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 章. 강호출도(江湖出道) 2
[그럼 나중에 반드시 찾아오시오. 나는 그리 알고 떠나겠소. 두 분 소협의 은혜.. 반드시 잊지 않을 것이오!]
[가량! 감히 도망치려고?]
청년 도사가 상황을 눈치채고 한 발 나서서 소리쳤다. 그러자 그제야 진양의 눈이 허공에서 내려오며 입도 열렸다.
[시끄러워. 네놈은 악만 지를 줄 아냐? 사람이 유유한 데가 있어야지. 쯧..]
[넌 닥쳐! 가량.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전진!]
그는 어지간히 급한 듯 했다. 연신 손을 휘둘러 단양이십사진을 전진하게 했다. 진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들었다. 스
물 네 명이나 돼서 그런지 진법에 무슨 오묘함이 있는 것인지 굉장한 중압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진양은 겁먹지
않았다.
[가 선배님은 이미 가셨으니 소용없다. 이젠 그만 돌아가지 그러냐?]
진양이 또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의 바로 뒤에 가량과 가화가 있는데 무슨 헛소리인가. 당사자는 물론이고 청
년 도사를 비롯한 전진교도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왕령은 단지 미소할 뿐이다. 도사들이 그대로 또
전진해오자 그가 다시 말했다.
[가 선배님은 가셨대도 그러네. 아아.. 나를 잡겠다 그거구나. 좋다! 오너라.]
그는 완전 제멋대로 상황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젠 아예 먼저 달려들어 유루봉법까지 펼치기 시작했다. 도사들이
일순 놀라 주춤거리자 청년 도사가 소리쳤다.
[당황할 것 없다. 저놈은 미친 게 확실하니 가량부터 잡아라!]
[누가 미쳐? 난 안 미쳤어. 미친 건 너희다!]
진양은 그들이 전진하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움직이며 유루봉법을 펼쳤다. 사방팔방으로 나무 봉이 난무했다.
왕령도 이제 나설 때가 됐지만 아직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관전하는 듯 했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았다.
가량과 가화가 여전히 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알아서 떠나길 원했지만 아무래도 한마디 할 필요가 있을 듯 했다.
[가 선배님. 안 가고 뭐 하세요?]
[소협. 큰일난 거 같소. 저분 소협이 이상해졌어!]
그의 말투 속엔 진정 어린 걱정이 들어있었다. 왕령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별 것도 아닌데 그의 진심을 느낀
것 같았다. 허나 여전히 몸은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어서 떠나세요. 그건 양이가 미친 척 한 거예요. 선배님이 없다고 계속 강조했잖아요. 그건 빨리 떠나라는 뜻이죠.
그래야 저희들도 무사할 수 있고 선배님도 저희에게 빚진 게 없어질 수 있죠.]
가량과 가화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곧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맙소. 반드시 오셔야 하오. 낙양성에 있는 형가장이오. 반드시!]
그의 간곡한 말에 왕령은 이제 떠나며 남기는 인사란 걸 알았다. 그래도 몸은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냥 고개
만 끄덕거렸다. 진양이 갑자기 협의지심(俠義之心)을 발휘한 만큼 웬만하면 그처럼 행동하려는 것이었다. 그에게 무
슨 계획이 있는지 모르니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몸을 돌려 도망치는지 진양을 봉을 뚫느라 인상 찌푸리던 청년 도사가 소리쳐댔다.
[이놈 가량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허 고놈 참. 가 선배님은 떠났다는데 정말 말귀가 어둡네. 넌 확실히 미친 거다.]
[너.. 네놈은 나중에 반드시 혼을 내주겠다. 감히 전진교에 맞선 대가는 클 것이다.]
청년 도사가 두 손을 들어 좌우로 두 번 교차시켰다. 그러자 단양이십사진이 갑자기 변화했다. 좌우로 각기 늘어섰
던 열 명의 도사들이 길게 늘어서고 중심서 사각을 이루던 네 명이 일렬로 맞춰 서는 것이었다. 언뜻 보아도 단번
에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진이었다. 진양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갑자기 자신도 손짓했다. 도사들이 잠시 어
리둥절해하자 뒤에서 왕령이 불쑥 튀어나왔다.
[호호. 양아. 우리는 어떻게 진을 만들까?]
[그냥 널찍하게 서자. 이런 놈들 상대하는데 무슨 진까지 필요하겠어?]
그들의 대화는 두말이 필요 없는 빈정거림이었다. 정말로 그들은 널찍하게 서서 그들의 전진을 기다렸다. 각자 봉을
든 남녀 한 쌍이 24명의 진 앞에 우뚝 선 모습이란 정말 진경(珍境)이었다.
청년 도사는 더 다급해졌다. 살짝 뛰어올라 보니 가량 부녀가 도망치는 게 보였으나 조금만 어물거리다간 놓칠 것
같았다. 그는 진양과 왕령을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마지막 충고다. 우릴 막지 않는다면 다음에 너희를 괴롭히진 않겠다. 게다가 그들은 반도니 어서 길을 비켜라!]
[그들이 누구지? 령아. 그들이 대체 누군지 알어?]
왕령이 킥킥거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청년 도사의 얼굴에 금방 짙은 살기가 끼었다.
[오냐. 정 그렇다면 긴말하지 않겠다.]
진양과 왕령을 번갈아 보며 소리치더니 이번엔 도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돌파다! 방해하면 죽여도 좋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그 말에 도사들이 검을 움켜쥐었다. 좌우로 길게 늘어진 단양이십사진이 드디어 밀려오는 것이다. 진양과 왕령은 서
로 한번 쳐다보고는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각기 정면으로 달려들
어 수세적인 유루봉법을 펼쳤다. 봉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는 공격이 계속 이어지는 이치와 같다. 하지만
그것을 방어에 응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철벽방어가 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봉의 길이는 길어야
5척(尺) 정도. 허나 봉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시전자 또한 계속 왔다갔다하니 시간벌이라면 가장 완벽한 무공일지
도 모른다.
실제로 단양이십사진은 심오막측(深奧莫測)한 절진(絶陣)이었다. 전진교 개파조사 왕중양은 중양수단양이십사결(重
陽授丹陽二十四訣)이란 책을 쓴 적이 있다. 이 책엔 도(道)를 비롯하여 마음을 청정이 하고 몸의 기를 다스리는 법,
고로 내공심법(內功心法)이 있었다. 왕중양은 이 요론을 바탕으로 전진교를 세우면서 한 가지 진법을 창안했는데 그
것이 바로 단양이십사진이란 얘기다. 이 진법은 전진 칠자가 배웠으나 다시 제자에게 전했다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
전진교도들이 단양이십사진을 펼치는 걸 보고 가량이 놀란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대단하고 귀중한 전
진교의 산물이라 위력도 대단했다. 진법의 변형만 여섯 가지가 있었고 그 하나하나 마다 용도도 달랐다. 지금 단양
이십사진의 변진은 파진(破陣)이라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무척이나 달랐다. 파진은 완벽히 돌파에만 쓰는 진 형태로 이를 취하면 적을 포위하거나 공격하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이 진법은 사면초가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나 쓰이는 탈출용인 셈이다. 이런 진법 앞에서 진
양과 왕령이 유루봉법을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단양이십사진이 그들 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돌파하
자니 봉법에 막히고 그들을 치자니 위력을 발휘 못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청년 도사는 분통이 터지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죽이든 돌파하든 하란 말이다!]
도사들은 한층 더 열을 올렸다. 그러나 열만 올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단양이십사진에 대한 지식이 부
족했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가량고 가화는 이미 시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청년 도사는
이를 갈았다. 빠득빠득 하는 소리가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물러서라!]
그의 분노가 담긴 외침에 도사들은 또 급히 물러섰다. 진양과 왕령은 이 도사들이 청년 도사에게 매우 순종한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라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청년 도사가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진양과 왕령이 찰싹 붙어서 같
이 조소를 흘리는 모습에 몸을 떨었지만 인내로써 울화를 억눌렀다.
[너희들 이름이 뭐냐?]
[우리가 왜 그걸 말해주지?]
진양이 능글맞게 빈정거렸다. 청년 도사는 짐짓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 그래 두려운 거군.]
[두렵다니?]
[그렇지 않느냐? 두려우니 이름도 말 못하는 거겠지.]
이번엔 진양이 대소했다.
[하하하! 세상에 미친개 한 마리 두려워할 사람이 있겠느냐?]
[뭐라고?]
[내 이름은 진양. 이쪽은 왕령이지. 복수가 하고 싶거든 언제든 찾아봐라.]
청년 도사는 한차례 눈을 부라렸으나 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사문은 어디냐? 겨뤄보니 유루봉법 말고도 다른 무공을 익힌 듯 싶군. 내공도 좀 있고.]
[사문은 알아서 뭐하게?]
[겁나지 않는다면 말해라.]
[흥. 우습다 우스워. 사문을 안 다음 내 무공에 대해서 파헤칠 생각이겠지만 난 너처럼 무지하진 않아.]
[이 망할 놈이..]
청년 도사가 다시 발끈하여 욕지거리를 내뱉자 왕령이 끼어 들었다.
[전진교도는 욕도 잘하네. 사람도 잘 괴롭히고 24명이 2명을 공격하기도 하지.]
[맞아. 전진교가 무슨 명문대파야? 이런 게 명문대파면 사악한 무리들은 대체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안 가네.]
그들의 빈정거림에 도사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청년 도사만큼은 여전했다. 창피하기보단 분노를
느끼는 듯 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다. 아예 여기서 너희들을 죽여버리겠다.]
[오호라! 살인멸구(殺人滅口)로군.]
[그것도 알면 반드시 죽어야 해!]
청년 도사에겐 도사다운 면모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까는 조금 기품이라도 흘렀지만 이젠 명성에 연연하는
외도무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단양이삽사진을 펼쳐라. 원진(圓陣)으로 오늘은 이들 둘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잔혹한 말투도 서슴대지 않고 있다. 왕령은 크게 불리할 거라 여기고 소리쳤다.
[네놈들이 정녕 전진 도사냐? 정말 더럽구나.]
[하하하.]
갑자기 청년 도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소롭다는 듯 눈빛도 좀 전과는 딴판이었다.
[그래 우린 분명 전진 도사다. 각오나 해라!]
청년 도사가 손짓하며 뒤로 물러섰다. 과연 신호 보내기 무섭게 도사들의 몸이 날아다녔다. 동에서 동북으로 서에서
서남으로, 이리저리 빙글빙글 하더니 금새 진양과 왕령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진을 형성해버렸다. 이젠 완벽히 포위
된 셈이다.
[아까 하고는 조금 다를 걸.]
[우리도 마찬가지다. 유루봉법이 왜 명성을 떨치는지 똑똑히 알려주마.]
왕령이 눈을 번뜩이며 씹어뱉는다. 결사항전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반면 진양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할까.
[형님!]
청년 도사 뒤로 누군가 온 듯 했다. 기척으로 보아 두 사람인 듯 했다. 격전장에 있던 자들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 청년 도사의 얼굴에 화색이 만면해졌다.
[하하. 주고, 민아. 함께 왔구나.]
[당연하지요. 형님께서 혼자 공을 차지하시려고요? 하하.]
그들은 만난 게 기쁜 듯 함께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진양과 왕령이 보니 한 명은 절세 미남이요 한 명은 절세 미
녀였다. 순간 왕령의 가슴으로 얼음물이 내려가는 듯 했다. 심장이 멎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저리 훤칠한 남자가 또 있을까. 그녀는 일순 그런 생각을 가졌다. 약간은 하얀 피부가 햇빛을 반사하는 것 같고 단
정한 머리며 맵시 있게 도복을 입은 모습도 여기 청년 도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게다가 옆에 절세 미녀까지 있으
니 한층 더 빛을 발하는 듯 했다.
[형님. 가량은 어찌 됐습니까?]
[흥. 저 두 놈 때문에 놓쳤다!]
청년 도사가 코웃음치자 절세 미남녀는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 미남자는 조용히 진양과 왕령을 훑어보더니 환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 성함이 어찌 되시오?]
그 말에 진양은 냉소만 머금는데 왕령은 안절부절못한다. 진양이 이상함을 느끼고 어깨를 잡아주자 그녀는 화들짝
놀랬다.
[왜 그래 령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얼굴을 약간 붉히더니 곧 미남자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저는 왕씨예요. 오늘 귀교가 나쁜.. 아니.. 힘없고 못난 자들을 괴롭히기에.. 이렇게 막게 됐어요.]
[아.. 그랬구려. 소저는 미모도 미모지만 협심도 대단하시오. 하하.]
그는 진정으로 탄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이 갑자기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령아는 본래 미모도 뛰어나고 협심도 대단하지. 너희 전진교와는 질이 다르다.]
[이분은..]
진양의 시비조에도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왕령은 놀라 진양 대신 말했
다.
[이쪽은 진씨예요. 동행자죠.]
[아하. 그렇소? 진소협은 호탕하고 비범하신 것 같소.]
그가 두 손을 맞잡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진양은 그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왕령이 자꾸 예를 다하는 터
라 시비 걸지는 않았다.
[아! 이런 결례를 범했군. 난 당주고(唐周高)라고 하오. 이쪽은 막내누이고 저 분은 우리 큰형님이오.]
알고 보니 그 절세 미남자의 이름은 당주고였다. 그 청년 도사의 이름은 당무(唐武)며, 또 절세 미녀는 당유민(唐有
敏)이라고 했다. 이들은 삼남매로 모두 전진교 소속인 듯 했다. 왕령은 청년 도사가 당주고의 큰형이라는 사실에 매
우 놀랐다. 갑자기 그 청년 도사, 즉 당무가 말문을 열었다.
[흥. 뭐 하러 그리 예로 대하느냐? 가량도 빨리 잡아야하는데.]
[그가 떠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얼마 안됐다. 쫓아가면 잡을 수 있어.]
또 진양이 불쑥 끼어 든다.
[누가 쫓아가게 내버려둔대? 한 시진 정도는 여기서 움직이지 못하게 할거다.]
[진소협.]
당주고가 한 발 나서며 말을 이었다.
[가량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시오?]
[다 들어서 알고있어. 하지만 나라를 말아먹는 간신은 죽어 마땅하듯 일파를 말아먹는 도둑놈도 죽어 마땅하지.]
[그건 무슨 뜻이오?]
당주고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몰라서 묻나? 듣자하니 가 선배님이 당광인가 하는 자를 죽이려 했다던데.]
[그 말뜻은 내 아버님이 일파를 말아먹는 도둑놈이라 그거요?]
[잘 아네.]
순간 당무가 호통친다.
[네 이놈! 예로 대했는데 네놈도 예로 대해야지 이런 고약한..]
[난 예로 대해달라 한 적이 없다. 이 자가 제멋대로 그랬던 거지. 안 그래 령아?]
진양이 왕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왕령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깨닫고는 진양의 소
매를 잡아끌었다.
[양아.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싸워선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저들의 비위를 조금 맞춰주다가 경계가 느슨해지면 도
망치자.]
[내 성격을 잘 알잖아. 난 못해.]
[양아.. 굽힐 줄도 알아야 대장부야.]
그녀는 속삭이듯 말을 하고 있었다. 진양은 뭔가 괴이쩍음을 느끼고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더욱이 자신
을 가장 잘 아는 그녀가 저들의 비위를 맞추라니 더욱 이상했다. 그러나 왕령이 간청하자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
다.
곧 당씨 남매를 돌아보며 말한다.
[오늘 일은 우리가 잘못했다. 길을 열어라.]
[아니 양아!]
왕령이 소스라치게 놀라 부르짖었다. 설마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주고를 바라보니 그는 심히 불쾌한
듯 했다. 그건 당무도 당유민도 도사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양아! 무슨 짓이야?]
[네 말대로 사과는 했지만 허리는 죽어도 못 굽히겠다. 네 말이 아니었으면 사과도 하지 않았어!]
[너.. 내 말 안 들을 거야?]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대단히 분노한 듯 했다. 하긴 6년 간 그녀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으니 이럴 만도 했
다. 하지만 진양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짐작했다. 갑자기 그녀가 변모한 것도 그렇고 표정도 뭔가 어설프다.
평소 그녀가 화를 낼 때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령아. 정신차려. 갑자기 왜 그래?]
[무, 무슨 말이야? 우리가 잘못했으니 사과해야지. 게다가 저 분들은 예를 갖추는데 우린 예를 갖추지 않는다면 뭐
라고 욕하겠어?]
[욕이라면 얼마든지 하라고 해. 지겹게도 들은 욕인데 하나도 안 겁나. 명문대파라는 전진교가 가 선배님을 반도랍
시고 누명 씌우지 않나, 그 분을 도왔다고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나. 그런 그들이 갑자기 예를 갖춘다고 나도
예를 갖춰? 난 절대 못해. 날 죽여도 못해.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절대로 못해.]
진양은 열을 올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6년 동안 함께 지내며 한번도 싸우지 않았던 그들인데, 드디어 처음으로 싸우
는 것이다. 그동안 간혹 의견 대립은 있었어도 이렇게 서로 호통을 치며 싸운 적은 없었다.
한편 당무 등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당유민이 조금 인상을 찌푸리자 당주고가 말했다.
[말려야 하나?]
그의 말에 당유민이 날카롭게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속셈이죠?]
[무슨 속셈이라니?]
[저들이 서로 싸우는 게 속셈이었나요?]
[하하. 아니야. 난 그저 예의로 대했던 것 뿐이라고.]
그녀는 그의 눈을 직시했다.
[오라버니는 저 왕씨 낭자가 마음에 들었던 거겠죠. 그래서 예를 표한 거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런 마음 없었어.]
[그거야 두고보면 알겠지만.. 아무튼 난 저들을 말려야겠어요.]
[민아.]
그가 타이르듯 말했지만 당유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달려나가 서로를 노려보며 말싸움하는 그들 사이
에 끼었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넌 또 뭐냐?]
진양이 매섭게 쏘아대자 왕령이 소리쳤다.
[진양! 그만하지 못해? 예를 갖추란 말야!]
[흥. 예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넌 뭐냐고 물었다.]
그들 둘 다 매우 흥분한 듯 했다. 진양은 당유민을 돌아보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유민이라고 해요. 지금 전 두 분을 말리려고 왔어요.]
[하하. 말려? 옳아.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이간질시키려는 계획이렷다!]
[진양!]
왕령이 호통쳤다.
[그만해 이제! 저들이 예를 갖추는데.. 넌 왜 그렇게 건방져?]
[난 원래 건방지잖아. 게다가 이 죽일 것들에겐 예 따윈 필요 없어!]
당유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이거 봐라. 이럴 줄 알았다!]
진양의 외침에 당유민과 왕령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진을 치고 있던 도사들이 어느새 거리를 좁혀오고 있던 것이
다. 아무래도 그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씩 접근해 온 듯 싶었다. 당유민이 놀라 소리쳤다.
[대형! 그만둬요.]
[걱정 마라. 넌 일단 이리로 오너라.]
당무의 말에 그녀는 잠시 주춤했으나 곧 그의 곁으로 돌아갔다. 좁혀든 원진 안에서 진양과 왕령은 서로 쳐다보지
도 붙어 있지도 않았다. 당무가 외친다.
[둘 다 들어라. 아까 나에게 범했던 무례는 모두 잊어줄 수 있다. 너희가 사과한다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지. 아니
사과한다면 우린 친구도 될 수 있다.]
[개소리 좀 작작해라. 누가 네놈에게 허리를 굽힌단 얘기냐?]
[양아! 그만둬. 우리가 잘못했으니 사과는 해야해.]
[난 못해.]
진양이 냉소하자 왕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걸음 나서서 당무 등에게 말한다.
[오늘 일은 죄송해요. 양이가 성격이 괴팍해서 저러니 이해해줘요. 제가 대신 사과 올리겠어요.]
그녀가 두 번 고개를 숙였다. 진양이 뒤에서 뭐라고 고함 쳤으나 그녀는 들리지도 않는 듯 무관심했다. 그녀의 행동
에 당무가 흘낏 당주고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갑자기 튀어나간다.
[소저. 일어나시오. 우리의 분노는 이미 다 가라앉았소.]
[정말이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한 가지는 용납 못하겠소. 진소협이 기어코 사과를 하지 않는 점이오.]
[그는 본디 괴팍하니 이해해주세요.]
[나는 그가 사과를 한다면 친구가 되고싶소. 그러나 하지 않는다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한 얘기다. 왕령은 재빨리 진양 곁으로 다가가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양아. 이제 고집 좀 그만 부려.]
[흥. 난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아. 알면서 이렇게 행동하는 네가 더 이상해.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말고 사과하자. 응? 우린 6년 동안 함께 지냈잖아. 네가 사과하지 않는다
면 네 목숨이 위험해. 난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양아..]
진양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간곡한 부탁을 듣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주마등처럼 6년이란 세월이 지나간다. 그
녀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조금 전 서로 싸웠지만 그렇다고 서로가 죽길 바라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고맙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잠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일
순간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난 굽힐 수 없어!]
[양아! 너 정말..]
[난 죽지 않아. 왜냐하면 저들이 날 칠 때 네가 도와줄 테니까.]
왕령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정곡을 찔린 셈이다. 그녀는 만일 그가 위기에 처하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 난 널 도와줄 거야.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예로 대해잖아. 굳이 싸움을 만들 필요가 있니?]
[나도 원하지 않아. 허나 저들에겐 허리를 굽힐 수도 사과할 수도 없어!]
진양의 말에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젠 아무런 소용도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슬쩍 당주고를 쳐다보았다.
마침 그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터라 눈이 마주쳤다. 왕령은 놀라 눈을 돌리며 생각했다.
(그들이 양이를 친다면 난 도와줘야 해. 하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저 진은 이길 수 없어. 시간만 벌다 지쳐 결
국 제압 당하겠지. 제압 당하고 나면 그들 속도 후련해질 것이고 양이도 느끼는 바가 있을 거야. 그때 화해시켜줘야
겠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주고가 입을 연다.
[진소협. 정말로 사과할 마음이 없소?]
[너에게 사과하느니 차라리 개새끼를 부모로 모시겠다.]
[흥. 정녕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없소. 왕소저의 도움이 있다해도 단양이십사진을 이길 순 없을 거요.]
[해봐야 알지.]
[마지막으로 묻겠소. 사과할 거요 안 할 거요?]
진양이 버럭 호통쳤다.
[난 아무에게나 허리를 굽히는 자가 아니다! 칠 테면 빨리 칠 것이지 뭔 잔말이 그리도 많은 거냐?]
[흥. 어디 두고봅시다.]
그가 당무에게 귓속말하자 그가 공격을 신호했다. 이제 둥그렇게 둘러싼 단양이십사진이 서서히 조여오는 것이다.
진양은 봉을 움켜쥐며 왕령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슬프다는 걸 진양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와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그런데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이변의 시작은 어디선가 들려온 정체불명의 광소(狂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