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章. 간특한 소년과 오만한 소녀 4
채문은 금방 검을 뽑아 달려들어 진양에게 먼저 공격을 퍼부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붉게 충혈된 눈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진양과 수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진양은 급한대로 함종권법을 펼쳐
가며 맞섰고 수녀는 잽싸게 채문의 등뒤로 돌아가 유루봉법을 펼쳐 앞뒤로 그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이 개도사는 나를 죽이려 날뛰고 있어. 아차하는 순간 내 목숨은 사라질지도 몰라. 수녀가 잘 도와주어야 하는
데….)
진양은 발을 열심히 놀려 그의 검을 피해다니고 있었다. 채문의 검법은 청성파의 여타 무공처럼 역시 부드럽고 쾌
속했는데 진양의 경공도 경공이려니와 수녀의 봉이 자꾸 그를 방해해 진양은 잠시동안 안전히 피해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채문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비켜라!]
채문이 일순 대갈하며 검을 맹렬하게 뒤로 휘둘렀다. 그 검은 빠르게 수녀의 목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반격에 놀란 수녀는 급히 봉을 돌려 그의 팔꿈치 앞에 봉 끝을 갖다댔다. 이렇게 되니 채문이 검을 그대로 휘두른
다면 그녀의 목에 검이 닿기도 전에 먼저 팔꿈치를 얻어맞고 말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채문은 감탄하면서도
팔꿈치를 가볍게 치켜들고 검을 횡으로 그어올렸다.
[앗!]
수녀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황급히 허리를 꺾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완벽히 피하지는 못하고 찰랑거리던 머
리카락이 일부가 싹둑 잘려나가고 말았다.
(과연 용가와 화가의 사제답다!)
수녀는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감탄하고 말았다. 실상 채문의 이번 공격은 뛰어나기 짝이 없었다.
수녀가 봉을 돌려며 봉 끝을 채문의 팔꿈치에 가져가 검의 진격을 막는 훌륭한 수를 펼치자, 그는 팔꿈치를 살짝
쳐들고 검을 횡으로 올려 긋는 식으로 기막히게 변초해버려 하마터면 얼굴에 흉터가 날 뻔한 것이다. 열 다섯의 소
녀긴 해도 어쨌든 여자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 횡으로 흉터가 생길 뻔했는데 어찌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
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스스로 제법 미모가 뛰어나다 생각하는 그녀니 감탄도 감탄이지만 그보다 더 두려움이 치
솟을 수 밖에 없었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진양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가 뒤에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멍청히 지켜보기만 하자 진양은 순식간에 위기에 몰리
고 만 것이었다. 채문의 검은 빠르게 그의 요혈로 날아들었는데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한편 수녀는
그의 외침에 금새 고민하게 되었다.
(어떻하지? 그는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개도사의 손에 당하고 말 거야. 하지만..)
하지만 한번 솟은 두려움은 그의 다급한 외침으로 자꾸 더 솟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얼른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갑자기 들려온 그의 욕지거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진양의 허벅지는 채문의 검에 의해 상처를 입은 듯 했다. 다
시 그의 입이 열리며 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 씹어먹을 개도사야! 개새끼도 종류가 있는데 정말로 넌 미친 개새끼에 속하겠구나! 이러다 날 죽이면 청성파의
어떤 개새끼는 화가 나서 연약한 소년을 죽였다고 소문이 나겠지.]
순간 채문의 몸이 움찔거렸다. 채문이 비록 다혈질이라지만 나이를 먹고 수도하는 사람인 만큼 상황을 판단할 줄
안다. 무자비한 욕설이긴 하지만 진양의 말을 듣고나니 느껴지는 바가 있던 것이다. 어차피 그를 죽일 마음은 없었
지만 화를 참지 못하고 어린 소년을 이리 몰아세웠다니 조금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는 즉각 검을 내던지며 말
했다.
[내 잠시 화를 참지 못하고 망령된 짓을 했다. 하지만 넌 수녀를 잡는 일을 방해한다 했으니 권(拳)으로 상대해주
마.]
진양은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은 그렇게 코웃음이나 치고 있을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원래는 그를 비웃음으
로써 공격을 그만하게 하려 한 것인데 이리 됐으니 반만 성공한 셈이었다.
[자! 받거라.]
다시 채문의 공격이 들어왔다. 채문은 먼저 우수를 그의 가슴으로 빠르게 내질렀다. 그에 진양은 가볍게 몸을 틀며
그의 옆구리에 일 권을 가하려 했다. 수년간 함종권만 수련해온 대가라 할 수 있을만큼 그의 몸놀림은 완벽하고 정
확했다. 하지만 채문의 움직임은 그보다 더 완벽하고 정확했다. 그는 왼손을 펴 쉽게 진양의 주먹을 막아내곤 몸을
빙글 돌리며 그의 가슴을 세차게 걷어찬 것이다. 이건 회후퇴(回後腿)로 무영환퇴 수법 중 하나였는데 그 위력이 제
법이어서 진양은 자빠지자마자 심하게 기침을 토했다.
[네 실력은 나를 따를 수 없다. 포기해라.]
진양은 채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연신 기침만 해댔다. 그는 알고있다. 좀 전의 공격 때 자신의 대혈을 걷어차지
않았다는 것을. 허나 그런 일에 감사할 진양은 아니었다. 도리어 화가 치솟았다.
[날 무시하는 거냐? 차라리 제대로 걷어차서 병신을 만들지 왜 봐줘?]
그러나 채문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수녀에게로 돌려버렸다. 그러자 진양은 발끈해 기침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뒤로
달려들었다.
[이놈!]
채문도 화가 났다. 목숨을 살려줬는데도 감사하긴커녕 도리어 암습을 가하니 크게 혼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진
양이 달려들며 다시 일 권을 내뻗자 채문은 후단퇴(後短腿) 수법으로 다리를 뒤로 내밀어 그의 무릎을 가볍게 걷어
찼다. 그가 짧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그에 채문은 몸을 반만 돌려 빠르게 그의 왼쪽 귀 뒤에 완골(完骨)혈을
건드리려 했다. 이 혈은 잘못 건드리면 뇌가 진동되지만 살짝 누르면 단지 기절하기 때문에 그는 이 꼴보기 싫은
소년의 완골을 점혈해 기절시키려 한 것이었다.
[아..]
수녀가 가볍게 탄식했다. 채문이 그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진양을 돕지 않아 왠지 미안했다.
그녀는 그가 곧 기절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진양은 크게 다급했다. 아니, 다급하다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의 괴상한 퇴법에 걷어차여 휘청거리는 순간, 갑자기 두 손가락이 날아와 자신의 완골혈을 노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허나 자세가 이미 흐트러졌고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이젠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가 자신
을 죽이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지만 이대로 점혈을 당할 순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
로 오른손 중지를 튕겨 탄지신통을 시전했다. 아니, 무의식적이기 보다 발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헌데 이것이 실
로 말도 안 되는 우연을 만들었다.
갑자기 팍, 하는 둔탁한 음향이 들리더니 채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흡사 만취(漫醉)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
며 힘 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제자들이 아연실색(啞然失色)하여 부르짖었다. 수녀가 진양을 보니 그의 표정도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
데 곧 그의 표정이 싹 바뀌더니 벌떡 일어서며 대소를 터트린다.
[하하! 냄새나는 개도사. 내 탄지신통의 맛이 어때?]
[너.. 대체 무슨 수작을..]
채문의 눈은 비할 데 없이 커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몸을 부르르 떨며 힘이 쪽 빠지는 듯 우당탕 나자빠져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애송이가.. 탄지신통을..]
채문의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빛으로 가득했고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
다. 일단 일어서기라도 하려 했지만 힘이 없어 자꾸 축 늘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양은 하하, 통쾌한 웃음을 터
트렸다. 하지만 그도 어쩌다 채문이 이런 꼴이 됐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 때 도사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어, 어떻게 탄지신통을..]
진양은 채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연신 대소만을 터트렸다. 어떻게 그를 제압했는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일단 웃고
보는 거다. 도사들이 채문에게 묻는다.
[사부님! 어떻게 된 겁니까?]
[내.. 연액(淵腋)혈이..]
도사 한 명이 알아듣고 급히 손을 뻗어 점혈하자 채문은 가늘게 떨리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곧 평안해진 듯 했
다. 진양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연액혈을 맞았다는 걸 말이다. 실상 채문이 손을 들어 그의 완골
혈을 노릴 때, 거의 발악에 가까운 심정으로 시전한 탄지신통이 운이 좋게도 이변을 만들었다. 그 당시 진양의 오른
손은 옆으로 늘어져 무슨 수작을 부리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하지만 무작정 탄지신통을 시전하자 역시 엉뚱한 방
향으로 날아가고 말았는데 그게 우습게도 채문의 겨드랑이 밑 연액혈을 친 것이었다. 진양은 가볍게 추리하며 그저
좋기만 했다.
[대단하군. 그 순간에도 탄지신통을 펼치다니.]
[흥. 계포무이낙 후영중일언.]
진양의 입에서 난데없이 나온 말. 그 말에 수녀는 깨달아지는 게 있어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계포무이낙 후영
중일언은 지난 대천산에서 휴정이 그에게 했던 말이 아니던가. 휴정은 탄지신통을 화연철과 금수쌍녀에게만 쓰라고
하며 이 말을 읊었는데 진양은 지금 그걸 지키지도 않고서 채문에게 계포무이낙 후영중일언을 언급하는 것이다. 수
녀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가 매우 재미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채문은 눈
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영악한 놈! 걱정마라. 청성파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킨다.]
그리고는 곧 좌중을 돌아보며 다시 일갈한다.
[가자!]
채문은 말을 마치자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섰다. 그에 도사들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역시 사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급히 그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우연이었던 거야?]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수녀가 달려와 진양에게 물었다. 허나 진양은 그녀를 흘낏 바라보고는 흥, 하고 코웃음치며
침묵했다. 한눈에도 토라진 것이 뻔했다. 그녀는 진양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함께 힘을 합쳐 여기까지 뚫고 들어왔
는데 아무리 두려웠다지만 결국은 배반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안색
만 보일 뿐이다.
[흥. 나는 네가 좋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위기의 순간에 날 버리다니.]
진양은 들리는 대답이 없자 다시 비소하며 먼저 길을 나섰다. 수녀가 깜짝 놀라 외친다.
[자, 잠깐! 어디 가려고?]
그녀의 외침이 진양은 우뚝 멈춰섰으나 곧 냉소하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듯하다. 그러자 수
녀가 다시 외쳤다.
[여긴 청성산이야. 서로 떨어지면 둘 다 위험해!]
[언제부터 날 그렇게 위했지? 살고자 날 버렸잖아? 아하! 그래, 나를 방패로 삼아야 덜 위험하다 그건가? 흥. 어림
없는 개수작이다.]
일순 진양의 고개가 매섭게 돌려지며 분노한 호통이 버럭 튀어나왔다. 그가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
자신이 동행을 원하긴 했지만 그녀는 여기까지 오면서 자신의 도움을 받았다. 그 도움이 기껏 얼마 되지도 않다 하
더라도 도움은 도움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돕지 않고 제 몸만 아꼈다는 걸 생각하니 자꾸
분노가 치밀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돕지않은 그녀가 미웠다. 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그렇게 믿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러니 수녀가 철면피(鐵面皮)가 아닌 이상 무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힘없
이 고개를 떨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해. 정말로.. 그가 검을 휘두를 때 하마터면 얼굴에 상처가 날 뻔해서.. 그래서..]
그녀는 자꾸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입술도 잘근잘근 씹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 가
더니 급기야 말을 잇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이쿠! 사실은 그런 내막이 있었구나.)
진양은 깜짝 놀라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과연 그녀의 머리카락 일부가 싹둑 잘려나가 있다. 그는 사실을 깨닫자 금
방 마음을 바꿔먹을 수 있었다. 아직 어리긴 해도 예전 사형들로부터 여인들이 얼굴을 굉장히 아낀다는 걸 들어 잘
알고있던 것이다. 마음이 뒤바뀌자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솟구치는데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니 측은지심(惻隱之心)
까지도 마구 솟아올랐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
[알았어, 알았어.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그는 이미 배반이란 단어를 잊어버렸다. 지금은 다만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하는 게 문제다. 그가 다정하게 다독거
리자 수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진양을 향해 간드러지게 미소했다.
[고마워.]
진양은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름다우면서도 포근한 것 같았다. 마치 봄날의 따뜻
한 바람처럼 살랑거리듯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동안이라도 그녀의 그 미소를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멍
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치챈 듯 얼굴이 붉히며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진양은 크게
창피하여 화제를 돌리고자 급히 입을 연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야? 부르기 불편해서..]
[그냥 령아라고 불러.]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미 진양에겐 어느 정도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진양은 활
짝 웃으며 곧장 말했다.
[좋아! 그럼 너도 날 양아라고 불러.]
잠시 여러 일을 겪은 그들 둘은 더 꾸물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채문이 비록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은 손을 쓰지 않겠다 했지만 다른 청성 도사들은 분명 방해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가
는 도중 몇몇 도사들은 만날 수 있었는데 다행히 둘 다 경공이 뛰어나 쉽게 피해갈 수 있었다. 허나 그들이 어찌
알랴. 실상 채문은 크게 창피하여 그들을 만났던 일을 다른 도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걸 모르는 진양
과 수녀는 도사들의 모습이 적은 게 이상했지만 더 개의치 않고 달려 곧 울창한 숲에 당도할 수 있었다.
[양아. 이리로 와.]
수녀가 숲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걸 진양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런 울창한 숲 안에서 뭘 어쩌려는 거지?)
그러나 수녀가 어느새 숲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음을 안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급히 따랐다. 그렇게 한참동안
나무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가까스로 밖에 나오자 바로 앞에 보이는 건 절벽이었다. 진양이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탄식하며 물었다.
[여기서 만나는 거야?]
그에 수녀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먼저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그녀를 따르자 나오는 곳은 작은
공터, 사방은 수풀로 가려져 길이란 보이지 않았다. 진양은 이 공터에서 금녀를 만나는 것이라 짐작하고 슬쩍 경계
심을 가졌다. 그런데 수녀가 더 길이 없을 듯한 수풀을 마구 헤치며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그녀를 따
라가보니 그 안에는 동굴이 있었다.
[햐! 기가 막히군.]
진양은 들어서며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이런 곳에 동굴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수녀는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동굴 안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가볍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어머니가 오셨다 가셨어.]
그 때였다.
[그래, 다시 왔다!]
갑자기 등골이 다 서늘할 한 노파의 괴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그러자 수녀는 얼굴을 활짝 폈고 진양은 화들짝 놀
라며 얼굴엔 초조한 빛으로 가득해졌다. 그들은 그 노파가 바로 금녀라는 걸 대번에 눈치챈 것이다. 다시 금녀의 목
소리가 그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이놈은 누구냐?]
수녀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진양에게도 묻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몸을 돌리지 않고 금녀에게 등을 보
이고 있는 상태였다.
본래는 이게 아니었다. 설마 이런 동굴에서 만나기로 한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동굴이라고 해도
이렇게 대비도 못한 상태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어떻게 도망칠 방도라던가 뭔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동굴에서
만나니 그런 것들은 모두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흥, 하는 싸늘한 비소가 들렸다. 진양은 뭔가 감지하여
몸을 수녀에게로 날리려 하는데 그보다 먼저 오른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금녀가 힘을 줘 진양의 얼굴을 보고는 눈
을 부릅떴다.
[너.. 너는 그 함종문의 건방진 꼬마로구나!]
과연 금녀도 진양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편 그들 서로의 반응에 크게 놀란 수녀는 허둥지둥 달려와 금녀에
게 말한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대체 이놈을 왜 데려왔지?]
그녀는 수녀의 말에 대답도 않고 물었다. 거의 호통에 가까운 말투였다. 수녀는 그녀의 딸로서 태어날 때부터 지금
까지 함께 했는데 그녀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다.
[그가 날 도와줘서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어요. 어머니도 보셨죠? 밖에 개도.. 아니, 도사들이 널려있는 걸요.]
수녀는 슬쩍 말을 정정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금녀는 잠시 진양을 노려보더니 다시 냉소하며 그의 어깨를 세차게
내던져버렸다. 그 모습에 수녀는 놀라 부르짖었다.
[양아!]
[뭣! 양아라고?]
갑자기 터져나온 그녀의 호통에 수녀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본래 금녀는 딸에 대해 상당히 엄하여 상스러운 말 같
은 천한 짓은 절대 두고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엄한 부분은 바로 남녀유별(男女有別)이었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엄한지 양가집 규수(閨秀)보다도 더했던 것이다. 역시나 곧 벼락이 떨어졌다.
[네 이년! 감히..]
곧 동굴 안으로 철썩, 하며 수녀가 뺨 맞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것들은 진양도 모두 들을 수 있어서 수녀에겐 미안
했고, 금녀에겐 분노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친다.
[왜 그녀를 때려요?]
그는 재빨리 달려와 수녀의 금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금녀는 황당하다는 듯 자꾸 허, 허 하며 숨을 내뱉더니 이내
노기충천하여 소리쳤다.
[이놈들! 감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말을 조심해요. 누가 죽고 싶어 환장했다는 거죠?]
[이 망할 놈이..]
금녀는 더 참지 못하고 손을 번쩍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양도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재빨리 수녀를 밀치며 몸을
숙여 피했다. 이에 금녀가 노기 띤 얼굴로 철장까지 맹렬히 휘두르자 그는 뒤로 펄쩍 뛰며 그 공격도 피해버렸다.
금녀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 다시 그에게 맹렬히 달려들며 빠르게 일 장을 내질렀다. 과연 진양의 무공은 예전
금녀와 싸웠을 때보다 좀 더 발전되어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런 것들은 금녀에게 어떠한 방해도 주지 못했다. 지금
날아가는 그녀의 일 장은 진양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먼저 닿을 듯 했던 것이다. 진양은 이를 악 물며 급한
대로 어깨만 움츠렸을 뿐 피하거나 감히 일 장을 맞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수녀가 놀라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
린다.
[안돼요!]
그녀는 재빨리 진양의 앞을 막고 봉을 들어 금녀의 일 장을 막아내려 했다. 그에 진양도 놀랐지만 금녀는 더욱 소
스라치게 놀라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어깨를 후려쳤다. 다행히 그 덕분에 일 장을 회수한 금녀는 안색이 가볍게 변
하며 뒤로 물러섰다. 금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미 맹렬히 날아가는 오른손을 빼기엔 힘들다 생각하고 왼손으로
오른 어깨를 후려쳐 우장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번엔 또 수녀가 놀랐다.
[이럴수가.. 어머니!]
그녀는 황급히 금녀를 부축하려했다. 그러자 금녀가 일갈한다.
[놓아라!]
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움츠리면서도 금녀의 곁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걸 보고 진양은 수녀의 효심이
제법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이나 생각하고 있을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는 금녀가 눈을 감
고 조용히 있자 수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며 슬금슬금 발을 움직였다. 수녀도 꽤나 총명하기 때문에 그의
뜻을 깨닫고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금녀가 눈을 부릅뜨며 몸을 번쩍이더니 어느새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애송이가 감히 도망을 치려고? 각오해라.]
하지만 다시 수녀가 달려와 진양을 보호한다.
[비켜라!]
그녀의 호통에도 수녀는 절대 비켜서지 않았다. 저번 채문과 싸울 때 제 몸만 추스르고 구경했었기에 이번에는 절
대 배신 따윈 하고싶지 않았다. 그녀는 강경하게 입을 연다.
[그가 절 도와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그를 죽이면 어떻게 해요?]
[흥. 우리 금수쌍녀는 그런 일 따위에 개의치 않아도 된다.]
[전 그럴 수 없어요.]
[네 정말 혼이 나고 싶은 거냐?]
금녀가 다시 호통쳤다. 하지만 수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진양은 크게 감동했다. 그도 그녀가 저번 일
때문에 이리 무리하면서까지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고마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
았다. 어렸을 적 일들이 주마등처럼 마구 지나쳐갔고 자신을 위해주던 함종문 사형제들이 생각났다. 자신을 그리도
위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진양은 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옆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녀를 괴롭히지 말아요. 난 여깄으니까.]
[양아!]
수녀가 놀라 소리쳤다. 그가 갑자기 영웅심을 발휘해 이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금녀는 그들의 그런 모습에 우습기
도 하고 화나기도 하여 잠시 멍청하게 있었다. 그러나 곧 크게 한숨쉬며 말했다.
[썩 꺼져라. 그러나 오늘 이후 다시 만난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금녀는 말을 마치고는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그러자 수녀가 환하게 미소하며 재빠르게 눈짓했다. 어서 가라는 신호
다. 진양은 그녀를 애절하게 한번 바라보더니 입술을 깨물며 급히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