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章. 소파(小派) 함종문(咸種門) 3
[물러서시오!]
갑자기 왼쪽 숲에서 도사 세 명이 나타나 금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조덕과 비슷한 백색 도복을 입고 있었
는데 조덕의 허리 매인 붉은 색 대와는 달리 푸른 색의 띠를 둘러매고 있었다. 또 셋 모두가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신(劍身)에는 <청성(靑城)>이라는 글자가 당당히 새겨져 있어 그들이 사천 청성산(靑城山)의 청성파임을 쉽게 깨
달을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한 명은 나이가 좀 들어 중년은 되어 보였고 다른 두 명은 약관의 나이쯤 되어
보인다. 그 중 중년 도사가 외쳤다.
[금녀야, 또 만났구나.]
[망할.. 또 어떻게 알고 쫓아왔지?]
그들은 서로 알고있는 듯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금녀의 표정은 거의 사색에 가까웠다.
(그녀가 사색이 되는 걸 보니 이 도사의 무공이 대단한가보다.)
조덕은 그녀의 안색을 보며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진양 등 그의 제자들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시 그 중년도사의 입이 열렸다.
[오늘은 반드시 끝을 보자.]
[웃기지 마라.]
그녀는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오히려 그의 안면으로 철장을 들이밀었다. 중년도사는 고개를 꺾어 피하고는 소리친
다.
[퇴로를 막아라!]
그 외침은 뒤편의 두 젊은 도사에게 한 말인 듯 했다. 과연 두 도사는 재빠르게 몸을 놀려 금녀의 뒤편으로 이동하
려 했다. 그러자 금녀는 그 대단한 경공으로 그들보다 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날렸다.
[흥. 또 도망치려고? 어차피 너와 우리 청성의 추격을 피하지 못한다.]
중년도사가 입을 열어 타이르듯 말했다. 허나 그녀는 듣지 않고 애통유루(哀痛流淚)의 수법으로 사방을 향해 철장을
빠르게 내밀어대자 중년도사는 물론 젊은 두 도사도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잠시간 도망칠 수 있는 완
벽한 틈이 보였다. 분명 두 도사보다 빨리 움직여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지만 중년도사가 가까이 위치해서 뜻하
지 않은 경우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초식을 펼쳐 틈을 잡은 것이다. 그녀는 비호처럼 몸을 번쩍여 뒤도 돌
아보지 않은 채 도망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중년 도사에게 뭐라 소리치는 건 잊지 않았다.
[화연철(和然徹), 상황이 좋지 않으니 나중에 승부를 가리자!]
[앗. 거기 서라!]
그녀가 도망치자 두 명의 젊은 도사들이 외치며 쫓아가려 했다. 그러나 정작 중년 도사가 만류했다.
[쫓아갈 수 없다. 그녀의 경공이 뛰어나 잡지 못할 것이다.]
그 도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조덕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에 조덕이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불초는 이곳 함종문의 장문, 조덕이라 하오.]
[아, 반갑소.]
허나 조덕의 정중한 인사와는 달리 그는 그저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대천산은 지극히 고요했다. 함종문 사람들의 우울한 심사를 말해주듯 지극히 고요했다. 아무리 강호의 마두(魔頭)라
명성을 떨치는 금수쌍녀 중 금녀라지만 또 고작 13년의 역사를 가진 극히 작은 문파라지만, 그녀 한 명에 의해 함
종문이 멸문당할 뻔 한 것은 실로 치욕이었다. 그나마 청성 도사들의 등장이 없었다면 이미 모두 죽은 목숨이 아니
겠는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산중의 부엉이가 은밀한 눈동자를 번쩍일 무렵, 조덕은 방안에 들어앉아 연신 자
신을 탓하고 있었다. 실로 반나절만의 일이다. 반나절만에 함종문은 치욕을 받았다. 조덕은 탁자위의 검(劍)을 빼들
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 실로 부끄럽구나.]
그것도 꼭 금녀에게만 치욕을 받았던 건 아니다. 또 다르게 치욕을 준 자는 바로 청성파의 화연철이었다. 아까 낮
그들은 서로 통성명을 했는데 조덕은 그들 청성의 문도들에게 고마움을 느껴 간단하게나마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
나 화연철은 매우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할 수 없이 하루 묵어주는 듯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인 것이다.
그 때였다.
[조장문.]
문밖에서 문득 화연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조덕은 얼른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곧 화연철은 들어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지금 조장문을 위로하고자 왔소.]
[위로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조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진면목을 본 바 그의 위로는 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없어 모르는 척 했다.
[낮의 일 말이오. 참으로 안됐소. 허나 조장문이 자책할 필요는 없소.]
화연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에 조덕이 생각했다.
(아까와는 태도가 많이 다르구려.)
그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화연철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사실 조장문의 무공이 약한 게 아니잖소. 그 마녀의 무공이 매우 고강해 그런 것이지.]
순간 조덕은 검미(劍眉)를 꿈틀거릴 수 밖에 없었다. 화연철의 이 말은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작디 작은 소문파라지만 어쨌건 장문인은 장문인이다. 할 말과 못할 말이 따로 있는 것인데 화연철은 못할 말을 거
침없이 해댄 것이다. 그러나 화연철의 다음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 누가 패한 경험이 없겠소? 다 그러면서 고수가 되는 게 아니겠소?]
조덕은 실로 기가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가 진정 위로를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다고 짐작했
지만 설마 이 정도로 무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과연 화연철은 그를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매우 싫어
하는 부류가 많았다. 그 중 명성도 없고 실력도 없는 자가 주제에 이름을 떨쳐보겠다고 명분없이 문파를 세워대는
자들을 특히 경멸했다. 비록 조덕은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있어서 문파를 세운 것이었지만,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
는 화연철은 그 또한 그러한 자로 생각하고 비웃고자 이 밤중에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씀을 가려서 하셨으면 좋겠소.]
[아.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내 입은 본래 거짓말을 할 줄 몰라서 말이오. 하하.]
조덕은 그의 어이없는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으나 명성을 날리는 청성파 사람이고 게다가 청성 장문의 사
제로 무공도 대단하니 더 따질 수가 없었다. 결국 조덕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헌데 그러던 때 문득 그
의 제자 한 명이 급히 그를 찾았다.
[사부님, 사부님. 큰일났습니다!]
그 제자는 자꾸 허둥지둥 난리법석을 떨었다. 사실 사정은 이러했다.
화연철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다. 아까 낮에 그와 같이 있었던 두 젊은이였는데 둘은 형제로 이름은 백항(伯恒)과 백
총(伯總)이라 했다. 그들의 나이가 이제 약관에 이르러 화연철은 제자들이 견문을 쌓도록 해주려 함께 하산했다가
우연히 금녀를 만났다. 마침 그녀가 수녀(獸女)없이 혼자 다니는 걸 발견하고 반드시 없애리라 하며 추격했고 그러
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실로 청성파와 금녀는 지지리도 끈끈한 인연이 있어 서로 원수처럼 지냈던 것이다. 그것
이야 어찌되었건 문제의 발생은 화연철이 그들과 잠시 떨어진 사이에 벌어졌다. 두 백씨 형제는 사부가 조장문을
만나러 가자 잠시 함종문을 구경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함종문 제자들이 후원에 몰려 단체로 수련하는 걸
보았던 것이다. 백총이 피식 웃더니 백항에게 말했다.
[형님, 저들 보십시오. 저것도 수련하는 겁니까?]
[암. 수련은 수련이지.]
그들은 함께 대소했다. 백항의 대답이 빈정거림임을 모를 리 없지 않는가. 한편 그들의 등장에 함종 문도들은 모두
수련을 멈추고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백씨 형제는 여유있게 손 들어 예를 받았다. 그에 함종 문
도들은 발끈했다.
(예를 표하면 너희도 예를 표해야 하는데 과연 그 사부의 그 제자구나.)
그러나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누구하나 나서서 따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무공이 대단한 것도 알았지만 무엇보
다도 사천 최고의 문파, 청성파의 문도가 아닌가. 그 때 백총이 입을 열었다.
[역시 모두들 열심이시구려. 헌데 누가 대제자요?]
[나요.]
사원이 나서며 대답했다. 그러자 백총이 다시 말했다.
[아! 그러시구려. 사실 형님과 난 무학에 깊이 심취하여 사는데 타 문파를 보면 그 무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오.]
[오호. 나도 무학에 깊이 심취했소. 허나 너무 둔해서..]
사원은 그가 무학에 깊이 심취했다니 일순 기분이 들떠 대답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제 둔함을 말하다 문득 창피
한 마음이 들어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백총이 무얼 원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것이다. 그에 백총은 그가
멍청하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생각만 할 뿐 그렇게 말하지 않고 도리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무릇 무학은 개나 소나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또 개나 소나 익힐 수 있는 게 되잖소.]
[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이해를 못하겠소.]
사원은 정말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총은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한다.
[그러니까 재능도 없는 멍청한 것들은 절대로 훌륭한 무공을 익힐 수 없지만 저급한 무공을 익히면 그래도 무공을
익혔다 할 수 있으니 내 그렇게 표현한 거요. 하하.]
그는 말을 마치며 크게 웃었다. 그에 사원도 멋모르고 하하 소리내며 같이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진양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말을 가려서 해라!]
[양아.]
사원이 깜짝 놀라 엄숙히 말했다. 그러나 진양은 여전히 씩씩대며 백총을 노려보았다. 그는 대노한 것이다. 사문을
욕한 것에도 분노하긴 했다. 허나 자신이 그 안에 포함된다는 것에 더 분노한 것이다. 그는 백총이 말할 때의 표정
이나 억양, 그리고 그 내용을 듣고 그게 말을 돌려서 욕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이미 그들이 처음 나타나
말을 꺼낼 때부터 그 능글맞은 표정을 보고 좋지 않은 뜻이 있음을 깨달았었다. 그러나 그건 그만 깨닫고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그와 이유는 달랐지만 그의 뒤에서 마보강과 이사형(二師兄) 연경후(延景侯)가 나와 진양의 양옆에
서더니 함께 백총을 노려본 것이다.
[잠깐, 잠깐. 대체 다들 뭐 하는 거야?]
사원이 크게 허둥대며 소리쳤다. 그는 갑자기 이들 셋이 나서서 백총을 무섭게 노려보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던
것이다. 그러자 진양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사형, 지금 저 놈은 대사형을 욕한 거예요.]
[나를? 무슨 소리야, 그게.]
진양은 그가 매우 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과 제 사문을 욕하는 대도 전혀 모르자 크게 답답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으이그! 재능도 없는 멍청한 놈들이 바로 우리고 그 저급한 무공은 함종문의 무공이라고 욕하는 거라고요!]
[뭐야?]
사원은 눈을 휘둥그래 뜨며 백총을 곧장 쳐다보았다. 그러나 백총은 능청을 떨었다.
[너무들 하시오. 내 전혀 그런 뜻이 없었거늘 어찌 이리 모함한단 말이오?]
[너.. 너..]
연경후도 크게 분노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제대로 못이었다. 그는 자신이 개가되건 소가되건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게 아니다. 그는 본래 다른 함종 문도처럼 사부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문의 무공
이 저급하다니 크게 분노할 만 하지 않는가. 그는 막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자 사원이 재빨리 몸으로 막으며 소리
쳤다.
[멈춰라! 지금 뭐하는 거냐?]
[대사형!]
[집어넣어라!]
그가 그렇게 대갈하자 연경후는 크게 한숨쉬며 할 수 없이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진양이 생각했다.
(휴.. 답답해. 대사형은 정말 머리가 나빠. 하지만 그냥 넘어가면 내가 피를 토하지!)
곧 그는 슬쩍 두 걸음을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맞아. 그런데 가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서 별 개싸움이나 벌일 때 쓰는 걸 배워서 그걸 무
슨 대단한 무공이랍시고 큰 소리 치는 자들이 있죠. 그 자들은 아까 낮에 봤는데 참 가관이었어요. 혹시 봤어요?]
[그게 무슨..]
그는 백총을 보며 말했는데 백총은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러자 진양은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다시 손짓발짓 입을 떠벌린다.
[아.. 못 봤나보군요. 제가 자세히 알려 드릴게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놈들은 사실 두 마리의 개들이더군요! 저
는 놀라서 눈을 비비고 자세히 봤지요. 과연 몸이 하얗던 건 백의를 입은 게 아니라 새하얀 털이 나있었던 거였어
요. 특히 그 중에 어린 개가 자꾸 사람을 보면 짖어대는데 정말 머리 아파요, 머리 아파.]
[풋..]
순간 연경후와 마보강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진양이 뭘 말하고자 하는 지 이제 깨달은 것이다. 물론 사
원은 여전히 눈만 멀뚱멀뚱 뜨며 그들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허나 백총은 드디어 깨달았다.
[뭐라고! 이 간특(姦慝)한..]
[아니? 왜 그리 흥분하죠? 혹시..]
진양은 말꼬리를 슬쩍 흐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백총을 바라보는 눈은 가늘게 뜨고 있었고 또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당신이 바로 그 개가 아니냐, 하는 말과 다름없지 않는가. 그에 백총이 분노를 안 할 리
가 없었다.
[네놈을 죽이지 못하면 내 피를 토하겠다!]
[누가 할 말인데? 사람을 무는 개는 죽어야 해.]
진양도 지지않고 맞서 소리쳤다. 결국 백총은 더 참지 못하고 일순 번개가 내리꽂히듯 움직여 오른손으로 진양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다행히 진양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재빨리 신법을 펼쳐 그의 우수(右手)를 피할 수 있
었다. 이에 그가 이를 갈며 다시 공격하려 하자 사원이 후다닥 달려 막고는 말했다.
[대체 왜 그러오? 제발 그만하시오. 양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켜라! 저 망할 놈을 내 손으로 죽일 테다!]
[제발 그..]
[이놈이!]
사원이 자꾸 말리자 백총의 분노는 오히려 더 치솟아 크게 일갈하며 그의 어깨에 일 장을 내갈겼다. 그러자 사원은
신음을 토하며 서너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사원은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젠 나까지 공격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혹 그들은 본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을까?)
그는 도저히 상황을 가늠할 수 없어 허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백총은 이미 진양의 목전에 다다라 있
었다. 그 모습에 놀란 연경후는 재빨리 달려들어 백총의 옆구리에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백총은 냉소하며 일단 몸
을 빼더니 연경후의 안면을 왼발로 후려갈겼다. 동작이 재빠르고 절도가 있었으며 자세가 안정되어 있는 게 과연
청성의 문도다웠다. 그 때 다시 사원이 달려들어 백총의 앞을 막아서곤 소리쳤다.
[더 무례하지 마시오. 내 둔하여 뭐 때문에 이러는 지는 모르나 사제들을 괴롭힌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흥. 너처럼 멍청하고 못난 놈이 가만히 있지 않으면 뭘 어쩔 것이냐?]
[뭐요?]
사원은 발끈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좋소! 한번 해봅시다.]
[멍청이는 사라져라.]
백총이 먼저 선공을 펼쳤다. 그는 청성의 보법 중 하나인 니추공(泥鰍功)을 펼쳐 빠르게 사원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사원은 일단 그의 무공을 확실히 알고자 가볍게 일 권을 내질러 보았는데 백총은 기이한 보법으로 간단히 피하더니
순간 발 끝으로 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 차버렸다. 이는 청성의 무영환퇴(無影幻腿) 수법 중 하나인 소단퇴(小短
腿)였다. 곧 정강이를 걷어차인 사원은 인상을 찡그리며 일순간 몸을 갸우뚱거렸다.
[하압!]
백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큰 기합성을 내며 사원의 앞가슴에 일 장을 친 것이다. 그에 사원은 몸을 뒤
로 물려 그 일 장의 위력을 많이 반감시켰지만, 위력이 제법이라 네 발짝이나 물러서며 입가에 한 줄기의 피가 흘
렀다.
[대사형!]
함종 문도들은 크게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그 모습에 백총이 조소했다.
[형편없군.]
[이놈..]
순간 연경후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손에 검을 빼들고 있었는데 그는 백총에게 근접하여 재빨리 함종
절검법을 펼쳤다. 그러자 백총도 가만히 있지 않고 검을 빼들어 청풍검법(淸風劍法)으로 맞서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였다. 백항이 소스라치게 놀라 괴성을 내질렀다.
[조심해!]
[네?]
그게 끝이었다. 갑자기 등뒤의 진양이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다가와선 그의 천령개(天靈蓋)를 힘차게 후려친 것이었
다. 백총은 연경후가 달려들어 막 검을 뽑아 맞서려던 찰나였고 진양의 경공은 제법 뛰어난 편이라 아차 하는 순간
그는 천령개를 강타당했다. 백총은 그리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총아!]
헌데 부르짖는 듯한 외침소리가 두 개였다. 진양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명은 백항이 맞았는데 또 한 명은 바로
화연철이 아닌가. 화연철의 곁에는 조덕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멍하니 서있었다.
화연철과 백항은 어느새 백총의 시신을 부둥켜 안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총아.. 총아!]
허둥지둥 황급히 달려온 화연철은 사부의 부름에도 말없이 서서히 싸늘해져만 가는 백총의 시신을 안고 몇 번을 더
불러댔다. 그러나 부른다한들, 때린다한들 백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어찌 대답하겠는가. 화연철은 처절히
흐느꼈다. 두 명뿐이었다. 본래 그는 제자를 거두지 않았다. 청성파에서 용정학(龍正學)장문 다음가는 실권과 무공을
가지고도 그는 제자를 한 명도 거느리지 않았다. 용정학 장문은 그런 그에게 제자 문제로 여러 번 권했었다. 그러나
그는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이고 일단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었기에 응하지 않았다. 분명 그가 왜 제자를 거두지 않으려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
신이 늙었음을 느꼈는지 어쨌는지 제자를 딱 두 명만 거두었는데 그들이 바로 백항, 백총 형제였던 것이다. 과연 화
연철은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성품은 좋다 할 수 없었지만 일단 한번 정(情)을 주면 그 깊이란 말로 형용하기 힘
들 정도였으니 제자 백총을 잃은 슬픔은 매우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함종문 제
자들과 조덕은 일순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진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흥. 잘들 노는군. 그게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거다. 너희들이 애당초 그 개 같은 짓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그러니 나를 원망할 순 없겠지!)
그러던 진양은 갑자기 안색이 대변했다.
(아차! 사부님은 비열한 행동을 크게 싫어하시는데 큰일이구나!)
그는 상황이 크게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때 화연철이 날아들며 음침하게 말했다.
[쳐죽일 놈.]
어느새 화연철은 진양의 면전에 도달해 있었다. 진양은 깜짝 놀라 몸을 내빼며 함종권의 수식을 취하려 했다. 그러
자 그는 또다시 재빠르게 달려들어 진양의 어깨를 매섭게 움켜쥐더니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말했다.
[내 제자를 죽인 네놈을 물론 네놈이 속한 함종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일순 조덕 등 함종문 사람들은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선전포고가 아닌가. 지켜보는 조덕은 미간을 찌
푸렸다. 사람을 죽인 건 큰 잘못이지만 듣기로 백씨 형제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데 이런 선전포고까지 하니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한편 어깨를 잡힌 진양은 크게 겁을 먹고 있었다.
(이 개도사가 분명 날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럼 사부님은 분명 날 도와주겠지?)
하지만 절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내색했다 혹 화연철이 알아보면 그거야말로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
문이었다. 곧 화연철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은 손을 쓰지 않겠다. 그러나 또 언제 손을 쓸지 모르지. 두려움에 떨게 해줄 테다.]
그 싸늘한 언사에 조덕을 비롯한 모두가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그가 마음만 먹으면 함종문 쯤이야 하루아침에 무
너뜨릴 수 있다는 건 분명 사실이 아닌가. 모두 대답이 없이 안면만 씰룩거리자 화연철은 더 머무르지 않고 몸을
돌려 비참하게 죽은 백총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천령개는 짓눌려져 있고 구규(九竅)로는 아직도 피를 쏟아내고 있
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다시 비분이 치솟았으나 또 싸우려 든다면 방금 한 말과 맞지 않기 때문에 화를 억누르고
떠나며 소리쳤다.
[두고보라. 두고보라!]
화연철은 말속에 점점 내공을 담아서 소리쳤는데 과연 그 소리는 대천산을 들쑤시고 다니는 듯 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백항과 함께 떠나고 말았다.
어느새 조덕 등은 함종문 대청에 모두 모여있었다. 사방이 그다지 넓지 않고 특별한 장식품들도 없어 그야말로 함
종문이 얼마나 작은 문파인지 잘 말해주고 있었다. 허나 그 안의 공기는 심히 엄숙했다. 대청 맨 앞의 높은 의자엔
조덕이 앉아있었다. 그 앞으로 진양이 공손히 서있었고 남은 제자들은 그 양옆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조덕은 고민하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전후사정을 듣고는 꼭 진양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분명 그는 비열
한 기습으로 백총을 죽였고 그렇게 청성파의 제자를 죽여 화연철의 분노를 사고 말았으니 큰일도 큰일이었던 것이
다. 이건 함종문의 존망(存亡)이 달린 문제였다. 진양은 조덕이 매우 난감해 하는걸 보며 점점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조덕이 의리를 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또 제자들을 크게 아껴서 문파 존속을 위해 제자를 버릴 리는 없다
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비열한 행동을 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둘 것 같진 않았다. 정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조덕이니 혹 손을 써서 자신을 죽이려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삶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허나 그렇다고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만일 조덕이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차라리 맞서 싸우다 죽고 파문하려
든다면 곱게 말을 들어 떠나겠다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양아. 너는 네 목숨과 사문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느냐?]
문득 조덕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장내가 왠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날 시험하는 건가? 내 목숨이 더 중요하다 대답하면 날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 욕하겠지. 하지만 사문이 더
중요하다 한다해도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부님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아하! 그렇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하던 그는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 곧 슬쩍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도저히 가릴 수 없을만큼 둘 다 똑같이 중요해요.]
[어째서 그러하냐?]
조덕이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이 넓은 천하, 그 어느 곳에 감히 자기 목숨이 중요하지 않다 하는 자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제 목숨이 매우 중
요한 거라 생각해요. 허나 하루라도 사부를 모시면 종신토록 아버님과 같이 섬긴다 하여 천경지의(天經地義)와 같은
데, 사부님께선 하루 이틀도 아닌 갈 곳 없는 불쌍한 처지의 저를 이만큼 키워주셨으니 그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
라 생각하죠. 해서 죽으면 보은(報恩)할 수 없고 사문을 버리면 배은망덕한 놈이 되니 전 감히 그 두 가지 중 무엇
이 중요하다 꼬집을 수 없군요.]
진양의 말은 실로 청산유수(靑山流水)와 같았다. 정말 조금의 막힘도 거리낌도 없었고 말의 억양이나 손짓 등등의
표현 또한 매우 뛰어나 언제나 그랬듯 모두 그의 말재주에 감탄하고 말았다. 또한 그의 마음씨에 미소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실상 맞지 않았다. 한마디로 거짓인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반면
조덕은 신음했다. 제자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데 사부가 어찌 딴 생각 하느냐고 생각했다.
허나 그런 비장한 마음을 품다가 금방 마음속으로 <아니야!>를 부르짖었다. 그는 지금껏 진양이 이만큼이나 사문을
위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가끔은 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사실은 전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조덕은 조용히 생각했다.
(네 말재주가 제법이긴 하다. 그러나 본디 정이 넘치는 넌 정녕 그렇게까지 사문을 위한다면 절대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갈 수 없다.)
그는 정확히 상황을 추리해나가고 있었다. 허나 이를 모르는 진양은 그가 속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심 웃음을 흘
리고 있었다. 그는 조덕이 조금 멍청하리라 생각하고 지냈기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조덕은 그
가 생각하는 만큼 멍청하지 않다. 본래부터 매우 예리했는데 강호에서 오랜 기간을 지낸 자라 더욱 눈치가 빨랐다.
다만 한 문파의 장문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특히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잘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조덕은 그의
속내까지 잘 알고 있는데 그는 조덕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니 이야말로 강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조덕이 잠시 궁리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다면 목숨을 지키고 사문도 버리지 않을 좋은 방도를 말해주마.]
그에 진양이 깜짝 놀라 눈을 멀뚱멀뚱 뜨자 그가 다시 말했다.
[곧장 청성파의 화연철을 찾아가 사정하고 그의 앞에서 오른손을 잘라 진심을 보여준다면 분명 그의 마음에도 동
(動)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순간 진양을 비롯한 모두가 앗, 하고 소리내며 경악했다. 그의 이런 잔혹한 말은 실로 상상도 못했던 말이었다. 진
양은 오른손이 잘린 채 고통스러워할 자신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전..]
[대답하거라.]
조덕은 일말의 감정도 담지 않은 듯 무정하게 말했다. 진양은 가슴이 떨렸지만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병신이 되서 무슨 삶을 살아간단 말이죠?]
[틀렸다.]
조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묻겠다. 우리 함종문의 힘으로 청성파의 공격을, 아니 화연철의 공격만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
[아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다만 강호를 살아가는 한 무인으로서 함부로 굽히지 않고
꿋꿋히 싸우다 죽는 것이다.]
진양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덕은 여전히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다 죽는다면 비록 패기라도 있어 보이긴 하겠지만 실상 그런 행동은 무지하기 짝이 없는 행동
이다. 강호를 살아가려면 오로지 무공만이 전부가 아니다. 많은 경험을 쌓고 고인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지식을 얻고
지혜를 길러 정신이 진실해질 수 있을 때 참과 거짓이 혼란스럽게 뒤섞여있는 그 강호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정상이 건 아니 건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고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무엇이나 행할 수 있다.]
조덕이 말하는 내용은 열 여섯의 견문하나 없는 소년이 이해하기엔 조금 복잡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진양은 총명
하여 그 말의 진위를 알아듣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럼.. 두 걸음을 가기 위한 한 걸음의 후퇴란 말인가요? 제 팔을 내놓는 것이? 제 팔이 희생을 해야 한단 말
이죠?]
[그렇다. 넌 과연 총명하여 쉽게 알아듣는구나. 지금은 이렇게 힘없이 당하지만 굴욕을 참고 이겨낸다면 언젠가 크
게 대성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어찌 회계지치(會稽之恥)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
조덕은 흡족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진양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까
지 그를 봐온 바 그는 속되고 자유분방한 면이 있어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구속될 사람이 아닌 걸 알았기에 그 생
각을 이런 계기로 고쳐주고 싶었다. 비록 심성은 변하게 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허나 진양은 그런 작은 기대를 한
마디로 깨트렸다.
[저.. 저는 싫어요!]
[뭣! 어째서냐? 총명하니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차라리 가서 죽겠어요. 그 개도사들에게 물려죽던 밟혀죽던 병신이 돼서 사는 것보다 낫겠죠. 회계지치고 회계지희
(會稽之喜)고 간에 전 그런 짓은 못하겠어요.]
진양은 감정이 격해져 감히 사부의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덕은 구구히 따지지는 않았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 수 없구나.]
그리곤 좌중을 훑어보며 다시 말하길,
[오늘로 진양은 함종문에서 축출된다.]
그러자 장내는 순식간에 웅성웅성 시끌벅적하게 되어버렸다. 진양의 사형제들은 모두 안색이 변해 어쩔 줄 몰라했
다. 하지만 정작 진양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팔을 잘려 병신이 되느니 차라리 파문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그렇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다 해도 별로 우울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 한다
면 지금껏 키워주고 무공을 가르치며 많은 지식을 쌓게 해준 사부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재빨리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떠나거라..]
조덕은 진양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놓은 채 말했다. 그의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양 장내는 또다시 일순
정막감으로 휩싸이고 말았다. 조덕은 절대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진양이 하직 인사를 드리는데도 여전히 무반
응이었다. 마치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했지만 진양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자 좀 전까지 없던 우울함이
치솟아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급히 몸을 돌려보니 이미 익숙하디 익숙해진 얼굴들이 보였다. 얼마동안
이나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 동생공사(同生共死)를 외치며 지냈던가. 별 것도 아닌 것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
고 어떠한 일이든 함께 행해 쌓아왔던 지금까지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어릴 적에 자
그마한 만두 한 조각을 가지고 싸우던 나날도, 사부의 작은 칭찬에 기분이 들떠 이리저리 날뛰다 무릎이 깨지던 나
날도, 마보강과 남들 몰래 대명사의 휴정화상의 가르침을 받던 나날도, 그리고 자신의 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최
상의 모습까지. 그의 눈앞에는 그동안의 행복하고 복잡했던 과거가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세상 모든 것
이 뿌예지듯 했고 점점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문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진 지
가 오래다.
[모.. 모두들.. 모두들..]
진양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하려하니 평소 그답지 않게 즉시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목도 심하
게 메여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물에 잠긴 듯 했다. 그는 소매로 막 떨어지려는 눈물을 닦아내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
고 말했다.
[모두.. 잘 있어요.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겠죠.]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고 서둘러 뛰쳐나갔다. 아니, 도망쳤다고 하는 게 더 옳았다. 그가 그렇게 도망
치자 그 뒤로는 침울하게 그를 부르는 외침소리들이 따라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을 달리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이미 대천산에선 벗어난 듯 했다. 그는 숨이
차오는 걸 느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옛날 사부님께선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을 해주셨죠. 그런 것이 정녕 이런 거라면 저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요.]
그는 잠시동안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큰 피로도 느껴져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기도 귀찮았다. 그동안 한없이
정든 사부, 사형제(師兄弟)들과 헤어진다는 건 그의 기력을 충분히 빼놓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후 뒤의 나무를 등
뒤로 기대며 금방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