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章. 6년만의 재회 1
[하하하하! 하하하하!]
무시무시한 웃음소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일단 웃음소리가 들려온 후부터 천지가 진동함은 물론이요 새들이고 짐승
이고 전부 내빼기에 바빴다. 물론 인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엄청난 광소는 그냥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내공
을 듬뿍 실은 웃음소리로 일종의 사자후(獅子吼)라 할 수 있었다. 허나 불문의 사자후처럼 장중하고 엄숙한 느낌은
전혀 오지 않았다. 매우 요동치며 지진처럼 모두를 잡아먹겠다는 것 같았다.
진양과 왕령은 말할 것도 없고 당무를 비롯한 전진 도사들 모두가 정좌했다. 지금은 싸움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공을 끌어올려 이 광소에 맞서야하는 것이다. 이 웃음소리를 듣자 순간 뱃속이 부글거리더니 점점 단전도 부글거렸
는데 이는 단전파괴를 의미한다. 내버려두다간 단전이 터진다는 말과 같다. 무공을 배우는 이들로 단전이 파괴된다
는 건 폐인이 된다는 것고 또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은 뒷전이고 광소에 맞서는 게 우선인 것이다.
진양과 왕령은 매우 고됐다. 실상 그들의 내공은 조금도 대단한 편이 아니었다. 진양의 경우는 함종문과 관계가 깊
다. 함종문은 내공 위주의 무공을 전하는 문파가 아니라 초식 위주의 무공을 선호하는 문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
연 내공 수련면에선 뒤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후로도 딱히 내공을 쌓는 일이 없었고 유루봉법이나 탄지신
통 수련에만 힘썼음으로 더 그랬다.
왕령의 경우는 유루봉법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유루봉법을 익혀 봉법을 시전하는데 특별히 대단한 내공은 필요
없었다. 물론 있다면 좋을 테지만 적다고 봉법 시전에 무리가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내공은
구결대로 기를 운용할 때나 쓰고 전(轉) 자 요결을 발휘할 때나 써왔다. 금녀가 내공심법을 전수하기로 했지만 갑작
스런 죽음이 닥쳐 미처 전수받지 못한 면도 있긴 했다.
전진교 도사들의 경우는 본래 다르다. 전진교는 내공심법이 뛰어나고 초식도 뛰어나 강호에서 상당한 명성을 이룬
다. 허나 당무 등 이곳에 있는 도사들은 내공이 심후하지 못한 듯 했다. 진양과 왕령이 아직도 버티는데 벌써 피를
토하며 나자빠지는 도사들도 몇몇 있었다.
그대로 반 각이나 지났을까. 진양도 왕령도 이젠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 정도의 사자후에 대항하려면 그들로선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야만 했기에 이젠 지친 것이다. 이제 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반 각을 더 못 넘기고 죽
을 게 뻔했다. 진양은 왕령이 한번보고 싶었다. 정신을 집중해야 하건만 그래도 그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억울했다. 최대한 집중하되 눈을 가늘게 뜨며 왕령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도 눈을 뜨고 있었다.
(아! 그녀도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령아, 이제 우린 구천에서 만나야겠는걸.)
잠시 딴 생각을 품자 당장이라도 피를 뿜어낼 것 같다. 진양은 사력을 다해 다시 광소에 대항하다 왕령을 또 바라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녀가 눈을 뜨고 있긴 한데 자신을 보는 게 아니었다. 멍하니 무슨 꿈을 꾸는지 이상
했다.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그녀의 시선을 따르던 진양은 순간 가슴이 얼어붙었다. 그 시선이 닿아있는 곳엔 다름
아닌 당주고가 있던 것이다.
당주고는 가부좌로 광소의 대항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진양은 그제야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녀의 표
정과 눈빛을 보고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녀가 갑자기 돌변했었는지, 또 그들에게 정중히 예를 다하려 했
었는지. 한순간 모든 걸 깨닫자 분노가 치밀었다.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일단 광소에 대항하며 가슴을 추스
르기로 했다. 때마침 광소도 멎는다.
광소가 멎은 후에도 그들 모두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젠 운기하여 치료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 모두가 제정신을 되찾을 때쯤이었다.
[하하! 그렇게 힘들었나?]
일순 진양의 몸이 움찔거렸다. 낯익은 음성이었다. 진양은 급히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떠보았다. 과연 눈앞에 있는 자
는 우락부락한 덩치에 오만한 얼굴, 바로 제 의형인 무굉이었다.
[혀, 형님!]
[오냐 아우야. 오랜만이다.]
무굉은 느긋하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무굉과 헤어진 지 얼마 만인가. 자그마치 6년도 더된다. 더구나
말 한마디 없이 연락이 끊겼었기에 해후의 기쁨은 더 컸다. 진양은 기쁨이 감격으로 변해 눈물이 찔끔거렸다.
[형님!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이리저리 놀러 다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지.]
[형님..]
[네 녀석도 훤칠해졌구나. 키야 나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컸네. 목소리도 쉬고. 하하.]
무굉은 진양의 성장이 대단히 기쁜 듯 했다. 진양이 무굉을 자세히 보니 별로 변한 게 없었다. 오만한 자세며 말투
며 목소리며 모두 6년 전과 같았다.
왕령은 무굉의 등장에 기뻐했다. 그의 무공이 초절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이 굳이 도와줄 필
요도 없고 진양도 위기에 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단양이십사진을 쳐부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무공이 대단하니 진양은 안전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나저나 넌 역시 내 아우답다.]
[왜요?]
[아까부터 여기 대화를 쭉 들어왔거든. 아무한테나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명언이었다! 하하.]
진양이 방긋 웃었다. 무굉을 만난 것도 기쁜데 그가 칭찬도 하니 더 기뻤다. 문득 뒤에서 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당
무가 포권하고 있었다.
[저희는 전진교 제자들입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그래 내 존성대명은 무굉이다. 자존자대 무굉! 들어봤겠지?]
순간 당무 등 도사들의 안색이 대변한다.
[아.. 무, 무대협이셨군요. 어쩐지 사자후가 대단하더라 했습니다. 하하..]
[하하하! 그래. 하지만 그건 사자후가 아니지. 그건 광후대란(狂吼大亂)이라고 한다.]
[광후대란이라!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마터면 못 견딜 뻔했죠.]
[내가 적당하게 한 거야. 더 하다간 내 아우가 다칠지도 모르니까.]
당무는 이미 그들이 의형제란 걸 눈치챈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예의상 물었다.
[진소협이 무대협의 의제셨군요.]
[그렇지. 아우는 나와 마음이 잘 맞아. 하하.]
그의 말에 당무는 소름이 끼쳤다. 이젠 죽을 지도 모른다. 자존자대 무굉이 사악한 사람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오만방자해서 눈에 거슬리면 반드시 혼내준다는 말을 익히 들었다. 지금 진양을 괴롭혔으니 여차하면 무굉에게 공
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가 그런 생각하기가 무섭게 진양의 입에서 밉살스런 말이 흘러나왔다.
[형님. 저들은 매우 비열해요.]
[아 그래. 나도 알고 있다. 24명이 단양이십사진을 펼치더군.]
[흥. 그래요. 이제 하마터면 죽을 위기였는데 형님께서 오셨으니 든든해요.]
당무가 진양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다 무굉이 쳐다보자 급히 눈을 돌렸다.
[일전에 전진칠자를 한번 본 적이 있지. 무공도 대단하고 인정이 많았어. 그런데 너희들은 전혀 다르구나.]
[무, 무대협. 사실은 그게..]
[에이 듣기 싫다. 양아. 죽일까 살릴까?]
도사들이 모두 움찔거린다. 그들 모두 무굉의 명성은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유민이 걸어나왔다.
[무대협.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호오. 이 아이 봐라.]
[저희가 잘못하긴 했지만 꼭 우리가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가량이라는 반도를 잡으려고 하다가 진소협 등과 맞선
거예요.]
무굉이 진양을 쳐다본다. 어쩔 거냐는 물음과 다름이 없었다. 진양은 생각 같아선 모두 죽이고 싶지만 정말로 다 죽
이자니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그는 그냥 봐주기로 결정했다.
[형님. 그냥 봐주..]
그가 말을 잇다가 갑자기 끊었다. 한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왕령을 본 것이다. 안색을 보니 다급한 듯 한데
분명 당주고를 죽일까봐 저러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흥. 나머진 죽일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저 당주고란 자는 죽여야해요. 령아와 날 이간질하고 나에게 사과를 강요
했으니까.]
[아.. 아니.. 지, 진소협 그건..]
당주고는 대단히 놀란 듯 했다. 얼굴이 새파래져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무굉이 웃는다.
[하하. 좋아. 네 뜻대로 저놈만 죽이마.]
[잠깐!]
무굉이 막 나서려던 차에 앙칼진 외침이 들려왔다. 뻔할 뻔 자로 왕령이다. 진양은 그녀가 막자 더 화가 났다.
[령아. 대체 왜 막는 거지?]
[그, 그건.. 그가 불쌍해서..]
[불쌍? 흥. 그게 아닐 텐데.]
진양이 냉소하자 그녀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곧 더듬더듬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그가 예도 표하고.. 또..]
[그만 둬!]
진양의 호통에 그녀가 찔끔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왜 그래 령아.. 내가 어떤 녀석인지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네가 뭐 때문에 이러는 지 난 잘 알
고 있어.]
[야, 양아..]
[좋아. 네가 정 그렇다면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겠다.]
[안 돼!]
[형님! 부탁드려요.]
그는 왕령의 말을 무시하며 무굉에게 말했다. 무굉은 잠시 그들을 번갈아 보더니 곧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당주
고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에 당무 등 도사들은 딱딱히 얼어붙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
[무대협!]
기어코 그를 막은 건 왕령이었다. 그녀는 무굉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자비를 베푸세요. 양이가 지금 흥분해서 저런 말을 한 거예요. 잠시 후면 풀릴 테니 용서해주세요.]
[몰라 나는. 아우가 부탁했는데 어떻게 안 할 수 있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거리를 좁혔다. 왕령은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제가 막겠어요.]
[네가? 네 실력은 형편없어서 소용없을 텐데.]
왕령은 봉을 들고 무굉을 쏘아보았다. 결사적으로 막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무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그에게 무슨 빚을 졌나?]
[따져보면 그런 셈이죠. 그는 우리에게 예를 표했지만 우린 그러지 않았으니 빚을 진 거예요.]
[그래? 양아 어떻게 하지?]
진양을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진양은 왕령을 잠깐 노려보더니 말했다.
[당주고는 죽여야해요. 령아는 혈도를 제압하면 되겠죠.]
[알았다!]
무굉은 대답하곤 다시 꺼리는 게 없다는 듯 걸어갔다. 왕령은 그가 매우 자신만만해 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단숨에
봉을 휘둘렀다. 유루봉법을 펼쳐 시간을 벌면 그 사이 당주고가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단숨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귀여운 녀석.]
무굉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견정혈을 후려친 것이다. 팍 하는 소리가 들리며 왕령은 심하게 비틀거렸다. 다시 봉
을 들어 휘둘렀으나 앞엔 무굉이 없었다. 번쩍 깨달아지는 게 있는 왕령이 화급히 몸을 돌리려는 찰나 옆구리가 뜨
끔했다.
[이럴 수가..]
쥐도 새도 모르게 혈도를 찍힌 것이다. 온몸이 석상처럼 단단하게 굳어져버렸다.
[무대협! 그만 둬요. 그를 죽이면 안돼요!]
[아우의 부탁인데 난 거절 못해.]
무굉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당주고에게 다가갔다. 도사들은 여전히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방금 그의 신기 같은 몸놀
림을 보니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왕령이 뒤에서 계속 비명을 지른다. 처음엔 하지 말라고 애원조더니 가면 갈수록
욕으로 변했다. 진양과 6년을 함께 보내며 그에게 많은 욕지거리를 배운 것이다. 한참 떠들더니 결국 제풀에 기절했
다.
[령아!]
진양이 놀라 달려들어 우선 혈도부터 풀어주었다. 그녀가 기절하다니 화도 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였
다. 혈도를 풀고 막 그녀를 안으려는 순간 가슴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찍혔다. 반대로 혈도가 짚인 것이다.
[령아! 이게 무슨 짓이야?]
[미안해 양아.. 어쩔 수가 없었어.]
그녀는 말하며 재빨리 진양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만 주면 목뼈가 부러질 위기다. 무굉이 놀라 달려왔다.
[너 무슨 짓이냐?]
[가까이 오지 말아요! 오면 그를 죽이겠어요.]
[아.. 알았어 그러지 마. 가까이 안 갈게!]
이만하면 상황이 완벽히 뒤집힌 셈이다. 무굉은 행여나 진양이 죽을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진양은 더 할말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죽일 리 없으니 무굉에게 말해 뜻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의욕이 사라져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다. 설마 그녀가 이럴 줄은 몰랐다.
[양아. 정말 미안해.. 우선 저들부터 보내고 내가 사과할게.]
[…….]
진양이 아무 말 없자 그녀도 더 말하진 않았다. 고개 돌려 당무 등에게 말한다.
[어서 가세요! 무대협은 손을 쓰지 않을 거예요.]
[왜 내가 손을 안 써?]
[쓰면.. 양이가 다치니까요.]
무굉은 흠칫하며 입을 꽉 다물었다. 곧 당무 등은 적당히 포권하고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주고만 잠시 주
춤거리며 왕령을 보더니 공손히 포권했다.
[왕소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으니 정말로 감사하오. 훗날 반드시 보은하겠소.]
왕령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녀를 향해 한번 더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려 내달렸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왕령도 무굉도 진양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왕령은 그들이 시야에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진양의 목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무굉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이봐. 이제 전진교 녀석들은 다 갔는데.. 왜..]
[기다려요. 그들이 멀리 갈 때까지만..]
무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쫓아갈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손 놔.]
[정말이죠? 자존자대께서 설마 한 말을 어기지는 않을 테죠?]
[당연하지. 난 한번 입밖에 내뱉으면 반드시 지켜!]
왕령은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진양의 목에서 손을 뗐다. 혈도까지 풀어주고는 조용히 입을 연다.
[양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는..]
[됐어! 그만두자.]
진양이 벌떡 일어서더니 무굉에게 말했다.
[형님 이제 가요.]
[아.. 음.. 얘는?]
그가 왕령을 가리키자 진양이 비소했다.
[흥. 알아서 오든지 말든지 하겠죠. 6년의 정(情)이 일다경의 정보다 못한데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안 오실 거면
전 먼저 갑니다.]
진양이 말을 마치며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무굉이 놀라 말했다.
[잠깐만. 저기 있는 애들도 처리해야지.]
[저기 있는 애들이라뇨?]
무굉이 가리키는 곳은 우거진 나무숲이었다. 조금은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곳이라 진양이 이상해하자 무굉이 소리쳤
다.
[거기 두 놈! 그만 나와라.]
허나 숲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무굉이 다시 외쳤다.
[안 나오면 가서 혼내줄 테야! 빨리 안 나와?]
[아, 알았소. 갑니다 가.]
낯익은 음성이다. 진양이 놀라 바라보니 가량과 가화였다. 그들은 우물쭈물 걸어와서는 진양에게 말했다.
[진소협. 오늘 정말 고마웠소. 본래 떠나려고 했는데 그냥 떠나자니 아무래도 양심에 찔려 갈 수가 없었소. 여하튼
모두가 무사했으니 참 다행이오.]
매우 정중한 어투였다. 그러나 진양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난 협심을 발휘한 게 아니니 소협이라 할 수도 없다. 차라리 저 분에게나 감사하시지.]
그는 왕령을 보며 대답했다. 이런 반응은 정말 짐작하지 못한 경우라 가량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진소협.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요? 만일 그렇다면 죄를 받겠소.]
[아니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 내가 잘못하고 나쁜 놈이지.]
[소, 소협.]
진양은 냉소하며 몸을 돌렸다. 가량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가화의 목에 있던 백색 진주를 뜯어냈다. 놀라는 그
녀는 뒷전에 미뤄놓은 채 다시 말했다.
[이 백색 진주는 형가장 사람임을 알리는 보석이오. 나중에 그곳으로 오실 때 이 진주를 보여주면 아마 극진히 대
할 거요. 혹시라도 나와 이 아이가 집에 없을 수도 있잖소.]
가량의 말은 여전히 정중했다. 진주를 보던 무굉이 박수를 친다.
[호! 이거 대단한 걸. 이 진주 꽤나 돈이 되겠어.]
[아.. 아니 무대협..]
그때 진양이 진주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품속에 진주를 넣으며 말한다.
[인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무굉이 허둥지둥 따라나서는데 왕령은 주춤거리며 따라나서지 못했다. 한 서너 발짝 갔을
때쯤 진양의 입에서 난데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누굴 위해 협심을 발휘했던가? 뭐 하러 협심을 발휘해 이런 꼴이 됐는가? 차라리 나서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무슨 소리야 그게.]
무굉이 따라가며 물었으나 진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랬다. 진양이 갑자기 협의지심을 발휘한 건 그가 각성했다던가 협객이 되기로 했다던가 하는 게 아니었다.
순전히 왕령을 위해서였다. 가량과 가화를 보는 왕령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는 걸 깨달았다. 6년이 지났어도 그
녀는 이런 광경만 보면 항상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에 진양은 생각했다. 가씨 부녀를 도와 왕령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겠다고. 그래서 이런 협심을 발휘했던 것이다.
진양과 무굉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사라져버렸다. 왕령도 멀리 떨어져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시 난주로 돌아온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진양은 왕령이 신경 쓰여 가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계속 따라
오고 있었다. 허나 미안함이 앞서는지 거리를 좁히려하진 않았다. 그들은 저번에 묵었던 그 객잔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 진양은 무굉에게 천하 명산을 둘러보자고 말했다. 예전부터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났기 때
문이다. 무굉도 매우 기쁜 듯 했다.
[오냐! 좋지. 어디부터 가볼까?]
그가 묻자 진양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왕령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산이 있었다.
그는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듣자하니 섬서(陝西) 종남산(終南山)이 볼만하다던데 가보죠.]
[오호. 종남산!]
왕령은 크게 놀라 진양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려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진양이 자신을 비웃으려 한
다는 걸 깨달았다. 종남산에 전진교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종남산을 지나서 낙양도 가요. 형가장에서 보답을 받아야하니까.]
무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산. 섬서 지방의 남부에 위치하는 산이다. 요즘 상당한 명성을 얻고있는 전진교가 있는 산이기도 했다.
종남산은 명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아미산과 비교할 때 백 배는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래도 어딘
지 모를 위풍이 풍겨져 나왔다. 어쩌면 전진 교단이 있는 곳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진양은 생각했다.
쭉 오르다보니 정면에 보광사가 보였다. 절은 절인데 중이 안 보이고 옆에 보니 작은 암자만 보인다. 휴식처라 생각
한 진양은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왕령은 어느새 진양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상황이었다. 진양과 무굉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왕령은 두어 발짝 뒤에서 따라오는 격이었다.
그들은 오천산에서 내려온 뒤로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진양이 과거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님을 잘 아는 왕
령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기에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진양은 답답하여 몇 번 말을 붙여볼까
하기도 했다. 허나 먼저 말을 붙인다면 꼴이 우스울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한편 혼자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던 무굉이 입을 열었다.
[종남산은 경치가 대단하진 못하군.]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는 실망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켜보던 진양이 묻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어떤 산이 좋을까요?]
[오악(五岳)도 좋지.]
오악이란 중원의 다섯 개 큰 산을 말함으로 숭산(嵩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형산(衡山), 태산(泰山)을 이름이다.
진양도 함종문에 있을 적 들었던 터라 오악에 대해선 조금 알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저도 그 산들에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 그럼 이 산에서 빨리 내려가자.]
[지금 당장 가자고요?]
진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종남산이 대단한 경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막 올랐는데 벌써 내려가자니
놀랄 만도 했다.
[당연하지. 뭐든지 빨리 하는 게 좋은 거야.]
[그럼 숭산부터 가나요?]
순간 무굉의 안색이 대변했다.
[아니아니. 숭산은 안 가.]
[숭산은 왜 안 가요?]
[안 간다면 안 가는 거야! 음.. 화산이 가까우니 그리로 가자.]
무굉이 빽 소리를 질렀다. 진양은 뭔가 이상했으나 그가 말할 것 같지 않으니 캐묻지도 않았다. 곧 왕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린 화산으로 갈 거야. 넌 어쩔 거지?]
[나도 가야지..]
[흥. 그럼 당주고는 못 만날 텐데.]
[양아!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마.]
왕령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진양은 또 화가 났다.
[그런 소리라니? 사실은 사실이잖아.]
[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말하자 진양이 냉소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가 보기 싫어졌지?]
[그건..]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게 미안하기라도 하나보군.]
[야, 양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어.]
[흥!]
코뼈가 부러지도록 코웃음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구경하던 무굉이 실실 웃더니 말한다.
[또 싸우는구나. 하기야 서로 사랑하면 잘 싸우지.]
[형님!]
[아아 알았어. 그런 말 안 할게. 자 화산이나 가자.]
진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굉이 이런 장난도 치다니 놀랍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흥. 종남산은 당신네들의 안방이 아니오.]
갑자기 밖에서 당무의 음성이 들렸다. 무굉과 진양은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투를 보니 자신들이 누군지
아는 듯 하건만 무슨 배짱으로 나타난 것인가. 왕령의 안색은 이미 새파래진지 오래다.
[형님. 당무 그놈이 미쳤나봐요.]
[흥. 그런가보다. 이 기회에 종남산을 내 안방으로 만들어야겠다.]
무굉이 비소하더니 보광사 밖으로 튀어나갔다. 밖에는 과연 당무를 비롯한 전진 도사들이 있었다. 당무의 바로 뒤에
는 당주고도 보였다.
[또 뵙는군요 선배님.]
[오호 이놈 봐라. 그래 또 만났구나. 아까 뭐라고 했느냐?]
당무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진양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선배님께 감히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아.. 하긴 그렇지.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할 놈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아우에게 말버릇이 그 모양이라니 맛 좀 봐야
겠군!]
[그는 저보다 후배입니다. 모르시나요?]
[알지 그야. 그래도 내 아우야. 의제니까 함부로 지껄여선 안 돼.]
무굉이 한 발 다가서자 당무는 한 발 물러서며 급히 입을 열었다.
[무림의 대선배께서 이런 후배에게 설마 직접 손을 쓰시려는 건 아닐 테죠?]
[왜? 하면 안되나?]
[당연하죠. 선배님도 농담이 심하십니다. 하하.]
그가 웃자 무굉도 멋모르고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농담이었다. 어떻게 후배를 직접 건드리겠나?]
그때 진양이 보광사 밖으로 나왔다. 왕령도 곧 따라나왔다. 진양은 잠시 이들의 대화를 듣다가 나온 것이다. 말투로
보아 뭔가 방책을 준비하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양은 당무와 당주고를 쓸어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무슨 대단한 계책이라도 있나보군. 감히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걸 보면.]
[난 너에게만 한 말이다.]
당무가 재빨리 따졌다.
[그래. 그렇다 치자. 무슨 일로 왔냐?]
[말했듯이 종남산은 네 안방이 아니다. 저번에 네놈 때문에 가량도 놓치는 사태가 생겼으니 대가를 좀 받아야겠다.]
[옳아. 형님이 손을 못 쓰게 만들어놓고 날 혼내주겠다 그거로군.]
[무대협은 호인이시라 후배에겐 손을 쓰지 않는 것 뿐이다.]
진양은 그의 유들유들한 모습이 얄미웠다. 무굉을 이길 자신이 없어 교묘하게 수작을 부리는 그의 속이 훤히 보였
다. 진양이 말이 없자 당무가 웃는다.
[겁나나보군.]
[흥. 누가 네놈 따위를 두려워하냐?]
진양은 발끈하여 먼저 봉을 휘둘렀다. 당무와 당주고가 흠칫하여 뒤로 물러선다.
[그래 난 혼자 나서겠다. 너희는 어쩔 테냐?]
[물론 나도 혼자 나서야지.]
당무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막 뽑는데 당주고가 막으며 말했다.
[형님 제가 나서죠. 형님이 직접 나서실 필요도 없습니다.]
[음. 네가 되겠느냐?]
[절 무시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