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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상한(傷寒) 1 (18/90)

                                       第 七 章. 상한(傷寒) 1

수녀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여 겨우 말을 마쳤다. 진양에게 금녀와 자신의 과거를 설명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피로해 보였다. 안색이 파리한 게 중병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눈도 약간 부어있었다. 일순 마주보고 앉아있던 그들의 

몸이 덜컹거렸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도 은은히 들린다. 알고 보니 그들이  있는 곳은 마차 안이었다. 전후좌우가 

비좁아 두 명이 들어가기엔 조금 그랬지만 둘 다 몸집이 작아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지금 그들은 아미산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금녀는 이미 죽었다. 악랄하고 거침없으며 슬픔이 한으로 변하여 악

행을 서슴대지 않았던 금녀가 죽었다. 청성산 동굴 안에서  비참하고 서글픈 말로를 맞이한 것이다. 지금 타고있는 

마차 뒤꼍에는 금녀의 싸늘한 시신이 담겨져 있었다. 

수녀는 금녀가 죽는 당시 기절했었다. 실컷 울다 울 힘도 빠져버렸는지 죽은 금녀 곁에서 기절했다. 이 모든 일들이 

꿈이길 바랬지만 절대 꿈일 리는 없었다. 금녀와 맞잡은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한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편 그녀가 쓰러지자 진양은 매우 놀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눈이 굴러 떨어질 듯 했다. 황급히 달려가 손을 

대보니 가늘기만 한 숨결이 느껴져 안심할 수 있었다. 진양은 그 후 밖으로 나가 화연철과 대화를 했다. 지금 안에

서 일어난 일을 말해주는 등 모든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물론 그건 화연철이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화

연철은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궁금했다. 또 무슨 수작일까 확인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마침 그가 나와서 얼

른 물어본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화연철은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자신이 홧김에 저지른 실수

가 금녀를 죽게 만들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역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금녀는 자신의 

철천지원수였지만 왠지 비열하게 죽인 것 같았다. 거기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수녀가 쓰러졌다니 더욱 부끄러움

이 치솟았다. 자신도 도사다. 도사다운 여유가 없다는 용정학의 지적도 많이  받았어도 그는 도사였다. 명실공히 사

천 최고의 도인집단이라는 청성파의 한 도사가 아닌가. 그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진양과 수녀를 건드릴 

수 없다. 죄책감도 죄책감이지만 명예의 문제였다. 도사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건드리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다. 

결국 진양과 수녀가 도망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마침 용정학도 수녀까지 괴롭히는 

건 크게 원치 않는 듯 하니 도리어 잘된 일일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허나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만일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닌다면 명예고 뭐고 없는 것이니까. 고심  끝에 그는 진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딱 

한 가지 약속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진양과 수녀는 두 번 다시 청성산에 오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그에 진양은 잠시 

주춤했으나 응낙했다. 이 산을 오지 않는 건 자신도 원하는 일이다. 꼭 와서는 뭔 일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떠날 때, 진양은 금녀의 시신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동굴에 버려 두고 싶었다. 허나 수녀 때문

에 그럴 수도 없었다. 금녀의 죽음 때문에 크게 상심한 수녀인데 시신마저 내팽개친다면 그녀의 몸이 더욱 상할 것 

같아서 그랬다. 한 쪽 어깨엔 금녀를, 한 쪽 어깨엔 수녀를 얹혀놓았다. 다행히 둘 다 가벼워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산하여 막 마부를 한 명 구했을 때야 수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상황을 판단하고 또 울음을 

터트렸다. 진양이 준비한 관에서 깨지 못할 잠을 자는 금녀를 알고 통곡했다. 진양이 나타나 고운 말로 달래보았지

만 소용없었다. 수녀는 그때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녀의 안색은 매일같이 침울했다. 사람 얼굴인지 송장 얼굴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진양의 머릿

속엔 슬그머니 행시(行尸 = 살아있는 송장)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런 자신의 생각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

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잡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서둘러 무덤자리를 생각해보았다. 그래

봐야 떠오르는 건 아미산 뿐이었다. 수녀도 찬성하자 그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즉시 마부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에서 그녀의 과거를 들었던 것이었다. 

삼 일을 달려 도착한 아미산.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여전했다. 아직 산을 오르지도 않았지만 고아한 산의 곡선이 진

양의 감탄사를 얻어내고 있었다. 분명 많은 시일이 흐른 것도 아니요 큰 해를 입어 힘든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다. 

다만 오랜만에 온 듯한 느낌일 뿐이었다. 복잡한 일들이 많았었기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왠지 피곤한 느낌이 다가

들었다. 수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미산.. 좋은 곳일까?] 

[그럼. 너도 올라가 보면 이 산이 얼마나 명산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오르며 보이는 경치는 본래 모습에선 변함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추운 겨울이었다. 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어버린 

때여서 허한 느낌도 주고 있었다. 진양과 수녀가 몸을 움츠린다. 오르면 오를 수록 안개가 짙게 끼더니 더욱 으스스

해졌다. 종종 눈덩이가 보이기도 했다. 관을 질질 끌고 가는 진양이 왕창 입김을 냈다. 

[춥지. 조금만 참아. 빨리 자리를 찾아봐야지.] 

수녀는 두 손을 호호 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더 하얗게 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아까보다 더 심

했다. 추워서 그렇게 보이나 싶었지만 본래 추우면 볼이 빨개지는 법이다. 몸이 안  좋은 게 틀림없었다. 진양은 마

음이 심히 좋지 않아 인상을 찌푸린다. 얼른 금녀를 묻어버리고 그녀와 함께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휘잉, 하는 매서운 한풍 소리가 그들을 얼려갈 때였다. 수녀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크게 기뻐했다. 

[저 자리가 좋겠어.] 

진양이 돌아보니 괜찮은 자리였다. 좋은 자리는 아니라도 나쁜 자리 또한 아니었다. 적어도 물이 들어올 자리는 아

니다. 언덕이 조금 높고 그 옆으로는 얼어붙은 강줄기가 보였는데 그녀가 말한 곳은 언덕에서 더욱 깊은 곳이었다. 

허나 깊으면서도 위와 옆이 좋게 트여 햇빛을 잘 받을 것 같았다. 

진양은 서둘러 관을 내렸다. 어찌나 날씨가 추운지 땅이 다  얼어붙어 있다. 챙겨온 삽으로 두어 대 후려쳐 봤지만 

하마터면 삽만 부러질 뻔했다. 지켜보던 수녀가 잠시 손에  입김을 불어넣더니 순간 우수를 땅속에 처박았다. 저게 

어떻게 들어가나. 진양은 새삼 그녀의 독조수가 무시무시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손톱을 날카롭고 기다랗게 길러 

쓴다지만 실상 수녀나 금녀의 손톱은 별로 길지도 않았다. 금녀는 무식하게 쥐어뜯는 식이었고 수녀는 요령인지 수

법이 괴상했을 뿐이다. 

수녀가 그렇게 십여 번 양손을 놀리자 금방 땅이 파헤쳐져 버렸다. 그제야 진양이 삽을 들고나서서 땅을 파기 시작

했다. 아까 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딱딱하다. 삽이 들어가도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예리한 금속성은 안 들리지

만 턱턱 둔탁한 소리가 들리니 아직도 단단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내공까지 운행한  덕에 겨우 땅을 팔 수 있

었다. 

진양이 금녀의 관을 깊게 파인 땅속으로 넣자 수녀가 다시 통곡했다. 설움이 복받쳤다. 이렇게 그녀를 보낸다는 건 

정말로 슬프고 안타까웠다. 어릴 때 아비가 죽어 얼굴은 기억도 못하는 그녀다. 또 어머니라고 해도 천하의 악녀로 

불리는 금녀였다. 그런 어미를 미워하진 않았지만 따라야하는 현실이 슬펐다. 그녀를 따라 천하를 종횡하며 나쁜 짓

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이 슬펐다. 여느 날처럼 또 제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다 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어

느새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지켜보는 진양만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녀를 다독거려 주고 있었다. 

(생애에 어떤 자였든지 죽은 후는 평온한 세계로 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불도가 있는 명산에 금녀처럼 포악한 악

녀가 묻혔으니..) 

진양은 운명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라 생각했다. 왕령이 묘비에 <비운녀노효정지묘, 불효자왕령읍립(否運女盧效情

之墓, 不孝子王領揖立)>이라고 직접 새긴 후에야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왕령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몸을 오들오들 떨며 온몸이 뜨거워졌다. 힘이 없는지 자꾸 비틀거렸고 눕

기를 원했다. 진양은 그녀가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산공독에  의해 내공이 흐트러진 채로 금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또 이런 고행을 했으니 결국 몸이 견디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지금은 아미산 정상으로 오르는 중이

었다. 

[령아. 괜찮아? 어떡하지.] 

[나.. 괜찮아. 그냥 졸려.] 

왕령은 나름대로 억지 미소를 띄웠다. 그러나 진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속을 리 없었다. 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제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괜히 정상에 오르자고 조르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한탄할 만도 했다. 의원을 구해

야하긴 하겠는데 시간이 없다. 그녀가 헐떡이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진양의 머릿속으로 순간 끔

찍한 생각이 지나간다. 

진양은 머리를 세차게 뒤흔들며 왕령을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새빨

개진 모습을 보니 자꾸 격정이 치솟았다. 정말 졸려 자는 건지 기절한 건지  진양이 자신을 안았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그는 이를 악 물었다. 예전 이곳에 아미사원이라는 절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 한참을 올라 아미산 정

상에 거의 다다랐으니 조금만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왕령을 꼬옥 안아들고 잽싸게 발을 놀렸다. 

지금까지 느긋하게 오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사천 지방은 본래 안개가 짙어서 항상 습했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 날 

이런 고산(高山)에 올라도 으스스한데 하물며 이처럼 한  겨울임에는 어떻겠는가. 더욱이 추운 건 둘째치고 바닥이 

미끄러웠다. 오르면 오를수록 쌓인 눈덩이는 불어만 갔고, 꽁꽁 얼은 빙판길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경공이 제아

무리 뛰어나더라도 바닥이 미끌미끌한데 빠르게 내달릴 수가 없었다. 어느 곳은 아예 전후좌우가 모두 얼음으로 뒤

덮인 곳도 있었다. 옛날 조덕에게 들었던 북해 이야기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너무 추워 콧물이 흐르다 얼 정도라니, 

이곳도 혹시 그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다간 왕령을 안은 채로 산길을 뒹굴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진양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줄일 수 없다. 조급한 마음이 그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마구 내달리던 진양은 고개를 들어보다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앞에 금정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불사가 보

였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곳이 바로 아미산의 정상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금정으로 달려갔

다. 예전에 보았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금정이라는 이 불사는 규모가 상당했다. 진양이 왕령을 안고 금정 정문에 이

르자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건지 고요하기만 했

다. 진양은 급한 마음이 들어 발로 문을 짧게 연달아 걷어찼다. 쾅쾅, 소리가 불사를 울린다. 

[아미타불.] 

진양은 너무 기뻐 환호성이라도 지를 뻔했다. 안에는 다행히 비구니가 있었던 모양이다. 고요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는데 이리 불호를 외워주니 그 비구니가 고맙기 짝이 없었다. 

[지나는 행인인데 친구가 병을 앓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가 외치자 곧 끼익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비구니 둘이 서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진양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쌍방이 놀라 경호성을 발했다. 

[시주는..] 

진양은 아차 싶었다. 재수 없게도 그 비구니들은 예전 무굉과 저 밖에서 말다툼을 벌였던 비구니들 중 두 명이었다. 

늙은 비구니는 없었지만 하여튼 재수도 더럽게 없는 경우다.  그들은 서로를 기억하며 잠시 놀라고 있었다. 진양은 

짧은 순간 빠르게 판단했다. 

[빨리요. 빨리. 따뜻한 곳으로.] 

그는 왕령을 안아든 채로 제멋대로 뛰어들었다. 그녀들이 놀라 주춤거리자 진양이 버럭 호통친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요? 빨리 안내하라니깐!] 

비구니들은 그제야 상황이 안 좋음을 깨닫고 황급히 앞장섰다. 

그녀들을 따라 들어가 다시 작은 문을 통하자 여러 개의 집채가 나타났다. 크고  작고 제각기 달랐는데 한 가지 공

통적인 건 엄숙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다들 뭘 하는지 어디서든 작은 소리하나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

녀들이 안내한 곳은 그 중 두 번째로 큰 집채였다. 돌 벽이 발그스레했다. 

안을 들어서니 그곳은 숙소라도 되는 듯 했다. 침상이 여러 개 놓여져 있었고 한쪽에는 이곳저곳 뜯어진 방석이 가

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그런 만큼 바깥과는 판이하게 따스했다. 진양은 먼저 왕령을 가장 구석진 침상에 눕혔다. 그

녀는 이미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령아. 좀 어때?] 

[추.. 워..]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자 진양은 즉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침상에서 이불을 서너 개 들고 그녀

의 몸 위에 포개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여간 추위가 가시지 않는 듯 했다.  진양은 점점 다급해졌다. 그녀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아까보다 더욱 심해진 듯 몸이 완전 화염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해도 춥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알아요?] 

그가 안절부절못하다 퍼뜩 생각났는지 비구니를 향해 물었다. 

[감기 같군요.] 

[빌어먹을. 감기 따위도 제가 모를 줄 알아요? 그녀는 감기에 걸릴 리가 없어요.] 

[아니 어째서 그렇죠?] 

진양이 화를 냈지만 비구니는 개의치 않고 되물었다. 그녀로서는 감기에 걸릴 리가 없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

이다. 진양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해줄 수가 없었다. 이 산에서 타불타불 하는 비구니가 내공이요 무공이요 알 리가 

없으니 말이다. 설명해줘야 시간낭비일 것이라 생각했다. 

[말해도 모를 거예요. 혹시 의술을 아는 분이라도 있나요?] 

[정고(正苦)사백께서 아실 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누구죠? 어디 있어요?] 

[사백은 오시지 않을 겁니다. 3일 전에 떠나셨습니다.] 

진양은 허탈함을 느꼈는지 어깨를 늘어트리며 낮게 물었다. 

[어디 가셨죠.] 

[백수보현사(白수普賢寺)에 가셨죠.] 

[백수보현사라.] 

[이 산 주봉(主峰) 동쪽 산자락에 있습니다. 한참 내려가야 나오죠.] 

순간 진양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그녀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쳐댄다. 

[뭐라고! 주봉이.. 그러니까 어디로 가면 되죠? 정확히 말해봐요!] 

그녀는 그가 흥분하자 크게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그,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대로 잠시 길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양은 그녀가 말해준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내달렸다. 본래 오르막 길 보다 내리막 길이 더욱 위험한 법. 진양은 수

없이 발을 삐끗하고 자빠지며 달리고 있었다. 비구니는  백수보현사가 진(秦)대 때 벌써 세워진 불사로써 그곳에서 

약초를 캐던 노인 포공이 부처를 모시던 곳이라고 했다. 백수라는 이름은 거기서 따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무튼 거기에 정고라는 비구니가 있다는 말이지.) 

그는 제 다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추운 겨울의 만물이 그의 목숨을 위협했지만 그는 조금도 움츠리지 않았다. 늦

으면 그녀가 죽는다. 오로지 이런 생각만이 그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백수보현사는 본래 지상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즉, 정상에 있는 금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추운 겨울의 산길, 그건 실로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미산이 좀 높은가. 산 중턱에 이르

렀을 쯤 진양은 정말 사람 꼴이 아니었다. 살갗이요 겉옷이요 전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뜯어진 나뭇가지가 무

슨 소뿔인 양 그의 머리카락에 우뚝 자리잡고 무릎도 다 까져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양의 얼굴

에는 어떠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냥 돌아갈 마음은  절대 없다.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가는 건  더 억울하다. 이쯤이 

대충 중턱쯤이란 걸 안 진양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허나 삼 장을 못 가서 또 우당탕 자빠지

고 만다. 

그렇게 힘들게도 달린 그가 백수보현사라는 불사에 다다랐을 때는 벌써 어둠이 짙어진 한 밤이었다. 사방이 고요하

고 귀신 곡성 같은 바람소리가 들려서 그런지 제법 으스스했다. 그러나 역시 정상보단 훨씬 따뜻했다. 백수보현사는 

제법 크기가 웅장했다. 대여섯 개의 건축물이 서로 옹호하듯 솟아서는 진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무도 

아주 많다. 겨울만 아니면 수목이 울창하여 왕령을 쉬게 하기가 아주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진양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금정에 있던 젊은 비구니는 정고가 고행을 겪어 뭔 깨달음을 

얻는다고 이리로 왔다 했다. 그런데 이곳은 도리어 금정보다 쉬기 편한 곳이 아닌가. 고행을 하겠다면 금정의 그 추

운 봉에서 오들오들 떠는 것이 백 배는 나을 듯 했다. 하지만 일단 왔으니 둘러보아야 했다. 그는 곧 백수보현사의 

대문을 두드렸다. 

[문 좀 열어줘요.] 

[누구십니까?] 

문이 두드리기가 무섭게 어린 비구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기뻐서 소리친다. 

[정고 사태(師太)를 찾아요!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 도움을 청하려고요.] 

[정고 사백은 지금 수련 중에 있습니다. 나중을 기약하시지요.] 

[아.. 아무튼 일단 문 좀 열어줘요.] 

그는 다시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비구니의 당황한 음성이 들렸다. 

[조용히 하십시오. 백수보현사에서는 함부로 시끄럽게 해선 아니 됩니다.] 

[그러면 빨리 문을 열어줘요. 그렇지 않을 땐 이 문을 발로 걷어차겠어요.] 

진양의 위협적인 말에 안에선 잠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크게 당황한 듯  비구니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반복한다. 결국 끼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그녀는 이미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대며 불호를 외

고 있었다. 

[아미타불. 일단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그는 화급히 들어섰다. 비구니는 왕령과 나이가 비슷한 듯 했다. 

[정고 사태는 어디 계시죠?] 

[사백께선 수련 중이십니다.] 

[일단 뵙겠어요. 친구가 위독해요.] 

[안됩니다. 절대로.] 

어린 비구니가 강하게 불허했다. 절대로 정고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을 듯 했다.  진양은 마음이 급해졌다. 여러 차

례 더 간청해보았으나 그 어린 비구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만 일 자로 닫혀 나중엔 고개마저 돌려버렸다. 분노

한 진양은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썼다. 

[흥.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호만 외면 그게 불도인 줄 아나. 극락이 어째요 생명이 어째요 하면서도 정작 위기에 처

한 사람은 도우려 들지 않는구나.] 

순간 어린 비구니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나이도 비슷한 놈이 나타나서 아는 척 하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분명 맞았기 때문이다. 

[그, 그건.. 사백은 지금 중요한..] 

[중요한 수련이 있으면 남을 돕지 않는 것이 아미사원의 계율인가 보군.] 

[하지만..] 

[부처라도 왔다면 아이고 오셨습니까 하면서 다 내팽개치고 올 테지.] 

[그렇지 않아요!] 

비구니가 소리쳤다. 

[지금 사백님은 안식(安息)의 유혹과 싸우고 계세요. 그래서 절대로 방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녀는 흥분했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그러나 진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버럭 호통친다. 

[이런 제기랄! 유혹인지 지랄인지 혼자 쉬고 싶을 땐 쉬고, 날 뛸 땐 날 뛰면 되는 거 아냐? 부처가  그걸 막는다면 

세상에 중, 비구니들은 다 짜증나 죽겠네.] 

[뭐, 뭐라고요?] 

비구니의 안색이 다시 새파래졌다. 이번엔 눈빛도 심상치 않다. 숨은 한층 더 심하게 거칠어졌고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분노라도 한 듯 했다. 그에 진양은 느껴지는 게 있었지만 악담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나? 아니 혹시 모르지. 안식과 싸운답시고 안에서 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지도.] 

[다.. 당신.. 아니 시주는..] 

[빨리 정고 사태를 불러요! 안에서 자고 있을 테니까 깨워서.] 

[누가 안에서 자고 있다는 겁니까!] 

그녀는 결국 화를 참지 못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진양의 말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도 났던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양의 말이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불자로써 그런 망령된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양은 불가에 대해서 본래 아는 바가 없었다. 

[알았어요. 사태가 자던 안 자던 빨리 좀 불러주세요. 위급하다니까.] 

[사백께선 이곳에 계시지 않아요!] 

[거참. 고놈 비구니 성깔만 더럽나 했더니 거짓말도 잘하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어, 어떻게.. 그런 말..] 

[뭐가 그런 말이야! 당장 정고란 늙은 비구니를 부르지 않는다면 이 백수보현사에 불을 놓겠다.] 

진양에게 갑자기 흉폭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점점 짜증이 나고 답답해지자 이젠  협박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그런 진양의 말에 비구니는 다리를 후들거렸다. 산에서 불도만 하는 그녀는 이런 협박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그..] 

[정고 이 늙은 비구니야! 불자를 자칭하는 비구니가 수련한답시고 잠만 퍼 자느냐. 안 잔다면 어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보시지!] 

비구니가 이젠 온몸을 다 떨어댄다. 진양이 이렇게 소란을 부릴 줄은 조금도 예측하지 못해서 더욱 그러했다. 그러

나 실상 정고는 이곳에 없었다. 

[제발 그만 두세요. 사백은 안 계시다니까요!] 

[증거를 대봐라. 금정에 있던 비구니는 분명 이곳에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사백은....] 

그녀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진양이 냉소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사백은 뭐.] 

[사백께선 지금 수련을 하시고 계세요. 저는 절대로 어디 계시는지 말할 수 없어요.] 

진양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거렸다. 그는 곧 대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린다. 

[아하.. 그래 알았다.] 

비구니가 어리둥절해하자 진양은 그녀보고 들으라는 듯 능청스럽게 떠들었다. 

[정고는 이곳에 없군. 주변에 있나보네.] 

[아니.. 어, 어떻게..] 

어린 비구니의 몸이 움찔하며 눈알이 왕방울만 해졌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실제로 정고는 분명 이곳에 없고 주변

에 있었다. 진양이 그런 사실을 알아챘다는 게 신기하고 황당했다. 허나 진양에겐 별로 어렵지가 않았다. 그녀의 말

에서 모순을 찾아낸 것이었다. 

진양은 그녀의 성품이 속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나 산에서  살았는지는 모르나 말투며 반응이며 여

느 속인들과는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분명 비슷하지만 은밀히 풍겨지는 어떤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어린 비구니는 정고의 소재를 말하지 않았어도 진양에게 답을 가르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진양은 백수보현

사에 있는데 어디 있는지 말할 수 없다는 건 정고가 이곳에 없다는 걸 은밀히 암시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금정에서 봤던 비구니는 정고가 백수보현사로 떠났다고 했다. 그럼 그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양은 

그 해답을 찾는 일에 눈 한번 깜박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사원 옆의 황량한 장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적당

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흥. 어디 두고보자고.] 

진양은 싸늘하게 내뱉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비구니는 소스라치게 놀라 앞길을 막아섰다. 

[시, 시주! 어디로 가시려고..] 

[이봐. 내가 어디 가든 무슨 상관이야.] 

[빨리.. 빨리 말해요.] 

[허! 아미사원은 비구니가 남자를 다 유혹하네.] 

순간 비구니가 창백해지며 뒤로 급히 물러섰다. 진양이 기이한 미소를 머금는다. 비구니 놀려먹는 일도 재밌다고 생

각했다. 그는 그대로 밀어붙여 그녀의 옆을 지나 백수보현사를 나서버렸다. 

나온 진양은 사방을 훑어보았다. 아까 흘낏 봤던 대로 기세가 탁 트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겨울이라 말라붙은 나

뭇가지가 있어서 그런지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진양은 그 황량한 숲 아닌 숲에 들어서기로 했다. 어떤 냄새가 

풍겼다. 

그런데 뒤에서 그 어린 비구니가 따라들었다. 자꾸 졸졸 따라오다가 진양이 고개를  돌려보면 모른 척 딴청을 부렸

다. 진양이 피식 웃는다. 그녀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금방 흥분하는 것이 수행이 부족한 듯  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은 그녀가 순수하다는 느낌을 주게 만들었다. 점점 웃음이 터져 킥킥거렸다. 

그나저나 이 숲 아닌 숲은 정말 외로워 보였다. 싸늘하고 허전하며 오는 이의  힘을 쪽 빼놓는 그런 무엇인가가 있

었다. 들어가면 갈수록 그 기운은 심해져 진양은 한숨 자두고 싶었다. 점점 피로가 몰려든다. 어린 비구니를 돌아보

니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실상 피로라기 보단 어떠한 편안함에 가까웠지만  그것이 너무 심해지자 몸이 늘어

지는 것이었다. 진양은 아무튼 빨리 이곳에서 정고란 비구니를 찾든 어쩌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봐요. 정고 사태는 어디 있어요? 여긴 왠지 기이해서 오래있고 싶지가 않아.]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졸립다고요. 아.. 한숨 자고 싶어.] 

[사부님이 그러시는데 이곳은 본래 겨울만 되면 황량해진대요. 특히 저 나뭇가지들이 기이함을 더해서 보는 사람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하셨어요.] 

진양은 갑자기 흥미가 돌았다. 

[오호. 그런 묘가 숨겨져 있었군.] 

[본래는 그것이 안식감이라 하셨어요. 마음이 느긋해지고 편안해지는 그런 안식감이요. 그런데  그것이 너무 극해서 

졸음마저 느낀다고 하셨어요.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일통하면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마음을 비우라고요? 에이, 집어쳐.] 

그는 고개를 뒤흔들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이제 지겹다. 조덕도 휴정도 틈만 나면 그 얘길 

했었다. 마음을 비우면 무공 수련에도 좋다는 말에 잠시 노력해보기도 했었지만 영 되지가 않았다. 도리어 오만가지 

잡념이 머리를 뒤덮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양의 내공도 깊지 못했다. 정좌하고 눈을 감아 꽁꽁 몸을 잡아둬

야 하는 건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함종문에서도 내공 수련은 게을리 하고 매일 같이 놀거나 초식 연마에만 

힘썼던 그였다. 

그런 과거를 회상하자 갑자기 함종문 사람들이 떠올랐다. 멍청하고 둔한  대사형, 시를 좋아하며 악비(岳飛) 장군을 

존경하는 이사형. 그리고 고놈의 마보강이 설치는 모습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랜만에 가지는 감상이었다. 

[저기..] 

문득 들려온 소리에 진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요?] 

[이곳은 더 깊이 들어가면 좋지 않아요. 호랑이도 있고..] 

[이 황량한 곳에 호랑이는 무슨 놈의 호랑이예요. 굶어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진양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겨울이 되면 먹거리가 없어지는 게 호랑이다. 배가 고파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지만 황량한 곳엔 애당초 잘 오지 않는 게 호랑이라는  얘기다. 그건 호랑이가 서식하는 대천

산에서 수년을 보낸 진양이기에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대천산에서 본  호랑이들은 먹거리가 없을 곳이다 싶으면 

절대로 오지 않았다. 

[나도 호랑이가 이런 곳엔 잘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또 뭐요.] 

[이 아미산엔 무시무시한 백호(白虎)가 한 마리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백호가 제법 무서운 듯 했다. 그에 진양은  조금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지금은 

왕령의 병세가 더욱 중요하니 그런 걸 일일이 따져 물을 시간도 없었다. 

[상관없어요. 빨리 정고 사태가 있는 곳이나 불어요.] 

[정고 사백이 계신 곳은 절대로 말하지 않겠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양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아미타불. 절대로.] 

그녀가 강하게 불호를 외웠다.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진양은 더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순수하여 마음

에 들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정말로 목에 칼을 들이밀었을 것이다. 

[쳇. 그럼 너는 날 따라다니지 말아라. 더 따라온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시, 시주..] 

그녀의 얼굴이 금새 일그러졌다. 반면에 진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꾸 방해하자 더욱 정고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문득 시퍼런 바람소리가 들리며 옷깃이 휘날린다. 진양은 뭘 생각했는지 슬쩍 주변

을 훑어보다 안색이 싹 변해버렸다. 그는 또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급히 정고를 찾으려 날뛰었으

나 정작 이런 데서 계속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오한에 떨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왕령마저 

떠오르자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뒤에서 비구니가 또 따라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젠 신경 쓰지 않았다. 한시바삐  정고를 찾는 게 중요하고 중요했

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나른한 느낌이 엄습했지만 그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발을 옮겼다. 다행히 깊이 들어가자 

눈덩이가 뒤덮여있었다. 눈이 종아리까지 차 올라 정신을 번쩍 일깨워주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그 어린 비구니는 

아직도 따라오고 있다. 진양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는 듯 버둥거렸으나 그래도 기어코는 따라오고 있었다. 진양

이 문득 사방을 훑어보았다. 충분히 들어왔는데도 정고가 보이지 않는다. 이 황량한 나무들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정고 사태! 어디 있어요!] 

그는 맥이 빠져 소리라도 질러 보았다. 사방이 트였으니 어쩌면 그녀가 들을지 모른다는 기대심이었다. 하지만 대답

은 들리지 않았다. 

[어디 있냐니까요! 빌어먹을.] 

[시주! 소리 지르지 말아요.] 

온몸에 눈을 달고 온 어린 비구니가 그를  만류했다. 검지를 들어 쉿, 하고 소리를 낸다.  진양은 비소하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노망든 정고야! 부처님께서 오셨는데 넌 뭐 하느라 안 보이느냐!] 

[시주! 제발..] 

[옳아! 잠을 자는구나. 내 수행을 하라 일렀거늘 감히 잠을 퍼 자? 빨리 안 나올 테냐!] 

진양은 힘들여 악을 써댔다. 허나 그래도 정고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상관도 없는 어린 비구니만 난리법석을 떨

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정고 사백은 아미사원에서 제일 항렬이 높으신 분이에요.] 

[흥. 항렬이 높아질수록 이렇게 오만해진다 그건가!] 

[시주!] 

진양이 다시 소리쳤다. 

[정고 사태! 친구가 병을 앓아 도움 좀 청할까  해요! 모두가 당신을 추천하는데 안 나올 건가요?  아니,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모른 척 할 건가요?] 

그렇게 떠들었지만 여전히 싸늘한 한풍만이 대답을 할 뿐이다. 진양은 그제야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 주변엔 아무래

도 정고가 없는 것 같았다. 더 깊숙이 들어가야 볼 수 있을 듯 했다. 방금 그는 내공을 넣어서 소리를  지른 것이라 

웬만해선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증명하듯 어린 비구니는 귀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얼마나 깊이 들어간 거야.] 

[시주. 이제 그만 돌아가요. 이곳은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에요.] 

비구니가 거의 애걸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진양의 분노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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