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章. 6년만의 재회 2
그는 당무 대신 나서려는 듯 했다.
[진양! 날 이길 수 있겠느냐?]
진양은 그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슬쩍 왕령을 돌아보니 그녀의 눈이 또 풀려있다. 당주고를 보며 넋이 나가있는 게
확실했다.
[오늘은 기어코 네놈을 죽여주마!]
진양이 선공을 가했다. 유루봉법 <전> 요결로 빠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봉이 먼저 당주고의 이마로 날아들었
다. 그가 급히 피하자 또 연이어 어깨로 떨어졌다. 그걸 피하니 봉은 다시 가슴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과연 유루봉
법의 명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허나 당주고는 당황해하지 않았다. 유루봉법에 대해선 이미 대책이 세워
져있었다.
[어디 혼 좀 나봐라!]
사방팔방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봉을 피해 다니다 막 머리로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내뱉은 소리였다. 봉 끝이
백회(百會)를 노리는 듯 한데 당주고는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단숨에 발검했다. 먼저 떨어지는 봉을 검
으로 쳐냈다. 나무로 만든 봉이니 잘라질 법도 했으나 내공이 담겨 있는지 팍, 소리만 내며 퉁겨졌다. 그는 봉을 쳐
내기 무섭게 금침도겁(金針渡怯)의 수로 검을 내질렀다. 검이 진양의 목으로 날아든다.
[조심해라!]
무굉이 소리친 것이다. 그러나 조심할 사람은 도리어 당주고였다. 유루봉법의 가장 큰 특징은 멈추지 않는 움직임이
다. 그렇기 때문에 봉을 처냈다 하더라도 어느 쪽에서 역공이 들어올지 모르는 것이다. 당주고는 검으로 쳐내고 곧
장 반격에 들어갔으나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봉에 안면을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별 거 아니군. 전진교 검법이 대단하다던데 실상은 아니었군.]
[닥쳐라!]
당주고가 벌떡 일어서며 기습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진양이 허리 젖혀 피하자 검이 가슴 일 촌(寸) 위로 매섭게 지
나간다. 그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그 와중에도 빈정거림을 잊지 않았다.
[흥. 전진교가 이런 기습도 할 줄이야.]
당주고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기습이 아니다. 여유를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것 뿐이다.]
[잘도 꾸며대는군.]
[흥!]
당주고는 인정할 수 없었다. 유루봉법이 대단하다지만 자신의 전진수검이 그보다 약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수녀와는 무슨 관계냐?]
진양이 웃었다.
[네 눈은 사람 눈깔이 아니구나.]
[그게 또 무슨 소리냐?]
진양의 말은 바로 앞에 수녀를 두고도 못 알아본다는 소리였다. 허나 당주고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순간 진양이 번쩍 봉을 내질렀다. 너무 급작스러운 공격이라 당주고는 중부(中府)혈을 격타 당하고 말았다.
[이 망할 놈! 감히..]
[기습이 아니지. 딴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준 거야.]
[너.. 너..]
화를 못 참고 몸을 떠는 그를 뒤로한 채 진양은 당무를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이 조금 망가져 있었다.
[이놈은 내 상대가 안 된다. 넌 어쩔 테냐?]
진양은 허리를 곱게 펴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조금은 무굉의 자세와 비슷하다. 그러자 당무는 그가 매우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명 이긴 것 가지고 이런 소리를 하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우습구나. 너야말로 내 상대가 안 된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용서해줄 수 있다.]
진양이 대소했다.
[하하! 내가 할 거라 생각하나?]
[하지 않겠지.]
[그럼 알면서 지껄인 넌 멍청이로군.]
당무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방자한 놈.. 정 그렇다면 직접 손을 봐주마.]
[나도 원하는 바다!]
진양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먼저 봉을 내질렀다. 당무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봉을 돌려 반대쪽 봉 끝으로 그의
태양혈을 노렸다. 그가 또 피한다면 다시 봉이 회전하며 접근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양은 유루봉법을 믿고 있
었다.
허나 예상외로 당무의 무공은 뛰어났다. 갑자기 빠르고 경쾌한 검초로 봉법의 회전을 막는 것이었다. 진양은 놀라며
기역모의의 초수를 펼쳤다. 자신의 봉이 그의 검보다 기니 일단 그의 몸을 공격하려한 것이다. 일순 그의 검이 왼쪽
어깨로 떨어졌다. 기회다 싶은 진양은 오른쪽 어깨 위로 봉을 돌려 단숨에 그의 팔을 후려쳤다.
<팍!>
당무가 낮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팔이 아련히 저려온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별 거 아니구나.]
[흥. 어쩌다 운 좋게 맞춘 거 가지고 자만하지 마라.]
그는 검을 힘껏 쥐었으나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 경우는 좀 억울했다. 잠깐 안이한 생각을 가졌다가 거의
승부가 난 셈이 되어버렸으니 분통이 터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다 당했으니 나도 할 말이 없다. 허나 이대로 보낼 순 없지.]
[여럿이서 공격하겠다는 뜻이군.]
[네가 자초한 거다!]
그들의 대화에 갑자기 무굉이 끼어 들었다.
[어이어이. 여럿이서 공격하면 비열한 거야. 싸움은 정정당당해야지.]
[선배님. 그가 자초했으니 누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반드시 자신이 해결해야하는 거지요.]
[뭐야? 그럼 난 아우를 도우면 안 되는 건가?]
[그렇죠. 만일 돕는다면.. 휴.]
당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무굉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그 모습에 진양은 냉소했다. 당무가
정말 비열하고 더럽다고 느꼈다. 슬쩍 그 뒤를 바라보니 어림잡아 20명은 넘는 도사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단양이십
사진을 펼칠 듯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단양이십사진은 혼자 이길 자신이 없었다. 무굉은 돕지 않을 테니 남은 건
왕령 뿐인데 그녀가 도울지 안 도울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가 돕더라도 이길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왕령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마침 그를 보는 터라 쌍방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뜻을 알고
있는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곧 한 걸음에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당주고가 나섰다.
[아니 왕소저. 그곳에 있으면 위험하오. 떨어지시오.]
[전 양이를 돕겠어요.]
[그, 그건..]
왕령은 이미 뜻을 정한 듯 했다.
[저번엔 제가 당신을 도왔죠. 하지만.. 이번엔 양이를 돕겠어요.]
[차라리 그를 설득해주시오. 우리도 그와 싸우는 걸 원치 않소.]
[양이는 고집불통이라 원하지 않는 건 그 무엇을 줘도 하지 않아요. 저도 설득할 수 없고 무대협도 설득할 수 없을
거예요.]
당주고가 무굉을 쳐다보자 그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고는 왕령이 다치는 걸 볼 수 없는지 안쓰러운 표
정을 지었다.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번엔 진양을 보며 말했다.
[에이.. 이렇게 됐으니 그만 둡시다.]
그 말에 진양은 당무 등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당주고가 원한다면 따르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
어보니 마치 봐준다는 것 같아 왠지 화가 났다.
[그만 두다니? 난 반드시 그 단양 뭐라는 진과 싸워야겠다.]
[흥. 그만 두자는데 끝까지 왜 그러냐? 죽고 싶나?]
[오냐 난 죽든 살든 싸우고 말 테다!]
곁에 있던 왕령이 말린다.
[양아. 이제 그만 둬. 저들이 화해를 청하는 거니 너도 받아야지.]
[저게 화해라고? ..좋아!]
그는 당주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정녕 화해를 원한다면 허리를 굽히고 정중한 태도를 취해라.]
[뭐라고!]
[왜 놀라지? 화해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당주고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진양을 노려보더니 왕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왕소저. 저 자가 끝까지 저러니 우리도 어쩔 수 없소. 왕소저는 옆으로 피해주시오.]
[자, 잠시만! 제가 다시 잘 타일러볼게요.]
그녀는 진양의 소매를 잡아끌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허나 그보다 먼저 진양이 입을 열었다.
[난 싸울 거야. 입장이 곤란하면 넌 그냥 구경만 해도 돼.]
[양아!]
지켜보던 당주고가 빈정거린다.
[대단한 장부시군.]
[흥. 죽기밖에 더하겠냐? 하지만 어떻게 돼도 네놈만은 죽일 테다.]
[능력이 있으면 해봐라!]
곁에 있던 당무가 손짓하자 금방 단양이십사진이 펼쳐졌다. 저번과 같은 원진이었다. 당주고가 왕령에게 빠져나오라
는 손짓을 한다.
[왕소저 이리로 와요!]
[양이를 해치지 말아줘요.]
[그가 싸우길 원하는데 어쩔 수 없소.]
왕령은 다급했다.
[양아.. 싸우지 말자. 무대협도 기다리시는데 빨리 화산으로 가야지.]
[형님은 종남산을 안방으로 만들고 싶어하시니 내가 도와드려야지. 안 그래요 형님?]
무굉이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빨리 처리해라.]
진양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왕령이 다시 말리려고 그를 불렀지만 그는 듣는 체도 안 하며 먼저 달려나갔다. 그
러자 단양이십사진이 이동했다. 진양만을 포위한 채로 거리를 좁혀 왕령을 진법 안에서 빼내고야 만 것이다. 그제야
당주고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무가 외쳤다.
[단양이십사진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주마.]
[잔말이 많군. 넌 입으로 싸우나?]
당무의 안색이 시뻘개졌다. 이런 상황에도 여유작작한 진양을 보며 화가 난 걸지도 몰랐다. 그가 곧 공격의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신호와 함께 진법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 형태는 여전히 원진으로 진양과 도사들의 거리는 어림잡아 2장 정도였다. 이만하면 포위 당한 경우치곤 상당히
근접한 거리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양은 위축과 같은 느낌을 받을 법했으나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
니, 느끼지 않으려 했다는 게 옳을 지도 몰랐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당무가 손짓하자 다시 도사들이 거리를 좁히려는 듯 했다. 진양이 세차게 봉을 돌렸다. 조금은 예리하면서도 또 둔
탁한 바람소리가 격전장을 울렸다. 그에 도사들이 잠시 주춤거린다.
[뭐 하는 거야? 단양이십사진을 무시하는 저놈에게 그 위력을 보여주란 말이다!]
당무가 호통치니 도사들이 다시 접근했다. 살금살금 거리를 좁혀온다. 그러자 봉을 든 채로 묵묵히 있던 진양이 갑
자기 움직였다. 아무래도 기다리는 것 보다 차라리 먼저 공격을 퍼붓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고는 정면을 향해 돌진
한 것이다. 일가견이 있는 경공을 최대한 펼치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정면에 있던 도사 두 명이 놀란 듯 눈
을 휘둥그래 떴다. 반면에 진양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접근하기가 무섭게 봉을 휘둘러 단번에 정면 두 도사의 천돌
(天突)혈을 후려갈겼다.
의외의 선공으로 두 도사가 나자빠지자 모두가 경악했다. 당무가 급하게 다시 뭐라고 고함쳤다. 곧 도사들의 간격이
약간 좁혀지면서 두 도사의 구멍을 메우는 듯 했다. 이걸 진양이 두고 볼 리가 있겠는가. 그는 즉시 자도종모의 초
식으로 간격을 줄이는 세 도사를 공격했다. 헌데 이번에는 굉장히 달랐다.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봉이 첫째 도사에게 들어가자 그가 막지 않고 곁에 붙어있던 두 도사가 검으로 대신 막아줬다. 봉이 또 회전하여
연달아 두 번째 도사의 안면으로 날아들었으나 역시 그의 양옆에 있던 도사들이 합심하여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아
닌가. 진양은 크게 놀랐다. 직접 대응하지 않고 두 도사가 막는 것에도 놀랐으나 더 놀란 점은 그게 쉽지 않다는 것
이었다.
진양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격이 들어오면 저리 태연히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을. 그건 생각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본능의 문제인 것이다. 대체로 무공을 익힌 자면 자연 방어자세가 취해지거나 몸이 움직인다.
반면 배우지 못했다면 손이 들리며 눈을 감아 몸이 움츠러들게 된다. 무공을 배운 강호인이라면 그 정도는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저 도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진양은 그 짧은 순간에도 이유가 두 개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고된 수련을 통해 얻은 성과요 하나는 단지 진의 힘
이라고 말이다. 둘 중 하나일지도 모르고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못 됐다. 요지는 어쨌
든 더 이상 단순한 공격은 먹혀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도사들의 배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도사들의 간격이 대단히 비좁은 건 아니었다. 허나 자신이 선 곳에서 그
들 모두의 눈이 보였다. 앞으로 세 발짝 이동해도 그들 모두가 보였고 뒤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단양이
십사진의 위력이 아닐까.
문득 도사들이 또 움직였다. 더 두고보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당무를 바라보던 진양은 안면을
씰룩거렸다. 당무와 당주고는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과 눈도 마주쳤는데 그 눈빛은 마치 어서 이겨보시지 하고
비꼬는 눈빛 같았다. 진양은 바싹 약이 올랐다.
[흥!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나도 함께 웃어보자.]
갑자기 진양이 그들 쪽으로 내달렸다. 그에 당무와 당주고는 잠시 움찔했으나 다시 미소지었다.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양의 기세는 제법 맹렬했다. 범이 목표를 잡고 돌진하듯이 달려 한순간
높이 뛰어올랐다. 도사들을 그냥 뛰어넘을 태세다. 하지만 그런 방비책도 없다면 단양이십사진이 어떻게 전진교 3대
절진(絶陣)이 되겠는가.
그가 뛰어오르자 진이 송두리째 이동했다. 그가 뛴 방향, 즉 뒤에 당무 당주고가 있는 쪽으로 재빠르게 이동한 것이
다. 그들의 발은 매우 정연하고 빠르게 움직여 과연 전진교라는 말밖에 떠오를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걸로 끝
이 아니었다. 이동도 이동이지만 진양과 가장 근접한 도사 다섯 명이 옆 도사의 어깨를 밟고 함께 뛰어오른 것이었
다. 이렇게 되자 진양은 도사들 몇 명과 허공에서 만난 셈이 되었다.
그러니 진양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급한 마음에 봉을 빠르게 질러댔다. 이리저리 찔러 도사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하려했다. 허나 몸이 뜬 상태라 디딤이 없었기에 몇 번 할 수도 없었고 위력도 없었다. 그저 세 명이 그 봉
에 밀려 멀찌감치 떨어진 정도일 뿐이다. 남은 두 도사는 그대로 진양에게 검을 내리그었다. 절대절명의 위기다.
진양은 최후의 수단을 생각했다. 이건 당무와 당주고를 죽일 때 쓰려고 단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무공이다. 유루
봉법으로 이길 수 없을 때 믿을 수 있는 무공이었고 그만큼 대단히 쓸모가 있었다. 허나 죽을 위기니 어쩔 수가 없
다. 그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중지를 연달아 두 번 퉁겼다.
바로 탄지신통이었다. 두 도사는 각자 가슴에 있는 유중(乳中), 천종(天宗)혈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이 모습에 왕령
을 제외한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무굉도 그 모두에 속했다. 안색이 대변한 당무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소리쳐 묻는
다.
[그건 탄지신통이 아니냐?]
[하하. 알긴 아는군.]
진양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들의 표정이 너무 볼만해 버릇대로 왕령에게 <저놈들 얼굴 좀 봐>라는 말을 할 뻔했다.
[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당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과연 탄지신통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물론 그 대단하다는 말이란 탄지신통의
위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진양은 웃으며 말했다.
[네 원수잖아. 새삼스럽게 그런 말은 왜 하나?]
[흥. 넌.. 넌.. 그 탄지신통을 소림사에서 훔쳐 배웠겠지. 어서 바른대로 불어라!]
[내가 훔쳐 배웠건 주워 배웠건 무슨 상관이야? 아니면, 설마 네가 소림사 주지라도 된다는 거냐?]
당무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이간질하지 마라 이놈!]
[뭐라고! 누가 소림사 주지야?]
그때 갑자기 무굉의 입에서 해괴한 말이 터져 나왔다. 지금 보니 그의 안색이 새파랬다. 눈빛이 떨리는 것도 진양은
알 수 있었다.
[아뇨 형님. 저놈이 마치 소림사 주지인양 굴어서 한번 해본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진양의 말에 무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곧장 말을 이었다.
[해본 말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소림사 주지가 얼마나 무..]
서서히 풀려가던 그의 얼굴이 다시 딱딱히 굳어졌다.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또 급히 말을 바꾼다.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하하. 형님의 말씀인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진양은 문득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탄지신통을 배웠다고 하자 안색이 대변하던 무굉의 얼굴이 아직도 생
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무굉은 왠지 소림사라면 반응이 남다른 것 같았다. 막 잘 생각해보는데 옆에
서 왕령이 달려왔다. 그는 할 수 없이 무굉에게 무슨 곡절이 있다는 생각 정도로 끝을 맺었다.
[양아. 괜찮아?]
그녀의 눈빛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6년 간 자신이 탄지신통을 수련할 때 곁에서 도와주던 그때 그 눈빛과 똑같
았다. 갑자기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치솟았다. 요즘 그녀에게 계속 화만 냈다는 걸 기억했다.
[난 괜찮아. 탄지신통은 이제 완벽하잖아.]
그의 말에 왕령은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이참에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언제나 방해꾼은 당주고다.
[왕소저! 그가 탄지신통을 어디서 배웠는지 아시오?]
당연 당주고가 왕령에게 한 말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말할 수 없어요.]
[어째서 그렇소?]
[그건.. 탄지신통을 가르쳐준 사람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주고는 계속 캐물었다.
[대체 무슨 약속이라고 그러오?]
[사실 저와 한 약속은 아니에요. 양이가 그 전수한 사람과 한 약속일 뿐이지요. 그러나 말할 수는 없어요.]
[왕소저.]
당주고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직접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말할 수 없다는 건 의리를 지키겠다는 거구려. 과연 왕소저는 좋은 분 같소.]
[고.. 고마워요.]
왕령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나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켜보는 진양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좋소. 왕소저는 대단한 미인이고 의리도 깊어서 더 몰아세울 수가 없겠소.]
[아, 아니.. 그건..]
[하하. 도화(桃花)가 자리잡으니 미모가 한층 돋보이는구려.]
진양이 더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
[이 더러운 자식아! 여기가 무슨 청루(靑樓)인 줄 아느냐?]
[아니 청루라니! 그럼 왕소저가 그.. 그.. 그런 여자란 말이오?]
진양은 분통이 터졌다. 그의 수작이 빤히 보여 더욱 괘씸했다. 진양의 말은 여긴 청루가 아니니 그런 닭살 돋는 소
린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헌데 당주고는 마치 왕령이 청루에서 몸파는 기녀라고 오해한 듯 되묻는 게 아닌가. 이리
되자 한순간 진양의 말이 왕령을 기녀로 만든 셈이 된 것이다.
[이 간을 빼먹을 놈! 네놈 수작이 훤히 보이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라!]
[무슨 수작을 말하는 거요?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소.]
[흥. 나와 령아를 이간질시키려는 수작도 보이고 령아에게 아부 떠는 이유도 다 보인다는 말이다. 네놈은 우리 모두
가 바보 멍청이인줄 아느냐?]
[하하하!]
갑자기 당주고가 크게 웃어댔다.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벌려 계속 웃어댔다.
[하하. 웃겨서 배가 다 아프군.]
[뭐가 그렇게 웃겨?]
[어떻게 안 웃기겠소? 당신 말은 조금도 근거가 없소. 난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
요? 하하.]
[흥. 낯짝이 두꺼운 게 부러울 지경이다.]
당주고가 다시 미소지었다. 왕령은 어떨지 몰라도 진양은 그 미소가 참 역겹다고 생각했다. 슬그머니 왕령을 돌아보
았다. 마침 그녀는 말문을 열던 차였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세요! 대체 왜 그렇게 싸우기만 하세요?]
조금은 울먹이는 외침이었다. 진양이 뜨끔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썹은 살며시 모아지고 눈언저리가 가늘게 떨리
고 있다. 그녀가 울기 직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 말로 해결하면 되는 걸.. 서로 기분 나쁘게 왜 싸워요? 이제 말리는 것도 지쳤어요..]
과연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진양은 어느새 그녀 곁에 다가가 있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기에 당주고보다
먼저 행동할 수 있었다. 그때 다시 당주고가 말을 꺼냈다.
[왕소저.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선 참으로 가슴 아프오. 소저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친구와 싸워야 한다니.. 하
지만 어쩌겠소? 그가 자꾸 싸우려는 것을.]
[양아..]
왕령은 그의 말을 다 듣고 낮게 진양을 불렀다. 부른 이유는 듣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진양은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적어도 지금은 당주고와 절대로 화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릎이라도 꿇는다면 모를까 저리 거만하게
화해를 청한다면 차라리 싸우겠다는 게 진양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니 또 싸우기도 힘들어졌
다.
(이게 다 저 빌어먹을 당가 놈 때문이다. 령아는 본래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아 저런 달콤한 헛소리에 넘어갈 여
자가 아닌데 이렇게 쉽게 현혹되는 걸 보면..)
진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방도가 없다. 그녀가 눈물로 하소연하니 이젠 호통으로 뿌리칠 수도 없는 것
이다. 진양 자신도 싸우기는 싫었다. 굳이 싸움을 만들어 어지러운 건 그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당주고의
저 유들유들한 얼굴을 보자면 자꾸 약이 올랐다.
[양아.. 잘 생각해봐.]
왕령이 다시 말했다. 너무 간곡하고 안타까운 음성이다. 진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정말 오랜만에 들
어본 그녀의 슬픈 목소리였다.
[좋아. 어쩔 수 없지..]
진양은 더 그녀의 슬픈 목소리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니 자꾸 6년의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지
나갔다. 정말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반면 왕령은 그 대답에 희색만면했다. 혹시 잘못듣기라도 했냐는
듯 재차 묻자 진양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화해하겠어. 허나 난 허리를 굽히지도 않을 거야. 또 이건 일시화해야.]
[그래 다행이야. 정말로..]
왕령은 어지간히 기쁜 듯 했다. 진양은 슬쩍 당주고를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이 조금 이상했으나 곧 바뀌었다.
[하하. 진소협, 난 실로 기쁘오. 이제 소협과 싸울 일도 없겠구려.]
진양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당무는 먼저 진을 풀게 했다. 헌데 24명 도사 중 3명은 죽임을 당해있었다. 본래 이들 24명은 당무가 특별히 거둔
수하들이었다. 제 아버지로부터 단양이십사진을 전수 받은 후 따로 거둬들인 제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진교
내부에선 이런 사실을 모른다. 실상 단양이십사진을 알고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당무는 화가 치솟았다. 이들에게 단양이십사진을 가르치며 들인 공이 어느 정돈데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단양이십
사진은 24명 이상이 아니면 어떤 위력도 발할 수 없다.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1명이라도 적으면 전혀 효과를 보
지 못하는 진법인 것이다. 그런데 3명이나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것인가. 분노한 그가 진양에게 따지려고 했다. 그러
자 당주고가 막으며 참으라는 눈짓을 몰래 보냈다.
[그들 3명을 죽인 건 미안하군. 어차피 아까 전엔 서로 죽이려던 상황이었으니 서로 탓하지 말자고.]
진양은 금방 상황을 깨닫고 선수를 쳤다. 당무는 더 화가 치밀어 몸을 떨었으나 당주고가 가로막은 채로 대신 대답
한다.
[알고 있소. 우리 대형은 속이 커서 그런 일은 개의치 않을 거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진양이 미미한 냉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되자 또 정적이 감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자는 다름 아닌 무굉이었다.
[아우야. 드디어 끝난 거냐?]
[네 형님. 이제 화해했으니 그만 화산이나 가죠.]
[오냐 빨리 가자. 목 빠지는 줄 알았다. 하하.]
무굉은 무척 기쁜지 하마 입을 쩍 벌렸다. 여태껏 지루하던 표정은 깨끗이 지워졌다. 그들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서
로 두어 마디 주어 받고는 바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화산으로 갈 태세다. 그 모습에 왕령이 주춤거렸다.
진양은 그녀가 주춤거리자 한번 더 냉소했다. 그녀가 왜 주춤거리는지 이젠 안 보고도 알만했다. 허나 그녀는 금방
발을 옮겼다. 결심한 듯 진양의 뒤로 따라붙었다.
[잠깐!]
갑자기 당주고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진양은 이 산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데 그가 막자 짜증이 났다.
[왜?]
[오늘은 기쁜 날이오. 진소협과 내가 화해한 날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전진교엔 좋은 손님이 오신 거잖소? 나
는 오늘 세 분을 대접하고 싶소.]
[우린 화산으로 가야한다.]
당주고가 급히 묻는다.
[그.. 화산에 선약이 있소?]
[선약은 없고 그냥 산세나 구경하려고. 형님과 오래 전부터 약속했던 거라 더 늦추고 싶지 않아.]
[아.. 다행이오. 그럼 먼저 내가 대접을 할 수 있게 해주시오. 화산은 나중에 더 둘러볼 수도 있잖소.]
진양은 그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가 궁금했다. 허나 이곳엔 머물기 싫다.
[화산에 들렸다가 나중에 이곳을 지나면 한번 들리도록 하지.]
[소, 소협!]
부르는 그를 뒤로하고 진양이 먼저 발을 옮겼다.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했다. 그러자 당주고가 이번엔 무굉을
불렀다.
[무대협! 잠시만!]
[난 왜 불러?]
[자존자대 무굉.. 이 대명을 오래 전부터 존경해 왔습니다. 저번엔 몰라 뵙고 감히 무례를 했으니 이번 기회에 사과
의 한잔을 올리고 싶습니다.]
진양은 아차 싶었다. 무굉은 멍청하니 당주고의 말 몇 마디면 금방 넘어가리라 생각했다. 과연 무굉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오호라! 네 녀석 제법 눈이 있는 놈이었구나.]
[하하. 어디 무대협이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오냐! 너 맘에 든다.]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무굉은 이미 넘어간 모양이다. 그는 잠시 대소하더니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우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들 대접 좀 받고 가자.]
[형님. 꼭 그래야만 하나요?]
[아니 왜? 안 되는 이유가 있나?]
[함께 천하 명산을 둘러보기로 한 지가 6년이 지났잖아요. 더구나 화산을 가보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러면..]
당주고가 황급히 말한다.
[오늘 하루 대접만 받고 갈 텐데 무슨 걱정이오? 하루쯤 못 기다리오?]
[그래 하룬데 뭐 어떠냐. 빨리 저놈들 대접이나 좀 받아보자.]
무굉의 마음은 이미 굳은 것 같아 더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왕령을 돌아보니 그녀는 묵묵히 땅만 쳐다보
고 있었다. 결정을 못 내려 의견이 없는 듯 하다. 진양이 말이 없자 당주고는 환하게 웃으며 무굉을 이끌었다.
[자. 이리로 오시죠. 오늘은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험.. 그래 네가 얼마나 괜찮은 놈인지 오늘 봐야겠다.]
당주고와 무굉은 앞서 출발했다. 이렇게 된 이상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진양은 속으로 이를 갈며 그들을 말없이 따
랐다. 그 뒤로 왕령이 따라붙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