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八 章. 은거 (20/90)

                                          第 八 章. 은거

좌우팔방이 모두 새하얗다. 아미산 하늘에선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주먹만한 눈덩이가 턱턱 떨어지듯 폭설이  오는 

것이었다. 세찬 바람에 휘둘려 그 커다란 눈덩이가 날리자 산 자체는 물론이요 백호를 기다리는 진양까지 덮어버리

고 있었다. 

지금 그는 백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정고가 말했다. 예로부터 아미산 호랑이는  신롱당(神籠當) 부근에 자주 

나타났었다고. 신롱당은 아미산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수보현사에선 조금 먼 거리다. 백수보현사는 동아미에 

속하고 신롱당은 남아미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신롱당에서 조금 뒤로는 작은 봉우리가 하나 있었다. 그다지 높지가 않아서 볼거리는  없을 듯 했지만 실상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봉우리라고 할 수 있었다. 봉우리의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 봉우리는 바

로 호랑이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부드럽게 이어진 능선, 그러면서도 나타나는  모습 자체는 제법 장중했다. 더욱이 

봉우리 벽에 자연적인지 인위적인지 모를 흡사  호랑이 얼굴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한층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봉우리를 복호령(伏虎嶺)이라 한다고 했다. 

이 지대는 아미산 크기에 비교하면 별로 높지 않은 저지대에 속했다. 그래서  겨울이면 폭설이야 자주 왔지만 금정 

같은 고지대에 비해선 상당히 적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는 것이었다. 

진양은 신롱당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춥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당연 백호를 혹시라도 놓

칠까봐 그러는 것이다. 남들은 백호를 만날까 걱정하는데 진양은 놓칠까  걱정하니 생각해보면 또 재미난 일이기도 

했다. 일순 눈발이 더 거세게 휘날렸다. 세찬 바람을 타고 휘날리니 마치 옆에서  날아드는 눈 같았다. 우뚝 서있는 

진양의 몸으론 그 눈이 차곡차곡 덮여가고 있었다. 

(대체 언제쯤 나타나려나. 계속 이렇게 기다리다간 만나기도 전에 얼어죽겠네.) 

그는 몸에 쌓인 눈을 쓸며 투덜거렸다. 이틀 째 꼭 필요한 시간만 빼고는 계속 이곳에 서있던 그였다. 내리는 눈은 

그를 놀리는지 점점 폭설로 변해갔다. 진양은 문득 백호가 폭설로 인해 오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추위엔 약하

지 않은 호랑이지만 그래도 이런 폭설이라면 모를 일이다. 그는 빨리 무슨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오

지도 않는 백호 기다리다 헛고생이 되면 그 꼴도 참 우스울 것 같다. 

[기껏 고생해서 만들어놓은 함정이 다 쓸모 없어졌군.] 

그가 새하얗게 뒤덮인 바닥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함정을 설치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

호는 오지 않고 눈만 펑펑 쏟아지니 아무리 대단한 함정이라도 멀쩡히 있을 리가 없었다. 꽁꽁 얼은 손으로 이곳저

곳 까져가며 만든 함정이 모두 무산됐다고 생각하니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그쯤이었다. 

<크르르릉> 

진양이 눈을 부릅떴다. 아주 낯익은 소리. 대천산에 있을 때도 자주 들었던 그 소리였다. 그러나 비교는 할 수 없었

다. 지금 들린 소리는 더 웅장하고 살기가 짙게 껴있었다. 진양은 이 소리가 필시 백호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라 생

각했다. 다시 크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양은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어깨 위로 또 쌓인 눈이 후두두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몽둥이를 힘차게 움켜쥐더니 정면을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함정도 끝이요 이젠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백호를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일단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곧장 백호의 기척을 잡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잘 들렸다. 

내공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백호가 워낙 커서 그런지 기척이 제법 컸던 것이었다.  헌데 그런 기척이 점점 작아지더

니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실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백호가 신선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진양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백호는 단순한 짐승이 아니야!) 

허나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백호의 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본래 호랑이는  먹이를 잡기 위해 기척을 죽이

기 일쑤였다. 다른 짐승을 잡아먹을 때도 사람을 해칠 때도 시끄럽게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상황은 그

것과 애당초 본질이 달랐다. 마치 멀리 가버리는 것처럼 소리가 서서히 죽여지다 결국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백호라지만 겨울에 제가 무슨 수로 먹이를 구하겠어? 사람을 자주  습격하는 건 먹이가 없다는 거겠지. 그

럼 내가 여기 있으니 절대로 가버릴 리는 없어. 반드시 온다. 덩치는 산만하다던데 어떻게 기척을 죽였는지는 몰라

도 위험한 놈일 거야.) 

진양은 그제야 정고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직접 상황에 처해 몸으로  느끼자 정고는 물론이고 비구니들이 그렇

게 겁먹어하던 것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동방(東方)에서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미세했지만 내공을 끌어올린 상태라 진양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눈 밟는 소리가  났다는 건 누군가 있다는 건데 이 주변엔 백호밖에 없을 

게 아닌가. 문득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백호가 옆으로 돌아갔다는 걸 상기하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진양은 다시 귀기울여 기척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사라진 후였다. 백호는 또 어떻게 된 건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소리와 자신의 거칠어지는 숨소리 뿐이었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백호는 지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아미산을 휘어잡고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는 짐승인 만큼 조심성도 크고 이런 일에 능수능란 한 

듯 했다. 

<크르르르> 

다시 백호의 험악한 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게  깔린 음습한 소리. 그러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바람소리와 

뒤섞이자 흡사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진양은 이대로  있다간 힘이 빠져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겁먹고 있다는 걸 알자 자괴심도 들었다. 속공 뿐이라. 

[이놈 백호야! 내 볼기짝은 여기다.] 

그가 엉덩이를 치며 몸을 날렸다. 일단 신롱당 쪽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면 백호가 모습을 드러낼 테니 그때

야 잡든 잡히든 싸워보는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그가 막 다섯 걸음 도망쳤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번쩍했다. 무언가 재빠르게 달려들고 있다는 걸 진양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성적으로 

느낄 때쯤엔 이미 백호의 앞발이 자신의 면전으로 날아들고 있을 때였다. 이만하게  반응한 것도 대단하다 칭찬 받

을 일이었다. 진양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몸을 뒤로 젖혔다. 다시 공격이 들어올까 발을 퉁겨 몸을 3장 밖으로  날리

기도 하고 있었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됐다. 눈은 아닌 것이 털 같았다. 첫 공격을 피하기가 무섭게 다시 연공이 들어오는 것이다. 백

호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반응하는 진양도 제법이긴 했지만 거의 찰나의 순간으로  겨우 피하는 수준이라 몇 수 

더 못 버틸 듯 했다. 진양은 일단 백호의  연공을 피하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일 리가 없었다. 

설마 하는 그의 턱을 백호의 앞발에 후려갈긴 것이다. 진양은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몸이 수장 밖에서 나동그라지

고 말았다. 

[윽..] 

뒹구는 그의 입으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이 없었다. 어찌나 위력이 대단한지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했다. 

지금은 골이 띵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가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양은 억지로 눈을 떴다. 호랑이는 한번 공격하

면 절대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눈을 뜨기 무섭게 백호가 정면으로 날아들

고 있었다. 그는 백호의 모습을 잘 보지도 못하고 다시 몸을 날려 피해야만 했다. 

[크앙!] 

백호의 입에선 무서운 괴성이 들리며 앞발이 그의 어깨를 슬쩍 스쳐지나갔다. 단숨에 눈으로 덮인 바닥이 모골송연

하게 파헤쳐졌다. 그제야 잠시 시간이 생겼다. 헛발질을 한  백호는 진양을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던 것이었

다. 분명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지금 같은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이라면  매우 귀중한 시간임이 확실했다. 진양

은 서둘러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손에 아직도 나무  몽둥이가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은 안심했다. 

이제부터가 싸움의 시작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다시 백호가 덤벼들었다. 이번엔 진양도 피하느라 땀을 빼지는 않았다. 대충 어디서 공격이 들어오는지 알 수가 있

었다. 백호는 유독 안면을 비롯하여 가슴 위만 공격한다. 그걸 깨달은 것이다. 머리가 인간의 치명적인 부분임을 잘 

아는 게 확실했다. 과연 이번 공격도 진양의 면상에 앞발 발톱을 내리긋는 수법이었다. 절대 힘으로 맞설 생각은 버

려야한다. 맞선다면 몽둥이가 부러짐은 물론이요 머리통도 부수어질 것이다. 

[이얍!] 

그는 함종절검법을 운용하기로 했다. 나무 몽둥이를 검이라 하고 응용하려했다. 매섭게 내리긋는 백호의 공격을  풍

리초절(風裏草切)의 초식으로 피해냈다. 마치 바람에 떠밀려 물러나듯 그의 몸뚱이는 백호의 앞발을 완전히 피해낼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백호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백호로서는 공격이 들어와도 막을 방도가 없는 순간이나 다름없

었다. 진양은 지체하지 않고 백호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찍었다. 단숨에 머리통을 부수어 주겠다는 그의 의지

가 담긴 일격이었다. 허나 그런 생각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인양 금방 사르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빡, 하는 소리도 아니요 우득, 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치열하고 살벌한  격전장을 울린 격타음(擊打音)은 와지끈, 하

는 나무 부러지는 소리였다. 진양의 몽둥이만 작살이 난 것이다. 몽둥이는 무슨 고목으로라도 만들었는지  도대체가 

힘이 없어 보였다. 

[이럴 수가..] 

그는 몽둥이를 떨구며 급히 물러섰다. 진동의 여운은 아직도 진양의 몸과 생각을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을까. 이번 일격은 실제로 진양의 공력이 담긴 그야말로 일격이었다. 이 정도의 힘이면 보통 호랑이의 골통이 

부수어지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아예 산산조각이 날 정도의 위력이란 것이다. 내공의 힘이란 그토록  대단하여 무

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진양은 이번 일격을 믿고 있었다. 헌데 백호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 했다. 한층 더 기세가 

사나워진 듯 자꾸 괴성을 흘려줄 뿐이었고 몽둥이만 작살이 났다. 

그렇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백호의 골은 무슨 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특출한 호랑이

라지만 어떻게 그 일격을 맞고도 멀쩡한가. 진양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영물이겠다.] 

그는 백호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자신은 백호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일격이 

아무 소용도 없다면 다른 공격은 오히려 제 몸만 망가트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더 싸워봐야 가망도 없

고 이득도 없으니 도망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허나 그렇다고 도망칠 순 없었다. 왕령을 생각

하니 그런 것이다. 몸은 도망치라며 그의  발을 재촉했지만 마음속 한곳에 자리잡은 그녀의  얼굴은 진양이 도저히 

도망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공격은 시작됐다. 아까보다 더욱 사나운 백호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살 떨리게 하는 

괴성이요 혼비백산하게 할 맹공은 진양의 정신을  온통 망가트려 놓았다. 진양은 때때마다 사력을  다해 도망 다닐 

뿐이었다. 정말 고양이 앞에서 도망치는 쥐새끼 꼴과 다름없다. 

다행히 이 신롱당 부근엔 나무가 많았다. 추위에 다 말라붙었어도 뼈대는 남았으니  진양에게 좀 더 유리한 장소였

다. 그는 빨리 나무가 많은 지점으로 도망쳤다.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진양인 만큼 더 도망치기가 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호는 화가 많이 났는지 나무 건  돌이 건 모조리 부수며 달려들었다. 나무 뒤로  도망치면 나무를 부수고 

돌덩이 뒤로 기대면 돌까지 박살냈다. 그 모습이야말로 호랑이라 하기엔 정말 부족한 감이 있었다. 괴물쯤이면 알맞

은 표현이라고 할까. 

그러던 백호는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동작을 멈췄다. 한 시진동안 그들은  쫓고 쫓기는 전투를 여지없이 진행했

던 것이었다. 백호가 많이 지쳤는지 몸을 움츠렸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으려는 듯 진양을  노려보기만 했다. 물론 

지친 거라면 진양이 한참은 더 심했다. 한 겨울임에도 온몸이 땀 범벅에  안색까지 파리하여 쓰러지기 일보직전 같

았다. 과연 백호가 몸을 움츠리기 무섭게 돌 위로 몸을 눕혔다. 백호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헐떡거린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을까. 진양은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자신이 부끄러워 본 사람이 없음에도 

안색을 붉혔다. 이건 일생일대 치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 시진동안 도망만 다녔던 걸 상기했으니 그럴 만도 했

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도망치면 왕령만 죽고 안 도망치면 자신마저 죽는다. 그걸 잘 알면서

도 그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목숨에 연연하여 그녀를 죽게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안 

살겠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그녀가 진양에게 있어서 보통 특별한 존재였는가. 

[이 괴물아. 오늘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 

그는 이제 망설일 것이 없었다.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녔으니 한낱 짐승에게 치욕을 받은 셈이다. 또 왕령을 위해선 

죽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죽으면 죽는 거요  살면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이젠 방어가 아닌 공격이었다. 백호는 그가 몸을 일으켜 매섭게 노려볼 때부터 뭔가를 직

감했는지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본능감각이 뛰어나도 그가 이런 미친 짓을 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미산에서 왕으로 군림한 백호인데 이런 경우는 당해봤을 리가 없다. 그런 것들은  기어코 백호가 한방 맞는 결과

를 가져왔다. 진양의 몸뚱이가 재빠르게 백호의 정면으로 날아들더니 유리장강 수법을 펼친 것이다. 백호는 이때 진

양의 주먹에 머리통을 직격 당했다. 

그래도 밀려난 건 진양이었다. 백호는 잠시 고개만 움찔했을 뿐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진양의 오른 주먹

이 파르르 떨린다. 정말 골통이 철인가보다. 하마터면 뼈는 물론 손목이나  어깨까지 부러질 뻔하지 않았는가.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성을 되찾은 것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통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작정 후려갈겨 봐야 내 손만 부러지고 내 발만 부러진다.)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문득 백호의 부릅뜬 두 눈에 맞서다 머리를 스쳐지나 가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

의 만면에 일순 희색이 감돌았다. 동시에 독기도 감돌았다. 무슨 계책을 세우기라도 한  듯 했다. 그는 곧장 백호에

게 달려들었다. 이야말로 공수가 반전된 싸움이다. 

이번에는 백호도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진양의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먼저 백호의 앞발이 날아들었다. 

진양은 크게 놀라며 황급히 천근추를 시전했다. 순간 그의 몸이 빠르게 낙하하며  백호의 앞발을 머리 위로 흘려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도리어 좋은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백호는  아직 발을 회수하지 못한 상태,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진양은 두 손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며 백호의 안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곤 눈동자를 향해 여지없

이 손가락을 내질렀다. 가지런한 네 개의 손가락이 내공의  힘을 받자 순식간에 무시무시해졌다. 더구나 눈은 어떤 

동물을 막론하고 수련이 불가능한 부분이니 더욱 그랬다. 백호의 눈이 진양의 양손 손가락 끝에 찔린 것이다. 

[크아아!] 

백호가 그 오금이 저릴 입을 쩍 벌리며 발광했다. 눈에선 금방 진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몹시 괴로운 듯 이리저

리 날뛰어댔고 아무 곳에나 몸을 갖다 박았다. 진양의 작전이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젠 이 백호를 때려잡는 일

만 남았다. 물론 작전대로 해야한다. 무지하게 또 맨손으로 잡으려 들다간 자신만 다친다는 걸 이젠 명심하고 있는 

그였다. 

일단 백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눈에 찔려  사방을 분간 못하고 도망쳐버린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는 셈이니까. 그는 서둘러 백호의  근처로 이동했다. 백호는 진양이 다가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날뛰기만 했다. 시험삼아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백호에게 던져보았다.  갑자기 백호가 번쩍, 하더니 

나뭇가지를 무섭게 후려갈겼다. 그게 진양이라도 된다고 느꼈나보다.  진양은 가슴이 뜨끔하여 서둘러 뒤로 물러섰

다. 일순 백호의 귀가 쫑긋했다. 눈을 잃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복수는 잊지 않는  듯 했다. 진양의 위치를 파악한 

백호는 피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앞을 못 보기야 했지만 기세는 아까보다 더하다. 

진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허둥지둥 등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아예 계획대로 승부를 걸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백호와 처음 만났던 장소로 달렸다. 

백호가 무섭게 쫓아왔지만 진양 또한 사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서 거리가 금방 좁혀지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섰다. 그리곤 미쳤는지 뒤를 홱 돌아보며 함종권 수식을 취했다. 덤비려면 어서 덤벼보라는 듯 온

몸에서 전의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허나 백호는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괴성을 지르며 진양을 덮쳤다. 단숨에 물어 죽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진양이 그쯤을 모를 리 없

었다. 그는 백호가 다가오기 무섭게 몸을  퉁겨 2장은 물러섰다. 백호의 거대한 몸집이  눈덩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백호가 다시 튀어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크앙!] 

백호의 입에서 또 괴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지금까지  느껴지던 그런 험악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쯤이면 아픔에서 

나오는 비명에 가까웠다. 백호는 그 상태로 계속 서글픈 비명만 질러댔다. 눈 밖으로 나오려 자꾸 버둥거렸지만 어

찌 된 일인지 다만 버둥거릴 뿐이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에 절규하는 모습이란  가히 보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

게 할 만 했다. 

[걸렸구나 못된 백호야. 이제 죽을 때가 됐지.] 

진양이 조소를 띄웠다. 이만하면 작전 성공이다. 아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완벽했다. 백호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바

로 진양의 덫에 걸려서 그런 것이다. 신롱당에 처음 오던 날 준비했던 덫. 메마르게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예리하게 

깎아내어 땅에 박아둔 그 덫이었다. 한두 개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리 정확히 백호의  발에 명중할 리가 없었다. 어

림잡아 한 30여 개쯤 될까. 

본래 진양은 덫을 설치할 때 생각했다. 적어도 눈이 그 위를  살짝 덮을 때 백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백호는 한참 늦게 나타났다. 그래서 눈이 덫을 아예 묻어버린 셈이 되었던 것이다. 진양은 그때 덫

을 포기했다. 허나 그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백호의 몸집이 거대하니 능히 눈을  파고 들어가리라 믿었다. 걸을 때

마다 눈이 움푹 패였고 한번 앞발질하면 땅이 울릴 위력을 보이지 않던가. 

작전대로 눈을 잃자 백호는 흥분했다. 그리고 진양에게 달려들었다. 아마 앞발 공격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높이 뛰어

서 덤벼드는 바람에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분명 백호의 네 발바닥이 모두 찔렸을 것이다. 제 이빨보다도 더

욱 예리하고 단단한 가지 끝에 두어 개씩은 깊이 찔렸을 게 확실했다. 그러니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가. 

[너와 원한은 없다. 그래도 령아를 살리려면 네가 죽어야지. 어차피 비구니들도 널 무서워하고 너도 사람만 골라 처

먹는 못된 놈이라니 잘된 걸지도 몰라. 네 고기는 유용하게 쓰이니 안심하고..] 

진양은 새로 준비한 나뭇가지를 들고 백호에게 다가섰다. 백호는 아예 실신했는지 눈  속에 처박힌 채로 미동도 하

지 않았다. 그는 백호의 목을 서너 번 찌르며 내공까지 끌어올려서야 겨우 백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그 후 왕령은 금방 쾌차할 수 있었다.  예정보다 시일이 더 걸려 내공이 많이 무산됐지만  백호가 정말 영물이라도 

되는지 효과가 대단했다. 몸에 남아있던 산공독을 제거함은 물론이요 그녀의 원기까지 도와주는 듯 했다. 당연 거기

에 진양의 노력이 한몫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루는 정고가 찾아들었다. 왕령이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내공 수련에 열중이던 때였다. 이 날도 진양은 그녀 곁에

서만 지내고 있었다. 

[그거 참 풍경 좋네.] 

정고의 농담에 진양이 피식 웃었다. 곧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정고가 미소하며 입을 다

문다. 

[아.. 오셨군요.] 

왕령이 금방 깼다. 이젠 예전만큼 내공을 되찾은 듯 얼굴에도  화색이 감돌았다. 고생은 진양이 다 했지만 그 역시 

만면희색하다. 

[그래 몸은 좀 괜찮아졌나?] 

[네. 사태와 양이의 도움이 커요. 정말 감사해요.] 

[원 농담도..] 

정고와 왕령은 서로 웃고 있었지만 진양은 웃지 않았다. 정고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지금껏 봐온 그녀는 이런 인사

치레를 잘 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한번이지, 또 나흘 전에도 찾아와 담소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

녀가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인다함은 뭔가 할말이 있다는 얘기였다. 별로 좋은 얘기일 건 같지 않다. 

과연 정고가 문득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 특별히 할말이 있지.] 

[무슨 분부라도 계신가요?] 

[아니 분부라니. 내가 뭐 보현보살이라도 되나.] 

왕령이 피식 웃는다. 

[사실 문제가 좀 생겼어. 이건 저놈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건데..] 

정고가 진양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원래 아미사원과 별다른 교류가 없어. 이런 겨울에야 뭐 잘 곳이 없으니 잠시 신세 좀 지는 거지. 비록 이곳 주

지(住持)의 사저(師姐)긴 해도 어쨌든 파계승이니까.] 

진양과 왕령은 크게 놀랐다. 진양이 묻는다. 

[아니 파계승이 어떻게 이런 데서 지낼 수 있어요? 당장 쫓겨나는 게 정상일 텐데.]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라. 사매가 날  존경하기도 하고, 사부님도 내가 파계했다고 해서 아예 

추방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셨거든. 아미산에서 계속 불도하되 아미사원 제자는 아니라 하셨지.]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 

진양이 중얼거리자 왕령이 눈짓을 보낸다. 그러나 정고는 개의치 않고 다시 말했다. 

[여하튼 이걸 말하는 건 이젠 너희들이 나가줘야 할 때가 와서야.  사매가 날 존경하지만 그래도 다른 녀석들이 가

만히 있지는 않지. 내 앞에선 굽신대도 뒤에선 날 비웃거든. 그 아이만 뺀다면 말야. 더욱이 내가 여기서 지내는 일

도 영 마땅치 않을 텐데 사람까지 데려와 불도를 방해하니 얼마나 열 받겠어.] 

그녀의 말투엔 조롱기가 섞여있었다. 

[네가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사매가 힘 좀 쓴 거겠지. 이젠  다 나았으니 가줘야겠다. 물론 나도 

한 달 후엔 나가야해.] 

[그래요. 사정이 그렇다면 더 방해할 수 없죠.] 

왕령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마음이 참 곱구나. 요놈처럼 영악하지도 않고.] 

[내가 뭐가 영악해요?] 

[영악하잖아. 네 자신을 돌아봐.] 

[흥. 사태나 그러시죠.] 

진양이 냉소했다. 그래도 아주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정고가 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 셈이지?] 

진양이 왕령을 바라보았다. 뜻이 어떠냐는 것이다. 그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늘게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

다. 

[이 산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이에요.. 어머니 곁에서요.] 

[무릴 걸. 이 추운 날씨를 어떻게 버티려고.] 

[움집이라도 짓던가 동굴이라도 찾아보면 되지 않을지..] 

[마찬가지야. 그런 방법을 내가 모를 거 같아? 나도  해봤는데 도저히 사람 살 곳이 아니다. 겨울이  없다면 모를까 

겨울엔 움집이고 동굴이고 다 소용없어.] 

왕령의 가는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 정도인가요?] 

[못 믿겠거든 저놈한테 물어봐. 저놈도 이곳 추위가 어느 정돈지 잘 알 테니까.] 

왕령이 진양을 돌아보자 그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왕령의 얼굴에 금방 수심이 가득 찼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니 곁에서 지낼 거예요. 혹한이 절 괴롭혀도 반드시..] 

그녀는 이를 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절대로 하산하지 않을 기세다. 진양이 눈썹을 찌푸렸다가 금방 다시 지운다. 

[령아. 힘들 거야. 이곳 추위는 생각보다 심각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 어머니를 생각해봐.. 어.. 어떻게 돌아가셨어? 날 위해 독을 빼내다.. 날 위해, 어머니 의지

대로 금수쌍녀라는 대명 하에 살아가는 걸 싫어하고 슬퍼하는 이 못난 딸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그녀의 말이 심하게 떨렸다. 다시 슬픔이 복받치는 것 같았다. 진양은 저번과 같은 상황이 연출될까 두려워 급히 그

녀를 진정시켰다. 

[알았어. 다신 그런 말 하지 않을게. 맘 상해하지 말고 우리 이제 이곳에서 나가자. 응?] 

정고가 미소하며 방을 나섰다. 진양도 곧 여전히 훌쩍이는 왕령을 다독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오니 과연 거센 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본래 아미산이 이토록 추운 곳은 아니었다. 다만 산이 높고 항

상 안개가 끼기 때문에 겨울이면 날씨가  매서워지는 것 뿐이었다. 더구나 고지대에선 바람마저  심해 뼈를 얼리는 

추위이긴 했다. 왕령은 진양과 함께 나오다 추위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춥지?] 

진양이 장난스레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 뿐이다. 세 걸음 뒤는 따뜻하고 산에서 내려만 가도 낫다

는 걸 아는 그녀였지만 고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입으로 진양을 향해 말했다. 

[양아. 정말 추, 춥긴 하네. 어머니가.. 계, 계신 곳으로 가면 좀 낫겠지?] 

[그럼! 여긴 정상이니까 그렇지 밑은 괜찮을 거야. 어서 가자!] 

진양은 막 걸음을 떼다가 저편에서 웃고있는 정고를 보았다. 얼굴엔 미안함이 역력했다. 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띄우

니 고맙긴 했다. 진양과 왕령도 함께 웃으며 그렇게 헤어졌다. 

산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추위는 풀리는 것 같았다. 실상 추위가 풀리는 게 아니라 바람이 약해진 것이다. 허나 몸

으로 느낌에는 이거나 저거나 같았다. 더 내려가니 점점 눈도 줄어들었다. 가는 길도 편해지고 추위도 풀리니 그들

은 다시 한번 웃을 수 있었다. 

머지않아 금녀의 무덤이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묘비엔 허연 눈이 더덕더덕 묻어있었다. 왕령이 눈을 쓸어

내며 무덤 앞에 엎드려 절한다. 

[어머니. 이 못난 딸.. 이제부터라도 편히 모시겠어요. 3년 동안 보살펴 드리겠어요. 밖을 나설 땐 방립(方笠)을 쓰고 

또 포선(布扇)을 쓰겠어요. 술이나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편하게 지내지도 않을 것이고 함부로 웃지도 않겠어요. 눈

이 오든 비가 오든 어머니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말을 마치며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진양이 놀라 입을 연다. 

[삼년상(三年喪)? 려, 령아.. 그건..] 

그가 말했지만 왕령은 듣지도 못한 듯 여전히 곡하기만 했다. 슬피 곡하는 그녀 앞에서 어찌 더 입을 열까. 진양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울어주진 못할망정 염장 지르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산중인데다 준비할 여건도 아니라서 부족한 게 많긴 했다. 허나 마음

만 있으면 된다는 진양의 말에 따라 무덤 옆에 움막을 지어 그곳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움막은 일부로 크게 지었

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지내야하고 또 남녀유별(男女有別)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다 지은 후 조금은 추워 보여 

진양이 더 손질하고 안에 불도 피우자 제법 따뜻한 움막이 만들어졌다. 왕령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다. 삼년상

이란 무덤 옆에 달랑 움막만 짓고 편하게 산다는 게 아닌데 따뜻하고 넓어 살기만 편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진양의 노력을 보았던지라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미산을 철저하게 얼리던 추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새 봄이 왔다. 새로이 싹이 트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날이 왔다. 땅속에 숨어 쌔근쌔근 잠자던 동물들도 튀어나오

고, 앙상하게 말라붙은 나무가 어느새 푸른빛까지도 발하고 있었다. 싸늘하고 백색으로 뒤덮였던 아미산은 다시  푸

르고 따뜻한 봄을 맞은 것이다. 

중원의 정세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남송은 새해라며 금에 조공(朝貢)을 바쳤고, 금은 여전히 남송의 정치에 간섭했

다. 무슨 군신관계라 함이 옳을 정도였다. 조정에는 간신이 우글거리고 제 이익에 눈먼 매국노가 황궁을 가득 메우

고 있었다. 

반면 강호에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강호인들이 사람을 모아 금국의 사신을 습격하는가 하면, 금국 인사를 암습

을 하기도 했다. 꼭 강호인이 아니라도 남인이라면 금인과 말도 터지 않았고 침을 뱉으며 돌아서기가 일쑤였다. 이

렇게 사신을 암습하며 괴롭히는 사실을 안 금국은 남송을  더 괴롭혔고 남송 황제는 잔뜩 겁에 질려 굽신거리기만 

했으니 악비 외 송나라 충신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한편 진양과 왕령은 이런 정세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다. 왕령은 묵묵하고  정중히 삼년상을 치르고 

진양은 그녀의 곁에서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진양은 매우 갑갑했다. 그녀가 침울해 보여 우스운 짓을 해도 도무지 

웃질 않고 수시진에 걸쳐 직접 만든 요리에도 조용히 수저만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진 지는 이미 오

래다. 

결국 진양은 무공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으니 생각난 건 고작 무공이었던 것이다. 특히 탄지신통 수련에 

열심이었다. 처음엔 굉장히 엉망이었다. 원한 방향은 정면인데 하늘로 솟질 않나, 땅으로 꺼지질 않나. 한번은 제 이

마에 꽂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점 나아지더니 5개월이 넘도록 수련하면서 거의  완벽해졌다. 

방향도 정확해졌고 머리로 퉁기는 황당한 경우도 없었다. 함종문 무공 초식하나 완벽히  시전함에 반 개월도 채 안 

걸렸었으니 5개월이나 걸린 건 조금 희한한 일이었다. 진양은 자신의 내공이 부족하여 그런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

다. 

탄지신통에 적응하자 당장은 할 일이 없었다. 막 생각난 건 유루봉법이었다. 하지만 왕령이 삼년상 하는 걸 보며 그 

봉법은 3년 뒤에나 전수 받아야겠다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함종문 무공도 게을리 하지는  않았으나 꺼리는 감이 

있어 그쪽 무공은 수련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왕령의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산을 벗하여 놀았다. 왕령이 보

면 불쾌히 여길까봐 항상 멀리까지 가서  놀았다. 가끔은 정고도 만나 담소도 나눴고  들짐승을 잡아서 구워먹기도 

했다. 하루의 반은 놀고 반은 왕령의 곁에서 지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선 오랜만에 맞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왕령

과 함께 놀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긴 했지만. 

시간이 또 흘렀다. 길면서도 짧았던 왕령의 삼년상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한참 치장에  신경 쓰고 정도 많을 나이. 

그걸 시묘하는데 버린 왕령의 마음이란 가상하기 그지없었다. 어느덧 열  여덟의 꽃다운 시절이 다가왔지만 안색은 

조금도 꽃답다 할 수 없었다. 초췌하게 마르고 3년의 피로가 겹친 그녀의 모습은 서른은 됐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래도 진양은 그녀를 밉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녀를 아꼈다. 3년이 지나며 그녀에 대한 감정은 한층  깊어

진 것이었다. 그녀가 원하면 물불 가리지 않을 기세다. 그건 왕령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삼년상이 끝났음에도 아직 떠날 맘이 없다는 걸 눈치챈 진양이 넌지시 물었다. 

[령아. 표정이 안 좋아 보여.] 

그러자 그녀는 가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우리 이제 내려가야지?] 

[정말 내려갈 맘이 있는 거야?] 

진양이 의미심장하게 묻자 그녀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원하지 않다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나도 내려가기 싫어. 너와 이곳에서 지내고, 또.. 유루봉법마저 확 전수 받는

다면 그야말로 좋겠지! 헤헤.] 

뒷말은 농담조였다. 그래도 그 말 자체가 또 의미심장하다. 왕령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 수련에 들어갔다. 

[유루봉법의 근본은 유루철장법에 있어. 예전에 말한 적이 있지? 내 봉법은 실제로 어머니께서 창안하신 거나 다름

없지.] 

[그래도 생각만 그녀가 했지 나머진 네가 했잖아.] 

[..아무튼 그래. 유루봉법의 기초는 물처럼 흐르는 유(柔)야. 그리고 끊임없이 회전하여  연회(連回)고, 요결은 전(轉)

이지.] 

진양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엄숙하게 입을 연다. 

[어허.. 과연 내가 봤던 거와 일맥상통하는군!] 

[풋..] 

[그래 어서 전수하시지.] 

[알았어. 서두르지마. 유루봉법은 음유함이 극한에 다다른 거라 마음부터 유유해야 해.] 

[너는 안 그렇잖아. 하하.] 

왕령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구결을 외울 거니까 잘 들어. 한번 뿐이야.] 

[히히. 뭘 그리 서둘러?] 

[노도(怒濤)가 밀려올 때 몸을 가볍게 하면 노도가 노도답지  아니하다하니 밀어내면 밀려가 주고 끌어내면 끌려가 

줘 실이 곧 허요, 허가 곧 실이 된다. 그 이치를 깨달은 터, 기를 단중(壇中)에 집중시키고 물 흐르듯 거궐(居闕), 기

문(期門), 주영(周榮)으로 나눠 움직이면 정(精)이 통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물 흐르듯 각자의 길을 따라 중완(中脘)

에 모이면 신(神)이 눈을 뜨고 또 기해(氣海)에 다다라 마음이 통할 때 마음을 얻게 된다. 그 후 용천(湧泉)과 은백

(隱白)을 직시하며 기를 내려 심신(心身)이 통일되는 순간, 기와 마음을 사지백해(四肢百骸)로 쏟아내면 비로소 힘을 

얻을 수 있다.] 

왕령은 초반엔 빠르게 읊다 진양이 집중하자  그제야 느릿느릿 읊었다. 모든 무학에 구결이  있듯 유루봉법에도 그 

만의 구결이 있는 것이다. 진양은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고 먼저 머리에 새겨뒀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마치자 조용

히 읊어보며 뜻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왕령은 방해가 될 것 같아 조용히 방안에서 나왔다. 

밖에 나오니 상쾌했다. 내일부턴 유루봉법의 초식을 가르쳐주리라  마음먹었다. 본래 유루봉법은 함부로 전수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예와 효에 대해 깊이 가르침 받았고 또 강호의 도리에 대해 가르침 받았다. 때문에 유루봉법의 

근본이 금녀, 마화미소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학은 사부의 허락 없인  함부로 전수할 

수 없는 법. 금녀는 왕령에게 있어서 부모이면서도 사부인 셈이다. 

허나 그녀가 특별한 유언 한마디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왕령은 삼년상을 치르며 생각했다. 이젠 자신이 의

지할 사람은 진양 뿐이라고. 세상에 나가봐야 세인들은 자신을 수녀라며 멸시하고 두려워한다. 더 나가  청성파라면 

아주 죽기살기로 덤벼드니 세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생각해준 

사람은 오로지 진양 한 명이었다. 그 만이 자신을 위해줬고 아껴주지 않았는가. 

왕령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스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자 시간이 절로 흐르는 듯 했다. 그렇게 따뜻하고 덥고 서늘

하고 추운 바람은 서너 번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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