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章. 간특한 소년과 오만한 소녀 2
순간 그녀의 봉이 번뜩이며 진양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진양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재빨리 몸을 내뺄 수 있었
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봉을 휘두르며 진양에게 달려들었는데 그는 그녀의 무공을 가늠해볼 심산으로 일단 도망다
니고 있었다. 그런데 몇 수 피하던 그는 그녀의 봉법은 뭔가 괴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봉의 회전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봉은 계속 회전하며 마치 냇물이 흐르듯 줄줄이 동작이 연신 이어졌다. 그 동작들 또한 모두 부드럽기
짝이 없어 정말 냇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되자 진양은 감히 맞설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계속 도망다니게
됐는데 이 상태로는 끝이 날 것도 같지 않았다.
(도망만 다닌다면 그다지 못 피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봉법은 매우 유유하고 부드러운 대다 봉의 중심을 돌려가
며 회전하니 금방 지치지 않을 거야.)
생각을 마친 진양은 한번 대적해 보기로 했다. 일단 봉의 흐름을 막아야겠다 생각한 그는 틈을 보다가 일순 대담하
게 뛰어들어 회전하는 봉의 중심을 잡으려 했다.
[건방진 놈!]
허나 수녀는 빠르게 반응했다. 진양의 손이 봉에 다다르기 전에 가볍게 소리치며 봉의 회전 방향을 기괴한 수법으
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봉을 돌려 진양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팍,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진양은 신음
소리를 내며 급히 몸을 내빼고 말았다.
[제기랄. 별 해괴한 봉법도 있구나.]
[이것이 바로 내 절학 유루봉법(流淚棒法)이다!]
수녀가 소리치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자 진양은 상황이 크게 안 좋음을 깨달았다.
(저런 건방진 소녀도 이기지 못하는 내가 무슨 수로 휴정 화상을 이겨?)
그러다가 일순 무언가를 생각하고 미소짓더니 곧 황급히 그녀를 막듯 손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자, 잠깐! 금녀는..]
그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과연 수녀는 크게 놀라 급히 봉을 빼냈다. 그런데 그 빼내는 동작도 과연 대단히
부드러워 진양은 속으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어서 말해!]
[아..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진양은 대체 뭘 생각했는지 입꼬리가 자꾸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녀는 그걸 보고 뭔가 꺼려지는 마음이 있었으나
금녀를 찾는 게 우선이었기에 할 수 없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러자 진양은 결국 음흉한 미소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
다.
[그 봉법을 가르쳐 줘.]
수녀는 너무 어이가 없어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뭔가 대단한 조건을 달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봉법을 전수해달
라고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본래 무공이란 강호인의 생명과 다름없는 것으로 함부로 전수는커녕 잘 보여주지
도 않는다. 설사 보여준다 해도 진수(眞髓)를 쏙 빼놓고 보여주는 등,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는 게 바로 무학이다. 그
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무공 비급을 탐하는 무리가 그리도 많고 자주 나도는 헛소문에도 무공 비급이 어쩌고 하
는 소문이 많겠는가. 그런데 이리 당당하게도 봉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그녀가 일순 멍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이
상한 걸 것이다. 그녀는 정말 어처구니 없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안돼?]
허나 진양은 그런 사실을 깊이 알지 못했다. 물론 조덕에게 많은 강호의 이야기를 듣고, 예의범절을 배웠으며 강호
의 법도도 따로 배웠다. 허나 그가 관심있게 들은 부분은 오로지 강호의 이야기들 뿐이고 나머지는 마이동풍(馬耳
東風). 본래부터 그런 법도니 뭐니 하는 것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닌 그는 그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조금 엉뚱한 면이 있었고 매우 자유분방했다. 수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놈! 그런 건 아무한테나 전수해주는 게 아냐.]
[흥. 그럼 금녀의 소식은 물 건너 갔지.]
진양은 그녀가 전수해주기 싫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코웃음치며 대답하자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
솟은 듯 씩씩거리더니 곧 덜덜 떨리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는 이를 지그시 깨물며 다시 물었다.
[다른 건 없니?]
그러나 말소리는 여전히 떨려나오고 있어 그녀가 지금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진양은 그런
사실을 눈치채곤 일순간 경계심을 가졌으나 어차피 금녀의 소식을 아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상기하고 킥, 하
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다른 게 어디 있겠어? 나는 그 봉법을 전수받야만 금녀의 소식을 말해줄 거야.]
[너.. 대, 대체 왜 내 봉법을 배우려 하지?]
[응. 사실은 이겨야할 사람이 한 명 있거든.]
진양은 서슴없이 다 대답해줬다. 그러자 수녀가 일순 눈을 번뜩이며 묻는다.
[그럼 차라리 내가 그 사람을 이겨주는 건 어때? 유루봉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구결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해. 그러니까 전수해주고 싶어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어머니가 누군데? 왜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해?]
이번엔 진양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이에 수녀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내 어머니는 바로 금녀야. 그리고 내 봉법은 본래 어머니의 유루철장법을 배낀 거라 봉법의 구결은 비록 내가 만
들었지만 기초는 철장법에 있으니 함부로 전수할 수 없지.]
[오호라!]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금녀가 그녀의 어머니였다니 매우 놀라웠던 것이다. 금녀처럼 추악한 여자의 뱃속에서 저런
미녀가 나왔다고 생각하며 그는 슬쩍 미소를 흘렸다. 또 그런 사실을 알게되니 그녀의 절박한 마음이 조금 이해 되
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휴정은 현재 자신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온갖 수단
을 동원해도 통하지 않았으니 새로운 무언가가 없으면 다 소용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이 수녀의 도움이라도
받아볼까 했으나 느껴지는 게 있어 세차게 고개를 휘젓고 말았다. 그는 잠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봉법은
분명 전수받고 싶었다. 봉법이 유유하고 부드러우며 끊김이 없고 가벼운 것이 매우 맘에 들었던 것이다. 만일 전수
받지 못한다면 그녀를 이용해 휴정을 이기고라도 싶었다. 그러나 수녀는 봉법을 전수해주려 하질 않고 그녀의 도움
으로 휴정을 이긴다면 그가 비웃을 것이라 생각하니 방책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수녀가 말했다.
[어떻게 해? 내가 그를 이겨 줘?]
그는 그녀의 말투에 조금 건방진 기가 들어있는 걸 느끼고 조소했다.
(좋아. 그냥 그녀에게 휴정 화상을 이겨달라고 하자. 소림 무학은 만 무학의 근원이랬으니 휴정 화상이 질 리가 없
겠지. 그리고 나는 구경만 하는 척 하다가 틈이 나면 공격하는 거다. 저 유루봉법인가 하는 것이 맘에 들긴 하지만
그건 나중을 노려야겠다.)
진양은 속으로 이렇게 저렇게 꿰어 맞추며 곧 입을 연다.
[좋아. 네가 그를 이겨주면 나는 금녀의 소식을 말해주지.]
[좋아! 그는 어디 있지?]
[이 산에 있는 대명사.]
진양은 그녀의 질문에 대천산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잠시 후 그들은 신형을 날려 대천산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진양은 수녀를 먼저 골짜기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자신은 슬금슬금 대명사로 향했다. 주변이 서서히 어두컴컴해지는
게 저녁은 다 된 듯 했다. 대명사에 다다라 보니 마당엔 아무도 없었는데 조금 기다리자 잠시 후 느긋하게 나오는
휴정을 볼 수 있었다.
[웬일로 벌써 왔느냐?]
[다시 도전하려고요.]
진양은 대답하자마자 빨리 따라오라는 듯 곧장 몸을 돌려 먼저 골짜기로 사라져버렸다. 그에 휴정은 어리둥절한 표
정을 지으며 그 뒤를 밟을 수 밖에 없었다.
진양과 휴정이 골짜기에 도착해보니 과연 그곳에는 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휴정이 물었다.
[저 여시주는 누구냐?]
[저 대신 화상과 싸울 사람이에요.]
휴정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진양이 아, 하고 소리내며 그에게 말했다.
[오해하진 말아요. 그녀의 힘을 빌리려는 게 아니라 그녀가 화상을 누르겠다 했어요. 저는 옆에서 구경이나 할게요.]
[좋을대로 하거라.]
휴정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수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들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진양의 말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 안엔 교묘히 수작을 부린 흔적이 엿보이지 않는가. 그녀는 진양이 비록
간특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이 얼마나 센 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보며 화상과 무
슨 일이 있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되든 간에 그 화상을 이겨야 금녀의 소식을 얻을 수 있다.
[자, 빨리 하죠.]
[시주 뜻대로 하게나.]
일단 휴정의 말이 떨어지자 수녀는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즉각 봉을 휘둘러 대번에 휴정의 천령개를 후
려치려 했다. 그에 휴정은 일순간 안색이 변하는가 싶더니 문득 표정을 굳히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그러나 과연 한
번 움직인 봉은 절대 멈춰지지 않을 듯 돌려지고 돌려지며 사방을 복잡하게 어지럽히더니 어느새 휴정의 안면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허! 이건 유루봉법?)
휴정은 그녀의 봉이 멈춰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게 혹 수녀의 유루봉법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확실히 소
문에 희세의 마두 금수쌍녀 중 수녀는 흐름을 멈추지 않는 봉법을 펼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그녀를 완전히 제압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 이젠 내 차례일세.]
그는 아주 가볍게 좌수를 휘저었다. 그러자 수녀는 일순 노도(怒濤)와 같은 무시무시한 기가 밀려옴을 느낄 수 있어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순간 작은 폭발음과 함께 콰직,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본 수녀는 금방 안색이 대변하
고 말았다. 자신의 뒤에 있던 고목 한 그루가 뿌리 채 뽑혀서 나자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 중은 보통 중이 아니었구나!)
휴정이 방금 펼친 수법은 소림 72절예(七十二絶藝) 중 하나로 꼽히는 발산장(拔山掌)으로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수녀는 금녀의 딸로서 그녀를 따라 천하를 주유했었는데 소림사와는 부딪친 일이 적어서 그 수법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이 무공에 소림의 무공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중이 이 정도의 무공을 갖추었다면 소림사 중
일 것이 뻔하다. 그녀는 다시 달려들어 그의 안면을 향해 봉을 돌렸다.
[소용없네.]
일순 중후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 찰나, 갑자기 휴정의 왼손 검지가 그녀의 오른 어깨 결분(缺盆)혈로 파고
들었다. 그 속도는 매우 빨라 먼저 봉을 휘두른 수녀보다도 훨씬 빨랐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이대로 봉을 휘두를 수
가 없음을 깨닫고 전(轉)의 요결로 봉의 중심과 회전 방향을 바꾸며 슬쩍 어깨를 틀었다. 허나 결분혈로 날아든 건
사실 허초였다. 갑자기 휴정의 일 지(指)가 변초하며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그녀의 인영(人迎)혈 날아드는 게
아닌가. 수녀는 사색이 되며 급한 대로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자 휴정의 일 지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을 살짝 긁고 지나가게 되었다.
(큰일날 뻔했구나!)
그녀는 마치 뒤로 날아가듯 몸을 날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은 이 휴정이란 화상을 쉽
게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허나 제 어머니의 소식을 알려면 이겨야만 하니 참 난감할 따름이다. 그녀는 일단 함
부로 뛰어들지 말고 천천히 승부를 가려야겠다 생각하곤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안전하게 낙법했다. 그런데 낙법하고
휙, 휴정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기호(氣戶)혈이 뜨끔해지며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왼손을
약간 펼친 채 살며시 미소하고 있는 휴정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부르짖었다.
[이럴수가!]
그녀는 어느새 점혈(點穴)을 당한 것이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의 손가락을 피하기 위해 뒤로 몸을
날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건 맞다. 그러나 그 사이의 시간은 지극히 짧았기 때문에 인영혈을 노렸던 그 수법마
저도 허초가 아닌 이상 자신의 혈도를 제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거리까지 있었는데 지풍이 아
니면 혈도를 제압할 수 없다. 그러자 그녀는 번쩍 뇌리를 스치는 게 있어 비명 지르듯 소리쳐 물었다.
[서, 설마 방금 내 인영혈을 노린 것도 허초?]
휴정은 미소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는 혹시나 했던 것이 맞아떨어지자 안색이 딱딱이 굳고 말았다. 한편
이를 지켜보는 진양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었다. 휴정이 본래 저렇게 대단했는가 싶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상
황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인영혈로 날아드는 손가락을 피하여 몸을 뒤로 날리는 사이 이미 휴정은 여유있게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몸을 한 바퀴 돌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갑자기 왼손 중지를
튕겨 그녀의 혈도를 제압한 것이다. 그는 그 수법이 참으로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속도도 평범한 지풍 날리기와는
크게 다른 듯 했고 맞는 순간 그녀의 몸이 세차게 꿈틀거린 걸로 보아 위력도 대단하리라 생각했다. 그 때 수녀가
휴정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그 지법은 대체 뭐냐?]
그녀는 휴정에게 더 예를 갖추지 않고 말했다. 그러자 휴정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이건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고 한다네.]
[흥. 역시 소림사의 땡중이었군!]
그녀는 혈도가 제압된 게 억울하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악을 썼다. 헌데 휴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여시주의 강호 별호(別號)는 어떻게 되는가?]
[알 필요 없다!]
그의 물음에 수녀는 앙칼지게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양은 생각했다.
(그녀의 별호는 수녀로 아주 악독한 마녀로 불리지. 내가 보기엔 그리 악독하게 안 보이지만 어쨌건 건방지긴 하니
까.. 아차! 그리고 보니 시기를 놓쳤구나.)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본래 그녀와 휴정이 싸움을 벌이는 사이에 기습하여 그의 혈도라도 제압한다면 이긴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리 하려 했는데 그들의 무공에 도취(陶醉)되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자 수
녀를 데려온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휴정이 수녀에게 말했다.
[별호는 수녀라 하겠지?]
[흥. 과연 제법 견문이 있었구나.]
수녀는 비소하며 사실을 인정했다. 그의 무공 수준으로 보아 이미 자신의 봉법을 알아봤으리라 생각했었다. 실상 그
녀의 봉법이 물 흐르듯 끊김없이 부드럽다는 건 많은 강호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에 한(恨)이 맺힌 금
녀를 따라 강호를 돌아다니며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복면을 쓰고 일을 벌이기 일쑤였다.
금녀는 그것을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으나 그녀는 본래부터 악행을 저지르는 건 원하지 않았었으니 어쩔 수 없었
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쓰는 봉법만 잘 알려진 것이다. 휴정은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회개(悔改)하게나. 한순간의 실수로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네. 여시주는 아직 젊으니 지금이라도 회개한다면
필시 덕을 쌓고 세존(世尊)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 것일세.]
휴정의 음성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라.]
그녀가 냉소했다. 허나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휴정은 놓치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건 제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이지.]
[누, 누가 마음이 흔들렸다는 거냐!]
[아미타불.]
휴정은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나는.. 모른다. 나는 어머니를 따를 뿐.]
[원하지 않는 악행은 하지 말고, 어머니도 잘 회유시켜보게.]
그녀가 안색이 어느새 창백해지자 휴정은 좀 더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슬쩍 지풍을 날려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몸이 자유로워진 수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뭐라고 한들 어쩔 수 없어.. 너희들이 어찌 내 비운(悲運)을 알겠느냐?)
그녀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자신의 슬픔을 이 중 따위가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어
느새 벌게져버린 눈으로 휴정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네깟 중놈이 어찌 내 마음을 헤아리겠느냐?]
[허어! 방황하는 자, 어이하여 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가.]
휴정은 크게 탄식했다. 그 음성은 고요하고 평안하여 실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만했다. 과연 그녀 역시 가슴
이 부르르 흔들림을 느끼고 더듬거렸다.
[나, 나는.. 나는.. 어머니를..]
[후회는 늦으면 늦을 수록 안타까운 법.]
수녀의 동공은 어느새 풀려있었다. 그녀는 휴정의 <후회>라는 말에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옛 일들
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처녀의 모습도 보였고, 열 살도
안된 아이가 금녀의 손톱에 갈기갈기 찢겨지는 모습도 보였다. 밤마다 꿈속에서 나타나는 귀신들도 보인다. 남녀노
소 가릴 것 없는 귀신들이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제 어머니의 뜻
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난.. 난 잘못한 게 없어. 그저 어머니의 명만을 따른 거야! 정말이야.]
그녀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져 허공에 대고 악을 질러댔다. 진양과 휴정이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후회는..]
휴정이 입을 열며 뭐라 말하려했다. 그러나 수녀가 매섭게 그를 노려보며 버럭버럭 악을 써댄다.
[네까짓 게 뭘 알아? 말해봐! 뭘 알아?]
그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그냥 나오는 데로 지껄이는 것이다.
[대체 뭘 아느냔 말이야! 내 슬픈 운명과 어머니의 한 맺힌 운명을 네까짓 중놈이 도대체 어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단 말이냐? 겪지도 보지도 못한 네가 정녕 알 수 있느냐? 또 그렇게 나에게 설교하는 너는 얼마나 잘났느냔 말이
다! 네놈이 그리도 깨끗하냐? 난 알고있다, 네 속내를.]
분노를 했든 슬픔을 느꼈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걸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녀도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광기
어린 눈빛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운명이란 걸 생각하니 자꾸 슬픔이 복받쳤
던 것이다. 그 모습에 진양은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너는 어머니라도 남아있지.. 나는 이제 어머니도 남아있지 않다. 나와 어머니는 10년동안 서로에 의지하며 개돼지
처럼 구차하게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죽고나니 내 삶은 진짜 개돼지의 삶이나 다름없었지. 살고자 했던 도둑질
때문에 더러운 인간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구걸하다 망할 거지새끼들에게 집단 구타도 당했어. 다행히 사부님의 보
살핌으로 이리 살 수 있게 됐고 또 동문이 있어 잠시 행복한 시간도 있었지만 파문 당해버린 나는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아는 이들까지도 없다..)
어쩌면 그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과 같다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비분에 가득 찬 악을 듣고는 자신의 비참하고
굴욕적이던 과거가 생각나 왠지 그녀가 더욱 불쌍히 여겨지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자신의 신세 또한 처량하게만 느
껴졌다. 이렇게 되니 그녀에 대한 약간의 악감정은 물로 씻은 듯 없어지고 말았다.
헌데 기괴하게도 휴정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의 말에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정직되어버린 것이다. 눈은 왕방울
만하게 커져 있고 입은 딱 벌어져 완전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에 수녀가 눈을 빛낸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너의 추잡하기만 했던 그 일을!]
[어.. 어떻게.. 네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
휴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듯 온몸도 미세하게 떨고 있었고 얼굴을 따라 땀만 주르륵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 수녀는 흥, 하고 비소했다.
[그것까진 알 거 없다. 하긴 네놈만 그런 것도 아니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지 않겠느냐?]
[너.. 너..]
휴정은 이젠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심히 우습게도 사실 이건 절묘한 우연의 조화였다.
휴정은 올해 지명(知命), 오십 세로 스물 둘의 나이에 출가했던 사람이었다. 젊을 적부터 무학에 깊이 심취했다가
소림사의 어느 선사(禪師)와의 만남으로 깨달아지는 게 있어 출가하게 되었다. 그는 40세를 넘길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도했다. 허나 운명의 장난인지 차가운 바람부는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왕중양이 세운 전진교가 종조(宗
祖)로 받드는 여동빈의 검법, 천둔검결(天遁劍訣)이 새겨진 비급을 아주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펼쳐보지 않고 전진교에 갖다주는 방법을 생각했으나 여동빈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었고 그의 천둔검법은 실로 고
절(高絶)하다는 걸 상기하게 되어 크게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자신도 출가 전에는 무학에 깊이 심취했던 호탕하
고 젊은 강호인이 아니었던가. 그만큼 천둔검법의 유혹은 대단하였기에 그는 결국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비급
을 가진 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은밀한 곳에서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 보아도 천둔검결에 담긴 뜻은 도무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 이 년이 흐르고 점차 시간이 흘러 순식간에 지명의 나이에 이르고 말자 그제
야 깨달아 지는 게 있었다. 그건 천둔검결의 오묘한 뜻을 깨달은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이다.
[선행선답(善行善答), 악행악답(惡行惡答)이라! 이 말의 겉 뜻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건만 속에 담긴 참된 진실은
몸으로 겪고야 깨닫는구나!]
그는 그 즉석에서 비급을 불태워버렸다. 신선의 무(武)는 어차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괜히 놔두
었다 후일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안타까운 일이라도 일어날까 불태워버린 것이었다. 만일 휴정이 그 비급을 불태우
지 않았다면 천둔검법이 후세까지 전수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그는 다시 소림사로 돌아가고 싶었
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면목이 없어 감히 가지 못하고 다른 절을 찾던 중 우연히 대명사를 발견하고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했던 일은 오로지 그 자신만이 아는 일로서 가슴속엔 회심(回心)이 크게 뭉쳐있었는데 그녀가 그 일을 안다하
며 비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나 실지로 수녀는 그런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흥. 무슨 일인지 내가 어찌 알겠어? 다만 본래 인간은 모두 한 가지씩의 큰 잘못이 있기 마련이지. 그 때문에 중이
나 도사가 되는 경우도 많고. 너도 그 부류 중 하나겠지.)
바로 그랬던 것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금녀를 따라 악행을 일삼으며 실상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군자(君子)의
감춰진 과거와 속내, 죽음 두려워하여 동료를 파는 인간, 힘없는 자만 골라 괴롭히는 악인 등등. 그렇기 때문에 인
간은 반드시 추잡한 과거가 있다 믿게 되었고 이번에도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것 뿐인데 이런 우연이 발생한
것이었다.
휴정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슴을 한참에 걸쳐 추스르고는 최대한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나도 크게 반성하고 있네..]
[그래, 이젠 나를 죽이려 들겠지? 네 추잡한 과거를 알고 있으니까.]
[아닐세!]
그녀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냉소하자 휴정은 부정했다.
[선행선답, 악행악답의 진리를 모두 깨달은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네. 다만..]
그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주게.]
[창피하지?]
[…….]
휴정은 더 말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수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곧 아차, 하며 진양에게 말
했다.
[제압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됐으니 어머니가 계시는 곳을 말해.]
[잠깐 기다려 봐.]
진양은 그녀의 말에 간단히 대답하곤 휴정에게 미소를 날렸다.
[화상.]
[…….]
화상은 반응이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전혀 미동도 없었다. 진양이 한번 더 부른다.
[화상.]
하지만 휴정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자 진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상!]
[말해보거라. 어떤 무공을 원하는지.]
휴정은 결국 눈도 뜨지 않은 채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진양이 뭘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다만 제자가 아니
니 함부로 전수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던 것인데 자신도 한 가지 조건을 생각해내고 대답한 것이다. 진양은 금방
입이 찢어져 당당히 소리쳤다.
[탄지신통!]
[좋다. 전수해 주겠다. 허나 그 전에 약속할 것이 있다.]
휴정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말투에 엄숙한 기운이 들어있어 진양은 재빨리 물었다.
[뭐죠?]
[화연철과 금수쌍녀에게만 쓰라.]
순간 수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휴정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진양이 근
래 겪었던 일들을 전혀 모르는데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좋아요!]
[계포무이낙 후영중일언(季布無二諾 候瀛重一言).]
갑자기 그의 입에서 난데없는 소리가 나왔다. 진양은 순간 어리둥절해져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지만 수녀는 그것이
뭔지 알았다. 이는 본래 당대 위징(魏徵)의 술회시(述懷詩)에 있는 한 구절로 <계포는 일구이언 하지 않았고, 후영
은 말 한마디를 중히 여겼다.>라는 말이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과 다를 바가 없다. 진양도 곧 깨달은
듯 했다. 분명 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지만 멍청하진 않은 터라 대강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힘
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너라.]
휴정은 그제서야 눈을 뜨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골짜기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진양이 서둘러 그를 따르려 하자
수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이봐!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부터 빨리 말해.]
[잠깐만 기다리라니깐. 금방 오도록 하지.]
[너..]
수녀가 발끈해 뭐라 말하려는데 진양은 벌써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일순 의심이 들었으나 제발 아
니기를 빌며 곧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