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그와 그녀, 그리고
짹짹.
아침이 밝았는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로젤리아는 그 소리에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신이 들자 느껴진 것은 온몸을 뒤덮는 뻐근함과, 특히나 심한 허리 쪽의 통증이었다. 순간 가물가물한 정신에 어제 격하게 넘어지기라도 했나, 되짚던 로젤리아는 곧 한 가지 기억을 상기하고 벌떡 일어났다.
‘좋아한다고.’
‘…….’
‘나도 너를.’
그건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와 주고받듯 나눈 애틋한 고백 뒤로, 되새기기도 부끄러운 정사의 장면 또한 함께 기억났다.
왜 전신의 근육이 이리도 뻐근한지 그제야 알아차린 로젤리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다가 제 뒤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세드릭을 발견하고 입을 떡 벌렸다.
지금껏 그녀가 베고 있었던 것인지, 한쪽 팔을 쭉 뻗은 채 잠든 세드릭은 항상 보던 번듯한 차림새가 아니라 한껏 풀어진 상태였다. 오로지 침대를 같이 쓴 여자만이 볼 수 있는 그의 민모습이었다. 더불어 이불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로젤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벗겨진 이불 밑으로 드러난 그녀 또한 나신이었으며, 평소 티 없이 맑던 피부는 병에 걸린 것처럼 울혈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를 살펴본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려 손부채질을 했다.
어제, 첫 번째 정사가 끝나고서 로젤리아는 불쑥 치미는 감정에 다시금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세드릭은 그 말에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뜨겁게 흥분했고 이후로 하늘에 달이 두둥실 떠오를 때까지 그녀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한참 시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 집무실로 찾아왔었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때 열띤 쾌락에 빠져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기에 그게 누구인지도 알 겨를이 없었다.
‘나 말고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세드릭은 마치 짐승의 울음처럼 씹어뱉는 듯한 어조로 그리 말했다. 언제나 다정하고 여유롭던 그에게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 야성적인 면모였다. 그에 가슴이 떨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로젤리아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서 곤히 잠든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도 잘생길 수가 있는지.
예전에는 혹 숨기고 있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 시선 하나 쉬이 건넬 수가 없었으나 그의 마음을 알게 된 지금은 이렇게,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도 무엇 하나 두렵지 않았다.
그가 주는 안정, 그가 주는 자신감이었다.
“음…….”
그렇게 얼마나 그를 보고 있었을까.
그녀의 지긋한 시선을 느낀 것처럼 세드릭이 잠에서 깨어났다. 로젤리아는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동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불에 덴 듯 어깨를 들썩였다. 혹시 그가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모든 걸 기억한다는 듯 로젤리아를 보자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좋은 아침.”
“…….”
“로젤리아?”
웃는 그의 얼굴이 아침 햇살보다도 찬란하여 로젤리아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세드릭은 넋이 나간 그녀를 보고 픽 웃더니 상체를 살짝 일으켜 세웠다. 로젤리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뒤통수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느껴지고 나서였다.
허공에서 입술이 맞부딪쳤다. 혀가 얽히고 숨결이 마구 뒤엉키던 어제와는 다른, 가벼운 버드키스였다.
“잘 잤어?”
“네, 네…….”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세드릭은 그런 그녀의 회피를 알고도 모르는 척, 머리에 입을 맞춘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주변으로 허물처럼 이리저리 벗어 던진 두 사람의 옷들이 보였다. 그중 가까이에 던져놓은 바지를 입은 세드릭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은 괜찮나? 아파했잖아, 어제.”
직접적으로 정사를 언급하는 그의 말에 로젤리아의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세드릭은 그런 사소한 변화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귓바퀴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조금 더 자지 그래.”
“아니에요. 일어나야죠.”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던 로젤리아는 행동 뒤로 따라붙는 날카로운 고통에 으억,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침대로 엎어졌다.
깜짝 놀란 세드릭이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이런 상태로 뭘… 아니, 다 내 잘못이군.”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일어나려는 그녀를 타박하던 세드릭은 그녀의 고통의 원인이 저라는 것을 깨닫고 자조했다.
로젤리아는 저를 걱정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그녀를 눕혀놓은 세드릭은 넝마가 된 옷이 아닌 새 옷을 입기 위해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했다.
“자, 잠깐만요. 공작님!”
로젤리아는 다급히 그것을 제지했다. 세드릭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우물쭈물거렸다.
“제가 여기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집무실이면 몰라도, 침실은 확실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물론 두 사람이 거사를 치른 것은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와 그녀 사이의 대외적인 관계가 있으니 이런 장면을 선뜻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세드릭은 잠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집무실이나 침실에서 설렁줄을 잡아당기면 언제나 다른 시종들이 아닌 마샤가 직접 시중을 들러 왔다. 그가 다른 사용인보다 마샤를 편하게 대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어제 마샤는 이미 그들의 정사 장면을 목격했다. 저녁 식사를 알리러 왔다가 안쪽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놀라 문을 열어본 것이다.
그가 눈빛으로 꾸짖어 얼른 내쫓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로젤리아는 어제 문이 열린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좀 그렇긴 하겠군.”
사실을 말해줘도 되겠지만 세드릭은 잠자코 그녀가 원하는 바를 따라주었다.
혹시나 여기서 ‘마샤는 이미 우리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걸 알고 있다.’라고 하면 그녀가 놀라 기절할 기색이라 더더욱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프면 오늘은 작업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
세드릭이 상체를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꼭 신의 가호를 받는 느낌이라서 로젤리아는 가슴 안쪽이 따듯해졌다.
아직 그들 사이에 나누지 못한 대화가 많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으며 로젤리아는 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의 짐작대로, 그녀는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손을 움직이기는커녕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세드릭은 신경이 쓰였는지 정무를 보다가도 꼬박꼬박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이윽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로젤리아는, 어제 아침과 달리 텅 빈 침대 옆자리를 발견하고 시간을 확인하였다. 언제나 꼬박꼬박 그를 보러 식당으로 내려가던 7시 30분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로젤리아는 그가 미리 마련해 둔 듯한 드레스를 입고서 조용히 그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작업실이 아닌 식당으로 향했다.
조용히 식당 문을 열자 그녀가 늘 보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신문을 읽던 세드릭은 로젤리아가 온 것을 확인하고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를 향해 당장 달려가려던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인지하고 차분하게 그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잘 잤어?”
“네.”
“몸은.”
“음…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녀장 마샤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저도 모르게 로젤리아를 흘끔흘끔 살펴보았다.
주인이 후원해 주는 화가 아가씨는 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샤는 세드릭이 어렸을 적부터 이 저택에서 일한 사용인으로, 결혼 이후 내내 우울증에 빠져 살던 선대 공작 부인을 정성껏 모시던 것도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래서인지 세드릭은 그녀를 친모만큼 잘 따랐다. 그렇기에 세드릭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마샤는 지난 밤에 본 장면을 쉽사리 잊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 슐라크는 어느 부분에서도 흠잡을 곳 없는 훌륭한 귀족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여자관계가 지나치게 깨끗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마샤는 그가 여자를 이성적으로 가까이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최근, 칸트 공작가의 영애와 조금 특별한 사이가 됐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칸트 공작과의 사업을 위한 물밑 작업일 뿐이었다.
그에게 어떠한 결함이 있는지는 마샤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적 주치의인 브루크에게 털어놓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덕분이었다. 세드릭의 가정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마샤는 그의 결함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세드릭이 처음으로 여자를 가까이하는 것으로 모자라, 다름 아닌 정사 장면을 들켰다. 그간 깨끗했던 여자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성적 불능까지 전부 다 해결되는 장면임이 틀림없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에 얽힌 주인공이 다름 아닌 세드릭의 후원을 받는 화가, 로젤리아였다는 것이다.
마샤는 예전부터 세드릭이 유독 그녀에게 약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제 식사는 거르기 일쑤이면서도 그녀가 식사 때를 놓치는 것은 결코 두고 보지 않는 그였다. 더불어 공작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예술 사업까지 벌여가며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스러운데, 그가 워낙 청렴결백한 삶을 살다 보니 마샤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경향이 있었다.
여하튼 마샤는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은밀했다. 더하여 두 사람을 감싼 분위기 또한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는 평소와 같은 척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면, 지금은 평소와 같은 척을 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뜨거운 시선이 가려지지 않았다. 특히나, 제 주인 쪽이 그러했다.
평상시라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을 마샤가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의아하게 여긴 세드릭이 나지막이 지시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샤는 얼른 사용인들에게 눈짓을 건넸다.
맛깔스러운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고, 로젤리아가 천천히 식사를 이어가는 동안 세드릭은 다정한 시선과 한결같은 태도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의 눈빛은 이제와 돌이켜 보면 도대체 어떻게 숨겼나 의문이 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행복해 보였다.
어느 때건 홀로 공작의 자리를 지키느라 외로워 보이던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마음속 무언가가 가득 채워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마샤 또한 덩달아 로젤리아를 제 윗사람이라도 되는 양 꾸준히 살피게 되었다.
“혹시 몰라 브루크를 불렀으니 이따가 진찰을 받도록 해.”
“브루크요?”
“내 주치의야.”
뜨끈한 클램차우더를 한 숟갈 먹던 로젤리아는 주치의라는 말에 눈을 끔벅거렸다.
“몸, 혹시 모르니까.”
이내 격렬했던 정사로 인한 후유증이 없는지 확인해 보라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낯이 홍당무처럼 짙게 물든 게 훤히 보였을 것이다. 고백을 한 이후로 그의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순간이 없는 것 같다.
품속의 회중시계를 확인한 세드릭은 이만 갈 시간이 됐는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헤어지기 싫은 사람처럼 로젤리아의 뺨을 한 번 어루만진 후 식당을 나섰다. 배웅을 위해 마샤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너무 쳐다보고 그러지는 마.”
마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세드릭이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를 단 채 덧붙였다.
“아직 눈치를 많이 보니까.”
그가 가리키는 대상이 로젤리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챈 마샤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주인님의 심기를 언짢게 만든 거라면,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부터 전한 마샤는 그가 입에 올린 ‘아직’이라는 말이 궁금해졌다. 지금 당장은 눈치를 보지만, 나중엔 그녀가 타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일까?
“친절하게 대해.”
“…….”
“나중에 나만큼이나 극진히 모셔야 할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그 말을 남겨둔 채 세드릭은 마차에 올라탔다.
세드릭을 태운 마차가 멀어져 작은 점처럼 보일 때쯤에야 마샤는 그가 건넨 말의 뜻을 이해했다. 지금이야 경고 정도로 넘어간다지만 후에는 세드릭, 그가 직접 그녀를 눈치 보게 만드는 이를 없애겠다는 말과 같았다.
‘나중에 나만큼이나 극진히 모셔야 할 사람.’
마샤는 그것이 무얼 가리키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바로 세드릭의 옆자리인, 공작 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언제나 겨울같이 냉랭하던 주인의 분위기가 봄처럼 바뀌는 것은 그를 모시는 마샤에게도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작저의 분위기를 환기시켜 줄 산뜻한 일이 아닐까.
배웅을 마치고 돌아서며 마샤는 앞으로 로젤리아를 더욱 철저히 모셔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 * *
브루크는 주의 깊게 맥을 살피는 척하면서 꾸준히 로젤리아를 흘끔거렸다. 공작저에서 일하는 자들 중 세드릭의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당연히, 로젤리아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단둘이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세드릭에게 말로만 들었던 상대를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왠지 꿈을 꾸는 것처럼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 세드릭은 브루크를 찾아와 간결하게 말했다.
‘로젤리아의 상태를 한번 진찰해 줬으면 좋겠군.’
그간 아플 일 없던 피후견인 아가씨가 혹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인가 싶어 브루크는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께서 어디가 좋지 않으신 겁니까?’
명확한 진찰을 위해 사전 정보를 구하는 브루크를 향해 세드릭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 남의 눈치를 볼 일 없이 자란 그인 만큼 머뭇거리는 모습이 퍽 낯설었다.
‘내가 처음이라 자제를 못 했어.’
‘…예?’
‘다른 곳은 괜찮지만 허리는 아직 아픈 것 같으니, 신경 써.’
무언가 명확한 단어가 비어있는, 알맹이가 쏙 빠진 듯한 대화였다. 브루크는 세드릭이 제 방을 빠져나가고서야 그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와 동시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브루크는 아주 오래 전 날 밤의 일을 아직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타 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공자는 그새 더 의젓하고 진중해졌다. 차기 공작이라는 지위 아래 그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어 보이던 세드릭이 그날 밤, 처음으로 타인인 브루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내비쳤다. 그것은 그의 결함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함이 기인한, 트라우마의 문제였다.
그런 그가 로젤리아와, 아니, 여인과 정사를 가졌다는 것은 처음으로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근육이 조금 놀란 듯하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키는 데 좋은 약을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그는 제 말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그녀가 학술원에 다닐 적부터 후원을 했다. 그리고 그가 로젤리아를 후원하게 된 계기에는 브루크가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난생 처음 발기가 됐다는 세드릭의 말에,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 설득을 한 것이 다름 아닌 브루크였기 때문이다.
‘홧김에 던진 말이 사실이 되어버렸군.’
스탕달 증후군.
의학적이라기보다는 예술적 증상에 가까운 그것은 브루크 또한 말로만 들어본 것이었다. 솔직히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으레 그렇듯 역사로만 기록된, 하나의 비현실적인 증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깨진 것은, 우연한 기회로 로젤리아의 작품을 보게 되었을 때였다.
외부에 볼일이 있어 잠시 저잣거리로 나선 브루크는 볼일이 끝나고 돌아오다가 코델리아 전시장을 발견했다. 공작가에서 손수 마련한 그 전시장은 오로지 세드릭이 후원하는 화가, 로젤리아의 그림만 걸린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브루크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실력 있는 신예의 등장은 어디서든 주목받는다지만, 아무리 작품이 좋다고 해도 한 사람의 것만 줄기차게 전시하는 전시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관심도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개장한 지 1년 가까이 지난 전시장에는 여전히 인파가 붐볐다.
예술 영역에 그다지 큰 흥미가 없지만 저리 꾸준히 인기가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 그는 속는 셈 치고 입장료를 지불한 뒤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한참 후 그는 매우 깜짝 놀랐다. 첫 번째 그림부터 그의 발길을 사로잡았으며 여러 구간 중 한 구간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훌쩍 흘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림은 사람의 오감을 휘어잡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세드릭의 증상에 ‘스탕달 증후군’이라고 정의를 내려주면서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던 브루크는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을 경험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체적으로 두드러진 세드릭의 증상은 가히 평범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브루크 또한 그림에 무척이나 감동을 받고, 평소와는 다른 감각의 작용을 느꼈으나 성기가 발기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세드릭만이 겪는 그만의 스탕달 증후군이었다.
‘운명 같은걸.’
어릴 적 트라우마로 발기 불능의 문제를 겪고 있던 세드릭. 그리고 그런 그의 문제를 예술 작품으로 해결해 준 평민 출신 화가 로젤리아.
마치 갈라진 조각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아까 시녀장 마샤가 로젤리아를 깍듯이 모시는 것을 보았다. 예전에도 무시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한층 더 예의를 차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드릭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모시는 마샤이니 그녀 또한 뭔가 평소와는 다른 기류를 눈치챘을 터.
‘앞으로 자주 인사를 드릴 것 같군.’
세드릭과의 대화도 그렇고, 마샤의 태도도 그렇고.
브루크는 상당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결론을 내린 뒤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르게 제가 다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평생 여자를 곁에 둔 적 없는 세드릭의 긍정적인 변화로 말미암은 것이란 걸, 그는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 * *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아름다웠다.
오색찬란한 하늘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듯,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로젤리아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렇게 한참 집중하고 있던 로젤리아는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화살촉 같은 시선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인지 모를 세드릭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지금 막.”
간결하게 답한 세드릭이 로젤리아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쓱 뻗은 그의 손이 로젤리아의 볼을 스치고서 멀어졌다. 그의 검지가 스친 볼가가 깃털에 닿은 것처럼 간지러웠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한 로젤리아는 그의 손가락에 묻어있는 염료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와 마음이 통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도 꿈만 같던 그때가 불쑥불쑥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럴 때였다. 그녀처럼 다가오는 것마저 신중했던 그가, 이전과 달리 스스럼없이 손을 뻗을 때.
“식사는?”
출타를 하고 돌아온 그는 늘 한결같은 질문을 던졌다.
로젤리아는 아마 제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도 그보다는 살뜰히 챙겨주지 못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요즈음 그가 눈에 불을 켜고 제때 끼니를 챙겨 먹는지 신경 쓰는 것을 알기에 로젤리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녀의 답에 눈살을 찌푸린 세드릭이 돌연 허리를 끌어안았다. 애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듯 그의 손이 로젤리아의 잘록한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그런데 왜 자꾸 살이 빠질까.”
그가 무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로젤리아는 곧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작게 웃었다.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드는데 세드릭은 오히려 그녀가 웃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젤리아는 부끄러운 마음에 대놓고 말도 못 하고 작업실 구석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작업실 한쪽에 놓인 침대였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세드릭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침음을 내며 이마를 짚었다. 침중하게 가라앉은 동공에 자책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이제 막 일주일. 그 짧은 기간 동안 그와 그녀는 하룻밤도 빠지지 않고 관계를 가졌다.
순서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공식적인 업무를 마친 그가 로젤리아를 보기 위해 작업실로 찾아오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키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둘은 옷가지를 전부 벗어 던진 채 침대 위를 난잡하게 뒹굴고 있었다.
그녀가 작업에 임하는 공간에서부터 침실로 이어지는 공간까지 스무 걸음도 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드릭은 아침에 힘들어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자제하자는 다짐을 새기고는 하지만, 막상 밤이 되면 그 다짐은 새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순진하고 맑은 다홍빛 눈동자와 마주칠 때쯤이면 이미 배 속은 후끈 달아올랐으며 잠잠하던 페니스는 분출의 욕구를 풀기 위해 단호히 곧추섰다. 그렇게 발기한 성기는 그녀가 엉엉 울며 이제 그만 자고 싶다는 말을 할 즘에야 고개를 수그렸다.
세드릭은 진정 자신의 성기가 오로지 그녀에게만 반응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뜻밖의 깨달음에 세드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금 제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봐도 성욕에 미친 놈 같은데, 그걸 감당하는 그녀는 어떻겠는가. 당연히 고역일 것이다. 힘들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살이 빠질 줄은 몰랐다.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죄책감에 세드릭은, 오늘은 반드시 그냥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여전히 그의 아랫도리는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볼 때부터 빳빳해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오늘은 그냥 자는 게 좋겠어.”
이 이상 있으면 또 성욕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세드릭은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저를 붙잡는 그녀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왜 제 말은 듣지도 않고 가세요?”
옷깃을 붙잡는 손길은 툭 쳐내면 그대로 멀어질 듯 연약했으나 세드릭은 꼼짝할 수 없었다.
다른 이의 앞에서는 절대 순응하지 않는 그가 이 연약한 손짓 한 번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굴복하고 싶어졌다. 만약 그녀가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라고 한다면 세드릭은 두말 않고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였다.
“가지 마세요.”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꼭 저를 두고 가려는 어머니를 알아차린 아이의 것처럼 간절했다. 그녀가 얼굴을 가슴팍에 비비자 세드릭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네가 힘들어.”
하소연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로젤리아가 너른 가슴에 묻어둔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전 좋아요. 공작님 때문에 힘든 거.”
예전에 마음도 밝히지 못하고 끙끙 앓을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의 사랑이 너무도 지대해 그녀가 힘들어지다니, 세상에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솔직히 로젤리아는 그와 나누는 정사가 너무도 좋았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로젤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건네는 한마디는 세드릭의 이성을 뚝 끊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로젤리아의 뺨을 감싸 그대로 입을 맞췄다.
로젤리아는 제 윗입술을 핥는 물컹한 혀의 감촉에 살그머니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금세 능구렁이처럼 건너온 그의 혀가 유영하듯 점막 곳곳을 쿡쿡 건드렸다.
“으응…….”
그녀는 혀가 쭉 빨리는 느낌에 예민하게 몸을 떨며 신음했다.
로젤리아가 키스에 정신이 빠져 비틀거리자 세드릭이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대로 성큼성큼 발을 옮긴 그는 저돌적인 태세와 달리 그녀를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일주일 동안 참 한결같은 태도가 아닐 수 없음에 로젤리아는 작게 웃었다.
“작업이 힘들 것 같으면 언제든지 쉬어도 좋아.”
그가 볼에 입술을 묻은 채 소곤거렸다. 로젤리아는 언제나 저를 향한 배려로 정사의 시작을 알리는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툭, 툭.
단추를 하나씩 푸는 소리가 어쩐지 야릇했다. 이윽고 그가 앞섶이 훤히 벌어진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녀는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탄탄한 가슴팍을 홀린 듯이 어루만졌다. 그 탐색 어린 손길에 세드릭은 순간 국부가 짜릿해졌다. 그녀가 가슴만 만져줘도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치미는 파정의 욕구를 간신히 이겨낸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일 테누이스 후작과 약속을 잡아뒀는데.”
치맛자락으로 서서히 파고드는 그의 손길을 느끼던 로젤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후작님이요?”
“그래. 지난번 제안, 거절해야지.”
그러고 보니 테누이스 후작이 있었지.
요즈음 세드릭이 주는 사랑에 빠져 그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로젤리아가 반응이 없자 세드릭은 괜히 초조해졌다. 이제 그녀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곁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을 잘 아는데도, 제 마음을 숨겨온 기간이 길어서인지 자꾸만 불안감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거절, 해야지?”
세드릭이 뚝뚝 끊어 건네는 질문에 로젤리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선연한 질투에 살포시 웃은 로젤리아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만약 거절 안 한다면 보내주시긴 할 건가요?”
“미쳤다고 그러겠어.”
그는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는지 마구 인상을 찡그렸다. 장난스럽게 넘기려는 기색 속에서도 못내 숨기지 못한 조마조마함이 훤히 드러났다.
이렇게 감정이 잘 보이는 남자였는데. 로젤리아는 그간 자신이 정말로 제 사랑에만 눈이 멀어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세드릭이 조금 급하게 입을 겹쳤다. 그와 혀를 섞는 데 집중하던 로젤리아는 돌연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은밀한 밀부에 닿는 손가락에 흠칫했다.
이윽고 그가 속바지와 속옷에 둘러싸인 음부를 손가락으로 둥글게 문질렀다. 그의 어깨를 붙잡은 로젤리아가 눈가를 움찔움찔 떨었다.
적당히 자극을 받아 젖은 아래를 확인한 세드릭은 거리낌 없이 그녀의 속바지를 끌어 내렸다. 속옷이 함께 딸려 내려가며 음부가 훤히 노출되었다.
로젤리아는 가슴이 빠듯하게 조이는 것을 느꼈다. 이젠 이 감각이 두려움이 아닌 설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손가락이 다가오리라 예상한 로젤리아는 문득 아래에 닿는 물컹하고 축축한 것에 허리를 비틀었다.
“하읏……?!”
황급히 상체를 든 로젤리아는 제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은 그를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고, 공작님! 그건 안 하시기로… 흑!”
첫날 그에게 아래가 빨린 일이 로젤리아에게는 상당히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손가락은 그래도 좀 참아볼 만한데, 그의 입술이 닿는 것은 끔찍이도 부끄러웠다. 정말 본능만 남은 금수의 행위처럼, 참을 수 없이 음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로젤리아는 저와의 약속을 간단하게 어기고 찐득한 애무에 임하는 그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힘 들어간 눈매는 그의 혀가 클리토리스를 문지르자마자 몽롱하게 풀렸다.
“흐응, 아!”
입에서 달콤한 비음이 흘러넘쳤다. 그의 애무로 질구가 젖기 시작했는지 아래에서도 쿨쩍, 쿨쩍 하고 찐득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불을 손으로 말아 쥔 채 로젤리아는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불보를 움켜쥔 로젤리아의 손등이 창백하게 질려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의 신경이 하복부로만 쏠린 것 같은 이상야릇한 감각이었다. 그가 아래를 핥을 때마다 점점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며, 횃불을 삼킨 것처럼 가슴속이 달아올랐다.
세드릭은 끝내 그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릴 때가 되어서야 묻어둔 고개를 들었다.
“읏, 하아, 공작님, 안이 너무… 간지러워요. 으응, 어떡해…….”
오르가슴을 느끼기도 전에 그가 입술을 떼는 바람에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로젤리아는 지금 이 순간 절실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세드릭이 나른한 손길로 바지춤을 풀어 헤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푹 젖은 구멍이 벌름댈 게 분명했지만, 당장 이 열기를 해소하고 싶단 생각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세드릭은 잘 길들여진 것처럼 알아서 다리를 벌리는 그녀의 행동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당장 비좁은 내벽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낸 그는 튼실하게 발기한 페니스 위로 질척질척한 향유를 쭉 뿌렸다. 일주일간 이어진 정사로 인해 그녀의 침대 옆 서랍에는 언제나 향유가 준비되어 있었다.
혹 그녀의 질구에 상처가 날까 향유를 골고루 펴 바른 그가 이윽고 로젤리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첫 경험 때만 해도 일말의 여유조차 없던 그는 이제 느른한 성적 긴장감을 즐길 줄 알았으며, 허리를 한 번 휘젓는 것으로 자궁 밑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삽입하는 법을 알았다.
“하으읏!”
묵직한 압박감에 로젤리아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 갸름한 턱에 쪽, 하고 입을 맞춘 세드릭이 유연하게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아, 앗, 천, 천히… 흐윽!”
제대로 정상위의 자세를 잡은 그가 탄력적으로 골반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푹, 푹!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향유로 인하여 굵직한 페니스는 잘도 그녀의 질 안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지기를 반복했다. 기분 좋게 아래를 야금야금 씹어대는 그녀의 내벽에 세드릭은 아득한 탄식을 흘렸다.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은 쾌락이 해일처럼 몰려와 그를 잠식했다.
“응, 아아! 핫, 으, 아읏!”
로젤리아는 이제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새된 교성만 터뜨렸다. 그에게 온몸이 엉망으로 들쑤셔지는 기분이었다. 그 무자비한 행위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것은 달뜬 쾌락이 전부였다.
좋아, 좋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솔직한 신음에 세드릭이 허릿짓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꾸준하게, 그리고 연속적으로 허리를 쳐올린 지 몇십 분이 지나서야 그는 첫 번째 사정에 이르렀다. 로젤리아 또한 몰아치는 절정과 함께 그대로 몸을 쭉 늘어뜨렸다. 벌써 기진맥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정도로 만족이 될 리가 없었다.
“흐읏…….”
안에 걸쭉한 사정액을 싸지르던 그의 성기가 다시금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 변화가 저절로 자극이 되어 로젤리아는 허리를 비틀었다.
“늘 그랬듯이.”
그녀의 귓불을 쭉 빨아들인 그가 서서히 드러나는 달빛에 기대어 속삭였다.
“못 버티겠으면 기절해.”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더운 숨결과 함께 귓바퀴 안으로 파고드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다.
* * *
로젤리아는 고통이 여실한 허리를 붙잡은 채 시녀가 내온 약을 들이켰다. 차처럼 맑은 빛깔의 약은 얼핏 보기에 맛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쓰고 텁텁했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약을 먹는 동안, 마샤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 테누이스 후작의 방문을 전했다.
로젤리아가 약으로 텁텁해진 입을 달래기 위해 물을 한 잔 마시는 사이, 지난번에 보았던 부담스러울 만치 화려한 금발이 눈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테누이스 후작님.”
“오랜만이네, 로젤리아 양.”
후작은 예의 그날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로젤리아는 미리 꺼내놓은 포장된 캔버스를 그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맡겨주신 의뢰는 이미 끝내놓았습니다.”
로젤리아는 테누이스 후작과 손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캔버스를 건넸다. 그 신중한 손길을 눈치챈 듯 후작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꼬리를 유려하게 휘었다.
“여기서 봐도 되겠나?”
“네.”
테누이스 후작은 그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겉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찌익, 포장이 찢어지며 드러나는 그림에 후작은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테누이스 후작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편이었고 그렇기에 제국 안팎으로 소문이 난 화가들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실제로 그들을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맡긴 초상화도 여럿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초상화만큼 완벽하게 그를 표현한 작품은 없었다. 꼭 스스로가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사실적이었다. 그림의 목적이 초상화임을 따지자면, 최고로 칠 수 있는 값어치를 가진 작품이었다.
로젤리아의 작품만이 걸린 코델리아 전시장에서 느꼈던 오싹한 전율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아, 역시나 탐이 난다.
테누이스 후작은 어렵사리 작품에서 눈을 떼며, 감탄스레 읊조렸다.
“완벽하군.”
“감사합니다.”
“내 제안에 대해서도, 이처럼 완벽한 대답을 듣게 된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는 기대감이 듬뿍 담긴 시선을 보냈다.
로젤리아는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작의 제안에 홀라당 넘어갈 것처럼 연약하던 제 마음이, 지금은 망치로 두드린다고 해도 꼼짝하지 않을 만큼 굳건했다.
“죄송합니다.”
로젤리아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로젤리아는 그가 정말 자신을 순수하게 후원해 주고 싶었을 것이라 여기며 정중히 사과를 전했다. 거절까지 하는 마당에 저를 향한 그의 손길이 마냥 음흉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슐라크 공작님의 후원을 받는 것이 좋아요.”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해줄 수 있다고 약속했는데도?”
“아니요. 아무리 약속한다 해도, 후작님께서는 주실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로젤리아의 욕심을 채우는, 세드릭의 사랑.
테누이스 후작은 죽었다 깨어도 그것을 그녀에게 안겨줄 수 없었다. 로젤리아에게 그것을 안겨줄 수 있는 이는 세드릭 슐라크가 유일했다.
“후작님의 뜻깊은 제안이 저보다 더욱 간절한 이에게 돌아갔으면 합니다.”
더 설득하지도 못하게 선을 긋는 로젤리아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의 남은 미련마저 털어내려는 것처럼 로젤리아는 한 점 머뭇거림 없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얘기를 더욱 꺼내기도 뭐해서 테누이스 후작은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로젤리아의 그림을 가지고 작업실을 나서려던 후작이 멈칫했다.
“아, 로젤리아 양.”
화구를 정리하던 로젤리아가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내게 연락해도 좋아.”
처음부터 저돌적이던 후작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테누이스 후작을 가만히 응시하던 로젤리아가 싱긋 웃었다. 이전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당당한 태도였다.
그에게 전한 대로 로젤리아는 결코 이 마음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설사 지금 당장은 저를 좋아한다는 세드릭 슐라크의 마음이 언젠가 변할지라도, 로젤리아의 마음은 변할 리 없었다.
그녀는 세드릭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족쇄처럼 평생 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 *
숨겨온 마음이 통한 뒤로 둘 사이엔 자연스러운 변화가 몇 가지 생겼다.
첫 번째로, 매일 아침마다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밤을 같이 지새웠으니 아침 또한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용인들에게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들켜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로젤리아는 여전히 그와 밤을 보냈다는 것이 알려지는 걸 몹시도 부끄러워했다.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세드릭은 일부러 아침마다 사용인을 부르는 악취미적인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두 번째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함께 식사를 했다. 그것은 아침일 때도 있고 저녁일 때도 있었으며 가끔 그가 출타를 하지 않을 때면 점심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제 몫을 다 먹을 때까지 옆자리를 지키던 그는 이제 그것으로 모자라 아예 그녀만의 시종이 된 것처럼 손수 수발을 들었다. 처음에는 마냥 거절하던 로젤리아도 어느덧 그가 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데에 꽤 익숙해졌다.
세 번째로는, 가끔 둘이 함께 외출을 하기도 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그녀가 세드릭의 제안에 따라 코델리아 전시장에 방문한 것이었다.
졸업식 날 이후 처음으로 코델리아 전시장을 가본 로젤리아는 제 그림이 빼곡하게 걸린 전시장을 둘러보며 말 못 할 벅찬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진정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세드릭 또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전시장을 나선 그녀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에 세드릭은 최대한 시간을 빼 그녀와 데이트를 즐기고는 했다.
이 모든 변화는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이전보다 월등히 길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마치 캔버스에 칠해진 염료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간 속에 스며들었다.
로젤리아는 제가 살아온 인생 중 작금이 가장 행복했다.
고백하기 전까지 그와 있는 시간은 로젤리아에게 너무도 두려운 시간이었다. 끊임없는 감내의 시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욕심이 나서 자꾸만 안달을 내게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그를 향한 설렘도 마냥 기쁘게 와닿지 않았다. 결국은 억눌러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백을 한 후로 그와 있는 시간은 평온했다. 마치 이제야 제대로 된 자리를 찾은 것만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은 그간 쌓아둔 이야기도 차곡차곡 풀었다. 로젤리아는 그가 에스코트를 했던 공작가 영애가 실은 그저 사업적 파트너일 뿐임을 알게 되었으며, 세드릭은 왜 그녀가 테누이스 후작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서로 같은 마음이 한참을 빙빙 돌아서야 만났지만 로젤리아는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이제라도 닿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로젤리아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신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이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로젤리아?”
“아, 네.”
며칠간의 행복한 나날들을 되새겨 보던 로젤리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시선을 들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오후, 세드릭은 느닷없이 그녀를 집무실로 불렀다.
로젤리아는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짚이는 바가 없었다. 그녀를 소파에 앉혀두고 무언가를 찾던 세드릭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로젤리아는 그가 건네는 서류를 얼떨떨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이게 뭔가요?”
세드릭은 말 대신 눈짓으로 서류를 가리키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사람처럼 다소 조급한 태도였다.
그 미묘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로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를 살펴보았다. 벤트 제국의 공용어와 표가 적절히 뒤섞인 서류는 로젤리아에게 퍽 낯설었다.
대체 뭐지?
눈살을 찌푸린 채 한참이나 서류를 살펴보던 로젤리아는 곧, 그것이 슐라크 공작가에 소속된 제국 내의 전시장 정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줄줄이 나열된 전시장을 훑어 내려간 로젤리아의 시선은 서류의 하단에서 멈칫했다.
“공작님, 왜…….”
서류 하단에는 위에 명시된 전시장의 실소유주가 적혀있었다. 그런데 분명 슐라크의 이름이 쓰여있어야 할 공간에 로젤리아, 그녀의 이름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바꾼 것은 아니야. 어찌 됐건 전시장의 소유권을 네 앞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네게도 마땅한 명분이 필요하거든.”
“적어도 슐라크의 이름을 가졌다는 명분이.”
“…네?”
슐라크의 이름을 가졌다는 명분.
로젤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아니면, 지금 드는 생각이 잘못된 걸까?
그녀가 슐라크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세드릭과의 결혼.
그런 생각이 들었단 것 자체가 죄스러울 정도로 그녀에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후견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리는 명령이야.”
후원 관계를 맺어온 이래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명령’한 적이 없었다. 제안을 건네고, 선택권은 오로지 그녀에게. 그것이 세드릭이 한결같이 고수해 온 태도였다.
을보다 갑이 더욱 긴장한 듯한 낯선 상황 속에서, 로젤리아는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꼭 그때의 기분 같았다. 그가 맹독 같은 다정함을 마구 선사하던 그때. 그로 인하여 로젤리아의 기대감이 한계치를 모르고 상승하던, 그때.
“나와 결혼해.”
차츰 고조되던 박동은 그가 건넨, 명령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어조에 그대로 뚝 멎어버렸다.
“그럼 이 많은 전시장을 포함해서 내 모든 것들을 네게 줄 테니까.”
그가 가진 돈, 명예, 화가로서 최고의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전시장.
로젤리아는 그런 것들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오직 단 하나였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드릭의 불안한 시선이 그녀의 손길 위로 진득이 따라붙었다.
“그건 공작님께서 명령을 내리실 일이 아닌걸요.”
자신의 대답에 세드릭이 급격히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그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분한 척 말하지만, 로젤리아의 손끝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목이 메었다. 가슴속이 바다로 변해버린 것처럼 마구 울렁거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로젤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간절히 부탁해야 할 일이잖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석상처럼 경직되어 있던 세드릭의 낯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를 마주 보며 로젤리아는 살포시 웃었다.
당당히 아내로서 그의 옆에 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와 마음이 통했다지만 이 이상 바라는 것은 지독히도 환상적인 꿈이라는 것을, 로젤리아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마음이 닿았다고 해서 두 사람이 서있는 위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는 또다시 로젤리아가 멋대로 그은 선을 넘어와 버렸다. 이미 희미해져 버린 선 위를 성큼 가로지르는 세드릭의 진심에 로젤리아는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드실 거예요. 저는 공작님의 옆에 설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 자격을 만드는 건 나야.”
세드릭은 평생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양 그리 말했다. 언제나 어른스러우며 단단한 그는 이번 일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가 건넨 한마디에 로젤리아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은 위안이 몰려왔다. 정말로 그의 옆에 서고자 마음먹는다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난과 힘겨움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와 함께라면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문득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제대로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염료 자국이 묻은 손을 세드릭이 감싸 쥐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에 로젤리아는 가슴 안쪽으로까지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공작님.”
그녀의 부름에 세드릭이 조용히 눈만 들었다.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가 오던 여름, 그녀가 학술원을 졸업하기 전 이 저택에서 머물던 때 사과보다는 감사를 전하라는 그의 말. 그 기억이 되살아나 고맙다고 말하려던 로젤리아는 입술을 벌리다가 멈칫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작품처럼, 그만의 스탕달 증후군을 일으킬 만큼 아름답게 웃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로젤리아의 소곤거림에 놀란 듯 눈을 키우던 세드릭이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맞닿는 입술 위로 심장이 쿵, 쿵, 쿵 원래의 박자보다 더욱 빠르게 뛰었다.
산뜻한 계절이 돌고 돌아 두 사람을 품는, 따스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