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 章. 강호출도(江湖出道) 1
대륙의 북서부에 위치한 곳. 거리며 복색이며 조금은 중원과 다르다. 한때 이 땅도 중국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듯
제법 건물이나 말투가 비스름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도 달랐
다. 한인이 가장 적고 태반이 몽고인이다. 그 외에는 서역 사람이 조금 있었다.
이곳은 감숙(甘肅) 지방의 중심 난주(蘭州). 당대 이전엔 서방(西方)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다. 지금
은 몽고족이 점령하여 몽고인들로 가득했다.
[몽고인들 참 많네.]
[맘에 안 들어? 이곳엔 나도 딱 한번 와봤어. 그땐 서역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이젠 몽고인이네.]
난주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객잔의 한 방에서 나오는 말소리였다. 작게 트인 창가 안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름 아닌
진양과 왕령이 아닌가.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조금 이상하다.]
[거부감이 드는구나!]
왕령이 알았다는 듯 묻자 진양이 미소했다. 아미산에서 하산한 후, 사천 지방을 두루 지나 막 이곳으로 왔다. 그동
안 왕령은 언제나 진양의 마음을 잘 알아 맞췄다. 자신도 그랬고 항상 서로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
론 그건 6년이란 큰 세월을 함께 보낸 덕이었다. 이젠 별로 거리감도 없을 정도니 굉장히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할
수 있다.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다. 막 강호에 나왔는데 금방 이런 곳에 오니까.]
[괜찮다 까짓 거. 몽고인이면 어떻고 한인이면 어때?]
진양이 봉을 두들기며 짐짓 호탕한 채 떠들었다.
[호호. 맞아. 하지만 금인이라면 싫어. 만강홍(滿江紅)이 생각나거든.]
[난 금인이라도 상관없어. 금인 한 명 괴롭힌다고 금나라가 물러서는 건 아니잖아. 금인이라도 나와 마음이 맞는다
면 친구가 될 수도 있지!]
그의 말에 왕령이 웃는다. 그녀 역시 천하 정세에 대해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다만 금인이 한인을 괴롭히는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흥. 대단한 호인이시군. 그럼 금국 황제가 맘에 들면 벗이 될 수도 있겠어!]
[사형. 그만하세요.]
문득 뒤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양은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명백한 빈정거림이
다. 진양은 힐끗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덥수룩하게 수염 난 것이 제법 괄괄한 중년인 같았다.
[한번 대답해봐라. 금국 황제가 맘에 들면 벗도 되느냐?]
[물론이지.]
진양이 조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중년인이 벌떡 일어섰다.
[네 이놈! 숱한 한민족이 그들 손에 죽어나는데 네놈은 그 황제와 벗이 되겠다고?]
[난 그 황제가 호인일 때 벗이 되겠단 말을 했지 그냥 벗이 되겠다고는 한 적이 없다.]
[그 말이나 이 말이나 같다!]
[달라.]
중년인은 어지간히 분노한 듯 탁상을 후려쳤다. 나무로 된 상이 콰직, 하는 소리를 내며 단숨에 부서졌다. 무공을
아는 자가 확실했다. 그에 진양은 조소를 흘린다.
[흥. 할 말이 없으니 무력이군. 가소롭다 가소로워.]
[차림새를 보니 무림인 같은데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진양이 대소를 터트렸다.
[웃기는구나. 난 무림인이 아니다.]
[그럼 뭐냐?]
[파락호(破落戶)지. 하하.]
중년인이 버럭 호통친다.
[감히 내게 말장난을 해?]
순간 그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의자를 밟고 번쩍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진양의 뒤쪽으로 다가섰다. 매섭
게 보이는 그의 손날이 진양의 견정혈을 내리찍는다. 그러자 진양이 채 움직이기도 전 먼저 왕령의 봉이 움직였다.
빠르게도 중년인의 손목을 때렸다.
[아얏! 너는 또 뭐냐?]
중년인이 손목을 감싸며 악을 지른다.
[파락호의 벗이다.]
[네 이것들.. 감히 감총방(甘總幇)에 맞서겠다 그거냐?]
그가 호통치자 진양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젊은 놈이 벌써 노망이 들었나. 제 놈이 먼저 시비 걸고는 우리가 맞섰대.]
왕령이 킥킥거리며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그러게. 아마 그 감 뭐라고 하는 방파는 굉장히 웃기는가봐.]
[그럴 걸. 저놈 하는 꼴을 봐. 그 감 뭐라는 방파 나머지 놈들은 안 봐도 꼬락서니가 훤하다.]
중년인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여차하면 또 출수할 듯 싶었다. 그때 막 같이 있던 자가 그를 끌어냈다. 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자꾸 사형, 사형하면서 그를 데리고 나서버렸다. 진양과 왕령은 그 모습에 대소를 터트렸다.
다음 날, 그들은 오천산(五泉山)으로 향했다. 듣자하니 오천산 정상에 오르면 난주는 물론이요 황하(黃河)와 백탑산
(白塔山)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진양이 크게 흥미가 돌아 왕령에게 닦달질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
다.
오천산이란 이름에 유래가 있다는 말도 들었다. 한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받던 청년장군 곽거병(藿去病)이 흉노를
정벌하러 서역으로 떠날 즈음이었다. 본래 감숙 지방은 사막처럼 강수량도 적고 낮엔 더우며 밤엔 춥기 때문에 행
군은 고사하고 사람 살기도 영 좋지 않은 곳이다. 때문에 병마(兵馬)가 갈증에 허덕여 이대로 진군하다간 싸워보지
도 못하고 참패를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고심한 곽거병은 힘들어하는 병마를 위해 산에 올라 칼로 다섯 군데
를 찔렀더니 맑은 물이 샘솟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오천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진양은 자신이 들은 걸 왕령에게 열심히 이야기해줬다. 진양도 그녀가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안다. 허나 이왕 함께
오르게 됐으니 알면 더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도 열심히 말하는 진양에게 미안한 듯 억지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헌데 한참 오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병기 부딪치는 소리며 기합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진양은 나불거리던 입을
다물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산 중턱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양아. 누가 싸우나?]
[그런가봐. 우리 한번 가보자!]
[정상에 오르자며?]
[에이. 그거야 언제든 가볼 수 있잖아.]
진양이 먼저 걸음을 내달렸다.
들리는 소리가 거세질수록 가까워짐을 알 수 있었다. 쇳소리의 근원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격전장을 앞
두고 숨을 죽여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가량(可量), 이 배은망덕한 놈아! 큰 죄를 지었으니 목숨을 내놔야 할 터인데 대장부답지 못하게 도망가다니.. 너
같은 놈과 동문이었다는 게 실로 수치스럽다!]
[웃기지 마라. 네놈 아비에게 모함을 당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까딱하면 죽게 생겼는데 당연히 도망가야지. 일단 목
숨을 부지한 후에 누명을 벗길 것이다.]
[누명? 네놈이 내 아버지께 누명을 씌우지 않았느냐? 더구나 넌 전진교도로서 동정(童貞)을 잃은 죄인이다!]
[그래 난 죄인이고 네 일가는 대죄인이다.]
[네 이놈이.. 긴말할 거 없다. 당장 제압하라!]
진양은 가량이라는 자를 슬쩍 돌아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가량이라는 자의 나이는 중년쯤 되어 보였는데,
키가 대단하리 만큼 무척이나 장신(長身)이었던 것이다. 또 생김새가 매우 험악하여 상대로 하여금 충분히 중압감을
느끼게 만들 듯 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묘령(妙齡)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령아보다 백 배는 못하군.)
진양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못생긴 게 아니었다. 묘령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사실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것인데, 왕령이 워낙 절색이다 보니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만 것이었다. 그
런데 자세히 보니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듯 했다. 또 표정도 새파래져 있어 척
보기에도 크게 겁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자들은 한 스무 명 정도였는데 모두가 푸르디푸른 청포
를 걸치고 있어 멀리서 언뜻 본다면 무슨 호수로 둘러싸인 듯 보일 것만 같았다. 또 동일한 검을 들고 동일한 수식
을 취한 채로 포위한 것이 분명 어떤 문파일 게 확실했다.
[저들이 어느 문파인지 알겠어?]
[음.. 좀 더 초식을 봐야겠어.]
진양의 물음에 왕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듯 했다. 그들 스무 명의 자세부터가 매우 정밀하
고 그 포위한 수법도 무언가 규칙이 있었다. 진법은 아니되, 실력으로 보아 반드시 명망 높은 문파임이 확실했다.
왕령은 검법을 눈여겨보았다. 마침 청삼인들이 규칙을 갖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 가량이라는 거한에게 접근
했다. 그러자 그 거한은 크게 코웃음치며 검을 뽑아들고 맹렬히 달려들었는데, 그 모습에 진양은 하마터면 대소를
터트릴 뻔했다. 그가 뽑은 검은 다름 아닌 연검(軟劍)이었던 것이다.
[킥킥. 저 봐. 연검이야 연검.]
그가 손가락질하며 말했으나 왕령은 가볍게 미소만 짓고 다시 정색했다. 지금 그녀는 청삼인들의 검법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녀가 웃지 않자 진양도 금방 흥미를 잃어 그들의 검법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뒤편을 바라보
니 묘령의 소녀는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바싹 끌어올려 더는 못 봐줄 정도로 불쌍해 보이게 떨고 있었다. 격전장을
자세히 보니 그들 청삼인들의 수가 많아 만일 저 소녀를 데려갈 심산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듯 했는데, 그들이
그녀에게 다가서지도 않고 가량이라는 중년인 또한 그들과 맞서 싸울 뿐 그녀를 보호하지는 않은 듯 한 게 청삼인
들의 목표는 아무래도 저 가량이란 남자일 듯 했다. 상황은 거한이 크게 밀리고 있었다. 진양이 보기엔 그의 연검술
도 제법 뛰어났지만 청삼인들의 협공은 더욱 뛰어났던 것이다.
[아! 알았어.]
갑자기 왕령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저 검법은 전진교의 검법이야. 어디서 봤던 검법인가 했더니 그때 봤던 거로군.]
[아하. 전진교! 전진교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어. 대단하다던데..]
[응. 대단해. 그 중에 전진칠자(全眞七子)는 굉장히 유명하지.]
과연 그들의 협공은 청성파보다 정교했고 잘은 모르겠지만 심오한 뜻도 담겨져 있는 듯 보는 진양이 머리가 어지러
워졌다. 그러니 저 가량이란 남자는 얼마나 혼란스러우랴.
[저 거한이 제법 뛰어나지만 절대로 저 청삼인들을 이겨낼 순 없겠어.]
[그럴 것 같아. 그런데 왜들 싸우는 거지?]
진양과 왕령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다. 분명 가량이란 자의 실력은 형편없는 게 아니었다. 연
검 특유의 유연성을 최대한 살리는 듯,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흔들어지는 검법을 쓰고 있었다. 그가 한번 검을 내지
르고 살짝 힘을 주면 마치 독사의 혓바닥인양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는 밀리고 있었다. 그들은 살짝 솟아오른 언덕에서 격전장을 내려보는 터라 제법 자세히 관전할 수 있었다.
[봐 저 검법을. 빠르고 힘차지? 어머니께서 그러셨는데 빠르고 힘찬 무공은 대체로 정파의 무공이래. 빠르고 힘차다
는 건 그만큼 당당하다는 얘기거든.]
[하기야 그렇겠다. 그래도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 걸.]
진양은 청성파에 대한 기억이 있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정파에 대한 호의라던가 존경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
건 왕령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청성파 때문에 명문정파는 별로야.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도와야지. 위기가 닥치면 돕자.]
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가량이 미친 듯한 함성을 내지르더니 뒤로 재빠르게 물러섰다.
[빌어먹을.. 이건 분명 단양이십사진(丹陽二十四陣)이다! 언제 배웠느냐?]
가량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청상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청년 도사가 나섰다.
[별 것도 아닌 것이 잘도 알아보는구나. 그래 아버지께서 전수하셨다. 그리고 이들에겐 내가 직접 가르쳤지!]
[옳아.. 그러니까 당광(唐光)이 전해주면 안될 것을 감히 전해줬다 그거로구나!]
청년 도사가 호통쳤다.
[닥쳐라! 감히 아버님 함자를 함부로 부르다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하하. 웃기는 소리 작작해라. 당광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름도 못 부르느냐? 오히려 당광 그놈은 전진교를 말아
먹을 후레자식이다.]
[너.. 너..]
청년 도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움찔거렸다.
[건방진.. 네까짓 게 감히..]
[흥. 사실이 아니냐? 전진교가 대체 무슨 집단이냐? 너희 당씨 놈들은 조사님이 누군지 알기나 하느냐?]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우리 전진교는 동정을 잃지 않는 도교 문파로 여동빈 종조를 숭상한다. 또 조사님
은 중양조사(重陽祖師)가 아니더냐. 전진교도라면 다 알 법한 사실을 묻다니 네놈이 망령이 들은 거다!]
[다 아는 놈들이 그따위 짓을 한단 말이냐? 구 사숙조(師叔租)께서 몽고의 부름에 떠나시고 다른 분들이 폐관에 들
어가자 당광 그 망할 놈이 어땠느냐? 바로 네 아비가 전진교의 실권을 거머쥐었다!]
가량은 열을 내며 악을 썼다. 허나 이번에는 청년 도사가 코웃음쳤다.
[흥. 멍청하군. 아버지는 교주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다. 교주님께서 폐관하시기 전에 전진교 일을 책임지라 하
셨단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허황된 망발을 지껄이다니..]
[하하하!]
가량이 대소하더니 금방 정색한다.
[이게 책임지는 거냐? 제 말에 따르지 않으면 암살하고 따르면 권한을 주는 게 책임진다는 거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더니 전진교도 그리 되려는가!]
그가 한탄했다. 한 차례 속 시원히 떠들어서 조금 개운하기라도 해야 했지만, 더 답답해졌는지 얼굴만 구겼다.
[화아야.]
청년 도사에게 대꾸가 없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엔 아직도 덜덜 떠는 그 묘령의 여인이 보였다.
[두려워할 것 없다. 네 외조부(外祖父)께 가면 안전할 거다.]
[아.. 아버지.. 무서워요..]
그녀는 가량의 말에도 안심이 전혀 안 되는 듯 했다. 그 모습에 왕령이 진양을 쳐다보았다.
[양아. 저 아이 불쌍한 걸.]
[당장 도와줄까?]
왕령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곧 둘은 언덕에서 몸을 퉁겼다. 묵묵히 각자의 봉을 꺼내들고 전진교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년 도사가 놀라 호통쳤다.
[웬놈들이냐?]
[그래 너부터 혼내주마.]
진양은 그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아까부터 자꾸 교만하게 입을 놀렸기 때문이었다. 다른 도사들은 왕령에게 맡기고
그는 먼저 청년 도사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청년 도사가 웃었다.
[젊은 놈이 건방지군!]
그는 맞서 싸울 태세였지만 검은 뽑지 않았다. 다만 양손을 흔드는 것이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뜻과 같았다. 진양은
발끈하여 단번에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천령개를 목표로 하여 일격에 죽일 심산인 것이다. 허나 청년 도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가볍게 피했다. 진양이 이번엔 기역모의(豈逆母意)의 술수를 펼쳤다. 유루봉법의 초식이었다.
[아니?]
몇 수 피하던 청년 도사가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매섭게 진양을 노려보고는 갑자기 검을 뽑았다.
[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이 봉법은 유루봉법이렷다!]
청년 도사는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동시에 검도 진양에게 날아들었다. 과연 기본기는 다른 전진교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초식에선 조금 다른 면모가 보였다. 조금 더 정묘한 듯 하고 빠르며 고요하면서도 경쾌했다. 진양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 많은 걸 알 순 없지만 이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청년 도사가 만만한 자가 아니란 걸 진양은 그때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유루봉법의 핵심을 꺼내다 쓰기 시작했
다. 그 핵심이란 당연 끊이지 않는 흐름이다. 시냇물처럼 도무지 멈추지 않는 봉법. 진양은 3년의 수련으로 이미 유
루봉법은 대성한 상태라 시전함에 있어선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봉은 곧 그의 몸을 타고 이리저리 기괴하게 회전
했다.
[유루봉법으론 전진수검(全眞修劍)을 당해낼 수 없을 걸.]
순간 청년 도사의 몸이 빠르게 덤벼들었다. 검은 어느새 진양의 봉 끝을 향했다. 봉이 빠르게 회전한다 하지만 주기
가 있는 터라 그걸 끊으려는 것이다. 진양은 놀라 손을 재빠르게 뒤집었다. 그러자 봉의 회전이 변화를 일으켰다.
움직임이 멈춘 것도 아니면서 검을 피해 다른 방향 주기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양은 그대로 돌진해 견정혈을 내
리찍었으나 그는 황급히 물러서서 격중시킬 순 없었다.
[건방진 놈.. 네놈은 대체 누구냐? 수녀와는 무슨 관계냐?]
[제법 견문이 있군. 봉법도 알아보고..]
청년 도사가 안면을 꿈틀거린다.
[강호인 치고 유루봉법도 못 알아볼 멍청이는 없다!]
[이거 미안해지는 걸. 나는 그 수검인지 괴검인지를 못 알아봤는데.]
[이놈이..]
청년 도사는 화가 치솟는지 몸에서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왕령쪽을 돌아보았다. 왕령
은 여유만만했다. 봉법으로 따지면 진양도 상대가 안되니 그녀가 밀릴 리 없었다. 진양보다 부드러웠고 어딘지 모르
게 노련미가 풍기는 대단한 봉법이었다. 정확히 24명의 전진교도는 그 봉에 맞고 쫓겨 난장판이 따로 없는 상황이
었다.
[제자리를 지켜라!]
창피함인지 분노함인지 모르게 청년 도사의 안색은 시뻘갰다. 그가 대갈하자 도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왕령의 봉에 두들겨 맞아 이리저리 쫓기던 도사들도 몇 명이 자리를 잡고 도와주자 하나둘
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잠시 후엔 대열이 정비될 수 있었다.
왕령이 진양을 향해 손짓했다. 진양은 청년 도사를 보며 냉소하곤 그녀의 곁으로 돌아갔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라고 대관절 전진교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오호. 너희들이 전진교라고?]
청년 도사의 호통 같은 물음에 진양이 짐짓 모른 체 했다.
[설마 몰랐다는 것이냐? 흥.]
[몰랐지 물론. 어찌 감히 전진교에 맞서겠어? 안 그래 령아?]
[물론이지. 전진교는 강호의 명문대파잖아.]
왕령도 맞장구를 쳤으나 그 뜻은 조금 의미심장했다. 청년 도사도 느끼는 바가 있는지 냉소를 머금었다.
[흥. 저들을 도와주려는 수작이면 때려 쳐라. 반도(叛徒)를 놓치면 명문대파 전진교의 명성에 누가 된다.]
[아하. 저들이 반도라 그거군. 대체 무슨 죄를 지었지?]
진양이 궁금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묻자 청년 도사가 대답했다.
[저 가량이라는 자는 중양궁에 불을 지르려고 했고 또 몰래 혼인도 했다. 임시 교주님을 시해하려고도 했으며 또
전진육자가 폐관한 동굴에 독무를 뿌리려고도 했다.]
일순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더니 가량이 달려나왔다.
[이 쳐죽일 놈아! 내가 언제 중양궁에 불을 지르려 했고 동굴에 독무를 뿌리려 했느냐? 네놈이 보았느냐?]
[나는 못 보았지만 봤다는 사람이 많고 네 요처(妖妻)가 살던 집엔 짚단과 독이 있었다!]
[흥. 네놈들이 날 모함하려고 그곳에 넣어뒀겠지.]
[전진교도는 당당하다! 너는 반도가 됐으니 순순히 따라와라. 옥에서 참선하면 면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안 간다. 당광 그 개자식이 전진교를 장악하는 한 나는 절대 가지 않는다.]
갑자기 청년 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죽어라!]
청년 도사가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 소리치자 갑자기 도사들이 진을 형성했다. 진양이 보니 좌측에 열이요 우측에도
열이요 중앙엔 네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세는 하나같았고 진양이 서있는 자리에서도 24명의 검이 모두 보여
공격을 받는다면 크게 위험할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진법이 아까 그 단양이십사진인가 뭔가 하는 건가?]
[그런 거 같은데..]
진양이 혼잣말하듯 중얼대자 왕령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가량이 나서며 정중히 포권한다.
[두 분의 성함이 어찌 되시오?]
[아.. 진양이라고 합니다.]
[전 왕령이라고 해요.]
그들은 역시 포권하며 대답했다. 가량도 자신의 이름을 밝힌 후 먼저 감사를 표했다.
[두 분 소협의 도움으로 이 못난 목숨 건졌소. 솔직히 나는 분명 반도요. 당광 그 자식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고 혼인
도 해서 여기 내 딸도 있소.]
진양과 왕령은 그의 곁에 있는 묘령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목에 걸린 백색 진주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변명도 긴말도 하지 않겠소. 부탁 하나만 합시다.]
[말씀해 보시지요.]
[이 아이를 낙양 형가장(衡家莊)까지 데려다주길 부탁드리오!]
가량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에 왕령은 놀라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됐으니 끝까지 도와드릴게요. 그렇지 양아?]
[난 저들부터 좀 때려주고 싶은데..]
진양은 전진교도를 가리키며 능글맞게 웃어댔다. 어쨌든 동의한 셈이다. 가량은 크게 기뻐하며 절까지 하려고 했으
나 왕령이 극구 막아서 절 받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는 곧 딸을 보며 말했다.
[화아야. 이제 우린 볼 날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 안돼요!]
[어쩔 수 없다. 당광의 졸개들이 날 죽이겠다고 난리법석인데 졸개하나 상대 못해서 이런 수난을 겪는구나..]
가량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자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너보다도 민매(民妹)에게 미안해.. 나 때문에..]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허나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물더니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두 분 소협.. 은혜는 구천에서..]
[아버지!]
진양이 문득 왕령을 쳐다보았다. 왕령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6년 전 금녀와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
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곧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가화(可花)의 팔을 말없이 끌어당겼다.
[가요 아가씨.]
[하.. 하지만..]
[가긴 어딜 가.]
갑자기 진양의 입에서 난데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량이 크게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왕령도 가화도 놀란 건 마
찬가지였다.
[왜들 그리 놀라지? 난 가 선배님도 구해드리자는 건데..]
[소협. 그건..]
가량이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양이 미소한다.
[걱정 마세요. 저들 따윈 두렵지도 않으니까.]
[확실히 저들은 별 거 아니지만 단양이십사진은 무시할 수 없소.]
[붙어봐야 알겠죠. 안 그러냐 말코들아!]
진양은 도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도사들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진다. 왕령이 그를 보며 물었다.
[양아. 무슨 계책이 있어? 아까 봤잖아. 우리 실력으론 저 진을 깰 수 없을 텐데.]
[계책은 무슨. 유루봉법이면 시간 끌기엔 충분하잖아.]
[아니.. 그건..]
왕령이 놀란 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제야 그의 뜻을 눈치챈 것이다. 유루봉법은 특징상 시간 끌기엔 매우 유리했다.
더구나 진양도 대성한 봉법이니 왕령과 한 쌍을 이루어 펼친다면 가씨 부녀가 도망치기엔 아주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되면 정작 그들이 도망치기 힘들게 되어있었다.
(양아가 웬일이지? 무슨 꿍꿍이가 있나?)
결국 그의 말대로 하자면 자신들은 반드시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진양이 갑자기 이런 협심을 발휘하니 이상한 게
당연했다. 그녀는 진양이 자신보다 지혜가 있음을 알고 무슨 계획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 네 뜻대로 하겠어.]
[두 분 소협. 지금 무슨 얘기를..]
가량이 끼어 들자 왕령이 대답했다.
[선배님은 이제 가세요. 여긴 저희가 맡죠.]
[그건 말도 안되오!]
[왜요?]
[난 도움만 받고는 살 수 없소. 게다가 단양이십사진에 빠지면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단 말이오.]
그의 말에 왕령이 진양을 슬쩍 바라보았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느긋이 허공만 바라보며 모른 체 하고 있었다. 이건
뜻이 굳어졌을 때 하는 그 만의 행동이었다. 이럴 땐 어떤 말로도 보석으로도 그를 유혹할 수 없다는 걸 왕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량을 향해 말했다.
[선배님. 양아는 매우 고집불통이에요. 건방지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한번 생각을 품으면 절대 바꾸지 않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소. 무슨 염치로 도망치란 말이오? 나도 대장부요!]
[음.. 그럼 이렇게 해요.]
왕령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이었다.
[낙양 형가장이라고 하셨죠? 나중에 그리로 찾아뵐게요. 그때 뭔가 보답하시면 되죠.]
[그, 그건..]
[저희는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니 감사하실 필요가 없어요. 자 어서 가세요!]
그녀는 빠르게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가량이 몇 번 소협 소협 하고 불렀지만 진양이고 왕령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 둘은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허허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