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四 章. 흔적 1 (11/90)

                                         第 四 章. 흔적 1

한편 금녀와 화연철은 뭔가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진양의 입가에 슬쩍 스쳤던 기이한 미소를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진양이 무굉만 들으라 귓속말을 해서 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뭐라고 지껄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들에겐 좋은 일일 것 같지 않았다. 금녀는 말없이 수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넋이라도 뺏긴 듯 멍청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무슨 정신나간 소녀처럼 멍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시선은 분명했다. 확실히 한쪽

의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을 따라가보니 곧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소년이 나온다. '다됐다' 

라고 하는 듯한 그놈의 건방진 상판때기에서 왠지 조소라도 흘리는 듯 가늘어진 입가까지. 그건 뻔할 뻔 자로 진양

이다. 조금도 맘에 드는 구석이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 밉살스러운 주둥이가 벌어지며 그녀에게 있어선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령아! 이리로 와!] 

[으, 응? 뭐?] 

수녀는 그 외침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선 어리둥절해했다. 고개를 돌려 금녀를 바라보니 매우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

녀는 아직 상황이 판단되지 않았다. 진양이 그녀에게 몇 걸음 더 달려와 손짓한다. 

[빨리 오라니까. 빨리!] 

그는 연신 재촉을 해댔다. 수녀가 멋모르고 걸음을 떼자 곁에서 지켜보는 금녀가 버럭 호통쳤다. 

[뭐 하는 것이냐?] 

[저.. 그게..] 

수녀는 얼굴이 금방 새하얗게 되며 말을 더듬거렸다. 진양을 만난 것 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는데 지금 그가 자신

을 부른다. 왜 하늘에 감사해야 할 만큼 기분이 들뜨는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또 왜 자신을 부르는 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가서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금녀가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방해한다면 벌써 골백 번은 더 때려죽였겠지만 금녀는 그녀의 어머니니 어쩔 수도 없었다. 

헌데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진양은 조금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였던 것이다. 그가 무굉을 돌아보

며 형님, 하고 구호를 외치자 무굉이 오냐, 하고  답하며 갑자기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비호가 따로없었다. 그의 

움직임은 과연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그의  몸뚱이가 금녀와 수녀 사이를 막아버

린 것이다. 마치 거대한 둑이라도 되는 듯 금녀의 형체는 이미 어둠의 아가리로 들어가버려 있었다. 

수녀는 크게 놀라 일단 봉을 빼들었다. 그런데 그때 진양의 외침이 들렸다. 

[령아! 금녀는 두고 일단 이리로 와. 형님이 보호해주실 거야!] 

그 외침이 그녀의 귓전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는 활짝 웃음꽃을  필 수 있었다. 그녀는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무굉이 금녀를 막은 것은 자신과 진양이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자, 금녀를 청성 도사들의 손아귀에서 

지켜주려는 것임을 말이다. 이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즉각 진양을 따라 달렸다. 뒤에서 

금녀가 뭐라고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  잠시 움찔거렸지만 진양을 믿었기에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진양은 공터 

뒤 수풀 사이로 계속 달렸는데 공터에서 일단 멀리 떨어지려는 듯 했다. 청성 도사들이 버젓이 널려있긴 했지만 방

해하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 무굉 때문이라는 것을 수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얼마동안 마치 쫓고 쫓기는 듯한 형세로 달린 끝에 그들은 청성산 뒤편 산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람이 잘 오

지 않는 듯 제법 고요해서 온 것인데 끝자락엔 작은 암자가 보였다. 청성파에 속한 암자인 듯 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듯 암자도 고요하기만 했다. 

진양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곤 딱히 방해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그가 주저앉아 

수녀도 옆으로 다가와 따라 주저앉았다. 그들은 다시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만에 만나고 그것도 급한 와중에 만나서 그런 걸까. 정적도 정적이지만 그 속에는 왠지 어색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령아.] 

그 정적은 진양이 깼다. 그는 정적이 어색으로 변하는 듯  하여 일단 말문을 열었던 것이다. 잠시 그윽한 시선으로 

수녀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청성 개도사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그 동굴을 찾아냈지?] 

그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자신이 보기에 그 동굴은 숨기엔 최적의 위치에 있었다. 청성산에 있는 숲이면서

도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울창한 숲. 그리고 그 숲을 통하여  오른쪽 비탈길을 오르고 공터가 나타나면 또다

시 수풀로 교묘히 가려진 동굴. 그 동굴을 찾아내려면 결국 미행 밖에는 없을  텐데 그 울창한 숲에서는 미행도 쉽

지 않을 게 뻔했다. 게다가 그 울창한 숲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주변을 잘 살펴보지 않던가. 그러니 그가 도무지 이

해할 수 없다는 듯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에 수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은 우연이었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동굴 위쪽으론 절벽이잖아. 위에서 봐도 밑이 안 보이고 밑에서 봐도 

위가 안 보여. 그래서 별 걱정이 없으려니 하고 이렇게 지냈지. 그런데 얼마 전에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길래 어머

니와 함께 나가 봤는데 보니까 그 공터에 떨어져 죽은 개도사 한 명이 있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나오고 있었다. 진양은 그녀가 그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청성 도사의 처참한 시신을 기

억하곤 공포를 느낀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걸 보시고 어머니께서 어서 떠나야겠다고 하셨어. 그런데 난데없이 개도사들이 들이닥쳤어.  어머니도 나도 놀랐

지만 그 청성 개도사들도 놀란 듯 싶더라. 어머니께서 그러는데 아마 개도사  시신을 찾으려고 떨어진 지점으로 대

강대강 들어오다가 이곳까지 온 것일 거래.] 

[그렇겠지. 제놈들이 설마 날아서 오진 않았을 테니까.] 

진양이 대꾸하자 수녀는 다시 고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날이 어제였어. 우린 어제부터 계속 싸움을 벌였어. 어제 온 개도사는 네 명 뿐이었는데  그 중 한 놈이 잽싸게 

도망쳐버린 거야. 그래서 우리도 빨리 떠나려고 했는데 웃기게도 반 각도 안 되서 화연철 등이 찾아왔어. 알고보니 

운이 없게도 그때 마침 화연철이 그 근방을 지나가고 있었나봐.] 

[흥. 개도사들이 운은 좋아 갖고.] 

[그래. 개도사들이 정말 운은 좋았지. 아무튼 화연철이 와서 제자들을 풀더니 천하삼유진을 펼치더라. 그것도 세 개

나 펼치니까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때 쯤에 우리가 온 거구나.] 

문득 진양이 끼어들어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모녀는 죽고 말았을 거야..] 

이번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진양은 그런 그녀가 가엽고 딱해서 위로의 말을 건낸다. 

[괜찮아. 어쨌든 무사하잖아.] 

[아.. 그래. 내 어머니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어?] 

그녀의 물음에 진양은 잠시 멈칫했다. 무굉에게 그녀를 보살펴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데리고 나오라 부탁했

으니 알아서 하겠지만 왠지 미덥지는 않아서 그랬던 것이다. 형님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진양이었

지만 그런 생각이 나는 건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문득 진양이 수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물었는데 대답이 없자  뭔가 일이 생겼나 

크게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양은 일단 그녀를 안정시켜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무굉도 믿기로 했다. 

[형님에게 부탁해놨으니 걱정하지마. 두 달 후엔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야.] 

[형님? 형님이라니?] 

그의 말에 그녀가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곧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손뼉을 치며 묻는다. 

[서.. 설마 자존자대가 네 형님인 거야?] 

[그렇지! 얼마 전에 의형제를 맺었어.] 

진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일순 수녀의 입은 딱 벌어지고 말았다. 처음 진양이 의형제를 맺자는 무굉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그녀 역시 나이 차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자존자대 무굉을 모를 리 없었다. 금녀와 몇 

번 부딪친 적이 있어서 자신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무굉의 대강의 나이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쉰 살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십 오륙 세의 새파란 애송이와 의형제를 맺다니, 그것도 자존심이 

세고 거만하기로 유명한 자존자대가 말이다. 한마디로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그녀는 말도 안 돼, 라고 말하려다가 그가 왠지 기분 나빠  할 것 같아서 그저 더듬거렸다. 그 모습에 진양도 금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녀의 의중을 화살로 꿰뚫듯 쉽게 꿰뚫어볼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상대가 무굉이었기에 가

능했으니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곧 무굉과의 일들을 상세히 설명해줬다. 청성산을 나와서 

아무 곳으로 쑤셔 박듯 가다가 우연히 만난  그 때부터 좀 전 격전장에 도달하기 전  까지의 내용을 이야기해줬다. 

마침 그의 구변이 유난히 뛰어났기에 내용을 너무 재밌게 전개해가 수녀는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특히 무굉의 

바보스러움을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깔깔 웃어대며 근심걱정을 다 잊은 듯 했다. 물론 그 웃음은 진양의 마음도 기

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한참의 이야기가 끝나자 수녀는 웃음 때문에 찔끔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렇구나. 정말 재밌어.] 

[난 형님에 대해서 아직 많은 걸 알진 못하지만 자존심이 무척  세고 거만하다는 건 알아. 이번에 금녀를 지켜주겠

다는 내 부탁을 들어 약속 했으니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줄 거야.] 

수녀는 기뻤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착하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이제 저도 살고 제 어머니도 

살 수 있는 게 확실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응.. 고마워. 정말로.] 

그녀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물을 보이자니 창피했다. 진양도 그걸 눈치챘는지 잠시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진양은 일단 이 청성산에서 벗아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상 무굉에게 한 귓속말은, 

<수녀를 내가 구해갈 테니 금녀를 도사들로부터 지켜달라. 두 달 후 이 시각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만나

자. 그때 금녀도 데려와 달라.> 

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수녀를 데려가도 분명 금녀를 걱정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리 한 것이었다. 일단 그리도 만나보고 싶었던 수녀와 서로 대면해서 이야기도 나누고 잠시 쉬다보면 두 달이 지나

겠지 하고 생각했다. 좀 더 시간을 늘려 잡고 싶었지만 무굉에 대한 마음도 깊어서 두 달로 정해뒀다. 

어찌 되었건 일단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령아. 이곳에 오래 있으면 좋지 않아. 우리 일단 이 산에서 벗어나자.]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하지?] 

[걱정마. 두 달 후에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이렇게 아예 그리로 향하자.] 

진양이 대답해주자 그녀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파 본당은 청성산 정면 입구에서 쭉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본당 뒤편은 끝없는 절벽으

로 이어져있었다. 지금 진양과 수녀가 있는 곳은 그 절벽의  아래였다. 그들이 있는 곳 옆으로는 작은 샛길이 하나 

나있었다. 그들은 그 길을 통해 청성산을 빠져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 나가고 있을 때였다. 

<뎅.뎅.뎅.뎅.> 

갑자기 청성산 사방팔방으로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어디서 들려오는 소린지 알 수가 없

었다. 이곳 저곳에서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종소리가 소리의 근원을 파묻히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양과  수녀

는 그 종소리가 청성파 본당에서 들리는 소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크게 울리는 종이라면 뻔하지 않겠는

가. 

[갑자기 웬 종소리지?] 

[이 종소리는 청성파가 위급할 때 알리는 신호야. 경종 말야. 너도 봐서 알지만 본당 말고도 암자들이 많잖아.] 

[아.. 개도사들을 모으기 위한 신호로군. 그런데 경종 치곤 너무 느긋한 걸.] 

정말로 그랬다. 보통 경종이라면 빠르고 다급함을  느낄 수 있도록 쳐댔는데 이건  그런 맛이 전혀 없었다. 느긋이 

뎅, 뎅 하는 게 무슨 아침 종이라도 되는 것 같다. 그의 말에 수녀가 답했다. 

[어머니께서 어쩌면 일부로 느긋함을 보이기 위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하셨어. 도를 닦는 도사들이란 자들이 황

급히 굴면 이상하기도 하잖아.] 

[흥. 그래봐야 개도사들 주제에.] 

진양이 냉소한다. 그러자 수녀가 킥킥거리며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문득 수녀가 웃음을 멈추며 중얼

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경종은 왜 울리지?] 

그 말에 진양은 금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가 미소하며 말한다. 

[난 짚이는 게 있어. 아무래도 형님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아! 그래.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알겠다는 듯 수녀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그녀도 사실  이 청성파의 경종을 자주 들어본 건 아니었다. 딱 

한번 들어봤었다. 오래 전에 금녀가 화연철을 죽여버리겠다고 청성파에 잠입했을 때에 들어본 것이다. 그 날 화연철 

암살에 실패하고 도망쳐 나올 때 이 경종이 울렸었다. 아주 어두컴컴한 한밤에었고 화연철이 길길이 날뛰어서 경종

이라도 친 듯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훤한 대낮인데도 경종이 울린다는 건 필시 무굉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녀도 무굉의 무공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수준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형님이 여간 난동을 부리는 게 아닌가 보네.] 

진양이 중얼거리자 수녀가 다시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진양이 얘기해줬던 무굉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웃음

이 터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한다. 

[자존자대의 무공은 대단하니 개도사들이 크게 겁먹었을 거야.] 

[맞아. 아까 화연철도 면상 가죽이 딱딱해져서는 처음엔 감히 나서지도 못했잖아.] 

진양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쾌한지 입꼬리가 자꾸 벌어졌다. 이렇게 됐으니 이것 또한 일석이조다. 무굉이  청성

파를 곤란하게 만드니 통쾌하여 좋고 덕분에 자신들이 좀 더 안전하게 청성산을 빠져나갈 수 있으니 또 좋은  것이

다. 그들은 함께 싱글벙글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걸음을 옮기다가 수녀가 피곤하다 하여 잠시 객잔에서 쉬고 있었다. 수녀는 정말 피곤한 듯 했다. 한번 잠에 

빠지더니 이틀 동안 꼬박 잠만 자댔다. 하기야  이틀 간 계속 싸움만 벌였는데 내공도 부족한  그녀가 멀쩡할 리는 

없었다. 

이틀 후 그녀가 잠에서 깨자 진양은 객잔 대청에 구석진 자리를 하나 잡고  식사를 주문했다. 그녀가 이틀 간 잠만 

잤으니 배가 매우 고플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그런지 가끔 그녀의 뱃속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새하얀 볼을 붉게 물들였다. 객잔이  시끌벅적했다. 꽤나 큰 객잔이라 사람이 매우  많았다. 잘 보니 

강호인도 보였고 평범한 사람들도 보였다. 

[사람도 참 많군.] 

문득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웠는데도 잘 들리다는  건 제법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건 무공을 안다는 증거도 될 수 있었다. 과연 그 자의 탁자에는 장검이 한 자루 놓여져

있었다. 평범한 강호인으로 보였다. 그 자의 앞에도 비슷한 차림새의 중년인이  있었다. 역시 평범한 강호인으로 보

인다. 

[이 객잔이 제법 크긴 하지만 이곳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뭔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하지만 이들이 그를 안다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겠지.] 

갑자기 중년인이 난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라니. 그건 처음 중얼거린 강호인도 마찬가지인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라니?] 

[뭐야. 설마 모르나?] 

중년인이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이 실소하며 입을 연다. 

[자넨 귀도 먹어버렸나? 그 소문도 못 들었나보군. 청성파에 자존자대가 나타났다는 소문말야.] 

[자존자대라고?] 

중년인의 말에 그는 크게 놀란 듯 했다. 얼굴에는 금방 어둠의 그림자가 덮이고 있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게 분명했

다. 그건 말하는 중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자존자대. 맨날 청루에서 살더니만 도대체  소식을 못 듣는군. 하여튼 그  괴물이 청성파에 나타나서 난동을 

부렸다더군.] 

[흥. 잔말은 많군! 그런데 무슨 난동?]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청성파가 모욕이라도 당했나봐. 저희들끼리 쑥덕댈 뿐 남한텐 말하지 않는 게 그런 

거 같더군.] 

그 말을 들은 강호인은 슬쩍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에 중년인이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걱정마. 자존자대는 이미 종적을 감췄다고 했어. 하지만 역시 겁이 나긴 하지.] 

[그렇지. 아.. 그런데 자존자대는 이유없이 일을 저지르지 않는데 왜 갑자기 청성파에서 난동을 부렸다지?] 

[그게 금녀를 구하려느라 그랬다는 말을 들었어.] 

중년인의 말에 그의 낯빛이 한번 더 변했다. 

[금수쌍녀 중 금녀를 말하는 거야?] 

[정확하지는 않아. 아무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렇다더라.] 

[헛 참.. 자존자대가 갑자기 왜 금녀를 돕지?] 

그가 이해할 수 없다 묻자 중년인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거야 무굉과 진양, 수녀만  아는 사실인데 

그들이 알 턱이 없다. 

[형님이 멋지게 일을 처리하셨나봐.] 

진양과 수녀는 그들이 모르게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이런 이야기를 듣자  수녀는 한시바삐 금녀가 보고 싶어

졌다. 그녀는 곧 진양을 재촉하여 약속된 장소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장소는 진양만 알고 수녀는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진양이 가는 길로 무작정 따르기만 했다. 진양은 우

회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될 것을 동쪽으로 돌아 우회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회하는 목적은 굳

이 서둘러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성산에서 그 야산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한 보름이면 갈 수 있

는 거리라는 얘기다. 

(그리고..) 

물론 그 이유 하나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진양은 사실 그녀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무굉과 금녀를 만

난 후 일은 대충 준비를 해뒀지만 혹 모를 일이 아닌가. 변수가 일어나 언제 다시 헤어질지 모르는 현실이다. 어차

피 시간도 실컷 남을 텐데 이 기회에 단 둘이 느긋하게 담소나 나누며 걸어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양은 자신의 뜻대로 행로를 변경할 수 있었다. 그 야산은 본래 청성산 남쪽에 있는데 진양은 동쪽

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 걷다보니 한 줄기의 강이  보였다. 민강(岷江)이다. 그들은 그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다만 뱃사공이 별로 보이지가 않아서 몇 일 시간을 허비했다. 강을 건넌 뒤 한참을 더 동으로 가다가 서서

히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다. 가는 길에 중간중간 작은 촌이 나타나서 가끔 쉬었다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방향은 쥐

새끼도 모를 듯 조금씩 서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따라 걷던 수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해. 이상해.] 

[뭐가?] 

진양은 그녀의 의문에 가득 찬 표정을 보고 일순 가슴이 뜨끔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녀가 묻는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인데?] 

그의 얼굴에 잠시 당혹한 빛이 떠올랐으나 이내 사라졌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가슴을 추스르고 되물었다. 그러자 

수녀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왠지 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우린 얼마 전에 민강을 건넜잖아. 민강은 청성산의 동쪽에 있는데 다시 얼마 전

엔 또 남쪽으로 향하고. 또다시 이번엔 서쪽으로 가서 어느새 또 민강에 다다를 거 같은데..] 

순간 진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번뜩 깨달아지는 게 있어 하마터면 아차,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가. 그녀는 사천 지방에서 주로 지낸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무래도 그녀와 단 

둘이 더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만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수녀가 어떻게 된 거냐는 듯한 눈으로 진양을 쳐다보자 그

는 낯빛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걸 본 그녀가 조금 놀란다. 

[양아. 왜 그래?] 

[아, 아니야..] 

그녀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작게 뒤흔들며 기이한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는 진양으로 하여금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 그녀가 눈치라도 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조금은 유치한 생각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혹시 길을 착각했던 거 아냐?] 

[아.. 그, 그런가? 그럴 지도 모르겠어. 그 야산을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 지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거

든.] 

그야말로 천지방궐 우출유혈(天之方蹶 牛出有穴)이랄까. 진양은 그녀의 질문에 금방 힘이 솟아 유유히 능갈을 쳐댔

다. 그는 그녀의 안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다 생각하여 의기소침(意氣銷沈)했었는데 이런 말을 하니  기

회를 놓칠 수 없던 것이다. 과연 그의 능갈이 제법이었는지 수녀는 완벽히 속은 듯 했다. 

[아! 그렇구나..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녀가 이해하자 진양은 더 힘이 치솟는다. 

[그래. 그리고 보니 조금 생각이 나는 것 같아. 어딘지 이젠 조금 알 것 같애.] 

[응. 어서 가자. 대신에 이번엔 반드시 정확히 가야해.] 

수녀가 새침하게 쏘아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모습은 진양의 가슴을 묘하게 만들었다. 일순 가슴 한 가운데가 

뜨거워지며 난데없이 현기증이라도 생기는 듯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갑자기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만 보인다. 미녀임

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정말 절색이 따로 없을 것 같다. 거기에 그녀의 앙증맞은 모습이 가

슴을 부르르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이다. 그녀의 비운을 듣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었지만 그 느낌은 이번처럼 격렬적이지 못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은 뭔가 흥분되면서도 격렬하고 뜨거우

면서도 허전한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기괴한 느낌이었다. 

진양은 그러한 감정에 심취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령아..] 

다소 포근하면서도 애절한 음성. 그것을 수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초점이 명확하지 

않는 게 매우 이상해 보였다. 

[왜 그래?]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진양은 여전히 멍하기만 하다. 수녀는 점점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 그의 어깨를 잡

고 흔들었다. 헌데 순간 와락, 하고 진양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게  아닌가.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했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온기가 손을 타고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 하자 순식간에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

다. 갑자기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숨이라도 막혔는지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야, 양아.] 

다리가 떨린다. 지금 그녀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청명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며 손을 

확 빼버렸다. 눈을 꼭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 덕인지 이번엔 손을 쉽게 뺄 수 있었다. 그제야 진양은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멍한 동공도 다 정상으로 돌아갔다.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지

고 말았다. 

[이.. 이건.. 그게..] 

그는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마음

이 정돈되지가 않았다. 입을 열어 어떻게 말을 꺼내긴 했지만 너무 떨려서 수습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런 그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수녀였다. 

[괜찮아. 자자! 어서 가자.] 

[령아.. 그렇지만..] 

[에이! 빨리 안 올래? 그럼 나 먼저 맘대로 가버릴 거야.] 

그녀는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진양의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나 먼저 가버릴 거야!] 

그 외침에 번쩍 정신 차린 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이미 멀리 걸어가  있었다. 곧 또다시 팔짝거리며 몸을 움

직였다. 진짜 먼저 간다. 진양은 황급히 그녀를 따르며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은 정말 선해.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일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거야. 나는  정말 미안하고 창피

한데..) 

생각하면 할수록 미안하고 창피하여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장 얼음물에 머리라도 쑤셔 박고 싶을 뿐이었다. 문

득 그녀가 이런 벌건 얼굴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절대로 안 된다. 

그는 속으로 연신 그렇게 부르짖으며 경공을 펼쳐 단숨에 그녀를 앞질러버렸다. 이렇게 하면 그녀는 자신의 달아오

른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젠 미친 소처럼 그야말로 미친 듯이 달리는 일만 남았다. 그는 그렇게 반 시진동안 

쉬지도 않고 달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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