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章. 간특한 소년과 오만한 소녀 1
깊은 밤 어느 산의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이곳, 사방엔 기이할 정도의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귀뚜라미도 부엉이
도 말없이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그나마 바람이나 솔솔 불어 이곳이 세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마저 없다면
여긴 지상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런 그곳에는 놀랍게도 사람의 형상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한 개, 두 개도 아닌
적어도 열 개는 되어보였다. 하지만 정말 사람의 형상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전혀 움직임이 없다. 아주 미
세하디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조각이라 착각할 만큼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그리
있을 것인가. 문득 우중충한 밤하늘의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춰졌다. 달빛이 마치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듯 슬쩍 비
추어 주자 드러나는 건 과연 사람들 십여 명. 그런데 해괴하게도 그 중 한 명은 저번의 바로 그 금녀가 아닌가.
[…….]
달빛에 비춰진 그곳의 상황은 그야말로 살풍경이었다. 금녀를 가운데에 몰아두고 사방으로는 백색 도복의 도사 십
여 명이 검을 꼬나 쥔 채 무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금녀 또한 철장을 땅에 내리꽂은 채로 그들을 조용히 주시하
고 있었다. 그 때 문득 금녀의 왼발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십여 명의 도사들 모두 전혀 깨닫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금녀는 다시 왼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실로 소리도 떨림도 없
어서 발 옆을 지나는 개미도 모를 듯 했다. 그렇게 잠시동안 왼발을 움직여 두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릴 수 있었
다. 순간 금녀는 눈을 부릅뜨며 지금까지의 정적을 일순간 깨트렸다.
[멍청한!]
그녀는 그 말이 터짐과 동시에 몸을 잽싸게 날렸다. 금방 두 도사의 면전에 다다른 그녀는 그들의 정수리를 철장으
로 한 대씩 후려쳤다. 그야말로 찰나, 두 도사는 깜짝 놀라 나름대로 몸을 꿈틀거렸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순식간에
두 도사가 죽어버리자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중년 도사가 급히 소리쳤다.
[학익교유(鶴翼交柔), 철연사영(鐵蓮射影)의 자리 잡아!]
[소용없다!]
그러나 도사들이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금녀의 신형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재빨리 한 도사의 등뒤로 이동해 독
조수(獨爪手) 수법으로 뒷목의 살점을 깊이 뜯어내 버렸다. 그 도사는 단발마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다. 그걸로 끝
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연달아 신형을 움직여 삽시간에 도사 셋을 죽여버린 것이다. 실로 그녀의 경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중년 도사가 손짓하며 소리쳤다.
[이리로!]
그는 더 이대로 있다간 모두가 전멸당할 것이란 걸 깨달았는지 급히 뭉치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녀는 허락
하지 않았다. 곧장 그 중년 도사에게 달려들어 다시 독조수를 펼친 것이다. 중년 도사는 그 독조수가 대단함을 알고
있어 몸을 틀고 급히 피해냈다. 다시 그녀가 오른손에 쥔 철장으로 그의 오른 다리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자 중년
도사는 뒤로 펄쩍 뛰어올라 허리춤에서 꺼낸 다섯 개의 돈표를 그녀의 온몸 요혈로 던졌다. 그녀는 그 던지는 법이
나 자세, 그리고 쓰이는 암기로 보아서 암향표(暗香표)의 수법임을 알 수 있었다. 금녀가 조소했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금녀의 신형이 번뜩였다. 그리고 어느새 금녀는 중년 도사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중년 도사는 아차, 하며 급히
검을 횡으로 그었다. 아니, 그보다 금녀가 먼저 독조수를 펼쳤다. 그녀의 좌수가 중년 도사의 가슴으로 날아들고 있
었다. 조금만 있으면 그녀의 독조수에 의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허나 다행히도 곁에 있던 두 도사가 반
응해 금녀의 양옆으로 달려들었다.
[비켜라!]
그녀는 중년 도사의 가슴을 쥐어뜯지 못하자 발끈하여 공격을 방해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무섭게 돌린 그녀의 철
장에 금방 그 두 도사의 머리가 박살나고 만다.
[아아..]
중년 도사의 한숨에는 안도와 탄식이 섞여있는 듯 했다. 다행히 중년 도사를 비롯한 남은 다섯 명의 도사는 이미
한 곳에 뭉쳐있었다. 금녀는 그런 모습을 보며 훗,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채문(蔡聞), 참으로 우습구나. 감히 네 따위가 나에게 덤벼들 줄이야.]
[흥. 내 힘이 모자라 널 잡지 못하는 게 한이로다.]
[누가 알려줬나? 내가 이곳 미창산(米倉山)에 있다고.]
[너의 행동 하나하나를 우리 청성파는 모두 알고있다. 네가 어딜가든 소용없어.]
본래 그 중년도사의 이름은 채문으로 용정학, 화연철에겐 막내 사제라 불리는 자였다. 실상 그들 셋 모두가 늙었기
에 그에게 막내 사제라는 칭호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버릇이 된 그들은 서로의 호칭에 전혀 변함이 없었
다. 그의 성격은 꽤나 급한 듯 했다. 지금 여유를 가지는 금녀와는 달리 매우 성급해 보이는 그의 말투는 실로 그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 말에 금녀는 대소를 터트렸다.
[정말 우습다! 우스워!]
[뭐가 우습지?]
채문이 날카롭게 소리쳐 물었다.
[어찌 안 우습겠느냐? 네 말투나 화연철의 말투나 하나같이 저희들이 무슨 강호를 휘어잡는 대파(大派)라도 되는
듯 하니 말이다.]
그녀는 계속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대소했다. 그러자 채문은 화가 치솟아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어쨌든 네가 어딜가든 언젠가는 우리 손에 붙잡힐걸?]
[하하. 이 채가 어린 놈아. 너희들이 날 찾는 방법 따위도 모를 줄 아느냐? 너희들은 기어다니고 나는 걸어다니기
때문에 본래는 날 찾아낼 수 없지. 다행히 내가 이 사천에 자주 얼굴을 들이밀어 너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 뿐
이야. 그렇지?]
채문은 크게 분노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한 기어다닌다는 말은 분명 경공이 형편없음을 비웃는
것이었지만 비유가 너무 모욕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기에 대답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 때
금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실력으로는 어떻게든 날 이길 수 없을 것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덤빈 거지? 솔직히 말해봐라.]
[흥. 이사형이 알려줘서 같이 있던 제자들과 온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한들 청성의 문도로서 어찌 적을 피
해가리!]
채문은 불끈 주먹을 쥐며 대답했다.
과연 그는 자신의 제자들과 어딜 갔다가 막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화연철이 보낸 전서구(傳書鳩)에게서 금녀가 현재
미창산을 지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를 급습했지만 공격은 실패했다. 도리어 제자 다섯
명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채문은 이제 자신과 남은 제자들도 모조리 몰살당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워낙 성정
(性情)이 불같아 절대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노하여 그런 건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게 맞았다.
한편 금녀는 잠시 밤하늘과 달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했다.
(더 늦을 수 없어. 혹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채문 등을 돌아 보자 그들은 결사항전을 하려는지 온몸에서 전
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녀가 말했다.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너희들의 목숨은 살려줘야겠구나.]
[뭐야?]
채문이 소리쳤다. 그는 자신들이 무시 당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너.. 이 금녀야,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차라리 죽여라!]
그는 꽤나 분노가 치민 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금녀는 비소하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후일 죽여주도록 하지.]
[기, 기다려!]
금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빠르기만 한 경공술을 펼쳐 사라져버렸다. 채문은 여전히 자신이 무시 당했다고 생각
하며 방방 날뛰고 있었고 그의 제자들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진양은 다시 대천산으로 돌아와 산 밑을 배회하고 있었다.
[음으으음..]
그는 지금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른손에는 얇은 나뭇가지를 들고 휘젓고 있었고 자꾸 춤을 추듯 덩실거려 걷는
게 아니라 껑충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오늘은 파문된 지 하루가 지난 날, 허나 그의 모습은 전혀 파문 당한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나게 놀고있는 소년과 전혀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가 지금 그리 빈둥빈둥 가고있는 곳은 다름아닌 대명사였다. 사실 잠에서 깨고 보니 갈 데가 없던 것이다. 5년
전, 조덕의 손에 이끌려 함종문에 입문한 후로 한번도 대천산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그건 당연했다. 그래서 한참동
안이나 궁리하고 궁리해서 떠오른 곳은 고작 대명사 정도였다. 그러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어서 크
게 기뻐했다. 그제야 대명사를 향하여 급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대명사는 여전했다. 진양의 파문을 당하건 안 당하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여전했다. 그는 휴정을 만나보려 몸
을 살금살금 움직여 숨었는데 문득 자신이 숨은 장소가 예전의 그 언덕임을 깨닫자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아! 보강이는 잘 있겠지?)
그 때였다. 절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그 안에서 휴정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도 전혀 변함이 없었
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데 반짝이는 대머리는 여전했다. 진양은 크게 반가운 생각이 들어 급히 입을
열었다.
[화상!]
[네 친구는 어찌하고 혼자 왔느냐?]
역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 말이었다. 그에 진양은 고소(苦笑)하며 대답했다.
[그 골짜기로 오세요. 거기서 말해주죠.]
[오냐.]
휴정은 두말없이 응낙했다.
골짜기에서 한 이 각쯤 기다렸을까. 과연 휴정은 나타났다. 그는 나타나 잠시 진양을 바라보더니 미소하며 말했다.
[자. 네 친구도 없는데 혼자라도 덤빌 것이냐?]
[아뇨. 그 전에.. 보강이가 같이 안 온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아요?]
진양이 묻자 휴정은 한번 더 미소하기만 했다. 그러자 진양은 곧장 입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금녀를 만난 일, 화연
철의 오만, 파문 등등. 한참동안 그동안의 일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파문당한 일을 이야기 할 땐 갑자기 설
움이 복받쳐와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하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러나 백총을 암습한 일에 대해선 말하
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백씨 형제가 시비 걸었던 일을 말하지도 않았다.
한편 휴정은 그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금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고, 화연철
의 이야기가 나오자 피식 실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그 반응들은 마치 그들을 알고 있는 듯 하여 진양의 호기심을
충분히 돋구었다.
[그들에 대해 많이 알아요?]
진양이 참지 못하고 눈빛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휴정은 또 미소만 짓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
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시 그 정적을 깬 자는 역시 진양이었다.
[제가 화상을 사부로 모시려면 뭘 어떻게 해야하죠?]
[나를?]
휴정은 눈을 휘둥그래 뜨며 크게 놀란 듯 했다. 머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데 눈을 휘둥그래 떠지자 그 모습이
여간 웃긴 게 아니었다. 진양은 히히 웃으면서도 다시 말은 했다.
[네. 화상을 사부로 모시면 무공도 전수해주실 거죠?]
[허허.]
휴정은 문득 입을 벌려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진양이 왜 웃느냐는 듯 이상하게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내 무공을 배우려면 너도 소림사의 제자가 되야한다.]
[그, 그럼 머리도 밀어야 하나요?]
[그야 당연하지.]
[매일같이 경을 외우고?]
[물론.]
휴정은 너무 뻔한 얘기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양은 서서히 안색을 굳히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
각하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됐어요, 그럼. 전 중이 되긴 싫어요.]
[그래. 출가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흥.]
진양이 비소했다. 그러다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그냥 무공을 가르쳐 줄 순 없나요?]
[소림의 계율은 엄해서 제자가 아닌 이에게 함부로 무공을 전수할 수 없단다.]
그의 말에 진양은 끙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러나 잠시동안 눈알을 굴리던 그는 또 눈을 번뜩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니 불만스러운 게 있어요.]
[무엇이냐?]
휴정이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진양이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나와 보강이가 화상에게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다고 했죠?]
[물론이지.]
[그럼 제가 지금도 혼자서 도전할 수 있겠네요?]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진양의 뻔한 이야기에도 휴정은 전혀 지루해 하지 않으며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럼 조건을 걸죠. 이제 보강이가 없고, 저 혼자 도전하는 것이니까.]
[아하.]
휴정은 그제야 진양의 의도를 알아챘다.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조건이 무엇인 지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
만 휴정은 모르는 체 하며 그에게 물었다.
[조건이란 건 무엇이냐?]
[조건이 무엇이든 간에 응낙하실 거죠? 어차피 보강이도 없는데 저 혼자서는 힘들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이긴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루어야죠. 맞죠?]
그러나 그 영악하고 간특한 진양이 설마 휴정의 마음속을 모르겠는가. 그는 이미 휴정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미리
짐작하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한편 휴정은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렸다.
(이 아이의 구두는 정말로 뛰어나다. 게다가 매우 총명하여 이제보니 내 마음을 꿰뚫고 대화를 이끌고 있었구나.)
휴정이 설령 진양과 같은 총명함과 말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내뱉은 말이
있는데 어찌 그걸 번복하랴. 하물며 휴정이 비록 다른 중들에 비해 제법 머리가 잘 돌고 말솜씨도 있었지만 어찌되
었건 반평생이 넘도록 중으로만 산 자다. 이미 이 혓바닥만 낼름낼름 놀리는 꼬마에게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진양
은 태어난 후로 10세가 될 때까지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았던 자, 바로 진양이다. 말싸움에선 애당초 진양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자신을 이겨야만 무공을 전수할 것이니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하곤
곧 입을 열어 대답했다.
[좋다. 네가 날 이긴다면 한번 이길 때마다 무공 한 가지씩을 전수해주마.]
[정말이죠?]
[불자(佛子)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휴정의 단호한 대답에 진양은 곧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날부터 진양의 끝없는 도전은 시작됐다. 진양은 아예 대명사 부근에다 작은 초옥을 하나 지었다. 물론 함종 문도
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부근이 아닌 험난하기 짝이 없는 절벽 부근에 지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대명사의 뒤편으로
넘어가 울창한 숲을 지나고 아무렇게나 널린 큰 돌덩이들만 몸을 의지해 이동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아주 험난한
곳이었다. 허나 진양은 아직 장난기가 남아있는 아이였고 경공이 제법 뛰어나 이런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깨
닫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마다 골짜기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과연 진양으로서는 도저히 휴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무공으로 안 된다면 다른 수단으로라도.)
그 후에는 수작을 부렸다. 단순히 그를 만나 싸움을 벌이는 게 아닌 이번엔 기습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월등히 강한 휴정이 기습 따위에 쉽게 당할 텐가. 진양이 아무리 숨을 가늘게 쉬어가며 숨어있어도 결국 휴정에겐
발각이 되었다. 또한 설령 그의 몸에 가까이 접근했어도 손짓 한번이면 나뒹굴게 되고 말았다. 그러자 날이 갈수록
진양은 점점 오기가 생겼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수법이 있었다. 이젠 아예 암기를 동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암기도 통하지 않자 그 이후론 검
을 잡지 말라는 사부와의 약속을 깨트리고 함종절검법으로 그를 상대했다. 어차피 파문된 것, 조덕의 말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법을 펼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진양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죠? 왜 전 화상을 못 이기죠?]
[무공으로나 정신으로나 넌 나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지.]
[무공은 그렇다 쳐도, 정신은?]
[네 마음가짐 말이다.]
휴정은 혀를 차며 곧 몸을 돌렸다.
(건방진 화상.. 반드시 이기고 말 테다.)
그 날, 진양은 초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산했다. 어차피 초옥으로 가봐야 변함이 없다. 차라리 하산이나 해서 무언
가 방도를 찾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산 아래 무슨 방도가 널려있을 리 없었다. 그는 문
득 제 자신에 대해 한심한 생각이 들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할.]
[이봐!]
그 때였다. 갑자기 웬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잠시 후 급작스럽게
몸이 뻣뻣이 굳고 말았다. 한 열 다섯쯤 됐을까. 유난히 둥그런 눈에 코는 오똑 서있었고 살며시 붙어진 앵두같은
입술까지, 한마디로 줄이면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허리는 가느다랗고 살결은 매우 보들보들해 보여 그야말로 귀엽기
짝이 없는 소녀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은은히 풍기는 부잣집 소녀의 건방진 기운
이었다. 분명 가벼운 홍의(紅衣)만 걸쳤을 뿐이지만 풍기는 기운은 굳이 자세히 뜯어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
다. 한편 손에는 봉이라 하긴 가늘고, 나뭇가지라 하긴 굵은 막대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 수년이 넘도록 또래 여자
를 보지 못했던 진양은 일순 멍청해지고 말았다.
[야!]
갑자기 들려온 그녀의 호통에 진양은 번쩍 깨어났다. 그녀는 곧 진양의 구질구질한 모습을 쓱 훑어보며 고운 눈썹
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이 주변에서 한 노파 못 봤어? 키는 매우 작고 철장을 들고 다니는 노파.]
그에 진양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허나 금녀에겐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 싸늘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뭐야? 넌 어디 사는데?]
[나는 그냥 이 산에.]
또 묻는다.
[그런데 왜 몰라? 여기로 향했다고 한 사람이 있는데 정말 못 봤어?]
[그것 참, 못 봤다는데도..]
진양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듯 휙휙, 손짓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촌놈 주제에 감히!]
[흥. 너도 별 차이는 없어 보이는 걸?]
진양도 발끈한 듯 코웃음치며 맞받았다. 헌데 그러던 진양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어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듣기로 금수쌍녀 중 한 명은 노파로 금녀, 다른 한 명은 어린 소녀로 수녀(獸女)라 했는데 서, 설마..)
그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나이는 분명 수녀의 나이와 비슷할 것 같았다. 말투 또한 건방지기 짝이
없어 별로 착한 소녀라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금녀처럼 악한 독기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다
만 부잣집 외동딸과 비슷하게 매우 건방져 보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진양이 자꾸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
을 훑어보자 소름이 돋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곧 호통쳤다.
[더러운 촌놈아! 죽고 싶으냐?]
[뭐야?]
진양은 일순 화가 치밀어 거의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자신의 행색이 충분히 더러운 건 알고 있었지만 이 건방진 소
녀가 자신을 멸시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옷이 깨끗한 홍의임을 다시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진양
은 금방 눈을 흉폭하게 빛내며 그녀가 수녀이건 아니건 이미 다 잊어버린 채 씹어뱉듯 말했다.
[날 멸시하는 것들은 모두 죽어야 해.]
그는 곧장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앞이마를 향해 사정없이 일 장을 내밀었다. 이 수는 너무 단순했지만 상대가
무공을 못한다면 인당을 쳐맞고 죽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건 그야말로 명확한 살초(殺招)였다. 그러나 그녀는 냉
소를 치더니 봉을 슥 들어올려 진양의 앞가슴 전중( 中)혈에 갖다 대었다. 이렇게 되자 순간 상황이 뒤바뀌어버렸
다. 진양은 일순 이성을 잃었던 터라 그녀가 수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잊고 무작정 달려들다 도리어 역습을 당
한 것이다. 다행히 몸을 날린 정도는 아니라서 급히 보(步)를 바꾸자 그녀의 봉을 슬쩍 비켜낼 수 있었다.
(수녀가 확실해!)
진양은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추스르며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확신하자 가슴이 싸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호호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법인데? 어디서 무공을 배운 거지?]
[너는 수녀 맞지?]
진양은 그녀의 물음을 무시하며 반문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이 굳어지고 말았다. 생판 처음 보는
자가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곧 앞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저 촌놈은 어머니를 알고 있구나!)
생각을 마친 그녀가 말했다.
[아까 말했던 그 분은 어디 있지? 그녀가 금녀라는 걸 알고, 내가 누군지 알아낸 거지?]
[아하. 너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그래, 난 금녀를 보았지.]
이에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제?]
[꽤 됐어.]
[어, 어디로 가셨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봤다면서!]
[꽤 됐다고 했잖아.]
진양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이 마쳐지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그녀는 대노했다.
[네놈이 날 놀리는 거냐?]
[웃기는 소리 마. 난 네 물음에 잘 대답해줬어.]
하지만 진양은 여전히 그녀를 비꼬았다. 결국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봉을 쳐들며 소리쳤다.
[더 까불면 네 눈알을 파버리겠다!]
[내 눈알이 네 점심식사라도 되나?]
[이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