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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금녀의 죽음 1 (14/90)

                                      第 五 章. 금녀의 죽음 1

무굉은 도둑 놈처럼 슬금슬금 움직였다. 별로 늦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깔린 어둠은  그의 온몸을 칭칭 감고 있었

다. 그 어둠 가운데서 움직이는 무굉의 모습이란 무슨 흑운(黑雲)이라도 되는 것 같다. 

그는 나무 사이로 고요하게 걷더니 문득 좌우를 훑어보며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걸 알자 갑자기 몸을 퉁겨 

웬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실로 대단한 경공이다.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마저도  겨우 들릴 정도로 대단히 은밀했다. 

그렇게 담장을 넘었는데 그럼 이 담장 안은 대관절 어디일까. 무굉은 흘낏 고개를 들어 뭔가를 보고는 조소를 흘린

다. 

상청궁(上淸宮). 놀랍게도 방금 그가 넘은 담장은 상청궁의 곁으로 한번 더 둘러싼 작은 담장이었다. 청성파 도관임

을 알리는 푸른 색 띠가 본궁의 몸체를 두르고 있었다. 크고 엄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이곳은 청성파의 본당임이 

확실했다. 그럼 그가 있는 곳은 자연 후원이다. 그곳은 도사들이 쉬는 일종의 휴식처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방은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는지 너무나 고요했다. 기침을 한다면 천지가 진동이라도  할 것만 같이 정적이 감돌

고 있었다. 도사들이 대부분 잠이 들었나 보다. 무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문에 지금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스스로 비책이라 생각하는 기막힌 수법을 머리에 담고서. 

그는 다시 신형을 움직였다. 가끔가다가 도사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중요한 길목에 서있기도 하고 왔다갔다 순찰을 

돌기도 했다. 그러나 무굉의 존재를 모르는 듯 그들은 눈만 껌뻑였다. 달빛이 비춰지는 곳도 있었지만 그는 그리로 

향하지 않고 어둠으로 가득 찬 곳으로만 지나갔기 때문에 도사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헌데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는 금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조용히 혼자 순찰을 돌고 있는 한 도사에게 접근했다. 지금 

누가 가까이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도사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무굉은 그가 하품하는 순간 빠르게 달려들

어 그의 아혈과 온몸 대혈을 점혈해버렸다. 너무 빠르다. 어떻게 왼손과 오른손이 번쩍 번쩍 하더니 도사는 그대로 

경직되어 허물어져버린다. 

그는 제압한 도사의 뒷목을 쥐며 속삭이듯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어?] 

도사는 눈알을 굴려 그를 보고는 크게 겁먹은 듯 했다.  누군지 알아본 모양이다. 눈빛이 공포감으로 가득 차 있었

다. 

[나는 자존자대야. 뭐 당연히 알겠지만.. 아무튼 금녀가 어디 있는지 어서 말해.] 

그의 말투는 매우 음침했다.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만큼 도사의 눈은 한층 더 두

려움이 짖어진 듯 했다. 눈빛이 흔들거리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빨리 말 안 해? 확 죽여버린다.] 

도사가 말을 안 하자 무굉은 좀 더 협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냉소하며 도사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러다가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작게 아차 소리를 냈다. 

[아이고. 미안. 아혈을 풀어줘야 대답하지.] 

그는 제 머리를 콩 쥐어 박으며 동시에 도사의 아혈을 풀어줬다. 그러자 도사는 혈이 풀리기가 무섭게 떨리는 음성

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소리 지르면 죽을 줄 알아. 금녀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해도 죽을 줄 알아.] 

도사의 안색이 새파래진다. 

[그.. 그, 금녀는 후원 여.. 여..] 

무굉이 뒷목을 세게 조르며 눈에 힘을 줬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천천히 말해. 안 죽일 테니까.] 

[금녀는.. 여, 영관전(靈官殿)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도사는 조금 안심이 되는지 약간은 덜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굉은 영관전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아는 곳이래봐야 이 상청궁만 알 뿐이었다. 

[영관전? 그게 뭐 하는 곳인데.] 

[그.. 그건..] 

도사가 머뭇거렸다. 그가 모른다니 거짓으로 알려주려 했지만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주춤거리는 것이다.  그걸 

알기나 하는지 무굉은 그를 잡아먹을 듯 입을 쩍 벌려 말한다. 

[빨리 말해. 혼나기 전에.] 

[저쪽으로.. 가면..] 

그가 화들짝 놀라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면.] 

[보, 보일 겁니다. 영관전이..] 

덜덜 떨며 순순히 다 대답하는 도사가 매우 불쌍해 보였다. 허나 무굉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는 그의 등

에 있는 영태혈(靈台穴)을 살짝 건드렸다. 일순간 도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풀썩 쓰러진다. 기절한 것이다. 

[몇 일간은 기억이 없을 걸.] 

무굉은 기절시킨 도사를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고 걸음을 옮겼다.  영관전은 상청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듯 했다. 

도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꽤 갔는데도 영관전이 나오지 않았다. 막 의심이 솟을 무렵, 그제야 영관전이 보였다. 아까 

상청궁보단 조금 작아 보였는데 그래도 큰 편이다. 상청궁은 워낙 큰 편이고 영관전은 그보다 조금 작을 뿐인 것이

다. 2층 난간에 영관전이라 써붙인 편액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로 들어가지?] 

그리고 보니 들어갈 길이 없었다. 정면에 입구가 있기야 했지만 열려 있지는 않았다. 괜히 열고 들어가다가 안에 누

구라도 있으면 어쩔 텐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속이고 뭐고 다 끝나게 되니 아주 조심해야만 

했다. 문득 고개를 젖혀 위를 보니 2층에 열려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는 기뻐하며 높이 뛰어올라 창문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안에서 기척이 없는 게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그 방안은 매우 훈훈했다. 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무굉은 그게 무슨 약 냄새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실상 광표장

법을 익히기 위해선 의술(醫術)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약초 따위에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 

냄새는 산조인(酸棗仁)을 볶는 냄새다. 문득 호기심이 든 그가 조금 다가서자 다른 냄새도 맡아졌다. 용안육차(龍眼

肉茶)를 달이는 냄새였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과연 맞다. 하나는 산조인 볶아놓은 그릇이요  하나는 용안육차 달

이는 그릇이었다. 확인한 무굉은 매우 기괴하게 여겼다. 

[갑자기 웬 약들이야. 누가 잠을 못 이루나.] 

확실히 산조인을 볶거나 용안육차를 마시는 경우는 잠을 못 이루는 경우에나 쓰였다. 뚜껑을 열어 양을 확인해보니 

둘 다 양이 많다. 

[단체로 잠을 못 이뤄?]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는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님을 생각해냈다. 그는 곧 그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살짝 열었

다. 밖은 조용하다. 어둡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살며시 발걸음을 옮겨 금녀가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방이 

꽤 많았는데 수련실 같기도 하고 침실 같기도 했다. 혹시나 누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든 그는 아무도 없음을 알면

서도 계속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방을 다 둘러봐도 금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린 말코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해?] 

무굉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가서 목젖을 뜯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

다. 내공이 중후하여 청각이 예민한 무굉이기에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크으크으> 하는 게 신음소리 같다. 그는 

다시 호기심이 치솟았다. 소리의 근원지는 영관전 맨 구석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뭐야 여긴. 아무 것도 없잖아.] 

분명 소리는 들려오는데 문이라던가 통로 같은 게 없었다. 일단 이곳 저곳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특

징도 없다. 무굉은 답답했다. 

[저거 혹시 금녀 소리가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렇게 점령을 당하자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통로를 찾아내야겠

다고 생각하고 다시 손을 놀려 벽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뭐가 없잖아.] 

화가 난 그는 평범한 방법으론 안되겠다 생각했는지 벽에 우장을 맞붙였다. 그리고는 내공을 끌어올리자 단숨에 벽

을 허물어져버렸다. 나무로 되어 있어서 그냥  주먹으로 쳐도 부서질 테지만 시끄럽게 하면  안되기 때문에 이렇게 

귀찮은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힘없이 쓰러진 벽을 통하니 과연 안에 길이 보였다. 무굉은 이럴 줄 알았다며 히

히 웃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은 단단한 철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귀신이라도 잡아 두었나. 무굉은 뭘 이렇게까지 막아놓

았나 싶었다. 순간 갑자기 앞에서 괴성이 터져나온다. 

[또 어떤 놈이냐!] 

아이고, 이렇게 기쁠 순간이 있나. 무굉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방금 괴성은 바로 금녀의 목소리가 아니던가. 그는 

허둥지둥 달려가 말을 꺼냈다. 

[난 자존자대다. 널 도와주러 왔지.] 

[뭐야?] 

어둠 속에서 다시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들린다.  심히 어두워서 대부분 사람들은 붉을 밝혀야 그녀를  볼 수 있을 

듯 했지만 무굉은 내공이 뛰어나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모두 두꺼운 쇠사

슬에 꽉 묶여져 있었고 여전히 혈도도 짚인 상태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는 밥 그릇들이 어

지럽게 늘어져있다. 

[히야. 말코들이 널 굉장히 무서워하는가 보다. 뭐가 걱정이라고 이렇게 철저히 제압을 해두셨나 그래.] 

[시끄럽다! 여긴 뭐 하러 온 것이냐?] 

[나 참.. 도와주러 왔다는데 더럽게 시끄럽군.] 

무굉이 중얼거리며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금방 털썩 주저앉는다. 

[역시 혈도도 찍혔구만.] 

[흥. 네놈이 혈도를 찍어서 이런 비참한 꼴이 된 거지.]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매우 초췌해 보였다. 예전에 보이던 그 힘 넘치는 악녀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다 죽어

가는 주제에 성깔만 있는 노파 쪽에 가까웠다. 그 꼴이 우스워 무굉은 자꾸 킥킥거렸다. 

[우습다 그거냐?] 

[당연한 걸 묻냐. 이렇게 보니 너도 꽤 불쌍해보인다.] 

[날 구해주면 너부터 죽여버릴 테다.] 

금녀가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말했다. 그러자 무굉이 대소를 터트린다. 

[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감히 자존자대를 죽일 능력이 있을까?] 

[너..] 

그녀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진다. 하지만 무굉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짚인 혈도를 물어 혈도를 풀어주었다. 

혈도가 풀리자 그녀가 벌떡 일어서서는 쇠사슬을 끊으려는 듯 바둥거린다. 

[보통 철도 아닌 것 같은데.] 

[흥!]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야 힘으로만 해본 것이고 그렇게 해서 끊기지 않으니 내공을 이용하면 된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런데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다리에 힘이 쪽 빠졌던 것이다. 

[뭐 하는 거야. 그것도 못 끊어?] 

[닥쳐.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저것들은 다 뭔데?] 

그가 사방에 난장판으로 늘어진 밥 그릇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는 힘도 없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말코들이 나를 잠들 게 하려고 하길래 다 갖다 내던졌을 뿐이야.] 

[혈도를 찍힌 주제에 무슨 수로 밥 그릇을 내던져.] 

[흥. 모르면 입 다물어라. 이 혈도를 짚인 건 저것들을 몇 일간 계속 내던진 후야.] 

[그럼 보름 간 밥 한끼 못 먹은 건가?] 

그의 물음에 금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이었다. 보름 간 한끼는 고사하고 한 톨도 목구멍을 넘기지 못했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지내온 시간인 것이다. 본래 이곳에 갇혔을 땐 쇠사슬에만 묶였을  뿐이었고 도사들이 몇 일간 꼬

박꼬박 밥도 챙겨다 줬었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그녀가 날뛰며  도사를 둘씩이나 죽이고 기껏 주

는 밥도 다 걷어차버리자 급기야 그녀의 혈도를 제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엔 밥을 먹여주려 했으나 입안에 밥

이 들어와도 절대로 삼키지 않아서 얼마 동안은 밥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뭘 잠들 게 만든다는 거야?] 

[이 청성의 말코들이 더럽게도 밥에다 산조인을 처넣더군.] 

무굉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먹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약이 들었는지 알어?] 

[날 바보로 아느냐? 그 정도는 냄새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 잘 안 먹었네. 먹었다면 잠들었을 거야.] 

말을 잇던 그가 또 의문이 생겼는지 다시 묻는다. 

[헌데 왜 잠들게 하려고 하지?] 

그녀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 소리를 버럭 지른다. 

[이 멍청한 놈아! 내가 시끄럽게 구니까 잠들 게 하려는 것이지.] 

그 말에 무굉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아하, 하며 손뼉을 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무굉은 뭘 생각하는지 상념에 잠

겨있었고 금녀는 그 무굉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날 도우러 왔다고?] 

[아, 그래! 널 도우러 왔지.] 

[흥. 날 데려가려는 수작이라면 때려쳐라.] 

무굉이 웃음을 터트린다. 

[누가 널 데려간다냐. 떼로 가져다 줘도 안 데려가.] 

[너..] 

그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금녀처럼 추악한 괴물이야 정말 떼로 줘도 안 데려갈 것이다. 그 전에야 진양과의 약

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이번엔 다른 방법이 있었다. 금녀가 다시 말한다. 

[흥. 좋아. 그렇다면 날 어서 도와줘라.] 

[그 전에 약속할 것이 있지.]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곧 그것이 뭔지를 묻자 그가 헤벌쭉 웃는다. 

[그러니까 내가 널 구해주면 넌 반드시 한 달 뒤에 그.. 그.. 아무튼 그 산으로 가야해. 야산인데 여기서 남쪽으로 보

름만 가면 나올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왜 그리로 가야해.] 

[싫으면 안 구해줄 거다.] 

[그럼 그만둬라!]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 싫었다. 죽으면 죽었지 명령을 받기는 싫다. 이런 반응은 무굉으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크게 놀랐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아무튼 가야해. 반드시 한 달 뒤에 그리로 가야해.] 

[왜 내가 그리로 가야 한다는 것이냐?] 

[음.. 그게.. 누군가가 널 그리로 데려가 달라고 했어.] 

그는 왠지 진양이라고 말하면 안될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나 그녀는 눈치가 빨라 금방 깨닫고는 냉소했다. 

[그 진가 꼬마 놈이겠지. 네 아우 말이다.] 

무굉이 크게 놀라는데 그녀가 다시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 원한다면 가주지. 가서 그놈을 죽여버릴 테다.] 

[안돼! 내 아우를 죽이면 너도 나한테 죽는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난 너를 이기지 못하니까.] 

그는 큰일났다고 생각하고는 머리를 굴리다 번뜩 생각나는 게 있어 소리쳤다. 

[그럼 네 딸도 죽여버릴 거야.] 

[뭐.. 뭐라고!] 

그녀가 버럭 악을 써댄다. 

[네 이놈. 그래 내 딸이 어디 있는지 알겠구나. 어디 있느냐? 어서 말해!] 

그녀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크게 흥분한 듯 했다. 그 모습에  무굉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는 부모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고 사랑도 해본 적이 없어서 모정(母情)이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수녀가 이  금

녀의 약점이라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멍청하다지만 그것도 모른다면 사람도 아니다. 

[수녀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어?] 

[옳아! 그럼 진가 놈이 알겠구나.] 

그녀가 눈을 무섭게 뜨며 말하더니 일순 눈빛을 빛냈다. 

[그래. 그럼 그놈을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군.] 

[갈 거지? 그 야산에.] 

[좋다! 갈 테니 날 구해줘라.] 

무굉이 기뻐하며 쇠사슬을 와락 움켜쥐었다. 한번 힘으로 부숴보려 했는데 역시 안 된다. 곧 내공을 끌어올리자 엿

가락 휘듯 금방 흐물거렸다. 그때 기합을 내지르며 양옆으로 세게 잡아당기자 콰직, 소리와 함께 그  두꺼운 쇠사슬

이 끊어지고 말았다. 발에 묶인 쇠사슬도 그렇게 끊어버리고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사방이 여전히 고요했다. 영관전 밖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바람소리는 왠지 모를 귀기가 감돌게 했다. 하지만 무굉은 

안심하지 못하고 작게 말문을 열었다. 

[아 맞다. 잘 들어. 나는 널 구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냐. 방금 날 구한 건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냐?] 

금녀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냉소했다. 그러자 무굉도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귀신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냥 누군가가 구해준 거고 절대로 내가 구해준 건 아니라고 해야해.]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해주지?] 

[그건.... 나도 몰라. 그러니까 누구한테든지 구해준 사람이 무굉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아니 그것도 안되고 그냥 오

늘 날 못 본 걸로 해!] 

그가 갑자기 흥분했다. 금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문제될 것

은 없으니 괜히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단 무굉이 통해서 들어왔던 방으로 달려갔다. 2층의 구석진 곳에 있는 단약방이다. 단약방을 여니 약 냄새

가 코를 찔렀다. 순간 금녀가 눈을 번쪅였다. 눈에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흥. 여기에 있는 약들로 날 잠재우려 했구나!] 

[시끄럽게 하지마. 들킬 일 있어?] 

그녀가 시끄럽게 하자 무굉이 초조하여 그를 말렸다. 들키면 끝장이다. 그들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존자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소문이 두려운 것이다. 일단 이 영관전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빠져나가면 바로 금녀와 헤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런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극히 조용히 해야만 했다. 그러나 금녀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에게 명령하지 마라. 내가 네 부하라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난 이 약들을 단방에 없애버려야겠어.] 

[미쳤어. 미쳤어!] 

무굉은 치를 떨었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싶었다. 사방이 너무 고요해서 함부로 말도 크게 못하는데 이 약들을 부수

겠다니. 그야말로 들키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이 번쩍 쳐들렸다. 그 손 아래는 볶아진 산

조인이 든 그릇이 보였다. 무굉은 소스라치게 놀라 재빨리 달려들어 떨어지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놓치 못해?] 

[조용히 해야 한다니깐!] 

[지금 말코들의 눈알을 파먹지 못하는 것도 억울하다. 그런데 내가 보름  간 굶게 만든 이 저주스러운 약들도 깨부

수면 안 된단 말이냐?] 

그녀는 어지간히 분노한 듯 했다. 실상 배고픔이란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다. 옆에서 듣고 보는 거와는 다

르게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고통이다. 사흘을 못 먹으면 도둑질도 하고 열흘을 못 먹으면 사람도 잡아먹는 게 인간

이다. 더구나 금녀는 제법 음식을 탐했기 때문에 보름 간 굶은 것은 정말 대단한 고통이었다. 지금 이 산조인을 밥

알로 착각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뛰어난 정신력이요 제법인 내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무굉도 음식을 탐하긴 하지만 보름이 넘도록 굶어보지는 못했다. 분명 그는 일찍 부모를 잃었다. 지금은 그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를 여의기 무섭게 한 여인에게 구제되었기  때문에 제법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 후론 무공이 초절하고 딱히 혼란스러운 일에 휘말릴 일이 없었다. 덕분에 며칠 이상을 굶는 일은 있

지도 않았고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하루만 굶어도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무굉인 것

이다. 하루에 못해도 두끼 이상은 먹어야 하고 고기를 안주 삼아  술도 많이 마시는 것. 그것은 무굉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러니 무굉은 지금 이 금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까짓 거 나중에  도사들을 죽이거나 하는 

게 낫지 뭐 하러 지금 이 약들을  없애버리겠다는 건가 하며 속을 애태웠다. 그저 역시  금녀라서 매우 독하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이 손 놔!] 

[제기랄. 안 놓을 테다.] 

그녀가 다시 악을 쓰지만 무굉은 죽어도 놓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반대쪽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다른 손으로 약

을 부수려는가 보다. 무굉은 빠르게 그녀의 어깨 견정(肩井)혈을 후려쳤다. 팍, 하는 소리가 단약방 내를 울린다. 바

로 백타권의 수법을 이용한 것이다. 견정혈을 얻어맞은 그녀는 반신에 힘이 빠지는 듯 몸을 비틀거렸다. 마침 먹은 

것도 없어서 내공도 끌어올릴 수 없는 그녀였기에 그 고통이란 꽤나 컸다. 

[나쁜 놈..] 

그녀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약을 노려보았다. 약을 보고 있나니 금방 눈에 핏발이 선다. 

[역시 너무 지독해.] 

무굉은 우습기도 하고 어이 없기도 하여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면서까지 저 약을 부수고 싶을까 했다. 그녀의 붉

어진 눈을 보고 있자니 점점 소름이 끼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다시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켰다. 약이 놓여진 

곳으로 가는 게 또 부수겠다는 것 같았다.  무굉은 안 되겠다 싶었다. 단숨에 그녀의  지양혈을 제압해버리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점혈은 할 수 없을 듯 했다. 자신의 내공은 월등한데 아무리  살짝 친다고 해도 쌀을 먹지 못한 

그녀가 점혈을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잘못 치면 원기가 상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비틀비틀 약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무굉은 깜짝 놀라 일단 달려들었다. 항상 적을 제압할 때는 기절을 시켜야  해서 점혈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점혈을 

하면 안 된다. 그럼 어떤 수법이 있는가. 그는 그것을 그것을 머리에 담고  재빠르게 금녀의 정면을 막아섰다. 어느

새 그녀의 손이 날아들고 있었다. 힘이 없이 흐물흐물한 손놀림이다. 그래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릇을 부술 것

이다. 정말 이런 사소한 일에서 막혀야 하는가 새삼 어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에잇!] 

그는 궁여지책으로 그릇에 놓여진 산조인 그릇을 잽싸게 들었다. 그러자 금녀의 좌수가 나무 탁자만을 후려치려 했

다. 무굉은 그냥 무시하려다 갑자기 깨달아지는 게 있어 황급히 왼손으로 그녀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너.. 너..] 

완맥을 제압하자 금녀는 순식간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몸만 부들부들 떨었을 뿐

이었다. 눈빛도 한 차례 흉폭한 빛을 발했지만 보통 힘이 빠진  게 아닌 듯 스르르 풀렸다. 과연 곡식을 먹지 못해 

정기(精氣)가 부족해진 그녀는 아주 살짝 쥔 이 정도도 못 견디는 것 같다. 

무굉은 그녀와 계속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완맥을 놓으면 다시 난리법석을 피울 게 뻔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산조인을 보았다. 잘 볶아진 산조인이 향을 낸다.  갑자기 그의 머리통을 꿰뚫는 방법이 있었다.  그는 금방 웃음을 

터트리며 그릇에 있는 산조인을 모조리 금녀의 입속으로 처넣었다. 금녀가 저항하듯 으으, 하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무굉은 매정하게 그의 입으로 산조인을 수도 없이 처넣는다. 

그는 지금 그녀를 잠재우려는 것이다. 이 정신나간 여자를 빨리 잠재우고 뭔  일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겠다 생각했

다. 확실히 도사들이 왜 그녀를 재우려고 했는가 문득 이해가 가기도 했다. 산조인을 있는 대로 다 먹인 그는 그제

야 그녀의 완맥을 풀었다. 그녀는 개구리처럼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이.. 죽일.. 너..]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졸음이 엄습하는지 눈이 스르르 감겨서는 떠지지가 않았다. 안색도 창

백해져서는 흡사 죽을 때가 가까워진 노파 같았다. 

반 각이나 그렇게 움찔거리던 그녀는 그 후에야 털썩 쓰러졌다. 무굉이 그녀의 콧김을 느껴보니 숨은 고르다. 깊이 

잠든 게 분명했다.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이다. 여차하면 도사들이  눈치챌 뻔했다고 쿵쿵 

뛰는 가슴을 조렸다. 헌데 일단 그녀를 업어들고 막 창문 밖을 돌아봤을 때였다. 갑자기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이고! 이 멍청한 무굉아.] 

그는 제 머리를 퍽, 소리나게 쥐어박았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녀를  아무리 잠 재워야 했다고는 하지만 그

렇다고 정말 잠 재우면 이젠 어쩐단 말인가. 그녀가 알아서 가도록 내버려두고  자신은 몰래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

젠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를 직접 그 야산까지 데리고 가던가 아니면  다른 곳에 버려둬서 직접 가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안돼. 약속은 지켜야지.] 

그는 다른 곳에 숨겨뒀다가 직접 가게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다시 이곳을 벗어나야

만 했다. 도사들이 눈치채면 안 된다. 그는 재빠르게 단약방 창문을 뛰어넘었다. 

그 때였다. 

[누구냐?]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봤는지 호통을 쳤다. 무굉은 다시 아차, 했다. 잠시  초조해져 성급히 몸을 날리다 결국 들키

고 만 것이었다. 다시금 자신을 자책하며 잽싸게 몸을 퉁겼다. 이렇게 된 이상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수 밖에는 없

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얼굴을 가리려 애를 썼다. 

[멈춰라!] 

영관전 옆에서 도사 두 명이 쫓아온다. 무굉은 그것만 보고  그 후론 절대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 어둠을 틈타야 

했다. 도사들이 제 얼굴을 보고 누군지 알아차린다면 일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아는  길은 아까 왔던 길 뿐이었다. 

그 방향으로 한시바삐 되돌아가는 게 중요하다. 

[어서 경종을 울려!] 

뒤에서 뭐라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무굉은 뒤를 흘낏 해보지도 않았다. 무조건 발만 재빠르게 놀려 달

려나갈 뿐이었다. 

잠시 달리자 금방 후원이 나왔다. 그 후원에 막 발을 디디는 때쯤이었다. 

<뎅 뎅 뎅 뎅> 

갑자기 청성산에 경종이 울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규칙으로 울리는 이 중후한 종소리는 어둠을 타고 청성산 

구석구석까지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깊이 꿈속을 헤매고 있는 도사들을 모조리 깨우기에 이르렀다. 

[이크. 큰일났구나.] 

무굉은 짐짓 통곡하듯 제 무릎을 쳐댔다. 앞을 보니 아까 넘었던 그 담장이 보인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담장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아까 들어올 때처럼 은밀한 동작은 아니었고, 오로지 도망치기  위함인 듯 빠르기만 했다. 그러

는 사이 이곳저곳에선 도사들의 분분한 외침이 터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본당은 무사히 빠져나온 듯 했다. 

이젠 청성산을 내려가는 게 문제였다. 청성산은 크고 넓어서 사방으로 도당이 널려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밤새 수도

하는 도사도 많았다. 순찰하는 도사도 또 많을 것이 확실했다. 경종 소리는 우레인 양 커서 청성산을 모두 들쑤셨으

니 그 도사들도 들었을 것이다. 그걸 잘 말해주듯 널린 도당에서 도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걸 또 어떻게 해. 앞에 셋, 좌우에 다섯!] 

전력을 달려 하산하던 무굉이 급히 몸을 세우며 한탄스럽게 되뇌었다. 불안한 마음에 내공을 끌어올려 보았더니 과

연 주변에서 많은 숨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도사들이 어떻게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야

만 한다. 자꾸 그것을 생각하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뭔가를 발견했다. 머리 

위에 오동나무의 넓직한 잎이 보였다. 

[저것으로 얼굴을 가려?] 

얼굴. 얼굴.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만을 가지던 그는 오동나무 잎을 보고 상상해보았다. 저 잎으로 자신의 얼굴

을 가린다면 어떨까. 왠지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의 얼굴은 크니 한 네댓쯤 따서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면 제

법 괜찮을 듯 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다. 그는 서둘러 잎 네댓을 얼굴에 붙였다. 허나 자꾸 흘러내린다. 어느새 베어

나고 있는 땀이 잠시 붙여주긴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생각하고 이 잎들을 감쌀 뭔가

를 생각해보았다. 줄이면 좋을까. 자신의 소매나 몸을 주섬주섬 뒤져보지만 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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