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혼(傷魂)
第 一 章. 소파(小派) 함종문(咸種門) 1
옛적 당(唐)나라 말기, 중원 하남(河南)의 작은 고을에서 그 고을을 뒤흔들만큼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갓난 아기였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이맹(李孟)이라 지었다. 그는 기이한 시선속에
모두의 관심을 모았는데, 과연 어릴 적부터 몸이 유난히 튼튼했고 매우 날렵해 모두가 장군이 될 몸이리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그가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던 해, 그는 작은 산골짜기에서 고대부터
전해내려 오는 무학(武學) 비급을 손에 넣는 기연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내버리고
오로지 무공에만 정진해 진정한 무학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소(黃巢)라는 사람과 만나 의기
투합하게 되고 서로 마음이 맞고 생각하는 일이 같아 즉석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그러던 중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
하는 조정에 분노하여 그를 수령으로 내세우고 함께 대농민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전국 각지를 전전(轉戰)하며 이
맹의 활약으로 가는 곳마다 대승을 거둘 수 있었기에 모두가 그를 <무신(武神)>이라 부르며 매우 경외(敬畏)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년 후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는 황소의 변한 성품을 보고 크게 탄식한 그는
그 길로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 또한 천명(天命)을 피할 수 없었으니 그의 나이 75세의 어느 날 3세밖에 안된 아들을 남겨두고 먼
저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경(璟) 자는 백옥(白玉)이었고, 그가 바로 전진교(全眞敎) 교주
왕중양(王重陽)에게 각종 비법을 가르쳤다는 신선 순양자(純陽子) 여동빈(呂洞賓)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제 아비가 익혔던 무학을 이었다. 그 무공들은 대체로 난잡하다 할 정도로 수가 많았는데, 부전자
전(父傳子傳)이라 한다니 그의 무학적 재질은 대단히 뛰어나 그 잡다한 무공을 모두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뛰
어난 자질로써 그 무공들을 조합해 하나의 절세검법을 만들어 내어 항상 검을 차고 다녔다니 그것이 천둔검법(天遁
劍法)이었다. 또한 그는 문(文)에 흥미를 느껴 이런저런 문학을 배워 나이를 먹자 관직에 뜻을 두게 되었고 어렵지
않게 한 현령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에 크게 분노한 그는 곧 심양(尋陽) 현령직을
버리고 출가하여 강호로 떠나니며 신선술을 익히게 되는데, 후일 여산(呂山) 불수암(佛手庵)에 은거해 신선이 되었
다.
허나 그런 그에게도 역시 자식이 있었다 하니 그가 출가하기 전 관리로 있을 때 얻은 자식인 이주공(李主空)이다.
이주공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평생동안 그저 무림(武林)의 고수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 역시
대대로 내려오는 비급을 통해 무공을 익히고 통달하여 후일 강호로 나서는데 그가 바로 송대(宋代)에 천무대협(天
武大俠)이라 불린 일세를 풍미한 무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의(義)만을 추구했고, 사람의 성품이 곧아 여지없이 대협
이라 칭송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작은 주루에서 아리따운 한 중년여인과 식사를 하고 있는 중년인 역시 천무대협 이주공이었다. 이
주공은 역시 천무대협의 칭호가 아깝지 않게 대협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균형있게 잘 가꾸어진 수염이 그랬고
눈알을 굴릴 때마다 번쩍거리는 눈과 풍기는 기도는 과연 범인(凡人)과 크게 달라 보였다. 한편 중년여인은 실로 아
름다웠다. 눈매는 썩 포근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개미처럼 가는 허리는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보호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분명 중년의 나이로 보이면서도 살결은 여전히 곱기 짝이
없어 젊었을 때의 미모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주공은 막 술을 들이키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고개를 치켜들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참, 양아. 그녀들의 일은 어찌 됐소?]
[흥. 몰라요.]
조용히 식사하던 그녀는 그 질문에 코웃음치고 입을 꼬옥 다물며 앙칼지게 내뱉었다. 이주공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
니 금방 달래는 어투로 다시 말했다.
[이해하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 미양(美梁), 당신이오. 다만 그녀들은 나 때문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내 모른 척 하긴 옳지 못하잖소.]
[훗.. 알았어요. 당신의 단목(端木)씨 성을 가진 리아(悧兒)도, 홍(洪)씨 성을 가진 리아(悧兒)도 사실은 모두 행방불
명이에요.]
그녀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자 이주공은 깜짝 놀랐다.
[아니, 갑자기 행방불명이라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둘의 흔적이 갑자기 사라져서 이곳저곳에 수소문 해보았는데 전혀 소용이 없더군요.]
그녀의 대답에 그는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못 만날 것이니 작별인사나 해두려 했건만..]
[…….]
그에 미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백 년의 시일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어느 날, 사천(四川)
대천산(戴天山) 함종문(咸種門)은 여느 날처럼 참새가 지저귀는 새 아침을 맞고 있었다.
여름 날의 파란 하늘아래, 허공에 떠있는 둥그런 불덩이는 말없이 뜨거운 열만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우렁찬 기합소리만이 울려 산을 진동시키는 듯 했다. 그리 넓지않은 어느 연무장(鍊武場). 한 30여명쯤 될까. 모두가
백색의 연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장검을 쥐고 있는 것이 분명 어떠한 검법을 연마하는 듯 하다. 그들의 앞에는 한없
이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 검을 들고 무언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검이 빠르게 내려오니 감히 피할 생각을 못하더라!]
수련생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또는 생각에 잠겼있었다.
때는 금(金)이 몽고(蒙古)에 화의를 청해 화약이 성립된 시기로 금이 막 개봉(開封)으로 천도한 시기, 이곳은 사천
창명현(彰明縣)의 북쪽 오십리 지점에 있는 대천산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대천산에 생긴 신흥문파 함종문 사람들이
었다. 허나 말이 좋아 신흥문파지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작은 문파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이젠 각자 수련을 시작하도록.]
[예. 사부님.]
제자들이 힘차게 대답하자 그는 가볍게 끄덕이고는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그 사부가 사라지자 이 함종문 제자들은
멋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무아래 앉아 잠을 청하거나 모여 제멋대로 모여 잡담을 하고 있다.
마보강(馬補强)은 함종문의 평범한 문하생이었다. 척 보아도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의 그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나이
가 약간 어린 듯 보였다. 수련이 끝나자 그는 산 정상으로 가기 시작했다.
[보강아! 양이 데려오려고?]
마보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못생긴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함종문의 대제자로 이름은 사
원(司元)이다. 마보강은 보고 미소하며 대답했다.
[네! 대사형.]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이냐?]
[뻔하죠, 뭐.]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산 정상에 다다르자 은은한 기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매우 힘차고 정열로 가득 찬 듯 하였지만 마보강은 눈썹
을 찌푸리고 말았다.
(흠. 함종권법(咸種拳法)을 연마하는구나.)
조금 더 오르니 과연 누군가 보였다. 키는 마보강만 한 아이가 열심히 함종권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마보강은 그를
부르려다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뭘 생각했는지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곧 거만하게 말을 꺼낸다.
[양아. 형님 오셨느니라.]
[흥. 형님 좋아하네!]
정상에서 수련하던 그 소년이 마보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소하며 말했다. 나이는 마보강
과 비슷해 보였는데, 그의 이름은 진양(辰揚)이라 했다. 마보강처럼 백색 연무복을 입고 있는 것이 함종문의 제자로
보였고, 그 역시 마보강처럼 장난기가 심해 보였다.
[허어, 고놈 참. 성깔 하고는.. 쯔쯔.]
마보강은 정말 형님인냥 턱을 어루만지며 혀를 찼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을 이었다.
[아참! 오늘 사부님께서 함종절검법(咸種切劍法) 제 6초식 가르쳐 주셨다.]
[그래?]
말하는 마보강은 약간 흥분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진양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이다. 또 그러면서도 그 속
에 무언가 우울함이 곁들여져 있다.
[응! 초식 이름이 하우직절(夏雨直切)이야. 정말 여름비가 쏟아 내리는 듯 했다니까.]
[그렇군.]
여전히 관심없는 표정과 말투다. 그에 마보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휴. 함종권법 연마하고 있었냐?]
마보강의 말에 진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함종권법의 기본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함종
권법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함종권법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바로 유(柔)다.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손과 발을 놀리면서도 은근히 빠르게 움직
여 상대를 제압하는 바로 그런 권법이었다. 헌데 현재 그가 보이는 함종권법은 전혀 부드럽지 못했다. 그건 그저 빠
르기만 하여 매우 성급한 권법인 듯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마보강은 곧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흐르자 진
양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이마에 핏발도 서기 시작했으며 얼굴은 초조함으로 가득찼다. 마보강 역시 좀 전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없어진지 오래였고 현재는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곧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외쳤다.
[멍청이.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모양이지!]
호된 호통에 진양은 멈칫하며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급히 자세를 풀어버렸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보강
에게 신경질을 냈다.
[흥. 다 네놈 때문이다!]
[그게 왜 나 때문이냐?]
[내 앞에서 검법(劍法)얘기는 하지 말랬잖아.]
진양은 눈을 부릅뜨며 따지고 들었다. 마보강은 그런 그를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알았다. 미안하다.]
그 말에 진양은 안면을 찌푸리며 옆 바위에 주저앉았다. 마보강이 달래 듯 말했다.
[오늘 수련은 그만해라. 더 했다간 오히려 퇴보하겠다.]
진양은 당연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양이 문득 일어서서는 천봉(天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천산의 정상은 본래 아주 위험하다. 진양이 지금껏
수련한 곳은 정상에 있는 공터인데 그 공터 절벽 쪽에는 천봉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작은 봉우리가 있었다.
아니, 높이가 너무 낮아 봉우리라 하기도 뭐할 정도다. 모양은 울퉁불퉁한 게 참으로 못생겼지만 덕분에 오르기는
쉬웠다. 또 봉우리 끝은 진양의 궁둥이가 깔고 앉으면 더 손댈 곳이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같이
이 파봉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고, 가끔 마음이 울적할 때도 찾아와 이 봉에 올랐기 때문에 마보강은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말릴 수도 없다.
[햐! 죽인다.]
[그게 그렇게 좋냐?]
어느새 봉우리 끝까지 기어오른 진양이 탄성을 내질렀다. 수백 리 밖이 다 보이는 이 광활함, 그에게 있어서 이 전
망이란 최고의 전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마보강은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보는 일이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진양의 독촉에 한번 내려다본 적은 있지만 그다지 흥
취도 돌지 않았다. 대천산은 험준하고 높아 꼭 정상이 아니라도 그런 광경쯤은 어디서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흥. 남들은 모를걸. 이게 얼마나 훌륭한 명관인지!]
[그래. 너만 잘났다.]
마보강이 장난기 있게 대답했다. 그러다 뭔가 번뜩 생각났는지 소리친다.
[아! 양아. 사냥이나 하러가자.]
하지만 진양은 이 밑을 좀 더 바라보고 싶었다. 마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 기분은 정말 오랫동안 느
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마보강이 자꾸 독촉하여 결국 고개를 끄덕여 응낙한다. 진양은 봉우리를 조금 기어내리
다가 중간에 번쩍 뛰어내렸다. 봉우리가 워낙 낮아서 아무렇지도 않다. 한편 그가 내려오자 마보강이 후닥닥 달려와
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알지?]
[아! 오랫동안 못 갔지.]
진양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진양은 그가 뭘 생각하는지 알고있다. 사냥하러 갈겸 대명사(大明寺)의 휴정(休靜)화
상과 다시 대련을 벌이자는 게 아니겠는가. 진양이 곧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서둘러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기 시
작했다.
대천산은 대강산(大康山), 혹은 대광산(大匡山)이라 불려 촉(蜀)땅의 높고 험준한 산 중 하나였다. 산을 쭉 훑어보니
과연 <촉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라는 말이 나올만큼 여느 날처럼 온통 안개로 가득했다. 그들은 일단 하산해야
만 했다. 함종문의 본당은 대천산의 정상에 있는 건 아니되, 거의 정상에 가깝다. 반면 대명사는 산 중턱에서 조금
오르면 볼 수 있기에 이쪽에선 조금만 내려가면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산로를 따르지 않고 자꾸 험난
한 길을 택했다. 안개도 짙어 한 치 앞이 잘 보이지 않거늘, 그것도 산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그들
의 사부가 보면 아마 호통도 이만저만 한 게 아닐 것이다. 둘은 사실 경주를 하는 것이다. 누가 더 빨리 대명사에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하여.
[오늘도.. 내가.. 이길걸?]
[웃기는.. 소리 마. 지금까지 내가.. 이겼는데 그게.. 무슨.]
그들은 서로를 자꾸 힐끔힐끔 바라보며 더 빨리 내달리려 했다. 하지만 역시 대천산은 험준하여 돌덩이 투성인데
그리 쉬울 리가 없다. 헌데 진양은 갑자기 번쩍 튀어올라 더 빠르게 경공을 펼쳤다. 경공을 능수능란하게 펼쳐 내달
리는 그의 모습은 이런 생활에 아주 적응되어 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에 마보강이 가만히 있으랴. 그도 번쩍 하
며 몸을 날렸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채 반 시진도 못되어 대명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은 대명사의 뒤편에 있
는 사방이 나무로 가려진 언덕에 몸을 쳐박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이겼지.]
[내가 이겼잖아.]
[좋아. 그럼 다음에 승부를 가리자.]
[까짓거 그래주지, 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대명사는 딱히 대단한 게 없는 절이었다. 중이라 해봐야 고작 열 명 남짓, 그와 함께 규모도 너무 작아 절이라기 보
단 거의 암자 규모에 가까웠다. 또 오로지 불도(佛道)만을 하는 곳이라 무학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 절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다면 당대의 시인 이백(李白)이 젊었던 날 잠시 공부를 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진양과
마보강은 그 절 중들을 깔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시라는 것에 큰 흥미를 두지 않던 그들이 이백이 공부했
었다고 이 절을 크게 생각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툭 하면 이곳의 중들을 놀려먹었는데, 정말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비질을 끝낸 중이 절 안으로 들어가면 쏙 하고 나타나서 마당에 똥물을 뿌려놓기도 했고, 또 어쩔 땐 한
밤에 산을 배회하는 중을 기습해 무공수련 한답시고 함종문의 무공으로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이런 수법들은
일반적인 수법이고, 그 외의 수많은 수법들은 그야말로 정말 기상천외(奇想天外)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게 했다.
허나 그런 것들이 그들 사부에게 모두 발각 당해 벼락이 떨어짐과 함께 크게 벌을 받은 이후로는 한동안 그 절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중들을 상대로 장난도 못 치고 나날을 보내 몸이 근질거려 더 참을 수 없어진 진양은 슬쩍
마보강을 꼬드겼다. 허나 마보강은 본래 사부를 심히 두려워 하기 때문에 그의 교묘한 구두(口頭)에도 쉽게 넘어가
지 않았다. 그러자 진양은 피식 웃으며 그를 비꼬았다.
[흥. 아무리 사부님이라지만 그리도 두려워 하니 넌 참 겁쟁이였구나.]
그 빈정거림에 마보강이 버럭 호통쳤다.
[이놈아! 넌 사부님이 우리에게 배푼 은혜를 잊었아?]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 다만 이런 일로 그런 은혜를 말할 순 없지.]
진양이 그렇게 연신 조소나 흘리며 비꼬자 마보강도 오기가 발동해 결국 그를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대명사를
살펴보러 가보니 비질하던 중이 다른 중으로 바뀌어 있는 게 아닌가. 마보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양에게 속삭
였다.
[저번의 그 중은 어떻게 된 거고 이 새로운 중은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때문에 겁나서 도망간 거 아냐?]
진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어이없게도 비질하던 중은 일순 귀를 쫑끗대더니 그들이 숨어있는 언덕을 바라보
며 말했다.
[너희들이 그 유명한 악동(惡童)들이구나. 이리 나오거라.]
그에 그들은 헉, 하고 숨을 급히 들이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저 중이 무공을 익힌 고수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
다. 진양은 생각했다.
(아! 알았다. 그 망할 중놈들이 저 무공을 익힌 중을 데려와선 우리한테 복수하려 했구나!)
마보강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어찌 잘났다고 나서겠는가. 그들은 동시에 몸
을 돌려 걸음아 나 살려라 맹렬히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그들 둘의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다. 둘은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런데 막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찰나, 갑자기 목구멍이 막힌
듯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곧 그들은 순간 눈치챌 수 있어 크게 겁을 먹고 말았다.
(어느새 혈도를 제압 당했어! 정말 무서운 중놈이었구나!)
과연 그러했다. 그들이 몸을 돌려 막 달려나가려 하자 그 중은 지풍(指風)으로 그들의 등뒤 지양(至陽)혈을 제압했
고, 또 그들이 악을 지르려 하자 재빨리 신형을 움직여 그의 아혈(啞穴)을 제압했던 것이다. 중은 어느새 그들의 면
전으로 느긋이 다가와 있었다.
[역시 별 볼일 없었구나.]
언제부턴가 진양의 눈에 서서히 독기가 맺히고 있었다.
진양은 본디 사천 태생이 아니라 섬서(陝西) 유림현(楡林縣) 태생이었다.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를 모두 여의어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일 년의 시간동안 도둑질로 목숨을 연명하였고 그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부모가 없다고 또래의 아이들에겐 따돌림을 받았고, 살기위해 저지른 도둑질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멸시과 구타를 맛보았다. 다행히 그 와중에 인연이 있어 지금 그의 사부가 되는 조덕(曺德)을 만나 그런
치욕스러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런 어릴 적의 기억 때문에 수년이 지난 오늘도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매우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이 혈도를 제압하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하니 갑자기 분노가 크게 치밀었
다. 항상 자신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면 언제나 말로써 상대를 조롱했는데 이번엔 아혈도 짚여 말도 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마보강의 눈에도 서서히 독기가 맺히고 있었다. 그 또한 진양과 지금까지의 삶이 비슷했던 까
닭이다. 중은 그들의 눈빛을 보며 피식 웃고 말했다.
[과연 무서운 꼬마들이로다. 내 겁을 먹어서라도 너희의 혈을 풀어주고 싶다만 너희의 수법들이 너무 무섭다고들
하니 또 겁이나 망설여지게 되는구나.]
허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들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아혈이 풀리자마자 터져나온 건 진양의 욕설이었
다.
[이 빌어먹을 땡중아! 너의 그 발바닥 굳은 살이나 깎는 수법으로 감히 사람의 혈도를 제압하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당장 내 혈도를 풀지 않으면 죽는 날까지 편안하게 잠드는 날들은 없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은 실로 잔악했다. 중의 무공을 크게 욕되게 하는 것은 물론 <죽는 날까지 편안하게 잠드는 날들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은 언젠가 복수를 할 것이란 게 아닌가. 허나 중은 그 잔악한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
다.
[좀 전 너희의 동작을 보니 아직 무공을 배운 지 채 5년을 넘지 못한 것 같더구나. 숨소리도 거친 걸 보면 너희의
내공이 형편없는 것도 알 수 있지. 그런데 너희가 나를 이길 수준의 무공을 쌓으려면 설사 역근경(易筋經)을 배운다
해도 최소 삼십 년은 수련해야 할 터인데 도대체 언제 나를 쓰러뜨리겠다는 것이냐?]
진양은 생각해보니 과연 맞는 말이라 이 중이 제법 예리함을 깨닫게 되었고 동시에 화는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
번엔 마보강이 소리쳤다.
[흥. 역근경 따위는 줘도 안 배울 거예요. 함종문의 무공을 얕볼 수 없게 해주겠어요.]
그 말에 중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조소가 아니라 보는 이를 편안케 하는 실로 자애로운 미소였다. 진양과
마보강은 저도 모르게 그 미소에 빨려들어 한동안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보니 그의 얼굴은 역시 인자하기
짝이 없었다. 눈꼬리가 마치 시든 꽃인양 가라앉아 조금 침울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한번 미소를 지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인자해보였다. 또 그의 몸에선 은은하게 포근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내공도 무공도
아닐 것이다. 아마 불심이 깊은 중에게서나 느껴지는 말 못할 무엇일 것이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그들을 보는 중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문득 손을 내밀어 그들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소림(小林)의 무학은 만(萬) 무학의 원류(源流)다. 어떠한 무공으로도 소림의 무공은 쉽게 깨트릴 수 없지.]
진양과 마보강은 크게 놀라 앗, 하고 경호성을 발하고 말았다. 그의 말은 자신이 소림사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
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중이 다시 말한다.
[내 법호(法號)는 휴정(休靜)이다. 일이 있어 대명사에 머물게 됐는데 너희가 나를 쓰러트릴 자신이 생긴다면 언제
든지 와도 좋다.]
[좋아요! 소림이고 대림이고 간에 함종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지요.]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양과 마보강은 틈만 나면 그를 찾아가 온갖 수단을 부려 그를 이기려 했다. 그러
나 휴정의 무공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뛰어나 그들이 펼치는 온갖 함종문의 무공을 모두 가볍게 제압하곤 했다.
그야말로 이쪽에서 다섯 수를 쓰면 그쪽에선 한 수로 단번에 제압하는 것이다. 그건 분명 진양과 마보강의 무공 깊
이가 떨어진다는 점도 있었지만, 실상 소림사의 무공도 뛰어나고 휴정의 실력도 대단하여 그를 이길 수 없다함이
옳았다. 그러던 그들은 어느 날 부턴가 휴정을 만나러가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지기만 해서 자존심을 뭉개느니 차
라리 수련을 쌓고 찾아가 싸워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달이 지나도록 휴정
을 찾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다시 휴정에게 도전하려 하는 것이다.
대명사는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여전히 목탁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번쩍번쩍 햇살을 반사시키는 대
머리 휴정화상은 비질하고 있었다. 진양과 마보강은 고개 돌려 서로를 바라보곤 픽 웃더니 함께 그를 불렀다.
[화상!]
[오랜만이구나.]
휴정은 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 있는 듯 비질을 멈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
소가 걸쳐져 있었다. 마보강이 대답했다.
[네, 왔어요. 할거죠?]
[내 말 한마디의 실수로 고난이 이만저만이 아니로다.]
그 말이 응낙임을 진양과 마보강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금방 희희낙낙(喜喜樂樂)하며 어디론가 먼저 가버렸다. 그
러자 휴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귀여운 녀석들..]
휴정은 곧 비를 옆에 모셔두고 순간 몸을 번쩍여 그들을 따랐다. 그가 느릿느릿 일 각(刻)정도 걸으면 나오는 어느
골짜기로 향했다. 그 골짜기는 꽤나 은밀했는데 휴정은 또 무얼 생각했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도착하자 과연 진양과
마보강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바로 시작해요. 우리는 빨리 사냥하러 가야해요.]
[너희들이 시작하면 그게 시작이고 너희들이 끝내면 그게 끝인데, 내 언제 토를 단 적이 있더냐?]
그 말이 마쳐지기 무섭게 진양이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일순간 번뜩여 휴정의 좌측으로 간 진양은 빠르게 유리장
쾌(柔裏藏快) 수법으로 그의 허리에 일 권을 가했다. 그와 동시에 마보강은 높이 튀어 올라 아까 전에 배운 하우직
절로 그의 머리를 공격했다.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위치가 서로 돕기 편한 걸 보니 분명 협공을 오래 연
습한 것 같았다. 허나 휴정은 그들의 움직임을 마치 경치라도 감상하듯 느긋이 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공격이
가까워지자 그제야 몸을 비스듬히 틀며 이동한다. 그는 왼손을 가볍게 들어 마보강의 허리를 살짝 밀었다. 그러자
마보강은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 놀란 진양은 급히 몸을 내뺐으나 어느새 휴정의 왼
손이 그대로 날아와 그의 어깨를 잡더니 옆으로 살짝 내쳐버렸다. 결국 예전처럼 또 쉽게 패배한 것이다. 휴정이 마
보강을 보며 말했다.
[새로운 초식을 익혔구나.]
[네. 하우직절이라고 해요.]
마보강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표정을 보니 진 게 억울한 듯 했다. 그러자 휴정은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갈수록 반응이 빨라지는구나.]
[쳇. 빠르면 뭐해요? 화상보다 느리고 연(延)사형보다 느린데.]
진양도 시큰둥했다. 휴정은 입가를 슬그머니 끌어올리고는 그들에게 한바탕 이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사부는 남자로 함종문의 무공은 그가 만들었다 했지만, 그의 무공 원류는 음(陰)으로 그건 확실히 여인의
무공이다. 그러나 여인의 무공이라고 나쁜 게 아니지. 특히 너희 함종문의 무공들은 제법 괜찮단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진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내 무공과는 반대로 매우 유유하고 부드러운 면이 있는데 이런 건 가볍고 끈기없는 너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반응이 빠르고 느리고를 떠나 그 무공을 열심히 수련한다면 네 사형들을 손쉽게
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더니,
[너도 듣거라. 누누히 말했지만 네가 펼치는 함종절검법은 허식중실(虛式中實)의 검법이다. 즉, 이런 검법을 펼침에
있어서는 상대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노려야지.]
하며 마보강에게 말했다. 그 말에 진양과 마보강은 문득 화색이 감돌았다. 항상 그랬지만 이 화상은 사부와는 다르
게 구구절절 쉽게 설명해줬다. 처음에는 그게 모욕이라 생각했지만 듣다보니 얻는 것도 많아졌고 왠지 모르게 불끈
힘이 솟았다. 그들은 다시 휴정과 대련하길 원했다. 그렇게 그들은 저녁이 될 때까지 대련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