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그 (3)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다.
칭찬하는 척,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마저도 그에게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 * *
로젤리아에 대한 감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처음 스탕달 증후군을 경험했을 때처럼 강렬했으며, 어안이 벙벙했고,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그는 몇 번이나 자조하고 또 자조했다. 그는 스스로 떳떳하다 생각하며 그녀의 후원을 고집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 감정이 생겨버리고 나니 자신이 더럽고 흉측한 리베 백작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품었다는 것을 로젤리아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측은 쉬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를 지나치게 경계하던 로젤리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저를 후견인으로서 철석같이 믿는 그녀였으니 오히려 리베 백작 때보다 더욱 큰 경멸감과 배신감을 느낄 터.
그래서 세드릭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겠다고.
* * *
저택으로 데려온 로젤리아와 함께하는 아침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만큼은 식사를 감시한다는 명목 아래에 그녀를 꾸준하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평소 같았다면 행여나 의심을 살까 봐 시선 하나 건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끔씩,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그녀를 볼 때면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고 손부터 나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로젤리아 못지않게 세드릭 또한 굳어버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순식간에 몰아친 당혹을 애써 숨기며 세드릭은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당황스러운 얼굴은 의연하게 가려졌을지 몰라도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수는 미처 가릴 수 없었다.
* * *
거슬리는 존재가 생겼다. 다름 아닌 테누이스 후작.
벌이고 있는 사업의 규모나 영역이 완전히 달랐기에 가문끼리 경쟁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로젤리아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작이 로젤리아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나서.
로젤리아에게 귀족들의 초상화 의뢰를 알선해 준 것은 세드릭이었으나 테누이스 후작마저 그 의뢰를 맡겼을 때는 전부 다 때려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젤리아에게 무어라 둘러댈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테누이스 후작을 만나지 말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가 로젤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고 나서였다.
순간 머리끝까지 빠듯하게 열불이 차올라 실소가 터질 뻔했다. 그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둔갑하는 데에 그는 굉장히 애를 먹었다.
평소라면 안내를 마친 후 정무를 위해 돌아갔을 테지만 그날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아 작업실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테누이스 후작은 작업이 이어지는 내내 로젤리아에게 지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거슬린다, 거슬려.
숨기고자 했던 마음이 질투로 탄로 나게 생긴 상황에서 세드릭은 가까스로 이성을 지켰다.
인내심이 이전에 비하여 다 타버린 심지처럼 바싹 짧아진 것이 느껴졌다.
* * *
그녀의 생일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무얼 좋아할까. 무얼 해줘야 기뻐할까.
온종일 정무에 집중도 못 하고 로젤리아의 생일 선물만 고민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바로 그녀가 내내 머무는 작업실이었다.
그전부터 그녀가 방을 침실 겸 작업실로 쓰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공작저에는 그보다 넓은 방이 몇 개나 더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방들도 작았다. 세드릭은 그녀가 최상의 조건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했다.
그리하여 1층 응접실 두 개를 개조하여 이어 붙였다. 그녀에게 비밀로 한 공사를 마치고 나니 어쩐지 허전해서, 그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제게 한결같이 그림을 보내주는 로젤리아에게 보답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임스의 질문. 그때 제임스는 저택으로의 초대를 꺼내기 전 장신구 이야기를 꺼냈었다.
장신구에 대하여 곰곰이 되뇌어 보자 언제나 캔버스 위를 유영하듯 가로지르는 그녀의 하얗고 마른 손목이 떠올랐다. 그 손목에 제가 선물한 팔찌가 걸리면 어떨까.
순간 떠올린 상상만으로 세드릭은 아랫도리에 자극이 오는 것을 느꼈다.
‘미친놈.’
제가 선물해 준 팔찌를 찼단 이유로 발기를 하다니. 진정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몹쓸 상상이 배가 될까 봐 관둘까도 했지만 세드릭은 끝내 보좌관에게 지시를 내려 팔찌를 구했다. 그저 순전히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고 자위하며 말이다.
이윽고 그녀의 생일날.
세드릭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분명 여느 때처럼 예쁜 미소를 지은 채 감사하다고 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눈물을 터뜨린 것이다.
왜지? 왜 우는 걸까. 마음에 들지 않나? 별로인가? 아니면 혹시 생일을 잘못 안 건가?
순간 오만 가지의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 그녀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지난번, 테누이스 후작님께서… 제 새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세드릭은 누군가 뒤통수를 가격한 것만 같은 충격과, 이후로 불길처럼 화르륵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거절했어?”
차분하게 묻자고 백 번은 되뇌었으나 실상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정말이지,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게 여실히 티가 났다.
세드릭은 자신 있었다. 그는 그녀와의 후원 관계에서 그 무엇 하나 아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이면 그림, 식사면 식사, 거처면 거처.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가 다 이루어줄 수 있도록 환경을 설계하고 주변을 만들었다.
그것을 위하여 그녀가 어렸을 적 머물던 고아원까지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으며, 그 건물을 폐쇄하지 않았는가.
이런 은밀한 행동이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어떻게든 로젤리아를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머물게 하고 싶었기에.
철저한 계획 아래에 로젤리아의 주변을 차츰 제 영역으로 물들였고, 남부러울 것 없게 그녀를 지원했다. 그래서 세드릭은 그녀가 틀림없이 후작을 거절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억지로 눌러 참던 초조함이 결국 표출된 것은 그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무심코 나를 선택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다그치자 로젤리아가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공작님을 선택하면요? 그럼 저는 앞으로도 계속, 공작님의 곁에 있어야겠죠. 공작님께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세드릭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저, 저는 그러기 싫어요…….”
뭐지.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그래서 그녀가 지금 제게 건네는 말이 사랑 고백처럼 들리는 것일까.
그는 이번만큼은 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놀라웠고, 얼떨떨했다. 그 표정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자니 곧 당황한 로젤리아가 벌떡 일어나 그를 두고서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세드릭은 망부석처럼 굳은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섣부르게 생각하지 말자 다짐하면서도 자꾸만, 수면 위로 기대감이 연꽃처럼 피어올랐다.
설마, 아닐 거야, 하지만 설마.
희망과 절망 속에서 그의 이성은 미친 듯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얼마 안 가 뿌연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 로젤리아가 평소처럼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드릭은 혼란스러웠다. 많은 질문이 그의 혀끝에 맴돌았다.
어제 꺼낸 말은 무엇이었는지, 혹시 너도 나와 마음이 같은지,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러나 물을 자신은 없었고 로젤리아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굴었다. 언제,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처럼.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를 보자 세드릭은 제가 품은 것이 괜한 기대임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입장인지라 이 간사한 뇌는 제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로젤리아가 천연덕스럽게 구는데 지난 일을 억지로 들출 수는 없으니 세드릭 또한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업무에 임하면서도 온종일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혼란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처음으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솔직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는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로젤리아의 침실 앞에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의 경고를 깡그리 무시한 취기가 그를 그녀에게로 이끈 것이었다.
“공작님, 술 드셨어요?”
취한 저를 보고 놀라워하는 그녀는 참 예뻤다. 순간 그대로 손을 뻗어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금욕의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아무리 뇌가 알코올에 잠식당했다고 해도 사리 분별만큼은 정확히 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보고 싶어서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림을 그려보라는 말에 난처해하던 로젤리아는 한숨을 내쉬고 붓을 들었다.
연갈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땋은 채 섬세하게 붓을 움직이는 그녀는 천생 화가의 모습이었다.
예쁘다. 예뻤고, 그냥 예뻤다.
감상은 따분하리만큼 한결같았다.
후우.
술 냄새가 배어 나오는 숨을 내뱉은 그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집중한 것인지 제가 다가온 줄도 모르는 로젤리아의 손을 불시에 감싸 쥐었다.
“정말 꽃 같아.”
깜짝 놀란 듯 움찔 떨리는 그녀의 어깨가 사랑스러웠다. 잔머리가 살짝 빠져나온 하얀 목덜미가 야릇했다. 당장 드레스를 끌어 내리고 가녀린 어깨 위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욕구가 산불처럼 피어올라 그를 잠식했다.
정말이지, 그녀는 꽃 같았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어떻게든 보고 싶고,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은…….
“사람 홀리는… 꽃.”
나를 홀리는 꽃, 말이다.
가까이서 마주 본 로젤리아의 눈동자는 그대로 빠져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이 깊고 영롱했다.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예술을 그려내는 사람답게, 존재 자체가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 예술 작품은 언제나 한결같이 그에게 아찔한 스탕달 증후군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을 쥔 힘이 서서히 풀렸다. 붓이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듯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스칠 듯 말 듯 가깝던 입술이 겹쳐졌다.
* * *
아침 햇살이 끈적하게 눈꺼풀을 벌리고 들어섰다.
정신이 든 순간 세드릭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바늘 끝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이마를 짚은 채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이윽고 눈을 끔벅거렸다.
상상만으로도 다리가 풀리는, 그런 달콤한 꿈을 꾸었다. 로젤리아와 입을 맞추는 꿈이었다.
‘…아니.’
꿈이 점점 선명해지며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것.
이마를 만지던 손이 스르륵 입술로 내려왔다. 이를 한참 동안이나 어루만지던 세드릭은 오래지 않아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 한정으로는 이성이 발휘되지 않는 그가 또 멋대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기억이 너무도 뚜렷했다.
‘로젤리아가 먼저… 키스하지 않았나?’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자 제게 먼저 입을 맞춘 그녀의 얼굴이 뇌리에 어른어른거렸다.
약 일주일간, 세드릭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식사도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겠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서류를 잘못 읽어 보좌관이 정정하는 실수가 몇 번이나 발생했으며 대신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넋을 놓고 있기 일쑤였다. 보다 못한 황제가 그를 지적했을 정도로 그는 내내 얼이 빠져있었다.
자꾸만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일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의 몸과 정신은 그날에 묶여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것은 로젤리아의 행동이었다. 술김에 제가 잘못 기억한 것은 아닐까 몇 번이나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말로 그날, 먼저 입을 맞춘 것은 로젤리아였다.
물어보고 싶다. 찾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녀가 또 전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 그럼 그는 또 덩달아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고민은 돌돌 말린 실타래처럼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한 점 보이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또 추측하다 지친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로젤리아의 마음이 무엇인지 떠보기 위해 강력한 수를 하나 던져보는 것으로 말이다.
그 강력한 수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그는 일전에 그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제가 공작님을 선택하면요? 그럼 저는 앞으로도 계속, 공작님의 곁에 있어야겠죠. 공작님께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결혼. 그래.
그 정도의 강력한 수가 되어야지만 그녀의 본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로도 한참 머뭇거리던 세드릭은 고민 끝에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집무실 문을 두드린 시종에게 그는 나지막이 명했다.
“로젤리아를 좀 불러오지.”
“네, 주인님.”
떠나가는 시종의 뒷모습을 보며 세드릭은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하는 것을 느꼈다.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이 감정은 명백한, 사랑이었다.
<스탕달 증후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