로 그의 손길에 철저히 녹아내리고 싶은 본능과, 그가 지금 이러는 이유는 순전히 취해서라는 이성이 치열하게 부딪쳤다.

‘혹시 공작님께서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계신 건가?’

불현듯 드는 의문에 둥둥 떠다니던 로젤리아의 기분이 급격히 저하됐다.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당장 그를 말려야 하는데…….

불쑥불쑥 드는 불안과 초조함은 그의 혀가 입천장을 뭉근하게 핥을 때마다 곤죽처럼 녹아내렸다. 그에게 입술이 먹힌 채로 정신을 차리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로젤리아의 정신이 확 돌아온 것은, 종아리를 감싸 쥐는 손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허벅지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명백히 의지를 담고 서서히 기어 올라오는 것은 분명 그의 손이었다.

그녀의 것보다 월등히 길고 곧은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을 길게 쓸어 올리는 순간 로젤리아는 심장이 쿵, 발밑까지 추락했다.

“공작님!”

로젤리아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황급히 그를 밀쳤다.

들이켠 술처럼 몽롱하게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에 날 선 광채가 감돌았다. 조급한 밀침과 큰 목소리에 잠깐이나마 취기가 달아난 듯한 그는 못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표정이 로젤리아에게는 따가운 상처로 돌아왔다. 정말로,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키스한 것 같아서.

세드릭이 짓는 표정 하나에, 그녀는 고이 간직해 온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 저예요…….”

착각하지 말라고, 나는 당신의 피후견인인 로젤리아라고,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고.

복합적인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세드릭은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 또한 난데없이 벌어진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골이 지끈거릴 것이다. 그런 그의 어려움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해도 당황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이 가슴속 깊이 박혀 떠나가지를 않았다.

욱신거리는 가슴의 고통이 서서히 올라오는지, 로젤리아의 눈동자에 어른어른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아챈 세드릭이 당장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언제고 평정을 잃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로젤리아.”

“오늘은.”

“…….”

“오늘은 그냥 가주세요…….”

지금은 무슨 변명을 듣든, 그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세드릭을 사랑하는 로젤리아에게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를 태연히 마주 보고 있기 힘들어 로젤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외면에 세드릭은 짙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로젤리아를 길게 덮치던 시커먼 음영이 옅어졌다. 문이 닫히고, 그의 기척이 완연히 사라지고서도 로젤리아는 한참이나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입술이 얼얼하고 다리에 힘이 없었다.

세드릭은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이 너무도 강렬히 남아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조금 전 떨어뜨린 붓을 줍는데, 바닥 위로 투명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선한 연분홍빛 염료 위로 물방울이 섞이며 흐릿하게 번졌다. 그 흔적을 손으로 닦던 로젤리아는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만큼은 삼켜내지 못한 마음이 울분처럼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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