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一 章. 전진 도사 당주고 2
진양이 외치자 당광이 선제공격을 하라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양도 움직이지 않았다. 굳이 먼저 움직
여 빨리 끝맺을 필요는 없었다. 당광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며 왕령의 일을 생각해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광은 이런 사실을 잠시 후에 깨달을 수 있었다. 가볍게 실소하며 먼저 검을 내질렀다. 선배로써 먼저 후배를 치는
건 창피한 일이다. 허나 그는 본래부터 그런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 그렇듯 진양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당광이 한참 후에나 참지 못하고 덤비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공격이 들어오니 너무 놀라 부지
중에 야호심절(野狐心切)의 초수를 펼쳤다.
야호심절은 함종절검 중 첫 번째 초식이었다. 주저앉듯 몸을 낮추고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검을 올려 긋는 수법인
것이다. 즉, 방어에 잘 쓰이는 초식이란 얘기다. 당광은 그가 갑자기 이런 초수를 펼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서로 놀란 셈이었다. 당광은 할 수 없이 검을 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 물은 흐르기 시작했으니 계속 이어나가야만 했다. 적어도 진양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 방금
초식처럼 방어만 하고 도망만 다닐 테니 빠르게 제압하는 게 중요했다.
[한번 받아보거라!]
당광이 일갈하며 다시 몸을 날렸다. 이렇게 되자 진양은 따로 왕령을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이젠 그저 사력을 다
해 맞서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당광의 검법은 과연 대단했다. 여느 전진 도사들이 쓰던 검법과 똑같았지만 위력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도사들보다
한 수 빨랐고 또 묵직했다. 이전엔 느낄 수 없던 어떤 위압감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순간 당광의 검이 그의 다리로 덤벼들었다. 여전히 빠르고 무거워 보인다. 그에 진양은 창기소절(娼妓笑切)의 수법
으로 발을 놀렸다. 보법 같지는 않았지만 제법 유유하고 춤추는 듯 하면서도 잘도 피해 가는 게 보통 수법은 아니
라는 걸 당광은 알 수 있었다. 다시 몸을 돌려 가슴을 찌르자 이번엔 검으로 막아내며 살짝 한 발 물러섰다. 또 덤
벼들면 한 발 물러섰고 다음도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면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서는 것 같다.
그러나 당광은 그게 진짜 도망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물러섬엔 규칙이 있었다. 도망치는 일엔 절대로
규칙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지금 그의 검법도 어떤 초식인양 규칙이 보였다. 그것은 즉, 이것 또한 진양의 수작이라
는 말이다. 과연 진양이 지금 펼치는 방법은 역시 함종절검법 중의 한 초식이었다. 허위퇴절(虛僞退切)이라고 한다.
그 후부터는 다른 게 없었다. 당광은 그에게 뭔가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고 진양은 그 속
내를 알아 함부로 다른 초식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자연 시간은 흐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 각이 흐
른 후에야 당광은 깨달았다.
(이놈은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이다. 더 기다려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안심할 순 없어 천천히 검의 무게를 늘렸다. 차근차근 내공을 실어 진양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렇
게 되자 상황은 또 변했다. 진양은 더 허위퇴절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야호심절을 펼쳤고
위험해지면 허위퇴절과 창기소절을 반복했다.
당광은 느껴지는 바가 있어 웃으며 말했다.
[넌 그 세 초식밖에 모르는구나.]
[알면 한번 이겨 봐라.]
진양이 싸늘히 대꾸하자 당광은 실소하며 선도입지(仙道立志)를 펼쳤다. 검이 진양의 양팔과 양다리로 빠르게 번갈
아 찔러 들어갔다. 그에 진양은 정말로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유루봉법을 펼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봉만 있
다면 이아야마(已我冶魔)의 수법으로 막아낼 수가 있었다.
결국 진양은 오른 다리 허벅지를 베이고 말았다. 제법 깊게 베여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당광의 검이 너무 묵직한 탓이었다. 함종절검법 초식을 세 개밖에 모르는 그로서는 그 검을 쫓아 하나씩 막아낼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그의 검이 빠르긴 했지만 내공은 부족했다. 한번 검이 부딪칠 때마다 팔이 울리고 가슴까지 울리
는 것 같았다.
허벅지를 감싸며 노려보는 진양에게 당광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싸움은 끝난 셈이다. 네가 졌다.]
[흥! 누가 졌다고 그러냐? 난 아직 쓸 무공이 많다.]
[탄지신통 말이냐? 그건 별로 무섭지 않다. 위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나 역시 사용하지 않은 무공이 많기 때문이지.]
진양은 당주고를 노려보았다. 그가 이미 말해준 것이 확실했다.
[그럼 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냐?]
진양이 조용히 있자 당광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진양은 이를 갈았다.
[내가 이 검법을 세 초식밖에 익히지 못해 그런 것이다. 이 검법은 전대 고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11초식을 모
두 익힌다면 너 따윈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마치 초식이 부족해서 졌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흥! 난 6년 전부터 검을 잡지 않았다. 자만하지 마라.]
당광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뭐냐?]
[내가 뭘 원한다고 했느냐? 잔말말고 네가 원하는 데로 날 처리해라!]
[우린 싸우기 전에 약속한 게 있었다. 난 널 이길 때 그 대답을 원했으니 그거나 어서 대답해라.]
그 말에 진양의 입이 꼬옥 닫혀버렸다. 마음속으론 이미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었다. 아까 전부터 왕령의 말을
곱씹고 또 그녀의 표정을 계속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결정을 내릴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 멋대로 결정
하긴 싫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결정하라고 했어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는 그녀와 6년을 함께 지내며 느낀 사
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령아.]
다시 왕소저가 아닌 령아로 바뀌었다. 그녀를 돌아보며 한 말은 아니었지만 6년 간의 그 때처럼 정이 가득한 목소
리였다. 왕령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날 부를 거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데로 하겠어.]
[난 이걸 내 맘대로 대답하지 못하겠다.]
[어째서?]
[넌 아직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거야.. 내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네게 있어서까지 제멋대로 행동할
것 같아?]
[양아 넌..]
[령아 대답해 줘.]
진양은 길게 한번 호흡했다. 그리곤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6년 동안 함께 지낸 나는 너의 무엇이지?]
그의 물음에 왕령은 일순 말을 잃어버렸다.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면 그가 상처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
양은 어떤 대답이든 원한다는 건지 자꾸 재촉했다.
[어서 대답해 줘. 당가 놈들이 기다린다.]
[너는.. 너는 나의..]
진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입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떨어지
기 싫으면서도 억지로 떨어지는 듯 힘겹게 벌어졌다.
[벗.. 넌 나의 벗이야. 그 전엔 아니었지만.. 이제 넌 내 벗이야.]
갑자기 진양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난 너의 벗이다! 예전엔 아니었지만 이제 우린 친구일 뿐이다!]
[야, 양아..]
[좋아 당주고! 내 말을 잘 들어라!]
당주고가 안색이 가볍게 변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그녀와 6년을 함께 지낸 벗이다. 그러므로 난 그녀가 못 되는 꼴을 보기 싫다. 너도 원하고 그녀도 원하니 벗으
로서 막지는 않겠다만, 만일 그녀가 불행해진다면 난 너의 온몸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천하 곳곳에 나누어 뿌려주
겠다.]
그의 말에 당주고는 물론 모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너무 지독한 말이다. 허나 그는 남들의 시선이나 생각 따윈 개
의치 않는 듯 곧바로 당광을 불렀다. 당광이 돌아보자 또 말을 잇는다.
[네 귀가 바르게 달렸으니 방금 말을 들었을 것이다. 저 당가 놈.. 아니 당주고가 만일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거나,
또는 네가 그녀를 괴롭힌다면 마찬가지로 네 온몸 사지 또한 당주고와 똑같은 꼴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진양은 벌떡 일어섰다. 곧 무굉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형님 이만 가죠. 아무래도 오늘은 대접받기 틀린 것 같군요.]
[어.. 그래? 어째서?]
[제가 너무 난동을 피워서 그래요. 대접은 제가 할 테니 화산이나 가요.]
[아! 화산. 그래 화산이나 가야지.]
무굉은 조금 얼떨떨하게 대답하다 화산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정신이 든 듯 했다. 그들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
떠날 기세였다. 문쪽으로 걷다보니 자연 당광 등과 맞붙게 됐으나 진양은 걸음을 멈출 기세도 아니었다. 당광은 가
볍게 미소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진양과 무굉은 뒤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전진교
를 나섰다.
종남산의 번천 주변은 이 일대에서도 제법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번천이 소리내어 흐르고 곁으론 옅은 황색 꽃
도 핀 버드나무가 즐비 차게 늘어서 있었다. 이만하면 멋있다고 감탄성도 흘릴 만 했지만 어째 이곳에 있는 두 명
은 매우 조용했다. 그들 위로는 조용한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언덕에 앉아 번천 일대를 바라보는 두 남자는 단연 진양과 무굉이었다. 그들은 지금 전진교를 떠나 화산으로 향하
는 중이었다. 진양이 말없이 서서 번천을 구경하지만 않았다면 이미 종남산을 벗어났을 법했다. 진양은 중양궁에서
나온 내내 말이 없었고 무굉도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여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할 때
가 됐다고 생각했다.
[아우야. 대체 무슨 일로 그리 고심하느냐?]
이상하게 진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귀머거리 같았다. 무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을 걸어봤으나
역시 대답이 없다.
[내가 잘 생각해 봤거든. 아무래도 그 왕.. 왕.. 하여튼 그 수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만일 정말 그
렇다면 고심할 게 못 된다. 수녀는 옛날부터 보아 왔는데 제법 총기가 있고 잽싸서 불행한 일을 당하진 않을 거야.]
무굉은 지금까지 그를 따라오며 나름대로 깊이 생각을 가졌다. 아까 중양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그는 전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나 몇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진양이 왕령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과 그녀와 대단히 친하다는 것,
그리고 서로 벗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실상 진양은 왕령을 단지 벗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들 사이에 담긴 미묘한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 벗으로 생각한다고 짐작했다.
그 후에는 왕령이 당주고에게 시집을 간다는 걸 알았다. 진양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껴
끼어 들려고 했으나 시기를 못 맞춰서 입도 열어보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양이 무슨 벗이 어떠네 하면서 왕
령이 불행해지면 그들을 죽이겠다는 게 아닌가. 무굉은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어도, 어쨌든 왕령은 그의 벗이라
불행해지길 원치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우야. 그러니까 힘내고 말 좀 해라. 말 많던 네가 그렇게 조용하니까 무슨 벙어리라도 된 거 같아.]
[형님.]
드디어 진양의 입이 열렸다. 무굉은 기쁨이 솟아올라 금방 헤벌쭉하게 웃었다.
[오냐. 왜 부르느냐?]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오늘은 그냥 이곳에서 보내고 내일 떠나죠.]
[아니 갑자기 왜? 이곳 경치가 마음에 드느냐?]
무굉의 말에 진양은 가볍게 실소했다. 그는 무굉이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하곤 그냥 피곤하다고만 했
다. 그러자 무굉이 웃는다.
[네 녀석 체력은 여전히 형편없군! 나중에 내가 무공을 전수해주마.]
[그래요.]
그는 왕령 생각으로 무공이고 뭐고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냥 이곳에서 저 변천을 바라보고 싶을 뿐이었다. 뒤
에 무굉이 잠시 주춤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우야. 그런데 배고파서 못 참겠다. 당주고 그놈이 챙겨줄 줄 알았는데..]
[아까 그의 말을 들으니 보광사 위로 객잔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요.]
[아.. 그런 말을 했군. 그럼 내 거기서 먹을 것 좀 사오마.]
무굉은 희희낙락 웃으며 금방 사라져버렸다. 진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령의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한숨이 흘러나
왔다. 이제 그녀와 함께 지낼 수가 없는 것이다. 6년의 세월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얼마나 행복했던 시간들인
지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후회되고 또 그리웠다.
[령아.. 당주고가 그리도 좋아? 6년의 정을 다 내버릴 만큼 그리도 좋아?]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제 그녀와 그는 단지 친구가 된 것이다. 그녀도 그렇게 말했고 진양 자신도 그렇게 말
했으니 번복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다시 번천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석양이 비치고 있다. 문득 3
년 전인가 2년 전인가 왕령과 함께 석양 아래 봉법 수련을 하던 때가 기억났다. 그 날도 이처럼 아름다운 석양이
평강을 비추고 있었다. 왕령은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고 당장 수련을 그만두었다.
(령아는 이제 내가 아닌 당주고와 이곳에서 석양을 바라보겠지.)
진양은 더 석양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더 보다간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무
굉에게 피곤하다고 한 말은 사실 거짓이지만 시간이 흐르니 정말로 피곤해졌다. 곧 날도 어두워질 테니 일찍 자두
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언덕 그 자리에서 나무를 등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왕령이 보였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달려가 그녀를 잡았다. 그녀를 못 가게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손을 뿌리치며 그의 혈도를 짚어버렸다. 가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곧 온몸 곳
곳으로 퍼져 몸이 꼼짝도 안 했다. 그는 슬픔 반 분노 반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을 차렸다.
[령아!]
진양은 그제야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그녀를 생각했으면 이런 꿈을 다 꿀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헌
데 뭔가 이상했다. 몸이 조금 뻐근한 느낌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하며 그는 가볍게 기지개를 펴려했다. 그러
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후후. 참으로 안타깝게 됐군.]
갑자기 싸늘한 말소리가 들리며 여러 명의 조소도 들려 왔다. 진양은 다시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그 혈도 짚이는 감촉은 실제였던 것이다. 너무나 허탈했다. 너무나 허탈하고 자신이 한심스러워 웃음이 다 흘러나왔
다.
[참 안타깝고 우습군. 그래 너희들은 누구냐?]
진양은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시야는 자신이 잘 때 바로 그 시야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혈도만 짚은 것 같
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무 뒤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려줄 거 같으냐?]
[안 알려주겠지. 한번 물어본 거니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라.]
[제법 대담하시군. 허나 저 밑으로 떨어져도 과연 대담할까?]
그의 말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저 밑이란 아마 이 언덕 밑을 얘기하는 것일 것이다. 이 밑은 실상 절벽이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진양은 다시 웃음을 흘렸다.
[나도 우습지만 너희도 우습구나. 난 불시에 혈도를 짚여 대항할 수 없으니 떨구려거든 얼른 처리하거라. 아니면 내
형님이 와서 너희의 정체가 모두 드러날 테니까.]
[흥. 일깨워줘서 고맙다만 네 형님은 오지 못할 걸?]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하하. 몰라도 된다. 난 네놈 말대로 얼른 떨구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진양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소리쳤다.
[빌어먹을.. 네놈들은 전진 도사들이로구나.]
[누가 전진 도사라는 거냐? 그리고 보니 여기가 종남산이군.]
[흥. 시치미떼도 소용없다. 너희들은 우리를 미행하다가 우리가 서로 떨어지고 내가 잠드니 덤벼든 게 확실하다.]
뒤에서 작게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네 형님은 무공이 뛰어나서 미행은 하고 싶어도 못할 텐데 말도 안 된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미행하지 않아도 대충 가는 방향만 어딘지 알면 쫓아올 수 있겠지. 너희는 이곳에서 지내는
전진 도사들이니까!]
순간 어깨를 발로 걷어차였다는 걸 느꼈다. 제법 매서워서 어깨가 저려왔다. 그러나 진양은 도리어 웃었다.
[하하! 할 말이 없으니 때리는구나.]
[누가 할 말이 없다는 거냐? 어이없어서 때린 것이다.]
[흥. 나는 죽어서도 알고 죽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매일 밤낮으로 등뒤를 조심해야할 걸.]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등뒤를 조심하라는 거냐? 누군지도 모르고는 무슨 복수를 하겠다고.]
진양은 그들이 반드시 전진 도사라고 생각했다. 그들밖에 없었다. 앞뒤 상황을 짐작해볼 때 이들은 반드시 당주고가
보낸 자들임이 분명했다. 인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확신했다.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이제 죽을 때가 됐지.]
[그래 죽이려거든 얼른 죽이거라. 훗날 누군가 이 일을 아는 자가 너희들을 죽일 테지만.]
[흥. 잔말 마라!]
누군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또 누군가 오른쪽 어깨를 밀었고 다른 누군가는 왼쪽 어깨를 밀었다. 적어도
두세 명은 될 듯 했다. 이렇게 몸이 일으켜지니 과연 절벽 아래가 보였다. 대단히 높아서 까마득하거나 하는 건 아
니었지만, 그래도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것 같았다.
[하하. 이제 죽게 되었군. 듣거라 전진 도사들아. 내 복수는 누군가 해줄 테지만 만일 령아를 괴롭힌다면 내 귀신이
되어 괴롭혀주마.]
이제 막 그들의 손으로 힘이 가해진다는 걸 진양은 느꼈다. 곧 서서히 눈을 감았다. 떨어져도 살아날 자신이 없다.
재수가 좋다면 모르겠어도 아마 죽을 것이라 확신했다. 세상에 미련 같은 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게 있
다면 왕령을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었다.
헌데 그는 너무나 재수가 좋았나 보다. 그는 떨어질 필요도 없었다. 몸이 앞으로 기운다는 걸 느끼다가 갑자기 멈춰
졌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리곤 도로 들려졌다. 진양은 처음에 이게 그들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다. 허나 잘 생각
해보니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장난을 치면서 웃음도 흘리지 않고 아주 묵묵히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였
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그 복면부터 벗어라.]
아주 생소한 목소리였다. 무굉처럼 조금은 크고 호탕한 음성이지만 그렇다고 무굉은 아니었다. 비슷한 목소리라고
제 의형의 목소리로 착각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건방지군. 너 혼자 우리 모두를 상대하겠느냐?]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몸이 점점 뒤로 넘어가더니 곧 다시 제자리에 눕혀졌다. 그는 얼른 눈동자를 돌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보았다. 그
러나 다 보이진 않고 뒤쪽 반만 보였다. 제법 덩치가 큰 듯 했고 손엔 뭔가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진양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내공을 끌어올려 보니 조금 더 상황 파악이 잘 갔다. 복면인들이 주춤주춤 물러서
는 듯 했고 거한은 앞으로 다가서는 것 같았다.
[덤벼라!]
거한의 목소리였다. 역시 호탕하고 범상치 않은 기개가 서려있다. 곧 강한 금속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연달아 챙챙
하기도 하고 살점을 꿰뚫는 소리와 신음소리도 들렸다. 보이지 않아 너무 답답했지만 거한의 무공이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붕붕 하는 바람소리도 들려 그가 창이나 봉, 철장 같은 긴 무기를 쓴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금새 말투가 바뀌는군. 내 성은 악(岳)이다.]
[뭐라고! 그럼 네 창법이 악가창법(岳家槍法)이란 말이냐?]
[그렇다.]
진양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악가창법에 대해선 오래 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매우 대단한 창법은 아니나 명장
으로 칭송되는 충신 악비의 창법이라는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악비가 어렸을 적 약간의 무술을 배웠는데 군
대에서 창법을 가르치자 그것과 잘 부합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본래는 따로 이름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악비가 모
두에게 칭송되자 어느 때부터 불려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진양이 정말 놀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놀란 이유는 악비가 죽은 지 벌써 100년이 다되어가기 때
문이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80여 년쯤 되지만 어찌됐건 거의 백 년에 근접한다. 그동안 악가창법이 전수되고 있었다
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고 또 말을 들었다. 왜냐하면 악비가 진회에게 죽임을 당
할 때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악씨 성의 거한에 대해선 매우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복면인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다, 당신이 악씨라니.. 악가창법이라니.. 말도 안 돼! 악비 장군의 일가족은..]
[흥. 맥만 이으면 되지 뭔 말이 그리도 많으냐?]
거한의 말투로 보아 조금 화가 난 듯 했다. 곧 그의 호통이 이어졌다.
[썩 꺼져라! 그리고 오늘 후에 또 이런 일을 벌인다면 그땐 살려주지 않겠다.]
복면인들이 머뭇거리는지 또 호통이 이어진다.
[죽고 싶은 거냐?]
[아, 아니오. 빨리 가겠소. 감사하오 정말 감사하오.]
그들의 기척이 금새 사라져버렸다. 그 악씨 거한이 실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혈도가 짚인 곳이 어디요?]
[복애(腹哀), 신장(神藏)..]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진양은 그제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얼른 일어서서 거한을
바라보았다. 구해준 인사는 미루고 먼저 그의 신분을 알고 싶었다.
거한은 역시 생각했던 모습이었다. 무굉이 연상될 만큼 어깨가 벌어지고 키도 커서 마치 태산을 앞에 둔 것 같았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것이 무슨 산도적 같기도 했다. 허나 그렇다고 싫다거나 실망한 건 아니었다.
[오늘 도움을 있어 목숨을 건졌군. 정말 고맙다.]
진양은 조금 정 떨어지게 말을 건넸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로 고마워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만큼 예의라
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한도 그것을 느꼈는지 눈을 휘둥그래 떠버렸다. 아마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하하! 좋아좋아.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나. 대신 다음 번엔 네가 날 구해줘야 한다.]
이번엔 진양이 깜짝 놀랐다. 이 거한에게선 매우 호탕한 기질이 느껴졌다. 자신의 말에 불쾌감을 느끼리라고 생각했
는데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지 않는가. 도리어 웃음을 터트리며 재미난 소리를 지껄인다. 진양은 이 자에게 일순 호
감이 갔다.
[널 구해주진 않을 거다. 난 네 복애와 신장만 뚫어줄 테니까.]
[하하. 좋을 대로 해라. 하지만 난 복애, 신장이 막히는 일은 없을 걸.]
진양의 반 농담조에 그도 반 농담조로 맞받았다. 진양이 웃는다.
[하하..]
순간 진양의 손이 번쩍였다. 너무나 기습적으로 빠르게 거한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거한의 복애 신장혈을
격타한 것이다. 거한의 무공이 제법 대단한 듯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손만 뻗으면 서로의 몸이 닿으니 이
런 기습이라면 거한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거한은 매우 놀랐는지 잠깐 얼굴빛이 변했으나 곧 뭔가를 깨닫고 또 대
소했다.
[하하하! 과연 그렇군. 정말 묘하다 묘해!]
[오늘은 서로를 구해준 의미 있는 날이군.]
진양이 다시 그의 복애, 신장혈을 뚫어주며 말했다. 그들 둘은 뭐가 그리 기쁜지 미친 듯 웃어댔다.
[이런 날 술 한 잔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하늘이 진노할 거다.]
[나도 진노할 걸.]
[그래. 나도 진노할지도 모르지.]
거한은 즉석에서 허리춤을 만지기 시작했다. 술을 찾는가 본데 아무래도 없나보다. 그는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바로 어제 술을 다 마셨군. 역시 종남산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여기 오지 않았다면 또 술을 찾을 필요가 없었겠지.]
진양의 예리한 대답에 거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자신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 술 생각
이 나지 않았을 거란 얘기였던 것이다. 거한은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종남산으로 오긴 잘했는데 술을 챙기지 않은 게 잘못한 거다.]
[그럼 술을 사러 가면 되지.]
[아니 그냥 가서 마시자.]
진양이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람을 만났다는 게 매우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론 왕령의 일로 상심할 때
그토록 미운 종남산에서 만난 사람이라니, 참으로 미묘한 운명에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참. 기다려라.]
진양이 먼저 걸음을 옮기는데 거한이 막았다.
[사실 아까 그 복면인들과 네 얘기를 듣고 있었다. 듣자하니 네겐 형님이 있는 것 같은데..]
[하하! 넌 의외로 솔직하구나. 그래 형님이 한 분 계시다.]
거한은 이상한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왜 형님을 찾지 않지? 그들이 네 형님에게도 암수를 가했다고 말하는 것 같더라.]
[넌 내 형님이 누군지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형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니?]
[자존자대 무굉!]
진양이 웃으며 한 자씩 끊어 소리쳤다. 과연 거한은 제법 놀란 듯 했다. 가볍게 안색이 변하며 말한다.
[자존자대 무굉이라면.. 그 광표장법으로 유명한 괴인 말이냐?]
[그렇지. 바로 내 형님이다.]
진양의 대답에 거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호쾌하다! 자존자대와 의형제를 맺다니 정말 맘에 들어!]
[하하. 그렇게 말하는 너도 맘에 든다.]
[여하튼 그 분이 자존자대라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거지.]
거한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진양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그는 옆에 나란히 서며 걸었다.