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章. 간특한 소년과 오만한 소녀 3
이렇게 되어 진양은 휴정으로 소림의 72절예 중 하나인 탄지신통을 전수받게 되었다. 이 지법은 말 그대로 손가락
끝에 기를 모으고 그것을 튕겨 지풍을 날리는 수법이다. 평범한 지풍에 비하면 좀 더 빠르고 위력이 강했다. 진양은
휴정이 전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때문에, 구결대로 힘을 모으고 원하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면 지풍이 날아간다. 다만 이를 수련하기 위해선
이해와 수련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 너는 일단 좀 전에 말했던 구결을 외우며 차근차근 수련하면 후일 높은 경
지에 다다르는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양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구결은 외웠다. 두어 번 듣고 연신 되새기니 금방 머릿속에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서두르면 아니 된다. 모든 무학이 그렇듯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는 법. 이를 잘 새기거라.]
휴정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다시 지그시 감았다. 더 할말이 없다는 뜻이다. 그에 진양은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이
탄지신통을 잘만 수련하면 화연철이나 금녀도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는 떠날께요. 탄지신통을 전수해 준 건 참으로 감사해요. 후일 만날 날이 또 있겠죠?]
이 말은 어찌보면 간단한 인사면서도 어찌보면 참으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뜻을 담은 말이다. 과연 휴정은 눈을
부릅뜨며 비장(悲壯)한 어투로 말했다.
[그 과거를 가지고 내가 죽을 때까지 닦달할 생각은 말거라. 탄지신통을 전수해준 건 그동안의 네 모습을 보고 전
수해준 것이지 절대로 너의 협박에 굴복해서가 아니다.]
[뭐라고요? 그럼 내가 협박을 했단 말인가요?]
진양도 두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자신도 이미 협박과 같은 행동을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휴정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어쨌든 전수한 건 나고 너는 받았을 뿐이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더 따지지 않겠어요.]
진양은 냉소했다. 곧 말을 잇는다.
[그럼 떠날게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금방 그곳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휴정은 조용히 중얼거
리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앞날이 결정되는 법이지. 아미타불.]
진양은 천천히 수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녀를 만날 것을 생각하니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
녀는 자신을 보면 필시 금녀의 행방을 물을 터인데 그가 무슨 수로 금녀의 행방을 알고있단 말인가. 그는 애당초
금녀가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다만 수녀의 도움을 받고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발
을 옮겨 수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던 것이다. 자신이 뭐라 말한다 한들 그게 사실인지 어찌 알랴.
그는 편한 마음으로 덩실덩실 뛰어 그녀가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역시나 수녀는 그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자! 어서 말해.]
[서둘지 좀 말아.]
진양은 느긋이 대답하며 옆의 바위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수녀가 다시 다가와 묻는다.
[너 설마 모르는 건 아닐 테지?]
[흥. 마음대로 생각해. 나를 믿지 않는다면야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겠지.]
그는 코웃음치며 간단히 수녀의 의심줄을 일검에 잘라버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며 말했다.
[미, 미안해! 그럼 어서 말해 줘.]
[금녀는 청성산으로 갔어.]
그는 더 끌지 않고 대답했다. 그가 굳이 청성산이라 한 것은 화연철과 금녀가 마치 오래 전부터 싸워온 듯 했기 때
문에 일부로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과연 그녀는 뭔가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손뼉을 쳤다.
[아! 좀 더 기다릴 걸 그랬구나.]
[무슨 소리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진양은 그녀의 혼잣말에 궁금증이 연기 피어오르듯 올라 슬쩍 물었으나 그녀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진양은 놀라 소리쳤다.
[뭐야, 가려고?]
[그럼 당연하지. 난 빨리 어머니를 만나야 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허나 진양은 왠지 그녀와 떨어지기가 싫었다. 그건 어쩌면 아까 느꼈던 동병상련
의 정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투는 분명 자신을 멸시하던 자들과 매우
흡사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밉지 않았다. 그는 슬금 마음이 동하는 부분이 있어 힘차게 외쳤다.
[나도 같이 갈래!]
한편 금녀는 수십 일에 걸쳐 청성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그녀의 움직임은 더욱 더 은밀해졌다. 여기 오
기까지도 그랬지만 함부로 대로에 나서는 일이 없어졌고 주로 울창한 숲이나 뒤쪽의 절벽 등, 아주 험난한 곳으로
만 이동했다. 그렇게 청성파 본당의 뒤편으로 가 순 나무들 뿐인 어느 곳에 도착했다. 허나 그녀는 가볍게 탄식했
다. 본래 대천산에서 도망쳐 나와 곧장 청성산으로 향해야만 했지만 사방에 청성 도사들이 깔려 있어 채 반도 못
가고 크게 우회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제 딸인 수녀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 날짜보다 상당히
늦어져버렸다.
(령아(領兒)가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그 아이는 효심(孝心)이 깊어 크게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녀는 슬쩍 사방을 훑어보곤 아무도 없음을 알자 곧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숲은 그야말로 울창이란 말 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빽빽했다. 나무들이 약간의 거리만을 유지한 채 빽빽히 들
어섰으니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사방에선 독사 따위를 흔히 발견할 수 있어 이곳으로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금녀의 발은 매우 잽싸게 움직이며 아주 여유롭게 나무들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걸로
보아 이곳에 크게 익숙한 듯 했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숲을 통과할 수 있었
다. 헌데 숲을 통과했어도 주변엔 딱히 이상한 곳이 없었다. 그 주변은 여느 산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는데 그저 정
면에 까마득한 절벽이 있을 뿐이었다.
[령아야.]
그녀는 가볍게 중얼거리며 절벽의 오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절벽의 양옆으로는 비탈길이 있었는데 양쪽 모두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비탈길로 오르자 곧 사방이 수풀로 메워진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하지만 역시
여느 산의 공터와는 전혀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 수풀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풀과 덩굴
들을 슬쩍 헤치며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알고보니 그 뒤로는 자그마한 동굴 입구가 있었던 것이다.
동굴 안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다만 동굴의 천장이 낮아서 장한들은 허리를 굽혀야 겨우 돌아다닐 수 있을 듯
했다. 물론 금녀의 키는 그보다 더 작아 방해는 전혀 없었다. 그 안의 한쪽 구석에는 침상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있
었고 가운데에는 둥그런 나무 탁자와 헌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장식이 없었
지만 동굴이 그다지 크지 않아 조금도 공허(空虛)해 보이지는 않다. 금녀는 그 안을 둘러보며 수녀가 없다는 걸 알
면서도 노파심에 입을 연다.
[령아야.]
물론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귓전으로 파고드는 건 동굴 벽을 타고 사르르 울려 퍼지는 자신의 음성 뿐
이었다. 그녀는 수녀가 자신을 찾으러 떠났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방으로 청성파가 널리 깔려있는데 길(吉)보단 흉(凶)이 많겠구나.)
그녀는 상황이 별로 안 좋을 것이라 생각하곤 급히 몸을 돌려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동안 진양과 수녀는 함께 청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진양이 그녀와 동행하길 원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게 됐는
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어 쉽게 응낙할 수 있었다.
(분명 어머니는 청성산으로 향했겠지만 혹 사정이 있었는데 이 간특한 놈이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어. 만일 가서
못 만난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
그녀는 이제껏 봐온 진양의 행동으로 보아 혹시 거짓말일 수 도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동행을 허락하게 된 것이
다. 헌데 진양은 같이 가면서도 자꾸 걸음을 늦추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란히 가다가도 어느
새 뒤로 밀려나 천천히 걸어오니 수녀는 이해할 수가 없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빨리 가봐야 한단 말이야.]
[아! 잠깐만 기다려봐.]
그녀가 어찌 진양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녀를 따라가 금녀와 만날 때를 대비해 탄지신통을 조금이나마
빨리 익히려는 걸 말이다. 진양은 휴정이 말했던 구결을 하나하나 깊이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치를 십분 깨닫고 있었다. 그는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여 잠깐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옆에 큰 고목이 보였는데 그는 그 고목을 잠시동안 노려보더니 곧 운기를 시작하여 기를 쉽게 중충(中衝)혈로 모을
수 있었다.
[얍!]
그는 가볍게 기합을 내지르며 고목을 향해 중지를 튕겼다. 과연 손가락 끝으로 기가 맹렬히 튕겨져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아주 쉽네.)
그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저 평범한 지풍도 아닌 천하의 소림에 72절예 중 하나인 탄지신통이 그렇
게 만만할 리가 없었다. 중지로 튕긴 지풍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목표했던 큰 고목은 무슨 일
이 있었냐는 듯 어떠한 변화도 없었고 다만 그 고목에서 한참 떨어진 애꿎은 종려나무만 해를 보았다. 신통에 당하
는 순간 마치 살점이 떨어져나가듯 나무껍질이 와직,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수녀가 냉
소하며 말했다.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지. 아무튼 빨리 가자.]
진양도 그렇게 생각하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천산과 청성산은 본래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 수녀는 청성산을 자주 갔었던 듯 아주 빠르게 능숙하게 걸음을 옮기
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생각보다 이동이 빠르게 되어 그들은 수일 만에 청성산의 근방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데 거기서가 문제였다. 한참동안 잘 걷던 그들은 문득 언덕 위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급히 수풀 뒤로 몸을 숨
겼던 것이다.
(청성파!)
과연 앞의 언덕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세 명의 도사는 백색의 도복에 허리에는 푸른색 띠를 두르고 일자건(一字巾)
을 쓴 젊은 도사들로 더 볼 것도 없이 청성의 도사였다. 진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청성산으로 향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 만나고 마는군.]
그 말을 들은 수녀가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청성산 주변에도 널렸군.]
[무슨 말이야?]
진양이 궁금한 듯 묻자 수녀는 조금 귀찮았지만 곧 술술 대답해줬다.
[저들은 지금 어머니와 내가 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널려있는 거야. 우리는 항시 붙어 다녔
는데 저번에 화가 도사 놈의 공격으로 잠시 떨어지게 됐거든. 저들은 필시 어머니와 나를 찾아 공격하려는 속셈이
지. 비열한 놈들..]
[흥. 청성 개도사들은 원래 비열했어.]
화연철과 백씨 형제들과의 기억으로 청성 도사들에 대해선 나쁜 인식을 가진 그는 그녀의 말에 비소하며 맞장구쳤
다. 그러자 수녀는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개도사라는 비유가 매우 재미있다 생각했다.
[그래, 비열해. 아주 개도사지.]
[맞아. 개도사.]
그들은 아주 신이 났다. 그저 서로 맞장구치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곧 상황을 깨달은 수녀는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몇 일 전 내가 이곳을 지날 때는 없었고 이곳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널려있었어. 이젠 청성산에도 널려있
는 걸 보니 어머니께서 이곳으로 오려다 행적이 발각됐나봐.]
그녀는 상황이 이렇자 진양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 생각하게 되었다. 금녀가 대천산에서 청성산으로 넘어오다
가 발각되어 많은 청성의 도사들이 이곳으로 돌아와있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진양의 말은 분명 거짓말이
었으니 자연 금녀의 행로에도 다름이 있었다. 한편 진양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진실로 믿었다고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그녀 몰래 미소하며 말했다.
[그럼 이곳 주변은 저들 뿐 아니라 수많은 개도사들로 쫙 깔렸겠군.]
[그렇겠지. 정말 개도사들로 가득 할거야.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그곳으로 가야해.]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양이 다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저 개도사들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고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우리 모습이 다 보일 것 같은
데..]
[그보다 한번 들키면 사방에서 개도사들이 몰려 올거야. 어떻게든 저들을 단번에 때려죽여야 해.]
그들은 자꾸 개도사, 개도사 하며 작전을 짜고 터지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곧 수녀는 사방을 둘러보며 어떻게든 그
들에게 접근할 방도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서있는 그 언덕의 위치는 실로 교묘하여 위에선 모두 보일
듯 하기 때문에 도저히 나설 수가 없었다. 그 때 진양이 그녀의 옷깃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하. 그래, 좋은 방법이 있어.]
[뭔데?]
그녀가 눈을 휘둥그래 뜨며 묻자 진양은 그녀에게 소근소근 뭔가를 설명했다.
잠시 후 문득 그들이 숨어있던 곳에서 연신 부시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두런대는 말소리도 들렸다. 그걸 감지한 청
성 도사들은 서로 눈짓하더니 언덕에서 번쩍 하고 뛰어내렸는데 그 때 막 두 명의 소년, 소녀가 나오고 있었다. 둘
다 매우 남루(襤褸)한 차림이었고 얼굴은 구정물에 얼굴을 쳐박기라도 했는지 더러웠다. 허나 어딜 가든 이런 아이
들은 있기 마련이고 또 지금은 금(金)과의 전쟁으로 더욱 피폐(疲弊)해져서 그들의 행색은 여느 소년, 소녀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어? 여기도 웬 아저씨들이 있네.]
그 중 소년이 청성 도사들을 발견하고는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이에 소녀가 맞장구친다.
[정말 그렇다! 오늘 무슨 날인가봐. 우리 구경하다 갈래?]
[그래, 그래!]
그들은 서로 헤헤 웃으며 저들 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청성 도사들은 하나같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썩 사라져라. 이곳은 위험하다.]
[왜요?]
[썩 사라져!]
도사는 거세게 호통쳤다. 그들 때문에 괜히 언덕에서 뛰어내려 왔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러자 소녀가 입을 삐
죽거렸다.
[괜히 화 낸다. 우린 그냥 가자.]
[그래.]
그들은 자꾸 중얼거리며 도사들 앞으로 다가가다 도사들이 비키지 않자 멈춰서며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 길로 갈
것이니 비키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한 도사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자자. 우린 다시 올라가기나 하자.]
그런데 도사들이 그 소년, 소녀에게서 막 등을 돌려버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소년의 눈이 번뜩이더니 곧 빠르게
달려와 한 도사의 허리 명문(命門)혈을 맹렬하게 강타해버렸다. 소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소년이 몸을 움직이
기가 무섭게 신형을 날려 양손으로 두 도사의 뒷목을 잡아 뜯어버렸다. 순식간에 세 명의 도사를 즉사시킨 것이다.
[흥. 개도사들의 최후다.]
그들은 즉사한 도사 셋을 바라보며 함께 냉랭히 중얼거렸다. 그리곤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진양과 수녀였던 것이다. 수녀는 아까 숨어있던 수풀 뒤로 가 제 봉을 들고 오더니 곧 가지런히 놓
여진 흰 이를 드러내며 진양에게 말했다.
[참 재미 있는 작전이었어. 흙에 물을 뿌리고 머리를 박는 건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헤헤. 나중에 다른 개도사들을 만나면 더 좋은 수법을 보여줄게. 기대해!]
진양도 히죽 미소하며 금방 건방을 떨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히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은 어느새 청성산의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는 도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수녀가 말한다.
[입구에는 개도사들이 없지만 어디선가 입구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입구로는 절대 못 들어갈 거야.]
수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진양을 보며 물었다.
[너 경공은 어때?]
[내 자랑거리 중 하나가 경공이야.]
진양은 목을 뻣뻣히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그러자 수녀는 씨익 미소하더니 따라오라고 하며 입구의 반대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잠시 조심스레 이동하자 옆에 험난한 길이 보였다. 아니, 그건 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다
니기엔 무리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수녀는 짧게 호흡하더니 먼저 경공
을 펼치며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따라와!]
그녀의 외침에 진양도 즉각 경공을 펼쳐 그녀를 따랐다. 과연 그 길은 정말 험난했다. 오르는 길은 절벽처럼 크게
기울어져 있었는데 다행히 찰싹 붙어있는 바위 덩어리들과 삐죽삐죽 튀어나온 굵은 나뭇가지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
게 경공을 펼칠 수가 있었다.
(그녀의 경공이 대단한 걸? 나보다 더 빠르겠어.)
그는 자신의 경공을 극한으로 펼치며 아무리 빠르게 달려 올라도 그녀와의 거리를 조금도 줄일 수 없자 크게 감탄
했다. 일면으론 오기도 치솟았다. 경공에선 자신도 꽤 제법이라 믿고 있었는데 또래의 소녀도 잡지 못하자 그런 것
이다. 그는 점점 사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와의 거리는 줄일 수가 없었다. 조금 줄어드는가 싶으
면 어느새 다시 벌어져있었다. 결국 진양은 한번 더 크게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잠시동안 달려 오르
자 곧 평평한 지대로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진양이 올라와 보니 수녀는 이미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누가 있냐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아니. 이곳은 사실 청성 도사들이 웬만해선 잘 오지 않는 곳이지만 혹시나 해서.]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가벼운 일갈과 함께 십여 명의 도사들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진양은 순간 번뜩 깨달아지는
게 있어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차! 이 개도사들은 멍청이가 아닌데 어찌 이런 험난한 길을 지키지 않고 있었으랴.)
하지만 깨달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사방을 도사들이 둘러싼 것이다. 도사들은 제각기 검을 꺼내들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뒤의 절벽을 뺀 삼면을 둘러쌌다. 진양과 수녀는 순식간에 궁지로 몰리고 말게 되었다. 수녀가 얼굴을 씰
룩이며 소리친다.
[여기도 있었어!]
[흥. 가소로운 것. 청성파가 어찌 청성산의 지리를 모르겠느냐? 금녀라면 몰라도 너 수녀는 분명 뒷길로 들어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냉소하는 자는 다름아닌 채문이었다. 실상 채문은 수녀를 본 적이 없다. 다만 그녀가 들고 있는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봉은 충분히 그녀가 수녀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진양이 소리친다.
[망할 개도사들아. 그녀들이 서로 떨어진 틈을 타 각개격파를 하려하고 붙어있을 때는 겁나서 다가서지도 못하지?
난 너희들이 얼마나 비열한지 잘 알고 있어!]
그 말에 채문은 일순 발끈하여 진양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개도사들이 내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그가 냉소하며 대답하자 채문은 콱 인상을 구기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말 안 해도 상관없다. 금수쌍녀와 상관이 없다면 썩 꺼져라!]
[나는 수녀와 상관이 있지.]
그는 수녀를 힐끗 바라보곤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이에 채문은 눈에 기광을 발했다.
[그럼 그녀를 돕겠다는 건가?]
[넌 참 멍청해. 왜 자꾸 뻔한 걸 묻지?]
진양은 조소를 흘렸다. 본래 그는 청성 도사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수녀가 혼자 싸우다 당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도우려는 것이다. 그는 맞붙으면 그들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연신 빈정거리고 있었다. 허나 채문은
이를 악 물어 화를 누르고는 고개를 반쯤 돌려 뒤의 도사들에게 명령했다.
[학익교유, 철연사영!]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도사들의 신형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둘씩 붙은 채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
어져 있었으며 채문은 정면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점한 위치는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도 진양과 수녀의 퇴로를 막는 셈이었다. 진양은 이렇게 되면 크게 위험할 것임을 느낄 수 있어
소리쳤다.
[잠깐!]
그 외침에 채문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조용히 진양의 입을 바라보았다.
[사천 최고의 문파라는 청성파는 본래 이런 협공을 즐겼나?]
역시나 진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모욕이었다. 청성 도사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렇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비
꼬는 기가 다분히 담겨진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채문은 더 크게
흥분한 듯 얼굴이 매우 벌게져 있었다.
[너.. 너..]
[흥. 얼굴이 벌게지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진양이 비소하며 그의 화를 돋구었다. 화가 나 벌게진 얼굴을 창피해 벌게진 얼굴이라 말한 거다. 물론 전자(前者)
가 사실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를 비웃어 상황을 조금이나마 좋게 해야만 했다. 그는 곧 도사들 모두에게도
까딱까딱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가 두려운 것이냐? 하기야 감히 이길 자신이 없겠지. 청성파는 비열하게 싸울 줄만 말지, 정정당당히
싸울 줄은 모르니까.]
[닥쳐라!]
채문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버럭 호통쳤다. 그의 잘생긴 수염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가.. 감히 청성이 비열하다는 망발을 하다니! 내.. 내..]
그는 본래 말솜씨가 형편없고 성격이 불같다. 그래서 심하게 흥분하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다가 결국
엔 출수(出手)하는 식이었다. 지금도 진양이 자꾸 모욕하고 비꼬자 화가 치밀어 심하게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이
에 진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휴! 내.. 내.. 내, 그리고 도대체 뭐야? 내 비열함은 사실이라고?]
채문은 안면 근육이 다 꿈틀거릴 만큼 흥분하고 말았다. 결국엔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악을 써댄다.
[망할 놈! 내.. 오늘 너를 죽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흥. 날 죽일 수는 있겠지. 개도사들이 멍멍 짖으며 개떼처럼 몰려드는 건 무서우니까.]
진양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고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저 십여 명의 도사들이 몰려들면 이길 가망이
란 일 리(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말은 그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과연 채문은 쉽게 말려들
고 말았다.
[너.. 좋아! 너희 둘이 감히 나를 이긴다면 나와 여기 내 제자들은 더.. 절대로 손을 쓰지 않겠다!]
[좋다!]
진양은 혼쾌히 대답하며 슬쩍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건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였다. 기실 채문이 저렇게까지 흥
분하리라고 처음부터 짐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수로 소수를 위협한다 비웃으면 뭔가 달라질 수 있다 생각하
고 그런 것인데 채문의 불같은 성정이 한몫하여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