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 章. 흔적 2
그로부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천지를 굽듯 살벌하게 내리쬐는 날씨는 어느덧 조금 풀리고 선선한 바람만
이 말없이 불어댔다. 그에 무성한 초목이 흐느적흐느적 춤출 무렵, 진양과 수녀는 이미 약속의 장소에서 무굉과 금
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진양과 무굉이 처음 만났던 그 야산의 그 자리였다.
수녀의 모습은 지극히 초조해 보였다. 느긋이 앉아 뭔가를 흥얼거리는 진양과는 생판 달랐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질
못하고 자꾸 왔다갔다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며 정신 산만하게 굴고 있었다. 이미 약속 날짜가 지난 것이다. 그들은
약속 날짜보다 몇 일 빠르게 이곳에 당도했다. 우회하고 또 느릿느릿 이동했지만 거리는 멀지가 않고 시간은 많았
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굉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약속한 날
짜보다 5일이나 더 지난 대낮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진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의 효심은 깊은데 초조해하지 않는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하지
만 그녀처럼 걱정은 하지 않았다. 금녀에 대한 걱정이야 뭐 천붕지괴(天崩地壞)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은 절대로 하
지 않는다. 죽으면 좋고 안 죽으면 그만이다. 그건 실상 말할 나위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수녀를 생각해보면 얘기
가 달라진다. 최소한 그녀의 앞에선 함께 걱정을 해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형인 무굉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각할 정도
로 둔하고 다혈질인 사람이지만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기필코 지킬 위인이다. 그는 그런 마음을 가지며
5일 동안 뒹굴기만 했다.
문득 초조하다 못해 울상까지 지어버린 수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물음은 반은 진양에게 묻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여기로 나온다고 했으면서 왜 5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느냐 하
는 간접적인 질문과 비슷했던 것이다. 진양도 그것을 느낄 수 있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 별 일이야 있겠어.]
[그래도..]
[걱정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네 몸만 상하겠다.]
실제로 그녀의 몸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5일동안 새우잠이나 자면서 지내지 않았는가. 그 증거라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난 괜찮아. 난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걱정돼.]
[뭘 좀 먹자. 배고프다. 먹어야 기다리든 말든 하지.]
그는 말을 돌리며 일어섰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궁둥이가 다 저려온다. 그는 그녀에게 이곳에서 쉬고 있으라
말하고는 사냥감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5일간 그래왔듯 여전히 먹거리 구하는 일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야산인 만큼 별다른 먹거리는 없었다. 가끔 보이는 수과(樹果)나 따고 운 좋게 토끼나 발견하면 아주 좋을 뿐이었
다. 오늘도 역시 수과나 실컷 따갈 것 같았다. 삼 일째 밥도 고기도 못 먹고 과일만 먹어댔더니 배가 등가죽에 늘러
붙는다. 이 상태론 몇 일 더 못 버틸 게 확실했다. 있는 열매란 열매는 다 따다가 꾸역꾸역 처먹고도 이렇게 비실비
실한데 수녀는 더 심할 게 뻔했다. 며칠만 더 있다간 그녀가 졸도라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일단 발걸음을 돌렸다. 보따리에도 수과가 가득 찼으니 더 있을 필요가 없다. 그는 돌아가서 오늘밤까지만 기
다리자 하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마을로 내려가 밥 한 톨이라도 구경을 좀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참 돌아
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낯이 익은 호리병이 보였다.
[앗!]
그는 부지중에 큰 경호성을 내질렀다. 몸도 일순 움찔거렸다. 그 호리병은 다름아닌 무굉의 호리병이었던 것이다.
보따리를 내던지고 달려가 호리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실하다.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저번의 그 호리병이다. 생
면부지(生面不知)였고 나이 차이도 컸지만 마음이 맞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형제를 맺었던 무굉의 호리병이 분명
했다. 아미산 정상에서 함께 술을 때 직접 봤는데 어찌 아니겠는가. 서둘러 병을 살짝 흔들어보자 과연 가늘게 찰랑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지?]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굉의 허리춤에 달려있어야 할 호리병이 여기 있다. 그런데 무굉은 그림자
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혹시..]
순간 찌릿한 느낌이 가슴을 건드렸다. 그는 곧 사방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 근방은 제법 수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산에서 오래 지낸 진양에겐 조금의 어려움도 없었다. 그렇게 반 각이나 지났을까. 무슨 약초꾼인 양 잡초들까지 샅
샅이 뒤지던 그의 입에서 앗, 하는 놀란 경호성이 다시 터져나왔다.
진양은 산에서 오래 살았고 또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산에 대해선 제법 통했다. 덕분에 어떤 흔적은 잘 찾아내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다. 사냥할 때도 자주 써먹듯 작은 흔적하나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들
여다보는 것이다. 지금 그의 발 아래에는 어떠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잡초더미가 뭉개진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는 그렇게 단순히 보이지가 않았다. 이건 그냥 밟은 게 아니다. 어지간한 무게를 누른 정
도가 아니었다.
(이 주변엔 잡아먹을 고깃덩어리라 해봐야 토끼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의 흔적.)
사람의 흔적. 그것도 이 정도의 무게라면 반드시 무공을 아는 자임이 분명했다. 무공을 아는 강호인의 몸이 무겁다
는 얘기가 아니다. 바로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이나 다른 경공 등을 펼치며 생기는 흔적이라는 것이다. 진양의 머리
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다시 그 주변을 뒤척여봤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또다른 흔적들이 나온다. 나온 흔적들을
차례로 보며 생각해보니 자연 쫓고 쫓기는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앞서서 도망치는 자와 쫓는 세 명인 것 같았다. 진
양은 잠시 그 광경을 연상해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는 머리를 뒤흔들었다. 방금 무굉과 금녀로 상상을 해보았으나 그들은 그렇게 도망칠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럼 대
체 뭐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는 더 생각하길 포기했다. 강호란 곳은 온갖 간악하고 기괴
한 수법이 난무한다는데 혹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일순 몸을 돌려 비호처럼 내달렸다.
도착해보니 수녀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별 탈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진양의 말대로 쉬고 있지는 않았
고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는 그를 발견하고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뭐 먹을 게 있었어?]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가 않아.]
진양의 진지한 모습에 수녀는 잠시 놀랐다. 좀 전만 해도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조금 어색해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일단 왜 라고 물으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걸 봐.]
그리고 보니 지금 그의 허리춤엔 처음 보는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그가 그 호리병을 막 꺼낼 때야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호리병이다. 딱히 특별한 점이 없어 보였다.
[이건 웬 호리병이야?]
[이건 바로 내 형님의 호리병이야.]
순간 수녀의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잠시 얼어붙어 말도 잇지 못했다. 무굉의 호리병이 여기있다는 건 그가 이곳
을 지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만나지 못했을까. 그녀는 곧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가. 그런데 그분이 이곳을 지났다면 우리와 만났을 텐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우리가 오기 전에 떨구고 간 것 같아. 아.. 일단 따라와 봐.]
그는 그녀를 이끌어 재빨리 그 흔적의 장소로 향했다. 그는 도착해서 일단 하나 하나 설명을 해줬다. 단순히 눌린
자국이 아니라 무공을 가진 자가 경공을 펼친 흔적이라는 걸 상세하게 설명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확연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그럼 그 쫓고 쫓기는 자들은 누구지? 혹 이 호리병과는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그 말에 진양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실상 그런 사실은 이미 아까 전에 생각해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흔적
들이 이 호리병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위치가 너무 절묘하지 않는가. 명확하게도 도망치다 호리병을 떨군
다면 딱 이쯤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아니야. 분명 상관이 있어. 위치가 너무 절묘해. 저 흔적대로 도망을 치다가 떨군다면 분명 이쯤까지 구를 텐데 이
호리병은 정확히 이 자리에 있잖아.]
[아.. 그렇구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젠 수긍하는 듯 했다. 한동안 그와 지내며 그의 옛 이야기들을 제법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산에 대해선 정통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어서 쫓아가봐야지. 이 흔적대로 따라가보자.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에 지난 듯 하니 분명 멀리 갔겠
지만, 그래도 갈 데까진 가봐야지.]
[좋아!]
이렇게 되니 쓸데없이 5일만 허비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 따위에 개의치 않았다. 수녀는 이제 금녀
를 찾을 단서를 발견했으니 기분이 들뜰 뿐이었고, 진양은 무굉의 호리병을 보며 갑자기 의형을 향한 그리움이 솟
을 뿐이었다.
흔적을 찾아가며 이동하는 방법은 너무나 느리고 느렸다. 진양은 계속 기어가듯 걸어야만 했고 수녀는 그 뒤를 지
루하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가끔 진양은 머리를 굴려 조금 띄엄띄엄 넘어가기도 했으나 역시 느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흔적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5일이나 더 흐른 뒤였다. 그냥 걸어갔다면 하루면 지날 수 있
는 거리를 다섯 배로 허비한 것이다.
흔적의 끝은 조그마한 동굴 앞이었다. 아니 동굴이라기 보단 들짐승이나 숨을 만한 굴이라 하는 게 맞았다. 그만큼
작았던 것이다. 엎드려서 기어가야 겨우 안에 들어갈 만 했는데 그것도 진양이나 수녀 이상으로 몸집이 크다면 들
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양이 기어서 굴 안에 상체를 들이밀었다.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굴 입구가 밑바닥
에 깔리듯 되어있어 굴 입구 부근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령아. 나뭇가지에 불 좀 붙여줘.]
그는 일단 몸을 빼냈다. 이대론 어차피 안을 잘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수녀는 돌을 몇 번 딱딱거리더니 금방 불을
붙였다. 나뭇가지 끝이 조금씩 타고 있었다. 진양은 다시 몸을 굴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앞으로 쓱
내미는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발악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빼다가 굴 모서리에 뒷통수를 쿵, 하고 박았다. 수녀는 그런
그의 행동에 매우 놀랐다.
[양아!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으응.. 괜찮아.]
그는 무안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뒷통수가 칼로 후벼파듯 아파온다. 그래서 뒷통수를 만지작거렸더니 손가락에 피
가 묻어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나는 모양이다. 곧 황급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이런 추잡한 꼴을 보인 것도 창
피한데 피까지 난다는 걸 그녀가 알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왜 그랬어?]
그녀는 그 피를 못 본 듯 했다. 하지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다. 하기야 멀쩡히 고개를 들
이밀던 놈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대가리를 모서리에 갖다 박았으니 어이없을 만도 했다. 그녀의 물음에 진양은
잠시 우물대다가 곧 말문을 열었다.
[안에.. 네 어머니가 있는 것 같다.]
[뭐라고!]
수녀가 비명을 지른다. 그녀는 이젠 멍청히 있지도 않았다. 곧장 비명이 지르기가 무섭게 굴 안으로 몸을 쑤셔 넣었
다. 그리고 금방 골이 울릴 듯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
그 안에는 우습게도 금녀가 들어가 있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 작은 굴 안에 그녀가 들어가 있는가. 그건 그녀의 몸
집이 매우 작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녀는 금녀를 굴 안에서 쉽게 빼낼 수 있었다. 그녀를 빼고 보니 그 안이
넓어 보인다.
[어, 어머니.]
수녀는 점점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여러 번 금녀를 뒤흔들며 깨우려 했지만 그녀가 깨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
만 분명 숨은 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 어떻게..]
[령아. 침착해.]
진양은 일단 나서서 말했다. 그녀가 너무 허둥거려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 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금녀를 살
펴보니 과연 숨은 쉬고 있는데 깨지는 않았다. 숨이 고른 게 아무래도 잠이 든 듯 했다. 하지만 어찌 잠이 들었다
해도 이런 소동에 깨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금녀의 내공은 대단하다. 그 정도의 수준이면 미세한 소리에 자다가
도 벌떡 일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지금 그녀의 상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머니..]
[너무 흥분하지 마. 내가 보기엔 그냥 잠자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어머니는 내공이 뛰어나서 작은 소리에도 깨. 그런데 지금은..]
[잠시 기다려 보자. 무슨 일이 있어도 금방 깨겠지.]
그에 수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돼! 혹시 무슨 변이라도 생겨서 이렇게 된 거면 어떡해? 빨리 의원을 찾아가자.]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주변에 의원이 있어?]
진양은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수녀는 다급하기만 했다.
[저 앞에 작은 촌이 있어. 그곳부터 가보자!]
[의원은 없을 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잖아!]
수녀가 신경질적으로 호통을 쳤다. 그녀는 지금 진양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게
조금도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아, 알았어. 소리 지르지 마.]
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실상 굼벵이처럼 느린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엔 정말
굼벵이 같았다. 왠지 화가 치솟는다.
[어서 어서!]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닌데..]
진양은 뭐라고 중얼거리며 금녀를 들쳐업었다. 그 모습에 수녀는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흥,
하고 냉소하며 먼저 경공을 펼쳐 내달린다.
(내가 이 금녀를 도와야 하는 건가? 령아만 아니라면 이런 개똥 얼굴의 악녀는 당장에 내다버릴 텐데.)
그는 그녀를 따르면서 속으로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양은 평소보다 좀 더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다만 너무 느리게 달리지는 않았다. 만일 너무 느리다면 일부로 느리
게 달린다는 걸 수녀가 눈치챌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동안 그녀는 진양의 느린 경공을 보고
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금녀를 업었으니 느리려니 했지만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결국 얼마 후엔 답답함을 참
지 못하고 날카롭게 물었다.
[좀 빨리 달릴 수는 없는 거야?]
[몇 일간 밥하고 고기를 구경하지 못했더니 힘이 나질 않아.]
그러나 진양은 배고픔을 핑계로 삼았다. 이러니 수녀는 할말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를 그렇게 달리자 과연 그녀의 말대로 작은 촌이 하나 나왔다. 진양은 다시 한번 그녀가 사천 지리에 밝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촌은 너무나 작고 별볼일 없었다. 말 그대로 작은 촌이다. 그러니 의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녀는 필사적이었다. 진양에겐 금녀를 데리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 해놓고는 이곳 저곳에 의원의 거
처를 수소문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측은해 진양은 점점 마음이 동했다.
[령아가 불쌍해. 어쩌다가 이런 어미를 만났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죽고 싶으냐?]
너무 싸늘하고 살기에 가득 찬 그 말. 그건 어이 없게도 금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진양의 몸은 뻣뻣이 굳
고 말았다.
[이, 이건..]
[날 내려놓아라.]
진양이 어찌 거부할 텐가. 그거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바다. 그는 즉각 그녀를 내려놓았다. 돌아본 그녀의 모습은 평
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저 한숨 자고 일어난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였다. 다시 그녀의 입이 열렸다.
[령아는 어디에 있느냐?]
[그녀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대답하던 진양은 갑자기 깨달아지는 게 있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금녀가 호통친다.
[대답 해라!]
[날 어떻게 할 거죠?]
그의 말에 금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감히 나랑 흥정을 하겠다는 것이냐?]
[대답을 듣고는 죽일 게 뻔한데 어떤 미친 놈이 대답을 해.]
진양이 금방 빈정거렸다. 그에 금녀는 잠시 악독하게 그를 노려보았으나 곧 냉소하며 말했다.
[좋다. 널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어떻게 믿어요? 파렴치한 일도 서슴치 않는 당신을.]
[네놈이 정말 죽고 싶으냐?]
그녀가 다시 살기를 풍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추악한 얼굴도 거기에 한 몫하니 정말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양은 비웃음을 흘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나와 령아는 하루 뒤에 벼락을 맞아 죽고 말 것이다.]
[날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건가요?]
[그렇지.]
[날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것이 그거 아니냐!]
금녀는 화가 치솟아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진양은 여전히 확답을 받아야겠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어서요.]
[알았다. 만일 대답을 들은 이후 너를 건드린다면 나와 령아는 하루 뒤에 벼락을 맞아 죽고 말 것이다.]
그제야 진양은 만족하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그녀가 질문을 퍼부을 차례다. 그녀는 먼저 령아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지금 이 촌에 있어요. 금방 돌아올 텐데 아직은 안 보이는군요.]
[거짓말이면 약속도 무효가 되는 것이다.]
[내가 당신 같은 줄 아나요?]
진양이 톡 쏘아붙이자 그녀는 분기탱천했으나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철장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어떻게 알아요? 굴 속에 쳐박혀 있을 때도 없더구만 뭐.]
갑자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굴이라니?]
[굴 속에서 잠만 퍼잤잖아요. 노망이 들었나.]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매우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다 잠시 후 손뼉을 치며 부르짖는다.
[이 무가 괴물이!]
그 말에 진양은 번뜩 느껴지는 게 있어 물었다.
[무형님을 말하는 건가요?]
하지만 금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소리나게 이를 빠드득 갈며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진양은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다.
[형님은 어딨죠?]
[그 괴물이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왜 몰라요? 함께 있었으면서.]
[닥쳐라! 한번만 더 주둥이를 놀린다면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다.]
진양이 냉소한다.
[날 건드린다면 내일 벼락을 맞을 텐데.]
[너.. 너..]
금녀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듯 보인다. 진양은 두려운 마음이 생겨 속으로 조용히 방비를 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손을 번쩍하여 옆에 고목의 몸통을 움켜쥐었다. 곧 와직 소리와 함께 고목 몸뚱이 일부가 뜯겨
졌다.
[나중에 만날 때는 널 이렇게 만들어주겠다.]
[흥.]
진양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역시 가슴이 떨린다. 저 고목이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니 자연 오금이 저려
왔다.
마침 수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래 떴다. 곧 허겁지겁 달려와 금녀의
품에 안겼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모습이 진양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금녀도 그녀를 만난 것이 매우
기쁜 듯 그녀를 꼬옥 안았다. 모녀의 상봉이다. 몇 달간 헤어졌을 뿐이지만 서로가 많은 고난을 겪었기에 그만큼 기
쁨은 컸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들은 곧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양이
옆에 있음을 알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수녀가 먼저 자신의 일들을 쭉 설명해줬다. 줄곧 진양과 함께 있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진양을 매섭게 노려보기
도 했지만 별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수녀는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를 마치곤 이젠
금녀의 일들을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금방 벌겋게 되며 독한 눈빛이 번쩍였다.
[정말 미칠 듯 분노할 날들이었지..]
그녀는 손을 부르르 움켜쥐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진양이 수녀를 데리고 떠나니 격전장은 자연 무굉과 금녀, 그리고 청성 도사들이 남게 되었다. 무굉은 진양의 부탁
을 들어줘야했다. 좀 전 알았다고 했으니 지켜야 한다. 하기야 별로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한 부탁은 그저
금녀를 구해서 두 달 뒤 만날 때 데리고 나오라는 것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무굉이기에 쉬운 것이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청성파는 사천 최고의 문파다. 강호에서 청성
파를 모르는 강호인이 어디 있으며, 또 사천 지방엔 순 청성파가 나다닌다는 걸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강호에서도 청성파의 위치는 제법이었다.
게다가 지금 둘러싼 자들 중에는 화연철이 있다. 장문인인 용정학 다음 가는 무공을 가진 도사가 아닌가. 그의 무공
은 금수쌍녀가 두려워할 정도로 대단하다. 특히 그의 절학 청운적하검(靑雲滴下劍)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진 청성
파의 이대(二大) 상승검법 중 하나다. 칠십이파검(七十二破劍)에는 조금 뒤떨어진다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대 상승검법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탈출은 매우 힘들었다. 그것도 금녀를 구해내서 도망치라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
나 역시 무굉은 무굉이다. 강호에선 자존자대라 하여 그를 비꼬지만 그러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의 무공이 초
절하기 때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