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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슬픔에서 한(恨)으로 (17/90)

                                    第 六 章. 슬픔에서 한(恨)으로

모든 건 몸이 으스스 떨리는 어느 가을의 흐릿한 날에 일어났다. 대낮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사위는 음습했다. 

하지만 여느 날처럼 시전(市廛)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제각기 분주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를 유유히 걷는 한 여인이 있었다.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그녀의 온몸에 달린 장식품들이 모두 다 

대단히 비싼 장식품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대조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한쪽에선 싸구려 노리개 하나를 팔겠다 오도방

정을 떨고 한쪽에선 상아(象牙) 등 존귀한 것으로 만든 장식품을 온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런 부러움 반, 질투심 반으로 날아오는 수많은 시선을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마치 수없이 

겪어온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사뿐사뿐 고귀하게 걸어 그녀가 도착한 곳은 평범한 만두가게였다.  그

녀는 그 만두를 바라보며 고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히  그 만두는 영 질이 떨어져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굳이 그 만두를 수십 개나 샀다. 주인이 손을 비비적거리며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에 그녀는 소매를 

잠시 뒤척이더니 엄지만한 금덩어리를 내놓았다. 

그녀는 다시 사뿐사뿐 걸음을 돌렸다. 이젠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전가본장(全家本莊)으로 

이 주변에선 가장 크고 부유한 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집 전동(全同)이라는 사내의 본처였다. 성은 노(盧)씨로 

처녀 때 이름은 효정(效情). 어찌나 효심이 깊고 정이 많은지 처녀 때는 그렇게 불렸었다. 

그녀의 입가엔 어느새 가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제 품으로 달려와 기뻐하는 모

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두를 사왔으니 분명 기뻐할 것이다. 훨씬 더 질 좋고 

맛있는 만두를 만들 수 있는데도 그 아이는 유독 시전에서 파는 싸구려 만두를 좋아했으니까. 

허나 그리도 잔악한 악녀를 내놓는 일은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노씨는 일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앞에 일어나는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던 최악의 모습이었다. 그

녀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건 그녀의  눈에서 나는 불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공

에 비춰지는 모습. 그건 거대한 장원이 통째로 불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누군가 툭 치기라도 하면 홀라당 자빠질 듯 몸을 비틀거렸다.  힘이 쪽 빠진다. 하나 뿐

인 아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만두가 든  보따리도 떨어트렸다. 불길이 활활 솟아대는 장원  주변에선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운 불길은 쉽게 멈춰질 것 같지 않았다. 서늘하고 건조한 가을 날

이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장원을 단번에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보!] 

겨우 그녀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그제야 그녀를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웅성거림에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장원으로 

뛰어들으려 했다. 사람들이 놀랐다. 단숨에 그녀를 가로 막고 서너 명의 장정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허나 어디서 그

런 힘이 터져나오는 걸까. 힘인지 발악인지 모를 괴력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왔다. 장정들과 사람들의 방해를 뿌

리치고 그녀는 결국 장원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말았다. 

장원 안은 정말 화염 세계와도 같았다. 만물을 불태워버릴 듯 불길은 나무요  풀이요 그녀가 아껴 키우던 꽃들까지 

단번에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노씨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이 장원 안에서 살던 하인이든 친척이든 그 누구든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내려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청은 물론이고 후원이며 방방마다 전부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의 모습은커녕 그

림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을 따라다니며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던  백의 시녀들도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

과 아들도 보이지 않았다. 시아버지요 시어머니요 다 안 보인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이쯤이면 그녀의 머릿속엔 이런 의문이 생겼을 법도 했지만 유난히 정이 많던 그녀

는 오로지 사람을 찾았다. 어린 시녀 한 명도 크게 아끼던 노씨다. 왜 처녀 때 이름이 효정이겠는가. 그녀의 입에선 

연신 처절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승아야! 여보!] 

그나마 그 외침마저 불길에 먹힌 듯 멀리 퍼져가지도 않았다. 머리가 모두 풀어져 흡사 미쳐버린 여자 같고 옷깃이 

탄 건 물론이며 이곳저곳 화상도 입었지만 그녀는 계속 입을 벌려 소리쳐댔다. 일순 와지직, 하는  소리가 울렸으나 

그녀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고열의  고통이 얼굴에 맞닿는다 느낄 때 그녀는 괴성인  듯 신음인 듯 

귀신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지붕을 떠받치던 큰 기둥 하나가 그녀의 안면을 후려친 것이었다. 그녀는 뒤로 쓰러져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얼굴 살가죽이 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 기

절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 크나 큰 고통에 감사했다. 절대로 기절할 수 없었다. 아직 아들도 남편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자

신의 얼굴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도 생각해보지 않고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헌데 그녀가 막 사전관(事

全館) 구석에 있는 작은 방 문을 열 때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가 솟아져 나옴과 함께 거대한 폭풍처럼 그녀의 

몸을 수장 밖으로 밀어내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날아가 뒤의 나무 벽을 몸통으로 부수어버렸다. 

그래도 기절하진 못했다. 이번엔 고통보다 의지가 앞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작은  방문이 활활 타고 있다. 뛰어들어

가며 불길이 다시 얼굴과 온몸으로 달라붙었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내달렸다. 얼굴과 팔에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다. 

옷깃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던졌다. 내의  하나만 달랑 입고 팔과 다리를 모두 드러내고 있

다. 허나 멈추지 않았다. 앞에서 뭔가 희끄무레한 것을 본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찢어지게 부릅뜨며 부지중에 비명을 질렀다. 앞 바닥에는 허연 비단 옷을 입은 작은 몸뚱이가 

놓여져있었다. 분명 새하얀 비단 옷이긴 했지만 또 가까이서 보니 이곳저곳  타들어가 있었고, 붉은 핏물도 보였다.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건 자신의 하나 뿐인 소중하디 소중한 자식인 승(承)이란 이름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일으켜세웠다. 하마터명 기절할 뻔했다.  아들의 옆목이 깊게 패여져 있다.  예리한 검으로 베기라도 

했는지 깨끗이 갈라져있었다. 이미 죽은 것이다.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늘어진 아들을 힘차게 흔들며 연신 곡성 

같은 외침을 질러댔다. 

[승아야! 네 어머니다. 만두도 사왔단다! 눈을 뜨거라. 스, 승아야!] 

그러나 그가 괴물이 아닌 이상 눈을 뜰 수도 입을 열 수도 없다. 그녀는  그것 알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흔

들어댔다. 순간 뜨거운 화기가 등줄기를 건드렸다. 마치 열화가 뼈속까지 들어가는 듯 내장까지 침투하는 듯 몸속으

로 그 고열이 느껴졌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들도 죽고  남편은 어찌 되었는지 알수도 없다. 한탄스럽다. 왜 하필 

그 시간에 만두를 사러 나갔는가.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라 생각했다. 일가가 몰살됐으니 더 살고 싶지도 않았다. 

[승아야. 이 어미가 너를 보호해주겠다.  너는 극락세계로 가있겠지? 슬퍼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어미는 금방 간단

다.] 

노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내의를 보니 벌써 내의도 불타고 있었다. 막 불이 붙

은 듯 정신없이 타고 있다. 빨리 벗어던지지 않는다면 큰 화상을 입고 죽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벗어

던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서 불타 죽을 것이다. 그녀는 불길의 재물로 없어진 지붕 위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번쩍거리는 게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부르짖었다. 

[내 행복을 너희가 시기했구나! 그래 내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느니라. 아들도 남편도  시녀며 아버님, 어머님 

모두를 죽게 하였으니 나도 살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원하는 건 이것이 아니겠느냐!] 

그녀는 말을 마치며 그대로 앞의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마침  화염이 살벌하게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이미 불이 

번진지는 오래되었지만 집안을 태워가며 더욱 불길이 거세졌을 때였다. 이대로  뛰어든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다. 한 줌의 흙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불길이 아가리를 벌렸다. 이제 그녀가 뛰어들면 불길은 그녀를 죽음의 세계

로 안내하듯 두 팔을 벌려 감싸안을 것이다. 

[어리석은 년.] 

노씨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사람의 목소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불구덩이가 내뱉는  말이

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마음이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후회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녀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엄청난 고통이 온몸으로 엄습하는 순간 그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노씨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하늘로 전가본장 사람들이 다함께 신선처럼 스르르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기도 했

지만 크게 슬펐다. 자신만 버려두고 떠난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향해 입을 벌려 악을 썼다. 

[날 버리지 말아요! 나도 데려가요!] 

하지만 그들은 무표정했다. 마치 당신은 누구냐는 듯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고 무관심했다. 그 가운데 남편의 모습

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의 왼쪽 눈이 없었다. 귀도 잘렸고 한쪽 팔도 보이지 않았다. 영락없는 귀신의  모습

이었다. 그녀는 그 끔찍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허나 다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보니 그들 

모두가 병신의 모습이었다. 다리가 잘리고 목이 없는 시녀. 온몸이 반으로  갈라진 시아버지며 시어머니. 목이 깊게 

파여 아직도 피가 흐르는 듯한 제 아들까지.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저건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날 속이려고! 너희들은 누구냐? 어디서 감히 날 속이려 드는 것이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눈이 따가웠다. 왜 그런 건지는 몰랐지만 생각할  수도 없었다. 고통이 가셔 눈을 

떠보자 이번엔 그들이 모두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의 귓전으로 그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동시에 울음을 터트리니 공동묘지에라도 온 듯 오금이 저렸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칭얼대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아들이었다. 목에 상처도 없다. 언제나  시전에서 만두를 사달라 

칭얼대던 사랑스런 내 아들 그 모습이었다. 

[승아야! 살아있구나. 어디 이 어미 품에 안겨보렴!] 

그녀가 달려갔다. 가슴을 펴고 손을 벌려 그가 뛰어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들은 오지 않았다. 다만 인상을 찌푸렸

다. 오른쪽 눈썹만 치켜오르며 두려운 얼굴빛을 보이는 그 모습. 그건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짓는 표정

이었다. 노씨는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아들이 자신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왠지 눈물이 솟아내렸다. 

[스, 승아야. 왜 이 어미를 그런 눈으로 보느냐. 만두 사줄 테니 이리로 오거라.] 

아들은 대답이 없다. 오히려 그녀를 향해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아들 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온통 흑색 망토로 온몸을 감싼 사람이다. 얼굴도 안 보이고 그저 흑색 망토만 보였다. 그 자의 몸에 가려져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노씨가 소리쳤다. 

[이봐요. 거기서 비켜요. 아들이 안 보이잖아요!] 

그 순간이었다. 흑색 망토인의 손에 어느새 검이 들려있었다.  어디서 빛이 쏟아졌는지 햇살에 반짝이는 그 검에선 

서슬푸른 기운마저 느껴졌다. 아주 묘하기만 했다. 그 검이 일순 번쩍였다. 그리고 그 흑색 망토인은 그냥 내달렸다. 

갑자기 사라진다. 

노씨는 조금 어이없어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미처 같기도 전에 앞에 아들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다시 멀쩡해졌던 아들의 목이 다시 반쯤 갈라져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달려가 아들을 안으려했다. 아들이  사라진

다. 손으로 잡으려는 순간 사라져 노씨는 허공만 안고 만 셈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미친 듯이 절규

했다. 눈물이 피눈물이 되었고 곡성은 천지 사방을 울렸다. 

어느 순간, 노씨는 따귀를 후려맞는 아픔에 정신을 번쩍차렸다. 눈을 뜬 것이었다.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

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내도 맡아졌다. 왠지 마음이 평온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좀 전의 기억을 생각해내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알고보니 자신은 침상 위에 고이 눕혀져 있었던 듯 했다. 그녀가 손뼉을 쳤다. 좀 전의 기억이 꿈이

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흐느꼈다. 총명했던 그녀다. 방금 전 기억이 꿈이긴 하지만 전가본장의 기억은 꿈이 아닌 실제

인 걸 깨달아버렸던 것이었다. 자신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얼굴도 따가웠다. 무슨 칼

로 콕콕 찌르는 듯 따끔한 게 한바탕 손으로 긁어버리고 싶었다. 헌데 그녀가 부지중에 손을 들어올리자 어디서 중

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점을 뜯어내고 싶나보군.] 

노씨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알고보니 침상의 옆 창가 앞에 웬 여인이 서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확인할 순 없었지만 목소리로는 대충 중년 여인쯤 될 것 같았다. 핏물처럼 붉인 빛깔에 길고 긴 열 개의 손톱이 노

씨의 시선을 끌었다. 

[온 몸에 약을 처발랐으니 가만히 있는 게 이로울 거다.] 

노씨는 한동안 눈만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보니 약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바른지 오래된 

듯 거의 맡아지지 않았지만 얼굴에도 발랐는지 미약하게나마 맡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은 상황 파악이 잘 이루

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이 불구덩이에 뛰어들면서 들렸던  목소리

와 매우 흡사했다. 점점 궁금증이 연기 피어오르듯 노씨의 머리를 뒤덮었다. 

[당신은 누구죠? 내가 왜 여기있죠?] 

[입 다물어라. 한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그 주둥이를 찢어버리겠다.] 

중년 여인의 말은 악독하기 그지 없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말 입이라도 열었다간 당장에 그 주둥이를 찢어버릴 

것 같다. 노씨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어 입을 꼬옥 다물었다. 중년 여인은 그제야 가볍게 웃는 듯 하더니 조용

히 바깥 경치를 구경했다. 문득 그녀가 한숨을 토해낸다. 안타깝다던가 억울함에서  오는 그런 한숨이 아니었다. 황

홀이나 감탄에서 나오는 그런 힘 빠지는 한숨이라고나 할까. 노씨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 또 궁금증이 치솟

는다. 노씨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돌려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을 바라본 노씨는 그저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만이 생각날  뿐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 것인

가. 창이 조그만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붉으스레한 낙엽이 떨어지며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날아다

니는 새들은 서늘한 날씨도 못 느끼는지 저들끼리 떠들기만 했다. 시원한 소리도 들렸다. 좀 더 고개를 들어보니 멀

리 허옇게 뭔가 떨어지는 게 보인다. 물 같은 게 아무래도 폭포 같았다. 갑자기 가까이서 그 절경을 보고 싶은 생각

이 들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노씨 또한 아름다운 광경을 좋아하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꽃을 사랑

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한 여인이 바로 노효정이었다. 그녀는 저 중년 여인이  뭐라 할까봐 조용히 몸을 움직

였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통증이 엄습했다. 

[멍청한 년. 거기서 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지 욕심도 많군.] 

중년 여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뱉는다. 노씨는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통증을 느끼면서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었다. 그녀가 귀신이라도 되는가 싶었다. 뒤에 눈이라도 달렸나 그녀의 뒷통수를 바라보기도 했다. 

[다리에 엄중한 화상을 입었다. 미친 년도 아니고  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난리야. 내가 한 발만  늦었으면 다리는 

고사하고 네 온몸이 그 꼴이 났을 거다.] 

[그.. 그렇다면.] 

[입 다물고 네 다리나 한번 봐. 그게 사람 다리인가.] 

노씨는 뜨끔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꺅, 하는 짤막한 비명이 터졌

다. 이제야 안 것이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온몸에 하얀 붕대만 감고 있었다. 다리도 붕대로 감겨져 있

었다. 자연 볼 수는 없겠지만 무릎 부근은 붕대가 감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무릎 모습만 보고도 다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또한 붕대로 감겨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고운 선은  온데간데 없었고 울퉁불퉁한 게 무슨 

고목 몸통쯤 되는 것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이게..] 

[불구덩이에 뛰어들길래 나름대로 네 년 머리를 낚아 챘지만 조금 늦었다. 다리는 이미 불길에 가득 휩싸여서 완전 

타들어갔어. 너도 참 신기한 년이다. 어떻게 그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는지 원.] 

[내 다리가..] 

[낙심 말아라. 네 얼굴을 본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걸.] 

노씨의 안색이 대변했다. 

[뭐라고요!] 

그녀는 급히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했다. 그러나 팔이 들려지다가 갑자기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 올라가지

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무언가 자신의 어깨를 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팔이 굳기라도 한 듯 되어버린 것이다. 

그제야 중년 여인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 만지지 말랬지. 지금 얼굴을 더 만지면 아마 괴물이 될 거다. 하기야 지금도 괴물이지만.]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제 얼굴이요!] 

그녀가 흥분하자 중년 여인은 기괴한 미소를 흘렸다. 

[괴물이라니깐.] 

[동경(銅鏡)을 줘요!] 

중년 여인이 노씨를 잠시 바라보았다. 얼굴에 한심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곧 걸음을 옮겨 작은 상자를 열더

니 그 안에서 금빛이 나는 동경을 꺼내주었다. 동경 윗부분에 공리지정 천고불후(空悧之情 千古不朽)라는 글자가 보

인다. 제법 명필이었다. 그러나 노씨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게 중요했다. 그리

고 자신의 얼굴을 본 그녀는 곧장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뒤로 스르르 넘어가고 있었다. 

[앗.] 

중년 여인의 입에서 놀란 부르짖음이 터졌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가 손을 내뻗었다. 헌데 우습게도 그녀의 손은 노

씨의 몸으로 가지 않고 동경으로 향했다. 노씨가 기절하면서 동경을 떨어트린 것이었다. 중년 여인은 잽싸게 동경을 

낚아채고는 기절하여 벌러덩 넘어간 노씨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쳐죽일 년. 아.. 이제 깨어나면 또 자결하겠다고 발광을 떨겠지.]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난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로 노씨는 깨어나자마자 죽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자신의 얼굴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깨달은  그녀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에 중년  여인은 

실소하기만 했다. 조금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뛰쳐나간 노씨는 그제야 이곳이 높은 봉우리  위라는 걸 알았다. 아까 창 밖으로 봤던  붉은 빛깔의 나무나 

새들은 모두 이 봉우리 위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은 꽤나 높았다. 까마득할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고지대였다. 갑

자기 노씨가 주저앉아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던 것이다. 그녀는  곧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지고 또 슬픔이 복받쳐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굳은 결심도 없으면서 뭘 죽겠다고 설쳐?] 

뒤에서 중년 여인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지만 노씨는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중년 여인도 그 말만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억울하게 흐느끼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본래 슬프거나 억울할 때 마음껏 울어버리면 잠시 평온해지는 법이다. 노씨도 그랬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슬픔이 

가득했지만 왠지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훌쩍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넓게 퍼진 절경을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다리가 후들거리진 않는다. 적응이라도 됐는가 싶었다. 그때 다시 중년 여인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으로 사

르르 흘러들어왔다. 

[슬픔이 앞서느냐. 분노가 앞서느냐.] 

노씨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문을 열었다. 

[슬픔이요.] 

[분노는?] 

[...모르겠어요.] 

[멍청한 년.] 

중년 여인이 냉소하며 내뱉었다. 노씨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제가 멍청한 년이죠?] 

[멍청하지 않느냐. 일가가 어째서, 누구에게 몰살되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슬퍼만 하다니. 너 같은 머저리는 그냥 나

가 뒈지는 게 백 번 낫겠구나.] 

중년 여인의 말이 험하기 짝이 없다. 노씨가 몸을 흠칫 떨었다. 왠지 이 중년 여인은 어째서, 누구에게 일가가 몰살

됐는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알고 계시나요?] 

노씨는 나름대로 차분히 말한다 했지만 역시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중년 여인이 냉소한다. 

[나는 안다. 허나 말해주면 뭘 어쩌겠느냐. 분노도 못 느끼는 네가 복수할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 하나요?] 

노씨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눈빛에선 어떠한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중년 여인은 여전히 냉소했다. 

[어째서냐고. 너는 강호란 세계를 아느냐?] 

[강호!] 

그녀의 싸늘한 말에 노씨가 부르짖었다. 들어본 적이 있다. 예전에 남편 전씨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실

상 강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강호를 아느냐라고 한 것은  강호에 어떤 인물들이 어떻게 사는지

를 묻는 것이었다. 노씨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강호란 세계에는 무술에 정통한 사람들이 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번쩍번쩍 날아다닌다는 것도 매우 잔악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전씨가 한 때 강호를 종

횡했던 사람이었기에 이처럼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잘 알고 있어요. 어떤 곳인지.] 

중년 여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네 일가를 몰살한 자는 단목이라는 성을 가진 여인이다.] 

[어째서.. 그런 만행을 저질렀지요?] 

노씨의 음성이 한층 더 떨린다.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분명 네 일가를 몰살시킨 사람이라는 거다.] 

노씨가 침묵했다. 안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 예전 같았으면 뭇 여인들이 그녀의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도 탄성을 터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은 

소름이 끼치게 하는 귀기가 철철 흐르고 보는 이의 가슴이 뜨끔거릴 만큼 예전과는 정반대였다. 

[그 단목씨 여인은 무공이 뛰어나겠군요.] 

[흥. 제법이긴 하지.] 

중년 여인이 코웃음쳤다. 잘 알기는 해도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노씨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어요.] 

[주제에 복수는 무슨 놈의 복수.] 

노씨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반짝거렸다. 그러자 중년 여인은 비소하며 입을 연다. 

[또 질질 짤 생각이면 때려 쳐라. 이젠 지겹다.] 

[그럼 어떡해요. 슬프고.. 억울한 걸..] 

[무공을 배우면 되지.] 

그녀의 흘려보내는 듯한 말에 노씨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전수해주시려고요?] 

[후후. 마음에는 든다.] 

그들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한 마디씩 했다. 중년 여인이 곧 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의 싸늘한 모습은 온

데간데없고 요염한 여인이 웃는 모습만이 노씨의 눈에 보여질 뿐이었다. 

그 날부터 혹독한 수련은 시작됐다. 반 각만 내달리면 끝에서 끝에 닿을만큼  비좁은 봉우리 위에서의 수련은 정말 

혹독하기 짝이 없었다. 중년 여인은 노씨에게 무공을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노씨는 처음엔 너무 힘들어 포기하

고 싶었다. 무공을 전수함에도 제자로 여기지도 않는 중년 여인의 모습도 그녀를 힘들게 했고, 밤마다  나타나서 울

부짖는 전가본장 사람들도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음만 그러했을 뿐 포기하진 않았다. 그녀는 이제 자신

이 앞으로 해야할 일이 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5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봉우리 위에서 지냈다.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물이나 식량이 부족해지면 중년 

여인이 직접 벽을 타고 내려가 구해왔었기에 내려갈 일이 도무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내려가는 일이 노씨가 원하

는 바도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엔 오로지 복수, 그 두 글자 뿐이었던  것이다. 가슴을 칼로 후벼베고 망치로 심장을 

찧는 슬픔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어쩌면 밤마다 나타나서 복수를 해달라 우는 가족들이 그녀의 분노를 도왔는지

도 몰랐다. 

그리고 그 분노는 노씨 무공의 엄청난 정진을 가져왔다. 중년 여인은 그녀에게  자신의 거의 모든 무학을 전수했는

데 노씨의 자질이 괜찮았던 것이 한 몫하기도 했다. 중년 여인 최고의 무공은 독조수라는 조공(爪攻)이었다. 

[독조수를 펼침에 있어서 힘을 줄 필요는 없다.] 

[왜 그러하죠? 힘이 없으면 살점을 뜯어낼 수 없을 텐데요.] 

[내가 손톱을 기르라 하지 않았느냐.] 

노씨가 이마를 치며 미소했다. 

[뭔 말씀인지 깨달았어요.] 

그렇듯 노씨의 무공은 무섭게 성장했다. 본래  무공이란 내공이 기반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실상  어릴 적부터 내공 

수련을 하지 않으면 높은 경지에 이르긴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노씨의 무공은  분명 대단했긴 했지만 고수의 수

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노씨도 그것을 잘 안다. 중년 여인이 매일 같이 <고수를 뛰어넘는 고수가 되어 복수를 이루

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또한 노씨는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크게 깊어졌다. 그녀가 절대 협을 이루는 강호인은 아

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느낌만을 믿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수 년을 보내는 사이 그녀의 별호도 알게 되

어 더욱 그렇게 믿었다. 본래는 이름을 알고자 물었던 그녀의 정체였다. 허나 그녀는 이름 대신 별호를 가르쳐주었

다. 다른 강호인들이 붙여준 별명. 그 별호는 바로 마화미소(魔花微笑)였던 것이다. 

그런 걸 잘 아는 노씨였지만 그래도  마화미소를 존경했다. 그녀의 무공을 존경했고 그녀의  독하며 냉정한 마음을 

부러워했다. 복수를 위해선 무공도 대단해야하고 독하며 냉정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씨는 5

년이 지나서야 겨우 무공 수련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수련을 끝내는 날, 마화미소가 말했다. 

[네 사부가 누구냐?] 

[마화미소지요.] 

[네 사부가 누구냐?] 

노씨의 대답에 그녀는 똑같이 되물었다. 음색도 억양도 판박이로 같아 정말 소름끼치는 말투였다. 노씨는 그녀의 의

도를 눈치챘다. 

[모릅니다.] 

[왜 모르냐?] 

[기억이 없으니까요.] 

[왜 기억이 없느냐?] 

[모릅니다.] 

그제야 마화미소가 방긋 미소지었다. 그녀는 그 길로 봉우리를 기어 내려갔다. 매우 빠르고 민첩하며 굉장히 능숙했

다. 노씨는 곧바로 내려가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봄이라 공기는 맑고 따뜻했다. 보이는 광경은 온통 푸르다. 

멀리서 떨어지는 희끄무레한 폭포를 뺀다면 모두 푸른 절경이었다. 조금도 떨리지 않는다. 5년 간 위에서  생활하며 

철 같은 가슴과 온갖 두려움이요 고통을 다 겪었다. 이렇게 높다고 하여  다리가 후들거리던 예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 날 봉우리를 내려가지 않았다. 아니, 그 후로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무

공을 만들고 싶었다. 그 무공을 만들고 숙달하는 시일이 바로 3년이라는 세월이었다. 기실 무공을 만든다 함은 대단

히 어려운 것이다. 말이야 쉽지만 정말로 쉬울 수가 없다. 초식도 초식이고 기의 운행부터 온갖 기초무학의 장단점

까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서야 새로운 무학을 창출해낸다 함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러나 노씨는 분명 새 무공을 창시하기 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화미소의  무학을 익히며 기초부터 잘 다졌

기 때문에 어려움이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유루철장법이라는 괴력의 무공을 만들어냈다. 마침 봉우리 위에는  마화

미소가 보관하던 고철이 있었는데 노씨는 그것을 수십 일간 내공과 노력으로 독특한 철장을 만들었다. 처음엔 모양

이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쓰면서 잘 가꾸다 보니 괜찮아졌다.  제법 모양을 갖춘 것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무공이 바로 유루철장법. 강호를 공포에 떨게 한 바로 그 괴력의 철장법이다. 

그녀는 그 이후에야 강호출도를 했다. 이미 25세의 젊은 부인이 아닌 서른을 훌쩍 넘긴 장년이었다. 그녀는 제일 먼

저 단목씨 성을 가진 전대 고수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무림 인사들을 직접  찾아가 물어보기도 하고 돈을 줘보기도 

했다. 말로 안 된다 싶으면 언제나 철장을 휘둘렀다. 그리고도 상대를 죽이는 수법은 아주 잔악했다. 그것으로 그녀

는 강호에 널리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한참을 뒤지고 쑤셔 보아도 단목씨 성을 가진 여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강호인들은 대부분이 단목씨 

성을 가진 전대 미녀고수를 알고 있었다. 명성이 대단하거나 무공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행방은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혹시 일부로 안 가르쳐주는 게 아닌가 하여 온갖 수단

을 부려보기도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상심하여 30년이 넘도록 강호를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작은 촌에 묻혀  조금 성깔 있는 

중년 여인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인연을 만들었으니 바로 그녀보다  다섯 살은 연상인 한 어부를 

만난 일이었다. 그는 성이 없었고 이름도 없었다. 있지도 않다고 했지만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고기를 잡아 다 늙

어 죽어가는 노파에게 먹이고 다시 고기를 잡는 일.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한 마디로 바보였다. 

그러나 노씨는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살면서 그가 얼마나 성실한고 효심이  깊은지 잘 알 수 있었던 것

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착한 어부이려니 했다. 헌데 할 일이 없어서 그의 도움으로 고기 잡는 일을 시작한 그

녀는 어느새 그와 정이 싹터버렸다. 바보지만 그 때문에 조금도 때묻지 않은 듯한 착하고 성실한 모습은 노씨의 마

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리 독하게 변모했다지만 역시 예전의 성격을 깨끗이 버릴 수는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토록 착한 어부의 

어깨에 기대자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젠 늙고 화상으로 추해진 모습에 강호에선 악독하다 악평이 난무

했지만 그녀도 슬픔을 느낄 줄 알고 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부는 그런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듯 그녀를 토

닥거려 주었다. 자신이 울 때 제 어머니가 해주던 것처럼 등을 살살 두들겨주며 뚝뚝,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스쳐지나듯 알게 된 지 10년만에 그들은 혼인을 치루었다. 태기가 보이지  않아 노씨는 크게 상심했었으나 나

중엔 자식을 가질 수 있었다. 딸이었다. 보들보들한  그 딸 아이는 남편의 성이 없어서 왕(王)씨로  짓고 이름을 령

(領)이라 했다. 한동안은 평온하고 행복하여 옛날의 그 악몽을 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씨의 남편이 어느 날 고기를 잡으려 다녀온다 하고선 다신 오지 않

았던 것이다. 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반 년이  지나서야 진위를 알 수 있었다. 

기다리던 한 여름 날 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실제로 시체라 하긴 조금 그랬다. 이곳저곳이 썩고 까마귀 따위

의 짐승에게 뜯어먹혀 사람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가 노씨의 남편임을 알아본 것은 바로 노씨가 짜주었던 백

의(白衣) 덕분이었다. 피와 땀, 물로 얼룩져서 이젠 백의도 아니었지만 그 백의  옷자락엔 노씨가 직접 놓은 원앙새

가 한 쌍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가 선심이라도 배풀었는지 유독 원앙새가 놓인  그 부분은 조금도 망가져있지 않았

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비적(匪賊)에게 당했다고 수군덕거렸다. 그가 비적에게 당한 것도 실제로 맞았다. 사실은 안 노

씨는 통곡 하기에 앞서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에 앞서 충격을 받았다. 천명(天命)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성을 잃

어버렸다. 영원히 쓰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철장을 땅에서 파냈다. 그녀는 그대로 옆 산에서 지낸다는 비적을 하룻

밤에 몰살시켜버렸다. 그들 온몸의 뼈를 가닥가닥 으깨고 골통을 부수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비적들 배를 갈라 열

어놓고 산에다 쫙 나열해두었다. 까마귀에게 내장까지 씹혀먹히라는 의도였던 것이다. 

노씨는 깨달았다. 자신은 더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운명임을 경험으로 

느꼈다. 괜히 평범하게 살겠다 하다간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게 한다는  걸 안 것이었다. 그녀는 그 길로 그 어촌을 

떠났다. 먼저 산 속에 은거하여 딸 아이 왕령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총명한 그녀는 대부분의 무공을 쉽게 깨닫고 익

혔다. 자질이 뛰어났다. 그러나 유루철장법은 익히지 못했다. 유약하여 그런 중후한  대다 무거운 철장까지 들고 설

칠 수는 없었다. 

노씨는 결국 왕령의 몸에 맞게 무공을 전수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물처럼 흐르는 봉법을 창안하여 그녀에게 

전수한 것이었다. 생각은 노씨가 하고 시전은 왕령이 했다. 노씨의 몸에는 그처럼 유유한 음(陰)의 무공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씨는 가진 무학 지식으로 유루봉법의 바탕을 창안했을 뿐이고, 왕령은 그것을 갈고 닦아 훌륭

한 봉법으로 바꾸었다. 

다시 강호출도를 한 때는 왕령이 유루봉법을 완벽히 습득한 후였다. 왕령의 무공도 그 땐 제법 되어버린 때였다. 그

리고 그들은 몇 개월만에 강호를 울리는 금수쌍녀라는  별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때가 노씨의  나이 일흔 셋이요 

왕령의 나이 여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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