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章. 소파(小派) 함종문(咸種門) 2
그들은 어느새 대명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산을 꽤 거슬러 올라가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흩어
져서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실상 옛날부터 그들 둘은 할 일이 없을 때마다 종종 사냥을 해왔기 때문에 이곳 지세
는 제 집안 방구석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진양은 과연 어렵지 않게 토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
침 운이 좋게도 그 토끼는 잡풀을 뜯고 있었는데 아직 진양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그는 조용히 주머니에
서 표창(標槍)을 두개 꺼내들어 양손에 쥐고는 잠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요놈. 오늘 내 간식거리가 되거라!)
그는 일순간 표창 두 개를 동시에 내던졌다. 표창이 빠르게 돌며 휘리릭 하는 파공음(破空音)을 내고 있었다. 그러
나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제대로 맞지 않고 옆의 고목에만 꽂히고 말았다. 그 팍, 하는 소리에 토끼는 사람
의 기척을 느끼고 폴짝폴짝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에 진양은 가볍게 신음하며 토끼를 뒤쫓기 시작했다. 분명 경공을 펼치면 잡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토끼가
나무 틈새로만 요리조리 파고들어서 아무래도 거리가 좁혀질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일단 틈이 보일 때마다 연신 표
창을 날려댔다. 하지만 암기 실력이 형편없는 진양이 던진 표창이니 그리 쉽게 맞을 리가 있겠는가. 표창들은 고목
몸통에만 머리를 쑤셔박을 뿐이지 토끼의 근처로는 가까이 가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의 표창이 다 떨어졌
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미세한 파공음(破空音)이 들리더니 곧 도망가던 토끼가 풀썩 쓰러지고 만 것이었
다. 그 토끼가 달리고 있던 곳은 고목들이 주변을 에워싼 곳인데 대체 어떻게 쓰러진 건가. 진양은 놀라기도 했으나
누가 도와줬는지 궁금했다. 그는 곧 토끼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외쳤다.
[누구세요?]
그는 연신 사방을 돌아보며 대답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몇 번 더 외쳤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다.
(사부님께선 강호인들 중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던데 혹 그런 사람일까?)
그는 토끼를 잡아준 자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토끼를 주으러 갔다. 토끼를 집어들고 살펴보니 과연 토끼의
목 왼쪽에 붉은 빛깔을 띄는 작은 침이 꽂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감탄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혼자 중
얼거리듯 말했다.
[와!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대단하네. 그렇게 빨리 달리는 토끼의 목에 이렇게 가느다란 침을 맞추다니 굉장한 분일
거야. 무공도 굉장할 텐데 어떻게 생기셨을까? 한번 만나 뵐수 있다면 정말 소원이 없겠구나.]
그는 연신 탄성을 발하며 암기의 주인을 계속 추켜세워댔다. 평소에 말을 조리있게 잘하던 그는 있는 말 없는 말
제멋대로 만들어내며 주둥이를 나불나불 놀리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자 과연 얼마 후 웬 노파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순간 등뒤로 한 줄기의 바람이 맹렬하게 엄습하는 걸 느꼈다. 헌데 진양이 화들짝 놀
라 막 고개 돌리려는 찰나 그 한 줄기의 바람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진양은 어
이없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잠시 가만히 있기만 했다. 물론 누군가가 등뒤에 나타났음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웬 할멈의 웃음소리 같긴 했는데.)
그는 일단은 미소 지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의 뒤에는 과연 한
노파가 서있었다. 그 노파는 마치 가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지듯 얼굴에 주름이 수없이 나있었고, 나이가 족히 80세
는 되어 보였다. 또 작은 키에 봉두난발의 머리였는데 손에는 철장(鐵杖:쇠로 만든 지팡이)을 들고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늙어죽은 귀신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러니 진양이 어찌 놀라지 않고 배기겠는가.
[히히. 꼬마야, 날 만나보고 싶다더니 얼굴이 왜이리 굳었느냐?]
노파는 히히 웃으며 진양에게 말했다. 그 웃음은 외모만큼이나 추악해 진양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태를 깨닫곤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와! 정말 만나다니.. 하늘이 내 소원을 들어줬구나!]
[낄낄. 이놈아! 네놈이 날 불러내기 위해 거짓말 한 것을 알고 있어.]
그녀는 마치 호통을 치듯 소리쳤으나 그게 정말로 호통일 리는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진양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
은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할머니! 토끼 잡는 것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진양은 갑자기 말을 돌려 정말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토끼 잡아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닌가.
[고마워 할 것 없다. 네 녀석 하는 꼴이 하도 우스워서 어떻게 잡는지 보여준 거다.]
노파는 추악한 얼굴에 미소한 채로 대답했다. 진양은 그녀의 말이 무척이나 아니꼬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물었
다.
[하긴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 잘 맞출 수 있죠?]
노파의 입꼬리가 한층 더 치켜올려졌다. 오금이 다 저릴만큼 흉측스러운 미소였다. 그녀는 이 진양이 보통 영악한
꼬마가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낄낄. 다 방법이 있지.. 그런데 넌 누구냐?]
노파는 일단 대충 대답하더니 갑자기 진양의 정체를 묻기 시작했다. 눈빛 또한 좀 전과는 다르게 푸르죽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양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방법을 가르쳐 주면 저도 제가 누군지 알려줄게요.]
진양이 대답하자 노파가 갑자기 멍해졌다. 그녀는 진양의 말을 듣고는 머리가 비워진 듯 멍청하게 있는 것이다. 그
러나 금방 대소(大笑)를 터트렸다. 아니, 추한 얼굴로 입이 찢어져라 웃어대니 그 모습은 마치 광소(狂笑)와 같아 보
였다. 한편 진양은 갑작스런 그녀의 대소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진양을 보며 중얼
거리듯 말했다.
[낄낄. 무림고수보다 산중의 꼬마가 훨씬 낫구나. 나 금녀(禽女)에게 저런 건방진 말을 하는 거 보니..]
일순 진양의 낯빛이 살짝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는 올해 나이가 열 여섯이었고 또 강호의 사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때문에 금녀가 누군지 알 턱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노파는 스스로 <짐승 금(禽)> 자를 써서
짐승 같은 여자라고 당연한 듯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주 못된 악인임을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진양은
그녀가 매우 악독한 여자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싸늘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안색을
고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안전히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꼬마야. 무슨 생각하느냐?]
문득 그 노파는 진양을 보며 물었다. 그에 진양은 흠칫 놀랐지만 아무것도 아닌 듯 미소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뒤흔
든다.
[그래그래. 내 다시 한번 묻겠다. 넌 누구냐?]
이번에는 한층 더 살벌해졌다. 그녀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살기를 풍기며 진양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 뜻은 뻔
하지 않는가. 대답하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뜻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 망할 할망구! 그러면 내가 겁먹고 술술 말해줄 것 같아? 내 정체 따위에 목숨걸 필요는 없지만 네 행동이 영
아니꼬우니 난 대답하지 않겠다!)
속으로 그녀에게 무차별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들며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체 순진하
게 입을 연다.
[아까 말했잖아요. 할머니가 아까 말한 그 방법 가르쳐 주면 나도 내가 누군지 가르쳐 준다고.]
금녀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스스로를 금녀라고 말할 때 진양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걸 분명 보았다. 게다가 아까
그가 보인 영악한 모습으로 보아 자신이 천하의 악인이란 걸 대충 눈치챘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쯤되면 웬만한 강
호인들도 몸을 떨며 이실직고(以實直告)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꼬마는 분명 겁을 집어먹었음에도 순순히 대답하
지 않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요 영악한 애송이는 제법 잔꾀가 깊구나.)
그녀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 또 저렇게 태연하게 술수를 부리는 걸로 보아 제법 대담하기도 한 꼬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헌데 그런 생각을 갖자 이 꼬마에게 무시당한 것 같기도 해서 왠지 화가 났다. 곧 한층 더 살기를 풍기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그럴 셈이냐?]
[네! 그 방법 가르쳐 주면 저도 좋고 할머니도 좋잖아요. 어서 가르쳐 주세요.]
진양은 여전히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의 살기는 피부로도 마음으로도 느낄 수 있다. 한풍이 불지도 않는데
으스스한 것은 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겁먹고 대답하는 건 자존심을 크게 뭉개버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
문에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는 와중에도 속으론 천천히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금
녀라는 노파의 상태가 점점 험악해졌으니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 금녀는 그를 잠시 보더니
문득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가소롭다는 듯 냉소하며 말했다.
[꼬마 놈아. 내 무공을 시험해보고 싶은 게냐?]
순간 진양은 크게 놀라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서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혹시 귀신이 아닌가 생각하며 낯빛까지도
다 변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한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진양은 새파란 안색을 조금도 고치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있으리. 그녀가 마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귀신이 아니라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무공이 대단한 사람은 상대에게서 흐르
는 기만 보고도 뭘 하려는 지 안다는 얘길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떨리는 가슴을 추
스르며 침착하게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봤다. 그러자 금방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모두 꺼려하는 것이 있다. 바로 명예롭지 못한 소문이지....>
그는 이것을 생각해내고 갑자기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 방비도 풀었다. 금녀는 이것을 보고는 희귀한 듯 그에게 물
었다.
[어째 방비를 푸느냐?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했느냐?]
[아뇨.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절 죽이지 않으실 것 같아 방비할 필요가 없겠더군요.]
진양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금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유를 묻자 진양은 빙그
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힘없는 자를 괴롭히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개라고요.]
금녀는 듣고는 싱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난 개다. 천하의 때려죽일 년이지. 그러니 널 죽여버리겠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잇더니 점점 진지해지며 얼굴엔 살기가 끼기 시작했다. 실로 당장이라도 철장을 휘두를 듯한
기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양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러시면 안되죠. 할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닐 거예요. 제가 토끼를 잡도록 도와 주셨잖아요. 그리고 설령 나
쁜 사람이라고 해도 절 죽이지 않으실 거예요.]
[나쁜 사람이라도 널 죽이지 않을 거라니, 그건 또 어째서냐?]
금녀는 매우 궁금한 표정이다. 이 꼬마의 말투는 정말 묘한 데가 있어서 모르고 그냥 넘어가기엔 뭔가 찜찜했다. 그
녀의 물음에 진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이 그러셨어요. 무림인들은 약자를 괴롭히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설마 저처럼 무기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이
시기야 하겠어요?]
말하던 그는 <무기도 없는 어린아이>란 말을 슬쩍 강조하며 말했다. 그러나 금녀는 이 말을 듣고 가소롭다는 듯
비소(鼻笑)했다. 어떻게 보면 실소 같기도 했다.
[난 두려울 것이 없다. 그건 내가 금녀이기 때문이지!]
그녀는 정말 그렇다는 듯 온몸에서 살기를 마구 내뿜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는 진양에게 있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마음이 다급해져 쿵쿵 뛰는 가운데 그녀가 왜 금녀라고 불리는지도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는 할
수없이 눈을 번쩍 뜨며 곧장 함종권법의 수식(手式)을 취했다. 금녀는 그의 노골적인 행동을 보고는 다시 비웃는 듯
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꼬마야. 네 사부가 누구냐?]
[…….]
진양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틈을 노려 전력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녀는 그가 대답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자 이상하여 그에게 다시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진양이 몸을 돌려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
했다. 그는 옛날부터 경공을 펼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경공법은 제법 괜찮았지만 함종문에 딱히 훌륭하고
독창적인 경공법은 없어서 굉장히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그의 내공이 부족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른다.
금녀는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는 기이한 미소를 짓더니 훌쩍 뛰어올라 그의 앞으로 떨어져 길을 가로막았다.
그건 실로 순식간이었다.
(빠르잖아!)
진양은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태어나서 이리 빠르게 경공을 펼친 자를 그가 어디서 보았겠는가. 사부가 제법 빠
른 경공을 펼치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곧 금녀는 그에게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꼬마야. 나의 유루철장법(流淚鐵杖法)을 삼 초 받고도 살아있다면 건드리지 않으마.]
그건 그녀의 여유였다. 그 자신만만한 말에 진양은 이젠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 독기어린 눈으로 그녀를 노
려보았다. 자신이 그녀보다 무공이 뛰어나다면 삼 초는 물론 백 초, 천 초도 다 받아내어 그녀를 혼내주고 싶었다.
머리통도 발로 신나게 밟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불가능하니 점점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기랄. 누구는 신선이 되서 수백 수천 년씩 산다는데 난 여기서 죽으라고? 난 싫어. 반드시 살고 말테다. 어디 두
고보자!)
그는 빠득빠득 이를 갈며 일단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금녀는 그가 비록 대답하진 않았지만 풍기는 기
도로 보아 싸울 뜻이 있음을 느끼고 가볍게 웃으며 자신의 철장을 이용해 유루철장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 1초!]
그녀는 기합을 지르며 일 초를 펼쳤다. 그 초식은 참 괴상했다. 철장을 두 손으로 잡아 상하좌우 사방팔방으로 마구
흔들어대는데 마치 미친 사람이 발광하는 듯 매우 기괴하였다. 또 몸짓과 달려드는 모습 역시 무시무시해 진양은
과연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갑자기 달려들며 함종권법 제 3초식인 유리장예(柔裏藏
銳)를 펼쳤다. 허나 금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세차게 초식을 전개했다.
(이 쳐죽일.. 치사하게 처음부터 그런 재수없는 초식을 펼치다니.)
진양은 속으로 열심히 욕을 내뱉었다. 그녀가 흥분해서 맹공을 펼칠까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떠들진 못했지만 자
꾸 그녀의 철장에 권법이 막히니 화가 치솟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흐물흐물 파고들어 일 권(拳)을 후려칠 수
있는 거리에 다다르면 어느새 철장이 날아와 몸을 내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게 자꾸 반복되자 답답함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방어만 하던 금녀가 갑작스럽게 철장을 휘저어 진양의 정수리를 찍어 내렸다. 그런 그녀의 빠른 공
격에 그는 결국 뒤로 급히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그녀의 공격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그걸 기다렸
다는 듯이 갑작스레 한발 앞으로 뛰쳐나가며 이번엔 진양의 목덜미를 찌르는 공격을 펼쳤던 것이다. 단순한 공격이
었지만 진양은 그녀가 이런 공격을 할 줄 몰랐고 또 찔러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 단번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진
양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눈을 꾹 감았다.
[빌어먹을 할망구!]
그의 입에선 최후에 발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 철장의 끝이 그의 목젖을 강타하려는 순간 갑자기 깡, 하고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양이 눈을 떠보니 금녀는 뒤로 물러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자신의 옆에는
동문이자 좋은 벗 마보강이 있었다. 금녀가 물었다.
[넌 누구냐?]
[전 이 아이의 형님이랍니다.]
마보강은 진양을 살짝 쳐다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진양은 그 상황에도 눈을 번쩍 치켜 떴다. 그가 자신의 형
님이라 칭하자 기가 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란 걸 아는 진양은 일단 꾹 참았다. 한편 금
녀는 얼굴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던 건 그런 형님이고 동생이고 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갑자
기 나타난 이 소년이 자신의 철장을 막은 수법은 바로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수법이 아니던가. 과연 사량발천근
은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네 냥의 힘으로 천 근을 퉁겨낸다는 말인데 그 정확한 이치
의 이해와 시전이 필요하니 어디 쉽겠는가. 아주 대단한 기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어린 소년이 시전할 수
있는 수법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진양 또한 사량발천근의 수법을 쓸 줄 안다
는 것이다.
[사량발천근의 수법까지 익히다니 제법이구나.]
[하하.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 녀석도 할 줄 아는데요, 뭘.]
[뭐야?]
마보강의 대답에 금녀는 크게 놀라 급히 진양을 돌려보았다. 그리곤 소리쳤다.
[넌 왜 그 수법을 쓰지 않았지?]
[흥. 몰라도 돼요.]
진양은 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놈의 검, 검, 검. 사량발천근은 함종절검법의 기본인데 내 어찌 그걸 모르겠어?)
본래 함종문의 최고무공인 함종절검법은 사량발천근 따위의 수법을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모를 리가
없던 것이다. 금녀는 진양의 건방진 대답에 발끈했지만 꾹 참고 마보강을 보며 말했다.
[흥. 너도 죽고 싶다면 어서 덤벼보거라.]
그녀의 찬바람 쌩쌩 부는 말에 마보강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방금 그가 나타난 건 그녀와 싸우고자 함이 아니다.
어차피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진양이 위기에 처해 일단 구하고 본 것이다. 그는 진양과 일단 도망치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진양이 도망치지 못한 걸로 보아 그녀의 경공 또한 뛰어나다는 걸 짐작 할 수 있어 함께 도망치
기 틀렸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가 진양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가 도망치지 않았다고도 생각해봤으나 무공이 자
신들과는 크게 차이나는 듯 하니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 생각했다. 그는 곧 그녀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양아! 사부님을 모셔와!]
그는 그렇게 외치고는 재빨리 함종절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편 진양은 그의 말을 듣고 빨리 사부님을 모셔와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보강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어찌 동문이자 훌륭한 벗인 그를 내버려두고 사부를 데려온다는
것인가. 진양은 마보강이 크게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상대했던 금녀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여 단 몇 수만
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말이다. 함종절검법이 함종문 최고의 무공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이길 순 없을 것이다. 무
엇보다도 차마 벗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자신의 유일한 벗이 아니던가. 그러나 마보강은 그가 망설이는걸 보고는 눈
썹을 찌푸리며 다시 외쳤다.
[이 망할 동생 놈아. 넌 정녕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어서 모셔와!]
그 외침은 악을 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에 진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좀 더 생각해보니 이렇게 멍청히 있
는 것 보단 차라리 사부님을 모셔오는 게 나을 거 같았던 것이다. 어차피 지금 그녀를 협공한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 한시 빨리 사부님을 모셔오는 게 중요한 것임을 진양은 퍼뜩 깨달은 것이다. 그는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달려
나갔다. 사부님을 모시러 함종문 대청까지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그 거리가 그다지 멀진 않았기에 과연 잠시 후 사
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상황을 짧게 설명했고 그 말을 들은 사부는 진양이고 뭐고 다 내
버려두고 급히 달려나가고 말았다.
[사부님!]
진양은 사부를 불렀으나 그는 듣지 못한 듯이 그대로 달려 가버렸다. 안 그래도 몇 안되는 제자들인데 얼마나 아끼
고 있겠는가. 그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곧장 사부를 쫓아 달려나갔다. 물론 그 뒤로는 다른 제자들도 따르고 있
었다.
그 사이 마보강은 큰 위기에 처해있었다. 금녀의 유루철장법은 역시 진양의 생각대로 매우 묵직한 무공이었다. 지극
히 양(陽)적인 것이다. 또한 그녀의 내공수준이 상당한지라 내공이 부족한 그로서는 그녀를 상대하기가 너무 버거웠
다. 그녀를 놀라게 했던 사량발천근의 수법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불시에 튀어나와 놀랬던 거지 그런 수법 정도로
는 그녀를 이길 수 없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가진 모든 무공을 펼쳐 싸웠지만 결국 금녀의 철장에 의해 검을 놓치
게 되고 말았다. 곧 그녀는 철장으로 그의 목을 겨누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참견하지 않았다면 목숨은 건졌을 것을.]
그러자 그녀의 말에 마보강이 곧바로 대답했다.
[설마 어린 애를 죽일 거예요?]
[흥. 난 그런 것엔 개의치 않는다.]
금녀는 코웃음치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마보강은 그녀가 과연 보통 악인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뭔데요?]
마보강은 눈을 빛내며 재빠르게 물었다. 그는 진양과 성격이 비슷해서 역시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고 방법이 있다는데 안 들을 이유는 없었다. 곧 금녀가 말했다.
[사부가 누구냐?]
[…….]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으로 보아 이런 건 대답하선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입을 꼬옥 다
물고 침묵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네가 죽어.]
[차라리 제가 죽죠, 뭐. 왜 사부님이 대해 알려하는 지는 모르지만, 저 살고자 사부님을 팔 수는 없거든요.]
[흥. 제법 대협인양 구는군.]
그녀는 냉소하며 가볍게 빈정거렸다. 그러자 마보강이 그에 맞받았다.
[하긴 당신의 모습을 보니 별로 은혜란 걸 잘 알 것 같지도 않군요.]
그에 금녀는 발끈한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건방진 놈. 꼭 네놈 따위에게 묻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왼손을 쳐들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멈추시오!]
[또 뭐야?]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사람은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희디 흰 백색 도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은 한없이 인자
해 보였다. 참 전형적인 군자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그는 바로 그들의 사부인 조덕이었다.
기실 조덕은 원래 이곳 사천성 창명현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훈장(訓長)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이 대천산에 나왔다가 웬 늙은 여도인을 발견했다. 그 늙은 여도인은 피투성이 였는데 그걸 본 그는 그녀
를 가엽게 여기고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물론 그는 그때까지 강호란 곳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녀의 상
처가 완치되자 그녀는 그의 마음씨에 감사하며 몇 가지 무공을 전수해 줬던 것이다. 그녀에게 전수 받은 무공은 권
법과 검법. 그리고 내공심법이었는데 조덕은 이것을 열심히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연마하면 할수록 건강해지는 것을 느꼈고, 또 길을 가다 도적 따위들을 만나도 문제가 없어지자 그때부터 그는 무
학이란 것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무공을 수련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우연히 강호의 세계를 알
게되었고 자신의 실력을 알고자 강호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학에 대한 열정만 어느 강호인 못
지 않았을 뿐, 딱히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그의 무공이 절세무공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강호를
돌아다니며 많은 일을 겪었으나 이렇다할 명성은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덧 긴 세월이 흐르자 문득 깨달
아지는 게 있어 문파를 창립할 뜻을 품고 이 대천산에 함종문을 창립한 것이다.
아무튼 그는 진양에게 마보강이 위험하단 이야기를 듣고는 전력으로 달려와 위기 때에 실로 때마침 나타났다. 그는
먼저 금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매우 늙어 보이고 눈빛이 강렬한 게 대단한 고수임을 한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곧 포권의 예를 올리며 말했다.
[불초는 이 아이의 사부되는 사람으로 조덕이라고 합니다. 고인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는 그녀를 고인이라 칭했다. 본디 고인이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칭호가 아닌데 그는 이 노파가 보통은 아닐
것이라 직감하고 일단 크게 예를 갖춰서 말을 걸었다. 강호의 약육강식(弱肉强食) 법칙을 잘 아는 그는 이 보통이
아닐 노파와는 맞설 수 없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금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
어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이름은 알 거 없다. 다만 남들이 금녀라고 부르지..]
순간 조덕의 얼굴은 굳어져 버렸다.
(그, 금녀라면 지금 강호의 마녀로 유명한 금수쌍녀(禽獸雙女)중 금녀?)
금녀는 그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히히. 너는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조덕은 그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검을 뽑고는 외쳤다.
[네 악명(惡名)은 귀에 못 박히듯 들었는데 어찌 모르겠느냐? 기왕 나와 만난 것, 내 무림에 해만을 끼치는 널 제거
해 주마!]
[흥. 네 따위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을걸?]
금녀는 그의 말에 가볍게 냉소하고는 말이 마치기 무섭게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조덕 역시 가만있지 않고 함종절검
법을 펼치며 덤벼들었다. 그 사이 마보강은 살며시 한쪽으로 물러나 그들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조덕은 몇 합 겨뤄
보고는 그녀의 무공이 소문대로 굉장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포기하진 않았다.
[이얍!]
일순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조덕은 함종절검법 제 4초인 추어영절(鰍魚泳切)을 펼쳤다. 이 추어영절은 말 그대로
미꾸라지가 헤엄치는 것처럼 교묘하게 검을 움직여 상대방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초식이다. 그는 이 초식으로 금녀
의 가슴속으로 파고들려 했다. 그러자 금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결한불공(結恨不恐)!]
그녀의 절학 유루철장법의 제 4초 결한불공(結恨不恐)이었다. 이 초식은 그녀가 가장 애용하는 초식으로 아까 진양
과의 접전 때 쓴 초식이 바로 이것이었다. 철장이 사방팔방으로 휘저어지는데 어지간한 공격이 아니라면 상대는 감
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초식이던 것이다. 결국 조덕은 접근을 포기하고 약간 뒤로 물러나다가 갑작스
레 하우직절의 수법을 펼쳤다. 그는 갑자기 상대방의 머리위로 뛰어올라 넘어가되 지나가는 동안 그녀의 머리를 검
끝으로 여러 번 찍어댔다. 한편 그가 이 초식을 사용하자 금녀는 철장을 머리위로 올려 빠르게 휘저어 댔다. 과연
그들 서로의 동작은 너무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만큼 동작 하나 하나가 정확하기 짝이 없어 훌륭한 승부를 보이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군. 특히 저 초식은 공격으로도 방어로도 매우 용이하구나.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
니 어떤 교묘한 규칙도 섞여있는 것 같군.)
조덕은 하우직절을 쓰고도 그녀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자 내심 감탄했다. 하우직절 초식은 공격방법이 기이
하고 움직임도 쾌속한 편이니 분명 피해를 줄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가 감탄하는 사이 금녀는 제 뒤로 넘어
간 조덕을 향해 몸을 틀며 철장을 휘둘렀다. 지금 조덕과 금녀는 서로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조덕은 아
직 발이 땅에 닿지 않아 그녀의 철장은 자연 그의 왼쪽 허벅지로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순간
조덕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우선 검을 땅에 찍어 몸을 공중에 잠시 멈추었다. 그 후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숙이
고 두 다리를 뒤로 세차게 들어올려 마치 공중에서 엎드리는 자세를 만들었다. 또 왼발은 어느새 금녀 오른팔 소해
(少海)혈로 향하고 있었다. 이건 자세가 매우 기이하고 몸이 유연하게 꺾이는 이 수법으로 절검법 수저어절(水底魚
切)의 수법이었다. 말로는 길지만 실제론 찰나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보다 이 찰나의 순간에도 이런 공격을 하니
참 대단했다. 그리되자 금녀는 두 팔을 들어 올렸고 자연히 지팡이도 따라 올라오게 되었으며 그 결과 두 사람의
공격이 모두 허공을 치게 되었다.
(와. 역시 사부님은 대단하셔. 저 상황에서 저런 공격을 하시다니!)
마보강은 물론 금녀에게도 감탄했지만 사부인 조덕에게 더욱 감탄하고 있었다. 비록 마보강처럼 무공이 별볼일 없
는 자도 척 보면 금녀가 우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여유롭게 한 수 한 수를 펼치는 그녀와는 달리 조덕은 지금 필
사적으로 싸우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부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싸우는 장면은 처음 보았기 때
문에 더욱 감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감탄하며 그와 함께 조금 흥분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 조덕은 함종절검법의 기본바탕이라 할 수 있는 부드러움과 빠름을 최대한
이용해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금녀보다 내공이 부족했고 움직임도 더 느렸다. 무엇보다도 유루철장법의 초식
들이 절검법보다 더 기괴하여 공격이나 방어가 대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0여 초가 넘어가자 서서히
조덕이 밀리기 시작했다. 진양과 다른 제자들은 그때 막 도착했는데 자신들의 사부가 밀리는 것을 보고는 다들 경
악하는 듯 했다. 그러는 그들이 생각을 알기나 하는 것인지 조덕은 금녀와 싸우면서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다. 제자
들 앞에서 그녀에게 밀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마녀의 손에 제자들이 죽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건방진 놈. 상풍(上風)은 내가 잡고 있는데 여유는 왜 네가 부리느냐?]
한참 신랄하게 공격하던 그녀는 조덕의 상태를 보고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동시에 공격을 잠시 멈추었다. 덕분에
조덕은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런 모욕을 받게되자 일순 분노가 치밀어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확실히 그건 금녀의 여유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대단하구나! 금녀의 명성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니었군.]
조덕은 일단 뒤로 물러나 그녀와 거리를 두고 말했다. 그의 감탄에 금녀는 오금이 저릴 듯한 기괴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조덕에게 물었다.
[아! 이 산은 대천산이라고 한다던데 대천산에 무슨 문파가 있었지?]
[13년 전 내가 이곳 대천산에 작은 문파를 세웠다. 함종문이라고 한다.]
[함종문? 이름은 그럴싸하구나.]
금녀가 한 이 말은 상당히 치욕적인 말이었다. 즉, 이름만 그럴싸할 뿐 실력은 별 볼일 없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조덕은 이 치욕적인 언사에 개의치 않고 다만 얼굴만 붉히며 대답했다.
[그렇다. 우린 비록 작은 문파지만 정파(正派)로서의 정신은 갖고 있다. 너처럼 힘없는 소년이나 해치려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조덕은 <정파> 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모습은 꽤나 당당하고 기품이 있어 보여 진양 등 함종문 제자들은
왠지 모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뒤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양은 또 참지 못하고 한발 나서며 소리
쳤다. 물론 사부가 있어 상스러운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못된 할망구야! 단지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고 하여 나를 죽이려 들다니 정말 넌 못된 마녀
로구나. 그것도 내가 어린 소년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또 스스로를 짐승에 비유하고서는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느냐?
너는 그것이 자랑이라고 생각하느냐? 너 같은 악한 마녀는 이 대천산에 올라올 자격이 없다. 썩 내려가 개과천선
(改過遷善)하라!]
말을 하는 진양의 어투는 마치 사부가 제자를 질타(叱咤)하는 듯 하여 금녀의 안색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만들었다.
80세가 넘도록 살아온 천하고 무림이다. 금녀란 칭호를 받고 강호인들의 두려움을 산 것은 비록 30세도 넘어서였지
만 그것만해도 반백년이 아닌가. 그런 자신에게 별 웃기는 꼬마 놈이 악담을 퍼부으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말았다. 진양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는 금방이라도 공격해올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해져 뒤로 살짝 물러섰다. 금녀는
잠시 그런 진양을 노려보더니 살기를 풍기며 느릿한 어조로 말한다.
[너희들이 정녕 전부 죽기를 원한다면 내 죽여주마. 단지 살고싶은 자는 꿇어라!]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내공을 담아서 말했기 때문에 함종문 사람들 모두가 속이 울렁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무릎을 꿇는 자는 없었다. 그에 그녀는 씹어 내뱉듯 외쳤다.
[오냐. 그럼 어디 전부 죽어보거라!]
곧 그녀는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저 진양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마치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백
마와도 같았다. 물론 얼굴을 본다면 실소를 터트릴 테지만.
[내 제자들에게 손대지 말아라!]
당연 이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조덕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는 순간 대갈(大喝)하며 앞을 가로막
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함종절검법을 시전하자 그녀는 도저히 진양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와 또 다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